|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비평서다. 근데 좀 독특하다. 보통 교육정책문제나, 사교육 문제나, 자존감과 관련된 주제가 대부분인데, 이 책은 가르치는 사람 즉 교사와 가르치는 행위 즉, 교수와 관련된 비평서라는데 그 독특함이 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책 같다. 아직 내가 책 발이 좁아서 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책은 처음이다.
먼저 우리의 옛날(?) 학교, 교실에 대한 풍경을 보는 것으로 책은 시작한다. 오와 열을 맞춰 앉은 학생과, 가운데 높이 있는 교탁, 널따랗고 긴 칠판, 그리고 분필 등. 저자의 이야기도 구체적이다. 가령, 교탁이 있는데 아마 일본강점기의 유산쯤으로 생각했던 교탁이 5세기경 기독교에서 사용하던 제단에서 그 기원이 있다는 설명이다. 신도들의 시선을 모으고 그들과 성직자의 위계를 물질적으로 표시하기 위하여 높이를 달리한 탁자가 있는 제단이 후대에 계몽주의자들을 거치면서 교사의 위치에서 시선을 모으고 교사와 학생들 간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학교가 도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번호로 불리는 학생들과 50분 수업과 10분 휴식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도입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학교의 교육이었다. 구체적이다라는 예를 하나 더 들면,
수업 지도안. 몇 분 단위까지 구체적으로 설계된 수업 지도안에 따라 진행되는 수업이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부분인데, 물 흐르듯이 흘러가야 하는 수업이고 학생의 궁금증은 없어야 하는 이런 수업은 딱딱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공개수업, 학습에 대한 평가 행위, 수능평가가 도입되었을 때의 혼란들, 국가고시 출제 관행등등 교육 현실에 대한 실전 비평서라는 말이 딱 맞다.
어쩌면 이 책은 예비 교사를 위한 책이겠다. 단락을 마칠 때 마지막 " 당신은 어떤 교사인가?" "우리는 왜, 무엇을 가르치는가?" 등등 자주 저자가 던지는 말이다. 그러나 그 비평의 세세함으로 볼 때, 이쪽 계통(교육계)이 아니면 몰랐을, '한국 교육 현실 쯧쯧쯧' 정도 수준이었을 것이 책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래 구체화다. 세세히. 이렇게 자세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저자의 이력 때문이겠다. 중등 교사에서 대학교수를 거쳐 지금은 예비교사를 가르치고 있고 학교 수업 개선과 교육 혁신에 대해 많이 연구한 저자다.
"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보는 시선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익숙함에 대한, 낡은 습속에 대한 무서운 보수성" "교과서에 갇힌 교사와 교수법" "학습자 위주로" 저자는 성찰과 해법을 돌려 말하지 않는다. 따끔하고 시원하게 내지른다. 저자의 해법이 과연 될까 하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도 느껴지지만, 실질적인 사례를 볼 때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당장 뭔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뭔가를 바꿔보려는 시도는 많다.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떴다방처럼 교육 현실을 비판하는 풍조는 여전하고 애먼 교사들만 욕을 먹곤 한다. 교사들 힘내라. 그리고 익숙함을 낯설게 보아라.
한번 읽고 던져둘 책은 아니다. 교육에 대한 성찰이 고플 때......
|
|
연수를 시작하는 마중물과 같이 나타난 책 2015년 7월 19일. 100일을 갓 넘긴 갓난쟁이와 부인을 떼어놓고 1급 정교사가 되기 위해 강릉으로 넘어왔다. 신규 발령받던 첫해, 선배에 대한 존경은커녕 동료교사로서의 존중조차 눈꼽만치도 해주고 싶지 않던 한 선생님이 ‘2정하고는 겸상도 안하’는 거라는 농담(이길 바란다.)을 급식소 같은 테이블에서 던지기에 1정이 도대체 뭔가 싶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1정이라는 게 2정을 무시하는 알량한 허세라면 차라리 안하고 만다.’는 것과 ‘빨리 1정을 받고 나는 2정을 무시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라는 것이었다. 파란만장했던 첫 학교에서의 4년을 뒤로 하고 올해는 새로운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전의 학교에선 생활지도가 참 어려웠는데 반해, 아이들이 하도 학력이 낮고 수업을 안 들어서 사실 정상적인 수업을 몇 번 해 본적이 없는 것이 고민이었고, 지금의 학교에선 성적이 꽤 좋은 편인 아이들만 모여 있어서 수업을 어떻게 잘 할지 매일 아니 매시간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 가입해서 다른 선생님들의 경험도 엿보고 이런저런 책도 찾아보면서 수업에 적용할 것을 찾지만 입맛에 딱 맞는 것은 없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수업의 요소와 수단이 되고 활동으로 바뀌어서 수업에 들어오지만, 성취기준이니 배움 중심 수업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을 들으면 어느새 주눅이 들어 교과서 뒤에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신규 교사 때 1정을 그리던 것과는 달리 수업의 혁신, 나의 발전을 위해 1정 연수가 갈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평 쓰기 대상 도서로 지정된 게 이혁규의 <수업>. 왠지 느낌이 좋았다. 교사는 왜 가르치려고만 드는가 부제가 도발적이었다.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내가 정년이 될 때까지 수업을 하면 만 시간을 넘게 할텐데, 어느 책에서 보니 어느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만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럼 정년이 될 때쯤이나 되어서야 전문가가 될텐데. 그때는 너무 늦었다고 후회하지 않을까. 7월 20일에 처음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이 날 보러 강릉엘 왔다. 스무살이 되어 어떤 녀석은 대학으로, 어떤 녀석은 취업을, 어떤 녀석들은 입대를 앞두고 있기도 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옛 추억담을 나누며 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인생의 앞길을 함께 고민하고 잡아준 훌륭한 선생이었다. 주제넘은 공치사에 손사래를 치며 “내가 니들에게 뭘 가르친 게 있다고.”라며 겸손을 떨었지만 사실 뜨끔하긴 했다. 내가 그 친구들에게 좋은 사람이리라는 건 알겠지만 과연 무엇을 가르쳤는지 선뜻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 책에선 ‘교사들은 왜 가르치려고만 할까?’라며 반문을 던졌다. 근대 이전의 교육에서 배움은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교육의 성립 조건과도 같았다. 근대적인 학교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등장한 수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술자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가르칠 뿐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자신을 고양시켜 가는 ‘도’의 담지자로 간주되었다. 이 때 스승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그 스승됨을 드러낸다. 저자는 표준화된 지식을 가르치는 기술로 무장한 교사는 진짜 스승의 모습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표준화된 지식은 나쁜가. 교육학자 쉰켈은 이를 ‘파울젠 효과’라는 말로 설명한다. 표준화와 전이를 위해 교과의 분업 체계가 진행됨에 따라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이 그 대상 영역의 발전을 반영하지 못하는 지체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런 수업 영역과 대상 세계 간의 지체 현상이 파울젠 효과이다. 다시 말해서, 공교육은 교육의 출발점에 자리해야 할 교사와 학생의 신뢰관계(학생이 스승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배태되는)가 없고, 교과의 기반이 되는 영역의 발전을 반영하지 못하는 지식을 가르치고 있으며, 교사는 행동으로서 도를 보이는 실천적 지식인이 아니라 수업의 기술자로서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공교육의 문제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사실 첫 학교에 발령받았을 때 참 야속하기도 했지만 난감하기도 했다. 책과 펜이 없는 아이들. 성적에 밀리고 밀려 소위 똥통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 그러니 배움에 대한 의욕도, 삶의 개선에 대한 의지도 없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데리고 나는 무언가 해야만 했고, 진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교과서를 버리고 실생활과 관련된 무언가를 찾았다. 어른에게 예절바른 말을 하게 하기 위해서, 담배를 끊게 하기 위해서, 나도 선배 선생님들께 깍듯이 하고 나도 담배를 끊었다.(대신 술은 늘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가도 스스로 아차 싶으면 사과를 하기도 하고 적어도 하루에 열 개피 피우던 담배를 담임선생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다섯 개피 밑으로 피우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야 다른 전문계 학교 아이들이 쓴 시를 읽으면서 공감도 하고 분노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보면 더 재미있는지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나는 많은 지식을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분명 무언가를 배웠고, 배우면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입시 문제를 재밌고 멋지게 풀어주는 것이 폼나는 선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교육이라는 것이 입시라는 변명 속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행위라는 것을 진심으로 믿게 된 시간들이었다. 공교육의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해결책은 더욱 요원해보인다. 글쓴이는 ‘교사는 왜 가르치려고만 드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통해 교사가 스스로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내 생각을 거기에 덧붙이자면, 배움을 즐기는 모습을 일관된 실천으로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배움이라는 일의 목적을 언제나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전제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를 넘어서야 앞서 파울젠 효과라는 말을 했다. 교과와 그 기반이 되는 학문 영역 간의 괴리를 나타낸 용어인데, 교과서만큼 이 말을 잘 드러내는 게 있을까 싶다. 내가 공부한 6차 교육과정은 교과서가 국정이었다. 십 몇 년 동안 이 교과서를 전국 모든 학생이 썼으니 표준화라는 측면에서는 참 유용했겠지만 그 긴 시간 동안 학계의 흐름을 반영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건 자명하다. 7차로 교육과정이 넘어오면서 구성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는지 교과서가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본문 길이가 줄어든 대신 갖가지 활동들이 늘어났고 색깔과 사진 자료들이 다양해졌다. 하지만 가르치는 방식은 그대로였고 고2를 지나면 EBS교재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현상은 그대로였다. 교육과정이 수시 개정으로 바뀌고 검인정 교과서 체제가 되면서 수많은 교과서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제작 당시의 시점과 학생들이 사용하는 시점이 못해도 1년 이상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아무리 최신 자료를 삽입하더라고 수업을 하는 시점에선 이미 구닥다리 자료가 되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교과서에 충실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기본 재료로 해서 보다 성취기준을 잘 달성할 수 있게끔 교사가 수업을 요리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 책에 나올 만큼 신선한 결론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교과서에 제시된 활동을 충실하게 하면 요즘 학생들은 일단 수업을 잘 듣지 않는다. 미리 학원에서 배워 와서 내용이 재미가 없으면 체력 보충을 위해 엎드려 자버리고, 그나마 시험에 낸다고 하면 그 부분에서 조금 고개를 들까 싶다. 교과서에 실린 활동이라는 것도 사실상 본문의 내용을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학생들을 움직이게 해야하고 재미가 있어야 하고 실생활과 관련이 있는 수업을 해야 함은 교실 속에서 체득할 수 있었다. 예컨대 교과서 본문이 마음에 안 들면 적절한 제재로 대체하기도 하고 글을 읽는 게 지루하면 모둠 활동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기 같이 대체 활동을 통해서 읽게끔 해 왔다. 형성 평가 역시 문제를 푸는 대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모둠 활동을 하게끔 만들었다. 1정 연수를 듣는 내내 ‘수업을 혁신해야 한다, 교육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사용해라.’하지만 현장의 젊은 교사들 가운데 교과서를 줄줄 읽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강의를 사용하는 사람은 단연코 없으리라 확신한다. 나를 포함한 이 젊은 교사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당신의 수업을 혁신해야 한다는 당위적 격언이 아니라 실천의 경험을 공유하고 실패를 함께 반성하며 보다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한 토의와 해결책 모색이다. 이제 그만 놀고 공부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날아드는 엄마의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온갖 짜증과 함께 공부할 의욕을 확 꺾어버리듯, 수업을 개선하려는 젊은 교사들의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잔소리가 절실하다. 학습자 중심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학습자 중심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강력한 국가교육과정, 차시 단위로 설계된 표준적 교과서, 평균 30여 명이 넘는 학급당 학생 수를 고려할 때 어떻게 학생 중심 수업을 할 수 있는지 ‘어렵다’라는 말부터 나오지만, 벌써 그 사례들을 연수 들어와서만 몇 가지나 보았다. 하지만 학습자 중심 교육이라는 말은 용어, 목표, 방법 등에서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그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과거 동양의 전통 교육의 모습은 이렇다. 우리가 표준화된 가르칠 내용을 가지고, 전문적인 기술을 통해 교육을 하는 것은 서양의 근대 교육의 모습인데 반해, 동양의 전통 교육은 애초부터 학습자에 따른 개별 교육을 실시했다. 같은 질문일지라도 학습자의 성격과 특성을 고려해 다른 답변을 주었던 공자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저마다의 소질과 성품을 고려해 교육을 해 왔다는 뜻으로, ‘인재시교’라는 말로 대표된다. 하지만 공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한, 중, 일 3국임에도, 오늘날 그들의 교실에서는 개별화 교육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서양의 근대 교육에서도 행동주의, 인지주의를 거쳐 오늘날 사회적 구성주의 이론에 근거하여, 실천 공동체에 참여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참여와 성찰을 통해 지식을 집단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데까지 학습자 중심 교육의 의미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는 이에 근거해 구성된 교육과정을 기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학습자의 자기 주도적 성장을 도와주는 풍부한 학습 환경을 다양하게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다만, 학습 환경을 설계할 때 특정한 이론만을 추종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덧붙인다. 더불어 우리가 학습자를 어떤 세계로 안내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도 동반되어야 한다. 성인 세대로서 우리가 구성해 왔고 현재적으로 구성하고 앞으로 구성해 갈 세계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정말로 바람직한 것인가? 가르침과 배움이 단순한 학문 활동이 아니라 깊은 인간적 의미를 가지는 활동, 위대한 인간적 목적을 가진 활동, 우리 자신과 이 세계의 변화에 기여하는 활동이라면 우리는 그 지반이 되는 우리의 세계 구성 방식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움의 목적에서부터 방법, 세계의 구성 방식에까지 이래저래 교사는 참 고민이 많다. 이 외에도 책 속에는 철지난 행동주의가 그대로 살아있는 이원목적분류표에 대한 비판, 교육공학과 가르치는 일 사이의 접점과 시사점, 공교육의 개선을 위한 혁신학교에 대한 희망 등 여러 가지 논쟁적인 이야깃거리들이 많이 들어 있다. 하지만 다소 현실과 거리가 있거나 이상적인 결론에 실망한 부분도 있어서 꽤 긴 시간 궁시렁대며 읽기도 했다. ‘위기에 처한 교실수업이나 학교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처방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실망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처음부터 보았더라면 좀 덜 날이 선 채로 이 책을 봤을 텐데 말이다. 다만 이어서 ‘이 책은 교실수업 개선을 위한 구체적 지침이나 제도적 개선책과는 큰 상관이 없다. 대신에 질문과 생각을 촉발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일상을 낯설게 볼 수 있는 질문 능력이야말로 미래 교육을 여는 데 필요한 좀 더 근원적 역량이라고 보기 때문이다.’라는 제언이 덧붙어 있다. 적극 동감한다. 이 책이 필요성이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연수 시작 전에 읽음으로써 가장 좋고 고마웠던 점은, 연수의 목적, 방법, 내용을 바라보는 태도가 비판적일 수 있었고, 내가 학교에 돌아갔을 때 이것들을 어떻게, 왜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 책을 읽은 다른 동료 선생님들과 책을 읽으면서 제기된 의문점에 관해 함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
|
강하게 주장하는 글이 시원할 때가 있다. 내가 하고 싶었으나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 상대가 무섭거나 역겨워서 하지 못한 말, 그런 내 마음을 강한 어조로 대신해 주는 글을 만나면 갑갑했던 속이 다 풀리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런 식의 강한 주장에 거부감을 받을 때가 있다. 어떤 경우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간단하게 말해서 잘난 척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 글이었다. 자신만 알고 있다는 듯, 다른 사람은 몰라서 자기가 꼭 설명해 주고 일깨워 줘야 한다는 듯, 그런 자신은 대견하고 모르고 있는 다른 사람은 어리석어서 자신의 사명감이 대견하다는 듯 스스로 부추기는 글. 나는 그런 글과 사람이 좀 많이 싫었다.
이 책의 작가는 내게 고마운 쪽이다. 혼자 잘났다며 다른 사람을 마구 가르치려는 듯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같이 고민하자고 하는 듯하다. '나는 잘하고 있고 당신은 실수 투성이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오'가 아니라 가르치는 입장에서의 온갖 어려움을 서로 알고 있는 처지이니, 비슷하게 느끼는 고민 확인하면서 같이 애써 보자는 듯. 그래서 나는 읽는 내내 끄덕끄덕했다. 확실한 답이 보이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수업은, 수업을 잘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고, 지금 수업을 좀 못하는 게 양심이 없거나 뻔뻔해서 그런 게 아니라 총체적인 환경을 고려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아직 발휘하지 못한 탓이니 애써 볼 만한 일이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노력해 보자고 격려해 주는 듯한 글.
한 편 한 편은 독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나 비슷한 주제로 묶일 수 있어서 3부로 갈라 놓았다. 교육적 고민이라는 게 그리 벗어날 일은 없는 모양이다. 사회적인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그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교육에게 책임을 묻는 풍조는 여전하고, 그때마다 교육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느끼고 마는데, 그래도 내게는 수업이 보람이고 기쁨이다. 이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한번 읽었다고 덮을 책은 아니고, 교육적 성찰이 있어야겠다 싶을 때 펴 본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정답이 여전히 보이지 않더라도. |
|
이 책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는 다양한 교육적 상황을 새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저자가 여는 글에서 밝히듯이 낡은 습속을 넘어서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교육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저자는 실제로 중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수업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다. 이 액에 실린 글들은 월간지 <우리 교육>과 교육공동체 벗의 <오늘의 교육>이라는 곳에 연재했던 내용을 모아서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실제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다. 수업을 위한 환경적 요소인 교실과 교사, 학생, 교과서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교실이 어떻게 발생하고 바뀌었는지, 로봇보다 인간 교사가 할 일은 배우는 삶이 가치 있고 추구할 만한 것이며, 학생들의 의지를 각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사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학생 참여가 강조되는 사회에 따른 교과서의 변화와 시대적 변화에 따른 학생과 교사의 교실 대화의 방향이 변해야 한다는 것도 이야기하고 있다. 수업의 내용에서는 행동적 수업 목표에 대한 맹신, 거의 모든 과목에 똑같은 양식의 수업 지도안,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만 학생에 대한 배려가 다소 부족한 수업연구대회, 기술의 개발에 따른 교육공학의 발달이 수업에 주는 변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대학 입시에 따른 평가와 수업 방식에 대한 비평적 관점도 잊지 않고 제시한다. 3부에서는 조금씩 변화를 보이고 있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교과와 교과교육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학생들에게 배움이 될 수 있는 수업을 위한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교사 자신의 전문지식 습득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교육 중심의 지식 습득과 이를 위해 어떻게 교사를 양성해야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혁신학교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교육에 대한 비평을 볼 수 없었던 듯 하다. 환경적 측면이나 수업에 관한 측면에 대해 다소 부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새롭게 생각할 거리를 보게 되어 내심 기뻤다. 아니, 주위의 것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내가 한심하기도 하였다.
나는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보는 시선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위기를 극북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시선이 왜 필요하고 중요할까? 우리들 대부분이 낡은 습속의늪에 안주하면서 구질서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간파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행동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어릴 때부터 몸에 내면화된 습속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는다. 문제는 습속의 힘이 너무 근본적이어서 그런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이습속이 지니는 무서운 보수성이다. 여는 글의 일부이다. 이 글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
|
올해 학교를 옮길 때 지난 학교 수석 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신 책이다. 업무는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수업은 참 힘들다는 생각에, 변화하지 않으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 싶은 위기감을 가지며 9년차를 맞았다. 쇄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1, 2순위에 혁신학교를 적었다. 새 학교에 적응하느라 힘든 와중에도 배우고 변하고 싶다는 생각에 3, 4월 동안 교육 관련 서적을 열심히 구해 읽어 왔다. 이 책 역시 요즘 교육계에서 논의하는 담론과 맥락이 비슷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았다.
저자는 교사 출신이면서 교대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수업 비평을 연구하고 있다. 여기 실린 글들은 '글의 출처'가 존재하는, 교육 잡지들에 실린 칼럼을 엮은 책이다. 세 가지 주제로 묶었으나 하나 하나의 꼭지들을 따로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사토 마나부, 손우정 교수님의 배움의 공동체 관련 책들은 실천에 중점을 두고 이론을 약간씩 설명해가고 있는데 비해 이 책의 저자는 한국 교육 현실 안에서 그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껴온 사람으로서 사례와 함께 우리 수업에 대해 이론적으로도 성실하게 성찰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좀 더 알차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수업, 비평을 만나다"와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를 전체 제안 수업 전에 읽으려고 계속 시도 중인데 손을 못 대고 있다. 저자의 글이 알차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조만간 꼭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교육이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다양하겠지만 수업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수업 속에 즐거운 배움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일 테다. 저자는 수업실기대회 관행과 관련하여 그러한 문제점을 꼬집으면서 수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배움의 공동체 철학과도 맥락이 통하는 이야기인 듯하다. 학교를 옮기고 책을 구해 읽고 연수를 듣지만, 여전히 수업 속에서 배움이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 느낌이 들어 고민만 많은 요즘인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학습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학습이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은 수업에 대한 다른 모든 질문을 압도하는 근원적인 것이다. 우수 수업에서 필자가 본 학습자들은 효과적인 수업 기법을 교사가 완벽하게 연기하는 동안에 정해진 각본을 힘없이 따라가는 풀 죽은 연기자에 가까웠다. 필자의 생각이 과도한 선입견이자 편견이라고?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묻고 싶다. 우수 수업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발성과 즉흥성이다. 학습 주제에 대한 원초적인 흥미 때문에 사전에 전혀 예상치도 못했떤 질문을 교사에게 제기하는 발랄한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는가? 혹은 그런 질문들을 즐기며 기지와 재치로 반응해 가는 교사의 모습은 관찰되는가? 이런 각본 없는 학습 활동이 가지는 도발과 자극과 재미가 관찰자에게도 오롯이 전달되는 체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142쪽.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새겨 들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정보, 평생학습 사회에서 지식은 날로 새로워지고 교사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교사는 단순히 일방적으로 지식을 넣어주는 수업이 아니라 배우는 방법과 기쁨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업을 해야 한다는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교사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지만 앞으로 지향해야할 방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주의와 학습주의라는 개념으로 잠깐 돌아가 보자. 김신일은 학습주의 시대를 맞아 '교육'의 정의를 '교수 활동'에서 '학습 관리'로 재개념화할 것을 주장한다. 전통적인 교육 개념이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제도교육에 주로 한정되었다면 학습 관리는 학습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평생학습 사회에서는 학습자 스스로 제도교육에서의 학습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학습을 관리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평생학습 관리의 시대에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얼핏 생각하면 교사의 역할은 축소될 것 같지만, 학습자들이 스스로 자기 학습을 관리하면서 능동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촉진하고 안내하는 교사의 역할은 오히려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한다." 245-246쪽.
|
|
교사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가르치기만 잘하면 좋은 교사인가? 교사 스스로 배움을 즐거워해야 하는가? 교사가 공부를 재미있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의문은 근대 공교육 체제의 교사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교육의 위기 내지 배움의 위기를 극복하는 사유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스승 없는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교육의 위기를 말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교학상장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전통을 회복하는 것. 이로써 더 나은 표준을 향해 구도하는 거대한 학습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소속되는 것이 위기 극복의 열쇠가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