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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이러 이러한 내용이다 정도에서 징비록을 읽기 전까지 경북 문경의 진남교반 위쪽의 고모산성이나 경북 안동에 하회마을에 있는,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했다는 옥연정사는 그저 인연 따라 걷고 싶은 볼거리 였다. 처음으로 고모산성에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진남교반의 벚꽃에 취해 거닐다 고모산성에 올라가 시를 읊고 주변 절경을 바라보았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성을 재현했는데 이러 이러한 부분이 잘못되어 문화재청에 올렸다는 향토문화 연구사의 말도 관심도 없었고 신립 장군을 운운해도 나와 관심 없는 외적 세계와도 같은 말들이었다. 왜냐하면 필요 이상의 돈을 역사적 고증도 없이 버린다는 일부분의 인지가 이상하게 생각되어서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는 그랬다. 군사력 요충지로 승리를 이끌 수도 있었던 고모산성에서 신립 장군의 잘못된 판단이 참담한 7년의 임진왜란으로 가게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는 생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가 가진 무기가 어느 지형에서 유리한지를 안다는 게, 잘못된 선택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 말을 타고 있는 우리 장수의 화살을 예견했을 일본군의 조총은 고모산성을 지나며 텅 빈 성을 두려워했지만 이미 주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말하자면 힘들이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단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지나간 반성의 내용은 없었고 반복의 역사를 보게 하는 6.25 때 격전지로 알려져 있어 똑같은 역사다. 그렇게 지금도 그곳은 참담했을 것은 뒤로하고 등산객들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주변 전망이 한 바퀴를 돌아도 너무 좋다. 하회마을을 둘러싸고 흐르는 물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듯 징비록을 읽으며 유성룡의 눈물과 통곡을 들은 사람도 없겠다. 그가 본 임금과 장수 그리고 민중은 지금도 반복되는 정치인과 국민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유성룡은 선조 임금의 옆에서 그림자처럼 국가의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권율과 이순신을 발탁했다는 것은 징비록을 보고야 알았다. 국가의 중책을 맡은 책임자들이 본인 우상화에 집착해 개인의 충성도에 따라 등용했다면 이순신 같은 명장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도 중상모략을 일삼아 훌륭한 장수를 죽이게 하고 모사꾼에 내분으로 현명한 판단을 못하고, 도망 다닌 게 오히려 잘했다는 평가가 내려지는 임금은 선조뿐이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역사에 전쟁 중에도 내분에 더 매달렸던 것은 6.25 전후 현대사에도 그랬고 지금도 중대사가 있을 때 보면 마찬가지다. 큰일을 앞두고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 것을 반성하게 하는 게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란 생각이 김수영 시인의 물음이다."나는 왜 작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나도 가끔 큰일을 앞두고 옹졸하게 남을 비판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를 필요로 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위기에 결정적인 판단을 못하면 좌절한다. 하지만 경험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한다면 머리는 맑아지고 지혜로운 상황을 맞게 된다. 이 끝없는 순환이야말로 인간사에 존재하는 고통과 행복의 근원이란 생각이다. 이 책은 우리국민이 알아야할 내용을 담고 있다. 내 안에 반성문도 한 번쯤은 징비록을 잘 읽었다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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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 만약 그 상호 소통이 없다면 미래 역시 없을 것이다 역사의 과거가 그냥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현실에 작용하는 것이기에 역사를 쓰고 읽는 효용성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재정립되고 재고찰되는 귀감이 되는 것이다 이 징비록 역시 다시 돌아 보기 위한 계기를 위해 쓰여진 것이다
징비록은 참혹했던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후세에 그 참상과 원인 그리고 교훈을 주기 위해 기술한 글이다 이 책이 왜 굳이 기술되어야 했을까 가장 좋은 것은 이런 책을 기술하는 것보다는 임진왜란을 막고 대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책은 임진 왜란 전의 상황부터 기술해 나가기 시작한다 일본이 전국 시대의 혼란과 아수라를 뚫고 도요토미 휘하의 가공할 세력으로 결집해 조선을 침공할 수 있다는 풍문이 도는 임진왜란 전의 상황에서 조선은 거의 무방비한 안일에 빠져 있다 그런 한심함은 조정으로부터 지방의 백성들까지 만연되어 심지어 통신사로 파견된 사신들 마저도 일본의 침략 의도를 없다고 상소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 당시 나라를 잠식했던 당쟁의 여파로 서인과 동인의 대립이 국론의 분열이라는 참국을 이끌어 낸 것이다
자 이제 조선은 침략당한다 자고 있다가 칼 든 도적이 안방에 침입 하듯 부산으로부터 쳐들어온 일본은 파죽지세로 서울까지 진격한다 그동안 조정은 제대로 된 군사 차출조차 못한 채 거의 통과시켜 주듯 적군에게 유린당한다 참혹하다 우리 조상들의 무능과 한심이 이 정도였다 그후 계속되는 패전과 목숨 구하기에 급급해 도망치는 지방 관리와 장군들의 모습은 왜 나라가 그 지경까지 전락하게 되었는지 비분한 감을 불러 일으킨다 전선의 교착과 꼬임 그리고 앞날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전운 그러나 아직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았는지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나라를 지탱한다 그러나 조선은 그토록 썩었고 나라의 기능이 없는 극악무도한 정권이었다 조국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권좌가 더 두려운 선조와 신하에 의해 이순신은 누명을 쓰고 하옥되고 그로 인한 힘의 공백은 일본의 승기 만회를 불러 오게 된다 이토록 암울한 전쟁의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괴롭다 충신과 용장들을 계속 살해하는 용렬하고 잔혹한 군주와 그 밑에 사직과 강산이 위태로운 조선의 실정은 왜 이 나라가 일본에 강탈당해야 했는지 그 당면한 숙명성을 일깨우게 한다
비록 이순신이 다시 풀려나고 그로 인해 명나라의 협공으로 패퇴하는 일본에 마지막 총공세를 가해 전쟁이 대정리되는 국면을 맞았다고는 하나 이것은 무의미한 전쟁이고 슬픈 전쟁이었다 일본의 야욕을 채워 주는 것이외에는 아무런 명분도 없고 의미도 없으며 대의도 없었던 전쟁 하기사 전쟁이 어디 의미가 있고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율곡 같은 이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고 눈 앞의 나태한 평화에 빠져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잊은 지도층의 방만한 무능은 용서될 수 없는 잘못이다
그렇지만 더욱 뼈아픈 것은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나 또 한 번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일본에게 아예 국권을 침탈 당해 식민지가 된 이 어리석음의 되풀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과연 역사는 그 본보기로 후세를 위해 기능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징비록을 읽었을 터인데 어찌하야 일본에게 지배당하는 우를 다시 범했단 말인가 이런 가슴 아픈 성찰을 하도록 하는 역사의 돌발성과 비가해성을 어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일본이 다시 우경화되고 있다 징비록이 쓰여진 후로 4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징비록을 읽는 이유는 지난 날의 길을 다시 밟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역사를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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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적에 어떠한 과목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국사도 특히나 싫어했었다. 외울게 너무 많고 시대적으로 정리가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 영향 때문에 잔인하다는 이유로 전쟁영화나 전쟁소설도 보지 않고, 고리타분할 것 같아 역사소설도 거의 읽지 않는다. 종종 역사소설을 읽고 나면 배경 지식이 없다 보니 그 모든 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아둔함을 발견하곤 한다.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인데 이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역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띄엄띄엄 주워들은 사소한 지식들이 조금 정리가 되었고 스스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난중일기』를 찾아서 읽고 있으며『칼의 노래』를 재독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임진왜란에 대한 나의 지식과 인식은 어느 정도였을까? 1592년에 일어난 전쟁,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적을 물리쳤단 사실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유언과 난중일기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을 덤으로 알고 있을 뿐 더 이상 알려고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수에 살다보니 늘 만나는 게 거북선과 연관된 지명들과 기념물이었다. 집 앞에는 거북이 모양의 호수가 있어 거북공원으로 불리고 조금만 걸어가면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했던 선소가 있다. 늘 마주치면서도 이순신 장군 때문에 유명하다며 늘 그 자리에 있는, 특별하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고 『난중일기』를 읽다 자주 등장하는 여수 곳곳의 지명이 뭔지 모를 뜨끈함으로 다가왔다. 여수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이 책으로 인해 살아나고 있었다.
『징비록』은 '지난 일을 뉘우치고 앞으로의 교훈을 찾는 역사의 기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책 제목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데 조금만 읽어 나가다 보면 이 책을 기록한 당시의 재상이었던 유성룡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책 제목의 뜻을 지키려 했던 글쓴이의 탄식과 안타까움이 애달팠다.
세 권의 소제목을 보면 1권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2권 ‘달아난 임금 남겨진 백성’ 3권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 임진왜란’이다. 1권에서 이 책의 제목이 사무치도록 다가왔던 이유는 충분히 준비하고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욕망으로 시작된 7년간의 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피해를 본 것은 조선이었다. 명나라가 구원병으로 와서 일본을 격퇴하고 조선 땅에서 몰아내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히데요시의 욕망이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방어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피폐해져가는 조선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잔인했다.
100년 동안 어지럽게 전쟁을 했던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군은 강력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아무런 제재도 없이 점령한 모습은 그야말로 한심스러운 당시의 조선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었고 의로운 자들도 없었다. 군관들이 자기 자리에서 조금만 최선을 다해주었더라면 일본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을거란 유성룡의 안타까움이 내 마음에서도 터져 나왔다. 그런 일본군이 조선을 만만치 않은 곳으로 보게 만든 것은 백성들이었다. 임금도 빈 약속을 한 채 서울을 떠났고,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은 싸우기는커녕 서로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 혼란 속에서 백성들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바다에서 너무 잘 싸워주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식량을 제때 조달받지 못하고 다른 부대와 쉽게 힘을 합치지 못해 지지부진한 상태 속에서 힘을 잃어갔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더 피폐해졌을 것이며 히데요시의 욕심처럼 명나라까지 치고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유성룡은 전쟁의 모든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재상이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 그 혼란스럽고 복잡한 가운데도 이 모든 기록을 남겨 임진왜란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부끄러운 모습이라 스스로 기록하면서 참담하고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금할 길이 없었을 텐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고 그래서 더 애잔하게 임진왜란의 참담함이 진하게 다가왔다.
이 책이 지닌 역사적인 가치와 기록의 낱낱한 점까지 파악할 혜안이 내게는 없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마음은 참으로 씁쓸하고 오묘했다. 이 아픈 역사를 지켜보는 것만도 이렇게 참담한데 그 모든 일을 겪은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지 상상조차 못하겠다. 명나라의 군대에 모든 식량을 대느라 정작 조선의 백성들은 굶다 인육까지 먹는 사태에 빠졌음에도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농사지을 환경이 주어져야 하는데 7년의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고 피의 땅으로 조선을 뒤바꿔 버린 것이다. 그런 시대를 감당하고 겪고 이겨낸 이들이 현재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뭉클해진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제목과 의의처럼 지난날을 돌아보지 못하고 약 300년 후의 일제 식민지와 6.25 전쟁의 비극이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든다. 3권의 부제목처럼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 임진왜란. 그 전쟁의 파란만장함을 이렇게나마 제대로 알게 된 것이 다행인지 불편함인지 그 씁쓸한 여운으로 어지럽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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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懲毖) 라는 말은 시경(詩經)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군무의 으뜸 벼슬인 도체찰사 및 정무의 으뜸 벼슬인 영의정 자리에서, 임진왜란을 둘러싼 국방, 군사, 정치, 외교, 민사 작전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의 기록이다. 이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