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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 리커버책 '현란한 세상'은 쿠바 작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국내 초역 소설로 생의 비극을 환상적으로 그린 쿠바 대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한 수사의 회고록 '주인공 세르반도 수사의 회고록'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현실 재현을 거부하고 여러 측면에서 현실을 파헤치며 언어적 층위보다는 과장, 풍자, 그로테스크, 아이러니 등의 바로크 미학을 통해 영원한 인간 비극을 동정적인 역설로 완화한다. 세르반도 신부에 대한 최소한 자료로 모험 소설을 쓰면서 실질적인 삶의 에피소드들을 환상으로 바꾸고 그것들을 새로운 현실의 묘사에서 다른 사건으로 전환한다. 또한 소설은 또 하나의 사건을 놓고 장(章)을 중복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개의 시점으로 그린다. 결국 인생을 하나의 교리나 규정 또는 하나의 역사가 아닌 다양한 측면에서 다뤄야 할 신비로 생각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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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도 나라도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 덮쳐 오는 환희를 겪어 본 적이 있는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의 맥락에서 온통 나만의 것인 줄 알았던 고통을 겪어본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반가움, 안도감, 동질감 등등 정말 복잡한 감정들이 밀고 들어온다. 『현란한 세상』은 바로 그런 환희에 젖어 쓴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쿠바 출신 작가 레이날도 아레나스가 멕시코(19세기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 수사를 향한 깊은 동질감을 동력으로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과 문체로 그의 일생을 서술한 작품이다. 아레나스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뿐인 역사를 거부하고 세르반도 수사의 삶과 인간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틀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하나의 장(章)을 여러 번 반복하거나 주인공의 심정에 따라 사건을 비현실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묘사하는 등, 한 가지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의 존재를 긍정하고 현실 속 겹겹이 쌓인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작품 곳곳에서 두드러진다. 세르반도 수사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의 시작을 상징하는 과달루페 성모의 출현에 대해 일반적인 믿음에 반하는 설교를 했다가 스페인 정부로부터 일평생 쫓겨 다녔다. 삶의 한 단원을 집어삼키는 투옥 생활과 간신히 도망쳐서도 멈출 수 없는 도주 가운데서 세르반도 수사는 끊임없이 생존을 위해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 그를 따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전역을 다니며 극단적인 빈곤과 사회 부조리를 목격하고, 미국에서는 인간을 연료로 삼아 숨쉬는 것에도 세금을 매기는 자본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그 어느 곳도 세르반도 수사가 스스로 원해서 가지 않았고 어디서도 안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를 가두기 위해 쇠사슬로 몸을 칭칭 감았을지언정 세르반도 수사의 정신은 과거를 자유로이 여행한다. 생각의 자유로써 팽창하는 자아는 억압할수록 더더욱 거대해진다. 안온하게 보낼 수 있는 단 하루도 허락되지 않는 삶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길은 오직 머릿속에 있는 동시에 그렇게 획득한 존엄은 무슨 수를 써도 앗아갈 수 없다는 걸 세르반도 수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도주하는 삶이란 어딘가를 향하는 삶의 반댓말일 것 같다. 지향점이 있다면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인지, 잠시 둘러가더라도 어디를 향해야 할지가 미리 정해진다. 반면 도주하려면 지금 있는 곳에서 당장 벗어나 어디든 가야 한다.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늘 미끄러져야만 하는 삶,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삶에는 무엇이 남을까? 세르반도 수사는 이탈리아에서 멕시코산 용설란을 마주하고는 거기서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고국에서 추방되어 머나먼 곳으로 밀려난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피해자"였다. 아레나스는 『현란한 세상』 속에서 비로소 (있지도 않던) 죄를 사면 받은 세르반도 수사에게 (역사는 만났다고 한 적 없는) 호세 마리아 에레디아와의 만남을 선사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미끄러지지만 분명 똑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한다.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었을 뿐 아니라 나를 절절히 이해해주는 한 사람을 만났다고 기록한 건 작가로서 세르반도 수사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아레나스는 생애 대부분 쿠바 정권의 억압으로부터 도주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동성애자라서 체포되고 정당한 이유 없이 감옥에 갇혔으나 탈출해 타이어 튜브를 타고 쿠바를 떠나려 했던 사람이다. 다시 투옥되어서도 글쓰기로써 자신의 존엄을 끝끝내 지켜 냈고, 에이즈로 고통 받다가 더 이상 글을 쓰고 투쟁할 수 없는 순간이 오자 스스로 목숨을 내려 놓은 사람이다. 억압에 둘러싸인 삶에서 그는 자신의 안식처를 글쓰기를 통해 자기 손으로 창조했다. 그의 삶은 세르반도 수사의 일생과 많은 부분 겹쳐진다. 『현란한 세상』은 표면적으로 세르반도 수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레나스의 심정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레나스는 『현란한 세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시간을 뚫고 나오는 영원한 존재들의 현재성에 대해 말한다. 역사 속에서 잊혀진 세르반도 수사에게 현재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오직 생존을 위해 내쫓기기만 하던 자신의 삶에도 치열하게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세르반도 수사가 이탈리아에서 멕시코산 용설란을 마주한 순간과 아레나스가 세르반도 수사를 알게 된 순간처럼, 원치 않는 삶에 내몰리는 상황에서도 힘껏 저항해본 이라면 세르반도 수사의 삶 그리고 아레나스의 글을 읽으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