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섹스와 젠더의 차이다. 섹스(sex)는 생물학적인 성이고, 젠더(gender)는 사회 문화적인 성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을 때는 알 듯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모르겠고, 무엇보다 왜 성을 굳이 구분해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앞섰다. 그러다 이번에 나온 <젠더 정체성은 변화하는가?>를 읽고 이러한 궁금증이 말끔히 해소됐다.
'신지식 교양인을 위한 젠더 입문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일반적인 책의 개념과 많이 다르다. 우선 본문의 내용 이해를 돕는 사진 자료와 주요 용어 설명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게 특장점이다. 내용상으로는 전통적 입장인 생물학적 근본주의에서부터 사회문화적 요소에 따른 젠더의 역사적 변화 양상, 각국의 다양한 젠더들의 위상,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되지 않는 다양한 생물학적 성의 존재와 오늘날 점점 더 확산되는 젠더 행동주의를 통해 섹스와 젠더는 물론 변화하는 젠더에 대한 풍부한 이해의 가능성을 선사한다.
우리가 왜 젠더를 알아야 하는가는 다음을 통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젠더는 정체성, 친밀한 관계, 일상의 경험 그리고 사회 문화적 지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는데도,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젠더는 삶을 구성하는 외적 요소이기도 하고 또 우리와 주변인의 인생 가능성을 생각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젠더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동물까지도 물건을 기술하는 말도 달라진다. 몇몇 언어와 문화에서는 일상의 물건이나 그 물건을 기술하는 말도 달라진다. (12p)
1장 '생물학적 섹스를 표현하는 젠더'에서는, 남녀의 차이가 생물학적 기질에 있는 선천적인 차이에서 비롯한다는 근본주의 학파의 주장과 달리 황제 펭귄을 비롯한 동물 세계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례들과 인간 세계에서 남자가 자녀 양육의 일부나 전부를 맡기도 하고 여자가 경제 주체가 되기도 하는 현실에서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섹스와 젠더 차이를 주장하는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 남녀의 생물학적 특성이 젠더로 나뉜 행동과 사회적 역할에 영향을 준 지배적인 근거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종교를 대신하게 된 과학이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중점을 두고 연구했고 철학의 담론이 이를 정당화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양성 모델이 아닌 다섯 개의 성 모델의 주장과 함께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남녀가 신경학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완전한 남성성과 완전한 여성성이란 가능한 인간 몸 유형의 스펙트럼 중에서 양극단에 해당'"되며 "이런 양 극단의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수많은 변형물이 존재한다."
2장 '사회 구성물로서의 젠더'는 젠더 역할이 어느 정도 우리가 사는 사회와 문화에 의해 만들어져 각 성에 고착된다는 사회구성주의 입장을 소개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와 로마, 고대 그리스 농경사회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비교하고, 산업혁명기의 여성노동과 젠더 역할, 종교와 도덕에 의한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살펴본 후 젠더화된 행동이 학습에 의한 것이며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젠더 역할은 경제, 사회, 정치 현실에 따라 변화해왔으며, 그럼에도 오늘날 초기 농경사회가 요구한 전통적 젠더 역할을 강요해 계속해서 불평등을 만든다.
3장 '젠더 다양성'은 젠더 정체성과 젠더 표현이 전통적인 젠더 역할 바깥에 있거나 그 사이에 있던 개인과 집단을 살핀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는 젠더 이분법에 맞지 않는 다양한 젠더가 있었다. 인도의 히즈라 공동체, 라틴 아메리카의 트라베스티, 멕시코 사포텍 문화권의 먹스, 폴리네시아의 마후, 사모아 사회의 파아파피나, 인도네시아의 와리아 등은 젠더 이분법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나 제3의 젠더로 인정되었다. 크로스드레싱과 크로스젠더 표현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 생물학적 성과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날 성전환 수술을 통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편 자신의 젠더 규범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아이들은 소외당하거나 꾸중을 받으며, 10명 중 8명의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청소년들이 따돌림으로 자해와 자살을 시도한다는 보고가 있다.
4장 '젠더 행동주의'는 이러한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이분법적 젠더 구조에 도전하는 세계인의 다양한 저항 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일어난 "제2물결 페미니즘은 LGBTQ와 연대하고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의 권리에 집중하는 단체들과 출판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젠더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는 생각에서 유연하고 변할 수 있는 사회구성물로 이해하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 페미니즘 운동과 LGBTQ 단체의 성과다. 전통적 젠더 정체성과 젠더 표현은 현대 서구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점점 더 유동적인 것으로 경험되고 있다.
이해를 돕는 풍부한 사진 자료를 통해 그동안 글로만 읽을 때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다양한 성과 젠더, 젠더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섹스와 젠더에 관해 쉽고 흥미롭게 기술한 이 책은 젠더 다양성을 이해함으로써 양극단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고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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