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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기를 잘 쓰지 않는다. 내가 일기를 쓸 때는 뭔가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분노, 짜증, 고뇌, 자포자기, 상실감, 좌절감 등등이 있을 때이다. 얼마나 솔직하게 써 놨는지 그 당시의 일기를 읽어보면 내 심정이 얼마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는지 쉽사리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일기를 쓰는 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가장 진실하게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설마 일기를 남에게 보여주듯이 쓰는 사람도 있을까?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의 부친께서는 40세가 넘는 시점부터 일기를 쓰셨다. 나무를 심듯 삶의 기록을 심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 쓰기는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이 나라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한 남자이면서 한 집안의 가장이기에 겉으로는 아닌 척, 모르는 척 하는 부분들이 많았을텐데 일기에는 그 속내가 많이 드러나있다. 넉넉하지 못한 시대에 지병으로 인해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없어 아내의 노고를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남자의 시선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197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가 풍요롭지만은 않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 그 시대에 직장을 가지지 못한,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특히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단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교사였지만 지병을 얻어 학교를 떠나야 했던 박화백의 부친으로 인해 모친은 팔을 걷어 부쳐야 했다. 자녀 셋을 데리고 먹고 살아야 했지만 체면치레를 위해서는 지인들을 피해 타향인 부산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작한 장사, 연탄을 팔고, 빵을 굽고, 얼음을 갈고, 책방을 보고, 케키를 팔고… 그나마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그 고된 노고는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날림공사로 지붕이 부실해 비가 새고, 막내는 장티푸스를 앓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나고, 불량만화, 불량음료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지만 그 또한 온전치 못한 자신의 건강 때문에 아내의 몫이 되어 아내를 수고케 했다. 그래도 부부는 검소한 삶을 유지하고 소신을 잃지 않으며 비록 일상은 고될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꽤 오래전에 TV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중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3회정도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인터뷰만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보면서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젊었을 때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이리 저리 밖으로 돌며 바람만 피우던 아버지가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자식을 찾아왔는데 너무나도 원망스럽지만 아버지인데 어떻게 내치느냐며 울던 여자가 기억이 난다. 아직 용서하지 못했는데 무조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이 사무치게 서럽게 보였었다. 딸들은 주로 엄마의 삶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정의한다. 어떻게 좋은 부모만 있을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박화백의 아버지가 쓰신 일기를 읽고 있지만 그 아내의 삶이 내 엄마의 삶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기에 가슴이 아팠다. 내가 지금 이렇게라도 사람구실 하고 살 수 있는 것은 분명 내 엄마의 희생의 대가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도 안다. 분명히 내 세대는 자신이 먼저인 매우 이기적인 세대임을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 당황스러웠다. 분명 박화백 부친의 일기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아내의 일기를 읽고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밖으로 나가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아내가 하지 못하는 아내의 몫의 일부를 감당해야 했기에 그 마음이 녹아 그리 보였던가 보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탓에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의 시선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미안하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감을 버릴 수가 없다. 고된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한결같이 남편의 편이고 남편의 손발이고 남편에 대한 무한 존경과 감사를 표현한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일기장임에도 내게는 내내 어머니의 노고와 고충이 더 크게 와 닿았다. 지금 돌아보면 분명히 내가 자랄 때 내 어머니의 고충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힘겨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할 곳이 없었기에 얼마나 또 외뤄웠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딸이니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거 눈물 쏙 빼는 거 아냐?’ 하면서 주말에 읽기 위해 고이 두었었다. 간혹 지하철에서 청승맞게 훌쩍이는 상황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그런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고 답답한 심정이지만 희망을 염두에 둔 자분자분한 글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책을 덮고 그 이후부터 이 책의 여운이 더 크니 말이다. 책 속에 있던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매번 아니라고 말씀 하시지만 부모님은 자녀들이 마음을 써 준비해 온 선물을 기꺼워하신다. 우애가 좋은 것을 자랑스러워하시고, 어버이날의 그 흔한 카네이션 한 송이에 흐뭇해 하신다. 그러니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몸만 덩그마니 갈 수가 없다. 그리고 예전이면 그냥 지나쳤을 옷 가게도 엄마께 적당하다 싶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도는 바로 결과가 되어 돌아왔다. ‘어쩜 이렇게 꼭 맞니. 색상도 좋고 시원하고 너무 좋다’ 가슴이 찌르르하다. 이젠 노력해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게 맛 없는 ‘생선 대가리’가 부모님들이라고 가장 맛있는 것은 아님을 이미 알고는 있었으니 이젠 가슴속 깊이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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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기을 살며시 들여다 보는 것은 궁금하기도 하면서 웬지 은밀하기도 한 일인 듯 하다. 어린 그 누군가의 (나의 경우는 주로 언니의 일기장을..) 일기장이나 편지를 몰래 훔쳐(?) 보았던 그 짜릿함... 아마 누구나 약간의 경험은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기장.. 만약에 내가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느낌이었고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의 일기이니 감히.. 라는 생각에 들춰볼 엄두조차 못했을까.. 아니면 아버지의?? 이라는 궁금함에 몰래 가슴 두근거리며 살짝 그 내용을 들여다 봤을까.. 사실상 이 일기장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신 박재동님은 빛 바랜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어내려가며 어떤 맘이셨을까.. 아마도 그것은 아련함과 아픔 그리고 뿌듯함과 설레임이 모두 공존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다.
일기 쓰기를 즐겨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숙제로 일기를 썼고 중,고등학교때는 대학생 스프링 노트에 갖가지 색깔로 멋을 부려가며 멋진 사진을 오려 붙이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문구도 베껴다가 멋들어지게 쓰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고 솔직하고 진솔하게 한 장 한 장을 채워나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 일기 노트는 소중한 나의 보물 1호이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점점 뭔가를 많이 적는 게 귀찮아져 대학수첩에 하루의 일정 정도를 메모하게 되고 그 버릇이 점점 스케줄러 정도 정리하는 습관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인가를 손으로 적는 것 조차 귀찮고 힘들어져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지해 그것도 작심 몇일로 적다 말다.. 또 새해가 되면 시작했다 흐지부지.. 그러고 있다.
이 책은 박재동님의 아버님께서 40대에 시작하셔서 꾸준히 적어오신 소중한 그날 그날의 기록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가장 관심사는 아이들이었고 살아나가야하는 그 삶 자체였다. 일기는 수려한 문장으로 멋들어지게 적혀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읽혀야한다는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적은 것이기에 진실하고 생생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당신이 직접 하신 말씀이나 쓰신 말씀을 보거나 들어야지만 그 맘을 헤아리게 되는 것일까. 그저 곁에서 든든한 울타리로 서 계신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기만 하고 그 안에서 휘둘림 없이 지내는 것에 대한 감사함에 대해 잊고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건강때문에 천직이라 생각했던 교사직을 그만두고 고향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타향 부산에서 만화방, 떡볶이 ,오뎅 빙수를 팔며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 오신 두 분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것 만이 낙이셨던 두분..우리네 부모님의 맘을 대변해 주시는 두 분의 모습이었다.
어떤 가르침보다 생활속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훈육하신 듯 하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지만 따뜻하고 인자하셨을 것 같은 아버님. 그런 아버님과 함께 강한 생활력을 보여주신 어머니 그리고 그 두분 밑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열심을 다해 공부도 하고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간 세 남매의 흐뭇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기는 그날 그날의 일들로 짧지만 자세하게 그리고 매우 현실적으로 리얼하게 적혀있다. 일기 중간 중간에 박재동님의 얼굴과 함께 그 일기를 대하는 아들의 입장을 적어 주시고.. 또 어머님의 얼굴과 함께 아버님이 다 못 하신 말씀을 첨가해 주시는 어머님의 의견도 간간히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박재동님의 훈훈한 삽화가 함께한.. 책이라기 보다 그야말로 일기장 한 권을 읽은 그런 기분이었다.
아버님은 글을 쓰시는 내내 자신이 건강하지 못해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을 말씀하신다. 한없이 베풀어 주시면서도 남들 보다.. 이런 생각에 미안해 하시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 이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그것 또한 이해가 되면서 그렇기에 더욱 죄송해진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대해 주셨을텐데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맘이 들면서 말이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지금은 어머님과 이런 저런 옛이야기 꽃을 피우신다는 박재동님.. 그러한 모습을 아버님의 초상화는 빙그레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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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떻게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p351)
모사랑이라고 해서 엄마와 딸들의 모임이 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고.. 그 모임에 언젠가부터 아빠도 함께 나오신다. 이제는 그 모임을 아빠가 더 기다리신다.. 엄마와는 예전에 아이 낳고 산후조리하러 친정집에서 지낼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하고는 친하게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깊은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어둑하고 허술한 대폿집에서 아빠가 좋아하시는 막걸리를 찌그러진 그릇에 가득담아 건배를 하며 두런두런 옛날 우리 어렸을 적 아빠 속썩였던 이야기... 그리고 아빠의 청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리 딸만 넷을 낳으며 속이 탔던 이야기(엄마와는 조금 다른 입장의 애탐이 있으셨으리라..) 그러다가 금쪽 같은 막내 아들을 본 이야기.. 이제는 그런 딸들, 아들을 만날 날을 기다리신다는 아빠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싶다. 먼 시선으로 옛이야기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면서 맘이 저 한 구석부터 찌르르 울린다...
이 밤 아빠가 그.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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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아버지께서는 엄마에게 반찬 해달라고 하는 언니들이나 저를 보면서 너희들이 해 먹던지 백화점서 사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엄마 일하시느라 바쁘신데 자꾸 해달라고 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런데 어디 백화점 음식이 엄마 손맛하고 같겠어요. 엄마 김치에 비교가 안 되지요. 다음 주면 친정아버지께서 팔순이시랍니다. 연쇄가 많으시니 건강이 많이 걱정되네요. 제가 크게 해 드릴게 없고 그저 귀여운 막내딸로만 산 것 같아요. 사실 귀엽다는 것은 제 생각이고 철부지 막내딸인거죠? 책을 읽으면서 부모님에 대해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 있답니다. 이 책 <아버지의 일기장>이 그런 책이랍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백재동님의 아버지 박일호님께서 1971년 4월 5일부터 1989년 5월 27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수십 권의 일기장으로 남은 기록 안에는 가난한 삶 속에서 자식들을 키우며 느낀 일상의 진솔함, 병들고 가난한 삶을 함께 견뎌내는 아내에 대한 연민, 그리고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들며 한 사람이 느끼는 인생에 대한 애환,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애틋한 부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89년 6월 18일 숙환으로 별세한 그는 슬하에 아들 재동과 수동, 외동딸 동명을 두었으나 동명은 재생불량성빈혈로 1998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인생의 고락을 함께한 아내 신봉선 여사는 올해 82세로 현재 울산에서 지내고 있다. 이 책은 아버지의 일기장입니다. 오랜 세월 일기장에서 다 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서 기억에 남는 내용이나 추억하고 싶었던 것 아버지가 재동에 대한 생각이나 수동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 시대의 시기적인 환경이나 일어났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몸보다는 자시들을 먼저 생각했고 부인에 대한 미안함이 참 많은 것 같은 글들이 많았답니다. 본인이 아파서 남자가 해야 할 일들을 부인이 하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것이 최고로 가슴이 아팠을 것 같아요. 자식의 공부를 위해서는 아까워하지 않고 무조건 미뤄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서 저도 자식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과연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아이들의 앞날을 미래를 조금은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 일기장은 처음서두가 1971년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일기장을 시작해서 1989년 죽어도 우리 집 안방에 가서 죽을 란다. 로 끝이 납니다. 어찌나 처음에 일기를 읽으면서 아프신 아버지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오게 되고 거기서 만홧가게를 시작하면서 박재동님의 꿈이 시작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박재동님을 만나서 박재동님의 어린 시절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그 실력이 초등학교 학생의 실력이 아닌 것 같이 대단해서 그런가 봅니다. 부모님이 만홧가게를 하셔서 지금의 박재동님이 계신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부모님이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을 잘 선택한 거라 생각합니다. 그 시절에 만홧가게는 찬밥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의 박재동님이 계시니 탁월한 선택일 겁니다. 저도 자식들을 위해 더욱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식들의 앞날에 아픈 몸이지만 돈을 벌어서 최선을 다하신 아버지 나의 자식들의 앞날이 막히는 것이 없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밀어주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보니 참 좋으신 것 같아요. 자기 인생보다는 자식들을 위해 더욱 노력하신 인생은 조금 안타갑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식들이 잘되는 것이 하나의 소원이니 그 소원이 이루어 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분 옆에 버팀돌이 되어주신 위대한 부인, 어머니가 있지요. 그 분이 계시기에 더욱더 이 가족이 빛이 나는 것 같아요. 비록 돌아가셨지만 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희생을 하신 박일호님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 분 옆에 기둥으로 남으신 부인은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일기네요. 잔잔하게 하루 일상들이 들어가고 크게 변화는 없지만 잘 읽혀지고 아버지에 대해 나의 과거에 대해 내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책입니다. 그리고 일기란 것이 이리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답니다. 남은 이들에게 그 소중함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매일은 아니더라도 열심히 써보려고 생각중입니다. 박재동 아버지의 생활신조 금전을 잃으면 작은 손해다. 신용을 잃으면 큰 손해다. 용기를 잃으면 마지막이다. 우리집의 문화 자기 삶은 자신이 알아서 ---그리 알고 살았는데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생각하는 삶이 아버지의 신조였다니 새롭답니다. 이렇게 이 가족의 신조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다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생각하는 삶을 살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합니다. 남을 해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의 삶을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요. 이런 삶들을 살도록 지금 주춤 하셨다면 그것을 이겨내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자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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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펜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잖아도 못 쓰던 글씨는 더욱 괴발개발이다. 이젠 대학에서도 노트를 펼치고 손 글씨로 필기하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래도 끝까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며 내가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초등학생 땐 학교 숙제였기에 억지로 했다. 가끔은 일주일치 열흘치를 몰아 쓰며 스릴을 느끼기도 했었다. 어른이 된 후 펼쳐보기에는 기록이 너무도 조악하고도 부끄럽지만 그 기록 덕에 이미 망각의 늪으로 빠져버린 기억들을 건져 올릴 수 있어 행복하다. 가끔은 한 장 가득 자신을 욕하는 내용이 끊이지 않고, 어떤 날은 가족이나 동료를 향한 섭섭한 마음으로 들끓기도 하지만, 솔직한 심정만큼은 일기를 따를 게 없다. 유명인이 아니기에 내 일기의 가치는 낮다. 그래도 초등학생 경필대회에서나 볼 법한 글씨체를 고수하며 일기를 쓰는 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줄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픈 마음이 커서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아프셨다. 자연스레 어머니가 가계를 책임지셨다. 두 분은 나름 열심히 사셨지만 가난은 지겹도록 우리 가족을 쫓아다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 정직한 삶을 살라는 가훈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지금이야 수명의 연장으로 여든도 거뜬히 산다. 예전엔 꿈과도 같이 여겼던 연령대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돼 버렸다. 저자의 아버지는 오래도록 앓았고, 지금으로서는 이르다 할 수 있는 만60세에 세상을 뜨셨다.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얻은 폐결핵이 간경화로 번지면서 빚어진 비극이었다. 부산 전포동에 셋방을 얻은 후 생계를 위해 연탄배달, 풀빵장사, 팥빙수 장사 등 안 해본 장사 없이 다 했다. 가장 오래 운영한 것은 만화방이었고, 문방구와 분식집도 제법 오래 유지했다. 자식 셋을 어른으로 키워내기 위한 노고를 자식 입장에선 알아채기 힘들었다. 운이 좋게도 저자의 아버지는 기록의 가치를 아셨다. 투병과 궁핍의 역사는 고스란히 아버지의 일기장에 기록됐다. 1971년 4월 5일 시작한 일기는 1989년 5월 27일까지 지속됐다. 1989년 6월 18일 숨을 거두기 불과 한 달 전까지도 아버지는 펜을 놓지 않으셨다. 한 개인의 삶이 오롯이 가족의 역사가 됐다. 부모의 마음 가득한 것은 자식 걱정이었다. 끊이지 않는 가난에 대한 갑갑함,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해 생겨나는 미안함 등도 결국은 자식 걱정으로 향했다. 몸만 성했어도, 그래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었더라면 자녀가 편히 즈려 밟고 앞날을 설계할 수 있는 버팀목 역할을 했을 터이다. 부모로서 기본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일기 곳곳에 묻어났다. 자녀는 나이를 먹어도 자녀였다. 스물이 넘어 직장생활을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저자를 바라볼 때마다 응원은 하면서도 불안감을 토로했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졸업한 인재의 앞날이 창창하지 못한 게 제 탓은 아닌지 반성하는 듯도 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아들이 배필을 얼른 데려오지 않는 것도 부모로선 안쓰러웠다. 이 땅에서의 생이 언제까지 허락될지를 자신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조바심이 컸을 것이다. 저자는 일기 곳곳에 아들로서 멘트를 달았다. 저자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함께 아버지의 기록을 음미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기록을 통해 접하며 아들은 뒤늦게 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의 투병생활마저도 제 삶의 밑거름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어머니의 생생한 음성이 더해졌다. 그리움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일까. 평면에 적힌 글은 한 개인의 입체적인 삶으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비로소 기록의 놀라움 힘을 실감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생전 못다 전한 부정(父情)을 일기를 통해 아들에게 전하는 데 성공했다. 요즘 아이들은 말은 기가 막히게 잘 한다. 하지만 펜을 손에 쥐어주면 허공에서 굴리기 바쁠 뿐이다. 첫문장도 쓰지 못해 끙끙 앓는, 그들은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세대다. 여기 한 아버지의 일기가 있다. 그의 글은 유창하거나 화려하지 못하다. 그의 글이 지닌 강점은 진솔함이다. 마음이 담기면 된다.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 글은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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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29. 화요일 아침 드디어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바쁜 틈틈이 자투리 시간에 읽기 시작한 '아버지의 일기장'은 방황하는 내게 많은 생각과 용기를 주네요 저도 초등학교때 부터 일기를 계속 써왔고 25년 정도 일기를 써오고 있는 30대지만 힘들고 지친 일상을 하소연하기 위해 끄적이는 용도로 쓰고 있어서 쓰고 나서 잘 읽지 않습니다. 아직은 일기장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하지만, 이분의 일기장을 보면서 힘겹게 하루 하루를 살면서도 소신껏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아버지의 의무를 다 하신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건 '도대체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거지?'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정에 대한 생각, 사랑이 어떤 건지 모르고 자란 저로서는 정말 알 수 없고 궁금하기도 하고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해서 조금씩 들춰보다가 계속 읽게 되었지요. 흘러가는 세월의 변화도 알 수 있고 가끔씩 댓글처럼 써 있는 '박재동'화백의 글을 통해 부모와 자식은 가장 가까이 있어도 알기가 쉽지 않구나 하는 반성도 해봅니다. 정말 좋은 책이었고, 가슴 뭉클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일기를 통해서 엿보면서 그 어떤 힐링책보다도 더 진솔하고 더 큰 에너지로 삶에 용기를 주네요. 그 어떤 미사여구로 쓰인 화려한 책보다가 더 감동적이고 더 사람의 마음을 이끌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참 고마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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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왕족의 가족사로 인식되던 시대가 있었다. 왕족의 실록이 곧 국가의 실록이었다. 지금도 그러한 사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왕족의 가족사가 아니라 권력 있는 사람들의 역사라고 인식될 따름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역사는 백성의 것이어야 한다. 이름 없이 살다간 수많은 백성의 삶의 기록의 총합이 곧 역사이다. 백성의 기록이 무수하게 많이 기록되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다행히 요즘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기록이 출판되고 있다. 때로 이름 없는 사람의 기록이 아주 귀중한 사료가 되기도 한다. 박재동 화백 아버지의 일기장도 귀중한 기록물이다. 병든 몸으로 가파른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온전한 가족을 꾸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눈물겹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박재동 화백의 아버지 박일호(1929-1989)는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군대에 갔는데 군 당국의 서류 분실로 군 복무를 두 번 했다. 제대 후 울산 양사초등학교로 복직하고, 23세에 두 살 어린 신봉선과 결혼한 뒤 범서초등학교로 전근을 했다. 교사 생활을 하던 중 폐결핵 발병으로 교단을 떠난 뒤 치료 과정에서 간경화가 진행되었다. 자식을 키우는 일이 요원해진 그와 아내는 1959년 부산 전포동에 셋방을 얻은 뒤 연탄배달, 풀빵장사, 팥빙수 장사 등을 하다가 집주인이 하던 만화방을 인수한 뒤 1980년까지 만화방을 운영하였다. 1981년부터 울산 전하동에서 문방구를 열어 떡볶이, 팥빙수, 김밥 등을 팔기도 하고, 울산여중 앞에서 분식집을 하면서 자식 셋을 키웠다. 삶을 요약하면 당대를 살아간 우리 아버지들의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람마다 살아가는 길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굽이치는 물결처럼 사납고도 억센 지난 인생의 역사가 있다.”면서 “식목일을 맞아 비록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해도 마음속에서나마 나무를 심듯 삶의 기록을 삼을까 한다.”(1971년 4월 5일)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43살에 시작한 일기는 1989년 61살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날마다 썼다. 일기에는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살면서도 올곧게 살아가려는 정신, 자신을 간병하고 살림을 책임진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자식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다. 책에는 아내 신봉선 여사의 글과 아들 박재동 화백의 글과 그림도 덧붙여졌는데 이들 간의 가족애는 뜨거운 감동을 준다. 남편이 다시 입원을 했다. 병세는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고 남편은 맥을 못 추었다. 애타는 내 마음 하느님이나 아셨을까. 남편은 보호자 없는 외로운 환자다. 나도 잠을 쉬 이룰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인연으로 만난 부부인가 싶기도 하고, 그이가 한없이 가여운 생각에 베개를 적셨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병마에 발목을 잡힌 것은 내 잘못이 아닌가 싶어 한밤을 지새웠다. (1984년 11월 30일 일기에 덧붙인 여사의 글)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 하신 적이 없지요. 제가 고1 때 전교에서 꼴찌를 했을 때도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법이지.”라고 하셨지, 다른 말을 하지 않으셨지요. 다만 이곳 전포동에서 이렇게 고생하며 사는 보람이 너희들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을 뿐이죠. 말씀은 안하셨지만 스스로 알아서 사는 법, 그리고 정직, 성실하시고, 불의에는 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싸우셨지요. 그런 삶이 우리들에게 큰 기둥 같은 것이 되어주신 거지요. 아버지의 글을 보는 이 순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도저히 배우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은 어머니의 언제나 우리들에게 하 안 내시는 모습과 아버지의 자상한 편지 쓰기입니다. 정말 어렵고 또 부러워요. (1986년 5월 9일 일기에 덧붙인 아들의 글) 박재동 화백의 아버지는 군 당국의 서류 분실로 군 복무를 두 번 하였고, 과로로 각혈을 시작하여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라로부터 두 번 군에 다녀온 걸 보상을 받아야 하고, 또 학교 과로도 산재도 인정받고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폐병 환자로 쫓겨났다.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당시 천대받던 만화방을 운영하는 아내를 지켜보는 마음은 또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러나 “생각하는 삶”을 신조로 하여 “자기 살은 자신이 알아서” 살아가는 가족 문화를 가꾸었고, 만홧가게 책상 옆에는 “금전을 잃으면 작은 손해다. 신용을 잃으면 큰 손해다. 용기를 잃으면 마지막이다.”는 글귀를 써 붙여 두었다. 이렇듯 당신의 곧은 삶의 자세가 헌신적인 아내와 스스로 길을 헤쳐 나가는 자식들과 어울리면서 깊고 뜨거운 가족사를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