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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거라'는 1차 세계대전에서 의무장교로 참전한 미국인, 프레더릭 헨리의 시선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자신의 나라인 미국과 관련이 없는 전쟁임에도, 다른 나라를 위해 싸우는 프레드릭은 어떠한 사명감이 있어서, 영광과 명예를 얻고 싶어서, 전쟁의 양상이 궁금해서 참전한 것이 아니다. 왜 참전했는지에 대해선 소설에서도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저 소설은 전쟁의 무자비함과 그 상황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동료들로 둘러싸인 프레드릭의 처지를 보여준다. 그 상황 속에서 프레드릭은 자신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전선에서 싸우더라도 그들의 전투 의욕을 고취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끝내지 않는 수뇌부들을 열렬히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는 전쟁 속에서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신에 대한 믿음, 정의의 승리, 쾌락의 도피처, 전쟁에 대한 증오 중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고, 그 어떤 것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모든 것에 어정쩡한 거리를 두었는데, 이는 그의 직책이 의무 장교임을 생각해봤을 때 얼추 이해가 된다. 적군과 총과 화약으로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경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 등을 떠밀리지 않은 것이라 해석된다. 부상병들을 후송하고 치료하는 사람과 참호 속에서 언제 포격이 올 지 몰라 신경을 세우고 있는 사람 사이에 범적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전쟁이 신성, 영광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로 곱게 포장된 추레하고 추악한 현실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를 유리창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는 레지던트처럼. 다만 레지던트는 객관적으로 파악해 학습하고, 때로는 실력에 감탄하기도 하겠지만 그에겐 피와 장기 그리고 의사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보기 거북하다는 감상도. 그는 퇴각하던 도중 명령에 불복종한 병장을 총살했는데, 그 역시 헌병에게 붙잡혀 독일군으로 의심받고 총살당할 뻔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쟁과 군인에 대한 회의,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대한 공허함에 빠졌고, 유일한 가치였던 캐서린의 곁으로 도망친다. 독일군은 자신과 부하들을 보더라도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않았는데, 같은 편끼리 서로 두려움에 휩싸여 총을 쏘고, 같잖은 이유로 죽이고 심지어 초연하고 준엄하게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는 꼴이 그가 보기에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제 임신한 아내 말고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고, 찾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그에겐 하루 빨리 이 전란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스위스로 힘들게 도망갔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듯이 캐서린은 아이를 낳은 후 유명을 달리했고 아이 역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프레드릭은 병원을 뒤로 하고 비를 맞으며 호텔로 걸어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전쟁은 숭고하고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같은 영웅이 탄생할 수 있는 저변을 마련해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는 막연하고 안이한 생각이었고, 어디까지나 이상 속에 존재하는 전쟁에만 해당되었다. 현실의 전쟁은 일순에 생을 마감할 수 있는 피와 비명으로 점철된 고통일 뿐이다. 누구를 위해 싸우는 가? 나라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우리의 죽음으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아마 전쟁과 관련없는 도시에서 피와 쇠와 물의 비린내를 맡지 않고, 며칠동안 계속되는 비명의 아리아를 수사적인 문장으로 읽을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자기자신은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죽음을 선고하는 사람들이 사지를 경험하고 벗어나려는 젊은이들에게 영광과 명예라는 허상에 불과한 가치를 들이밀며 다시금 전장으로 밀어넣는 상황이 전쟁일 것이다.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고통임을 몰라도 되는 사람들이 알고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슬픈 현실이 전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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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집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는데 뭣도 모르고 이것저것 읽곤 했어요. 그때 읽은 <전쟁과 평화>와 <무기여 잘 있거라>의 내용이 머릿 속에서 뒤엉켜서 한권의 내용인줄 알고 열심히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전혀 다른 두 작품이었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추억이네요.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다시 읽으며 추억에 잠겨보았어요. <무기여 잘 읽거라>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반전 소설로 전쟁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며 공허함과 상실이 느껴집니다. 마지막에 혼자 남은 헨리가 안타까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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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작품답게 역시나 문체는 간결하고 소설 속의 모습은 담담하다. 그렇기에 어렵지 않고 술술 빨리 읽힌다. 소설 속 주인공이 전쟁터에서 마주친 고난과 상실이 마치 험난한 세상이라는 전쟁터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헨리가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겪는 모든 과정들이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과정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전쟁은 소설 속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닌 마치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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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다. 툭툭 던지는 묘사들과 짧게 주고받는 대사들 덕에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간결하게 다가온다. 군더더기 없는, 그래서 복잡하지 않은 인상이다. 덕분에 저자가 그려내는 전쟁의 모순적 면면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애절함이 보다 강렬하고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인상이다.
더불어 쉽게 읽힌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전개되는 덕에 다소 무거운 소재의 이야기임에도 쉽게 읽힌다. 대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정보들(가령 인물들의 성격, 전쟁 상황, 전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태도, 인물이 처한 배경과 그 분위기 등) 역시 어렵지 않게,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인상이 남는다. 간결한 묘사로 펼쳐낸 극중 배경들이 생생한 이미지로, 흥미롭게 주고받던 인물 사이의 대화가 생생한 사운드로,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이야기 전개는 속도감 있는 편집 기법으로 기억에 남는 만큼, 마치 ‘무기여 잘 있거라’란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인상이 독서 과정의 끝에 양손 가득히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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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작가 헤밍웨이가 집필한 대표 소설이다. 전쟁 중에 전선에서 마주친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와의 약속으로 쓰인 소설이다. 헤밍웨이는 실제 1차 세계대전 중 적십자 구급차 운전사로 일하던 실제 경험을 각색후 소설로 쓴 것이다. 전쟁중 다리 부상으로 후방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간호원과 사랑에 빠져 전쟁에서 도망치지만 모든것을 잃게 된다는 헤밍웨이의 허무주의 문학의 바탕이 되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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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무기여 잘 있거라는 좋은 책을 출간하기로 대한민국에서 손곱히는 유명한 출판사중 한곳인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의 186번째 작품으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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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이라서 샀습니다~~~~~~~! 아직 안읽어봤지만 읽고있는 책 다 읽으면 바로 읽으려구여~~~ 이번 내용은 어떨지 궁금하네여\~^^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이라서 샀습니다~~~~~~~! 아직 안읽어봤지만 읽고있는 책 다 읽으면 바로 읽으려구여~~~ 이번 내용은 어떨지 궁금하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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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라는 말이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냉혈한의 시선으로 본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 일에는 암묵적인 구분이라는 게 있다. 가령 하늘에서 드래곤이 나타난다면 그건 놀라운 일이고 소리지를 일이고 경악할 만한 일이다. 가령 드래곤이 불길을 뿜으며 날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비둘기가 새똥을 싸면서 날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인생에 아무런 관심도 미련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만약에 드래곤이 불길을 뿜으며 날아다니는 게 비둘기가 새똥을 싸고 날아가는 빈도와 비슷해진다면 어떨까. 물론 건물이 무너지는 걸 보거나 사람이 불에 타서 죽는 걸 보면 놀라고 두렵기도 하겠지만 이전처럼 패닉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계속되면 건물이 무너져도 사람이 불에 타 죽어도 그러려니 하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하드보일드라는 건 그런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놀랄 이유 같은 건 없다는 것. 말하자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 고통이 주변에 산재할 때 인간은 세계와 자신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무력해지는 것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소설의 화자는 자기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감정이라는 게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이 포격을 맞아 죽거나 크게 다쳐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 격앙되거나 충격을 받은 기미는 없다. 심지어 자기가 다쳤을 때도 그렇다. 아프다고 말하고 괴롭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통증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일 뿐 그 통증으로 말미암아 생긴 감정적 변화 혹은 정신적 충격에 대한 설명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은 몸에 관한 것뿐이다. 물론 생각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뇌의 물리적 작용일 뿐 영혼의 고백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실제로 작중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생각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먹고 마시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요컨대 왜 자기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고 대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주인공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문제가 생기고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채무나 인간관계 같은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병이나 상처처럼 육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고통은 항상 질문을 한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평소에 마음이 건강하고 자기 자신과 그 주변에 어느 정도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은 잘 하지 않고 설령 하더라도 문제의 해결과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자기 주변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조차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 별 것 아닌 일에도 끊임없이 묻게 된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하 것일까, 라고. 오프라 윈프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이것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러 왔는가. 그 말대로 고통은 선생이기도 하다. 고통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새로운 길을 찾도록 모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교실에는 언제나 열등생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선생님의 질문에 잘 대답하지 못한다. 어쩌다 대답해도 선생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경우는 별로 없다. 결국 선생님은 질문하기를 멈춘다. 열등생은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점차 자기와 무관한 것이라고 느끼게 되고 그 안에서 어떤 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요컨대 고통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찾아오고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이 일어났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도 아무 해답도 찾을 수 없고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우리는 질문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저 받아들인다. 마치 유괴당한 창녀처럼. 처음에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탈출하려고도 해보지만 나중에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저절로 다리를 벌리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 유린당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고통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린다. 물론 그것은 치유가 아니다. 고통이 정신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감각적인 차원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감각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주먹으로 다리를 내려치면 아프지만 잠시 뒤면 괜찮아지는 것처럼. 말하자면 자신과 자기 주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삶이 고통에 무방비해질 때 사람은 고통을 의미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세계와 나는 단절되고 나는 내 몸 안에 갇힌다. 사람간의 신뢰나 믿음, 사랑 같은 것은 고대의 유물이 되어 먼 곳의 박물관에 전시되고 나는 어쩌다 그것을 구경할 뿐 그것과 나 사이의 어떤 연계성도 찾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그렇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상황, 자기 주변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비일상적인 일들을 마치 일상적인 일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와도 그러려니 한다. 물론 소리가 들리면 조심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삶이 자기를 파괴하려고 할 때 방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육체의 반사작용이다.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 자기 자신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 있어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건설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한 발의 포탄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주인공도 물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몇 번은 나름대로 대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게 대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이렇게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 아닐까. 흔히 하드보일드라고 하면 조폭이나 마피아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마 그들이 일상의 야만을 상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있고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장소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일하거나 작업 현장에서 자재를 짊어지면서 일하는 것과 다르게 그들은 칼과 총을 사용하는 등 폭력을 쓰는 게 일이다. 겉보기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인다. 손가락이 잘리고 피가 튀는 건 그들에겐 일상적이이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커터칼에 손이 조금만 베이기만 해도 호들갑을 떨기 일쑤다. 그렇지만 우리는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가 겹쳐있다는 것을. 실제로 칼이나 총을 휘두르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폭력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그것을 느낀지는 오래되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주먹과 성적으로 알았고, 대학생일 때는 학벌과 취업으로 알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계가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폭력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안다. 마치 전쟁 중의 병사처럼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이 소설을 쓴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는 전쟁에 대해 썼지만 실제로 그가 쓴 것은 전쟁이 아니라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에 HBO에서 만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봤는데 전쟁 장면을 실감나고 사실적으로 재현했다고 해서 호평이 많았다. 그러나 이 소설과 비교해보면 그 드라마가 보여준 리얼리티가 전쟁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것임을 알게 된다. 리얼과 리얼리티는 다르다. 리얼은 존재하는 것이고 리얼리티는 실감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우리가 실감한 것은 전쟁의 사실성이 아니라 전우애 쪽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전쟁이지만 실제로 체감하는 것은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다. 신이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고통만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은 인간에게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을 준다고.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을 받지는 않는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힘을 잃고 점점 작아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세계를 자기 몸처럼 여겼다. 세계는 친숙하고 다정했으며 무엇보다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쳐가고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일 뿐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이 소설의 제목에 들어간 ‘무기’라는 말은 전쟁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삶이 주는 고통에 맞서 싸울 의지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겐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고. 잘 있으라고. 2025년 8월 1일부터 2025년 8월 5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