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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간서치(看書痴)이다. 얼마나 책을 읽고 또 좋아했으면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책에 미친 바보라고 했을까? 조선후기 실학자중 한 사람인 이덕무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했고, 적성현감을 지내기도 했지만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서얼출신인 그에게 한계는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읽었고,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 이덕무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남긴 소품문과 시를 통해서이다. [선귤당농소]와 [이목구심서]는 이덕무가 일상생활 속 신변잡기와 잡감(雜感) 또는 평소 듣고, 보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쓴 책이다. 그의 소품문들을 읽으면서 이덕무의 글쓰기에 빠져든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전에 [문장의 온도]란 책으로 이덕무의 소품문을 소개했던 이 책의 저자는 이번엔 이덕무의 시(詩)를 소개하고 있다. 이덕무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라 생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모든 존재 즉 자연과 사람들에 대한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위로’가 담겨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이덕무가 특유의 감성과 사유를 통해 시에 담아놓은 일상속 삶의 온도를 다시한번 공유하고 싶어 이 책을 내놓게 되었다고 한다.
한시(漢詩)를 읽다보면 압축과 리듬감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한시를 짓는 것은 관두더라도 읽고 해석할 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저 마음뿐이다. 동양고전을 읽거나 한시를 대하면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막상 시작할라치면 아득함에 손을 놓기 일쑤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어김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역자의 해석을 따라가기 바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덕무의 시를 소개하면서 이덕무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통해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그는 그 특징을 절제와 여백, 압축과 생략, 그리고 자연스러운 글쓰기로 나누어 보고 있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 표현하지 않으면서 표현하는 것, 보여주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것,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내는 것, 묘사하지 않으면서 묘사하는 것이 바로 절제와 여백에서 나오고, 천 마디 말을 한마디 말로 압축하는 것은 나머지 구백구십구 마디 말을 생략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덕무는 일상과 주변의 작은 것들을 세심하게 바라보며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 본질과 이치를 꿰뚫어 시적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세심한 시선과 꼼꼼한 관찰을 바탕으로 그에 맞는 언어의 선택과 감각적인 필치가 절제와 여백, 압축과 생략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소품문을 쓸 때와 하등 다르지 않다. 그는 글을 쓸 때마다 자연에 대한 세심하고 꼼꼼한 관찰로 자연과 자신이 일치하는 어떤 지점에서 포착하고 터득한 풍경과 현상을 그만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묘사는 시선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사고의 경계로까지 확장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이덕무의 글쓰기는 놀이삼아 장난삼아 하는 창작이기도 했다. 이덕무가 20세 때 자신의 시를 모아 책으로 엮은 최초의 시집이 [영처시고(?處詩稿)]이다. 영(?)은 어린아이를 처(處)는 처녀를 뜻한다. 장난을 치며 즐기는 것과 같은 어린아이의 천진한 마음, 부끄러워 감추는 것과 같은 처녀의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뜻에서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목적의 노예가 되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그런가하면 이덕무는 마음에 드는 시를 모은 다음 그 시에 대해 논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시를 볼 줄 아는 안목과 식견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고,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이라 이름 붙였다. 좋은 시구를 얻어서 나의 창자를 맑게 씻고 싶다고 해서 붙여진 제목이라고 한다. 이렇게 옛 시를 익히면서도 작법과 시법에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담아 새로운 시를 창작하였기에 당대의 비평가들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기궤첨신(奇詭尖新) 즉, 기이하고 괴이하고 날카롭고 새로운 시라고 평했고, 연암 박지원은 참된 조선의 시라고 일갈하지 않았나 싶다.
저자는 이러한 이덕무의 글쓰기를 ‘아방가르드’와 ‘불온함’으로 설명한다. 아방가르드 정신의 본질은 혁신이고 혁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불온함이기 때문이다. 혁신은 이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실험하고, 도전하고, 모험하고, 개척하는 것이며, 이러한 혁신으로 이루어지는 창조는 낯익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는 불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덕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던 요인을 여덟 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글을 쓰라.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라. 일상 속에서 글을 찾고 일상 속에서 글을 쓰라.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세심하게 보고 적어라. 다른 사람을 흉내내지 말고 자신만의 색깔로 글을 쓰라.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진실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라. 무엇에도 얽매이거나 구속당하지 말고 자유롭고 활달하게 글을 쓰라. 온몸으로, 다시 말해 나의 삶과 나 자신을 온전히 글에 담아 쓰라.’ 아마 우리 모두에게 주는 글쓰기의 비법이 아닐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에 생각이 미친다. 나도 책을 읽는다. 어떤 때는 그저 미친 듯이 읽는다. 아마 마음이 허전한 걸 책을 읽음으로써 위안을 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의 굴곡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치유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독서였다. 그러나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을 다잡을 수는 있었지만, 내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속에 의문으로 남아 있다. 내가 왜 책을 읽는지, 그렇게 책을 읽어서 뭘 하겠다는 건지 의문이 들 때면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덕무의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서 나의 그것들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고, 단지 욕심, 시기, 미움과 같은 마음속의 쓸데없는 생각이나 몸의 게으름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를, 그리고 나의 글쓰기는 이덕무마냥 마이너스 글쓰기 이며 그 글을 읽고서 그림이 그려지는 글쓰기이기를 바래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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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글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글이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볼 때 그림이 떠오르면, 그 그림은 참으로 훌륭한 그림이다. 이러한 까닭에 옛 그림에는 반드시 화재나 발문이 있었다.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써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p.16
고전읽기 리뷰대회를 참가할까 말까 망설이다, 마침 리뷰응모란의 참고도서에 집에 고이 모셔져 있는 문장의 온도가 있길래, 응모하기로 마음먹었다. 포인트를 받기 위한 리뷰를 써야 하니, 써 놓기는 하는데, 리뷰대회를 준비해야 하니, 제대로 쓰긴 힘들 것 같다. 만약, 리뷰대회에서 수상하지 못하면...뭐... 조금 수정해서 다시 올려야겠지만 말이다. 그림을 그르듯 글을 쓰면, 언젠가 내게도 좋은 소식이 오겠지. 좋은 소식은 악조건 속에서, 악조건을 이겨냈을 때 더 기쁜 법이니, 내게 시련이 다가와도 이겨내고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문장의 온도가 고전인 거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문장의 온도는 한문문장들을 글로 풀어놓고 그 밑에 칼럼을 써놓은 방식인데, 조금 어렵긴 하다. 리뷰 잘 쓸 수 있으려나. 그래도 써야지. 내 삶이 보다 더 아름답기를. 보다 더 충실하게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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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내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책을 읽을 때 다가오는 문장의 깊이가 다르다. 사실 요즈음 나는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다. 남편이 포항으로 발령이 나고 그에 적응하느라, 아이들 신학기에 맞게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자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조금은 날카롭게 변해있다. 그래서 인지 나 또한 조용히 앉아 책을 읽을 시간이 많지 않다. 책을 읽을 시간이 되어도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는 책이 나에게 주는 적당한 온도를 찾기 위함이 아닐까?
지금의 나에게 적당한 문장의 온도는 몇 도 일까? 이런 저런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친정식구들에게 위로 받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늘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지금의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내 성격에도 맞지 않으니.. 어쩜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보다는 책이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결정했을지도. 그래서 이 책이 마음에 와 닿았는지 모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나와 100% 일치할 수는 없지만 내 고민의 일부를 이 책이 글로 위로하니까.
최상의 즐거움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고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고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다. 이것은 최상의 즐거움이지만 지극히 드문 일이다. 이런 기회는 일생동안 다 합해도 몇 번에 불과하다. (239) 맞다. 지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나도 마음에 맞는 친구가 되고 싶지만 내 마음과 같은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사람에서 찾지 못하면 글로 찾아야 할 텐데 그런 글을 만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문장에는 아니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마음의 온도는 지독하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바쁘다는 핑계로 보통의 것, 아니 지극히 일상의 온도로만 반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이 좋은 이유는 지금의 내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최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간 이상의 즐거움을 평범하게 누리고 있으니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 얼굴에 은근하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과는 더불어 고상하고 우아한 운치를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가슴속에는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이 없다. (148) 이런 얼굴을 하고 싶지만 나는 아직 멀었다.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 사실 어떤 사람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막연하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무심한 사람이고 세상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부당한 것에 불끈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조금 더 고상하게 그리고 우아한 사람이고 싶지만 쉽지 않다. 내가 가진 그릇이 그렇게 크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양한 문장의 온도와 만났다. 어떤 문장에서는 마음이 활활 타오르고 어떤 문장에서는 잠잠해질 수 있어서 좋았다. 사물을 관찰하고 주의 깊게 보는 태도. 이런 태도를 배우고 싶다. 오늘은 그리고 내일은 어떤 문장의 온도에 내 가슴이 뛸지... 그런 문장을 매일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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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하면 우선은 그의 책 읽기가 떠오른다. 조선후기 실학자중의 한 사람인 이덕무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했고, 적성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서얼출신인 그에게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책을 읽었다. 미친 듯이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평생 읽은
책이 2만권이 넘었고, 스스로 베껴둔 책만 해도 수백 권에
이른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痴) 즉, 책에 미친 바보라 부를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책을 읽는다. 어떤 때는 나 역시 그저 미친 듯이 읽는다. 아마 마음이 허전한걸
책을 읽음으로써 위안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의 굴곡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치유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독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을 다잡을 수는 있었지만, 내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속에 의문으로 남아 있다. 내가 왜 책을 읽는지, 그렇게 책을 읽어서 뭘 하겠다는 건지 의문이
들 때면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러기에 오늘도 책을 읽는 건지 모르겠다.
이 책 [문장의
온도]는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에 나와
있는 소품문들을 발췌하여 역자가 자신의 생각과 함께 엮은 책이다. [이목구심서]는 이덕무가 24살부터 26살까지
3년동안 평소 듣고, 보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쓴 책이고, [선귤당농소]는 그 이전의 글들로 ‘선귤당에서 크게 웃는다’라는 뜻처럼 일상생활 속 신변잡기와 잡감(雜感)에 대해 쓴 글이라고 한다. 이덕무의
이런 소품문들은 ‘글이란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묘사하고 솔직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우치게 해준다’고 역자는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글의 주제가 거대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어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것들을 대해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가 조금만 주변의
것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리고 마음이 느끼는 대로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글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역자는 이덕무의 글들을 예로 들며 우리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가 말하는 글쓰기가 새삼스레 다가온다. 알고 있던 것도 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기에 이 책은
글쓰기의 독본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역자가 책의 제목을 [문장의 온도]라고 한 이유도 알 것 같다. 이덕무의 글들을 읽다 보면 지극히 소소한 것들에 대한 이덕무의 따뜻한 시선과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그랬지
싶다. 아래의 글들은 마음 속에 남는 글들이기에 별도로 정리하는 의미에서 필사 해보았다.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글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글이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16쪽)
‘지봉 이수광은 시나 문장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쳐야
할 곳을 알아야 좋다고 말했다. 그쳐야 할 곳에서 그치지 못한다면 중언부언과 횡설수설에 불과하다.’
(22쪽)
‘언제 어느곳에서 어떻게든지, 도저히
마음을 감출 수 없고, 뜻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나오는 말과 글이 바로 진실한 말이고 참된 글이다.’
(150쪽)
‘글쓰기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가 플러스의 글쓰기라면 다른 하나는 마이너스의 글쓰기다. 플러스의
글쓰기는 지식에 자꾸 지식을 더하고, 감정에 자꾸 감정을 더하고, 생각에
자꾸 생각을 더해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잘 쓰려고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플러스의 글쓰기를
좇게 된다. 마이너스의 글쓰기는 지식에서 다시 지식을 덜어내고, 감정에서
다시 감정을 덜어내고, 생각에서 다시 생각을 덜어 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너스의 글쓰기를 좇게 된다.’
(183쪽)
‘이덕무는 좋은 글은 동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동심은 거짓으로 꾸미거나 억지로 애써 가다듬지 않기 때문이다.’ (199쪽)
‘머리로만 글을 쓰는 사람은 애써 꾸미거나 자꾸 다듬으려 할 것이다. 심장으로만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뜻과 기운을 어떻게 든 새기려고 힘쓸 것이다. 이것은 모두 가식이고 인위다. 그러나 온 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몸 구석구석 가득 쌓여 있는 말과 글을 도저히 참거나 막을 수 없을 때 그 말과 글을 그냥 토하고 뱉아낸다. 이것은 모두 자연이고 천연이다.’ (301쪽)
이덕무는 스스로 자신을 평하기를, 백 가지 가운데 한가지도 잘하는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더 잘하지 못하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둑을 둘 줄 모르고, 소설을 볼 줄 모르며, 여색에 대해 말할 줄 모르고, 담배 피울 줄 모른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가 일상생활에서도 결코 흐트러짐이 없는, 지극히 유교적인
삶을 살았음을 나타내는 말 일 게다. 그가 왜 바둑을 술수와 모략으로 생각했고, 소설이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싫어했던 것은 소설과 바둑 그 자체가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그것들이 가지는 폐해를 꼬집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덕무는 그 시간에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시대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난 그 네 가지를 다하고 있으니 어찌한다, 쩝~
이덕무의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서 나의 그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고, 단지 욕심, 시기, 미움과 같은 마음속의 쓸데없는 생각이나, 몸의 게으름이 생기지 않기를, 그리고 나의 글쓰기는 마이너스 글쓰기 이며 그 글을 읽고서 그림이 그려지는 글쓰기 이기를 바래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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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두 번 , 세 번 읽는데 익숙하지 않다. 근데 그것이 바뀐다. 하기사 편견과 고정관념은 바뀌면 또 다른 멋진 풍경을 경험하게 된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너무 좋아서 산다. 다시 한번더 읽는다. 이덕무의 소품집 『이목구심서&선귤당농소』를 잘 엮은 책 <문장의 온도>가 그렇다.
책놀이 4번째 독서모임을 가졌다. 함께 읽어 나눈 책은 <문장의 온도>이다. 내가 추천했는데, 역시나 독서 취향이 모두 제각각임에도 좋았다는 평들이 많았다. 오늘 모임은 5명이 모였다. 말할 기회들이 더 많았고 오히려 생각 나눔이 풍성했다.
이덕무의 글을 접함에 있어서 편견없이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데 공감했다. 그의 글이 진귀한것은 그 바탕에 역시나 책 읽기가 있었다. 53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50여년동안 2만여권의 책을 읽었던 '간서치' 책만 읽는 바보였음을 인증. 하루에 한 권씩 읽는다치더라도 1년에 365권, 10년이면 3650권, 50년이면 거의 18000권이상. 그가 박물학자라 칭함을 받는 이유도 소소한 삶을 그냥 허투루 넘기지 않는 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의 눈에 미물이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경직된 사고가 아닌 유연한 사고와 함께 호기심이 매 순간 그를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고 또 보고, 모르면 찾고 읽고 하는데 열린 마음을 가졌다. 이 책을 엮은 저자는, 일상 가까이 존재하는 지극히 미미하고 하찮은 사물들을 세밀히 관찰하면서 관점의 전환과 발상의 변화를 통해 우주와 자연과 인간 세계의 원리와 이치를 깨치려고 했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의 아름다움. (중략) 우열과 존귀와 시비의 이분법은 전복되고 해체된다.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통합적인 사고를 가진 18세기 지식인의 모습 속에서 현재 우리 아이들의 현실을 많이 이야기했다. 다양하게 보고 경험함이 중요한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키워지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암울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지식 획득에만 무작정 쫒아다니고, 사귐과 교감에 어설픈 아이들, 이대로 괜찮을까?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 이목구심서의 철학이라 하는데 아이들이 자연스레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제도, 교육....)들이 턱없이 부족함에 그저 허허롭다.
자칫 지루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을 수 있는 책인데, 함께 읽어 서로 대화로 공유할 수 있음에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책 한 권이 주는 보람과 행복은 이덕무의 마음과 똑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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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빛나는 것들은 언제나 일상 속에 있다. -문장의 온도 - 시는 계절을 닮는다. 사람의 감성은 계절의 기운을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의 온도-
가장 가까운 곳에 마음이 머물고 시선이 간다. 익숙한 곳에서 생경한 다름을 발견한다. 가끔 생각한다. 나에게서 나오는 말이 詩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가 주는 위로를 알기 때문이다.
길게 써도 시가 될 수 있고, 짧게 써도 시가 될 수 있음을 요즘의 시들을 읽으며 느낀다. 일부러 오랫동안 곱씹어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시가 들어온다. 지극히 일상적이며 평범하고 보통의 시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의 정서와 그 시를 읽는 사람의 정서가 통해서 이해되어진다. 잘 쓰여진 시는 2,3번의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않고도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가 아닐까!
18세기 실학자이며 시인, 문장가이며 책만 읽는 바보(간서치)라 불리는 이덕무의 문장에 이어 시를 들여다보았다. 물론 책을 엮은 분의 해석을 통해 조선 최초 모더니스트 이덕무란 인물을 더 잘 알게 된다. 책 <시의 온도>이다. 시의 온도가 있다면 삶의 깊이와 넓이가 다를 것 같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를것이고. 이덕무의 글은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고 좋았다. 웅숭깊은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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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계절을 닮는다' 말이 이해된다. 편지를 쓸 때도, 카톡에 쪽지를 보낼 때도 늘 계절과 날씨에 대한 인사와 안부를 묻는다. 어색함을 없애고, 부드럽게 대화하기에 좋다. 봄여름가을겨울 속에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 마음의 상태도 계절, 날씨와 함께 오롯이 전해진다. 자연은 참 좋은 글감이 된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자연스레 글이 쓰여진다.
청나라 시인 원매는 창작의 즐거움이 '자득'에 있다고 했다. 스스로 힘으로 깨달아 터득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써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시 쓰기의 이치'가 많이 공감된다. "애써 억지로 시를 지으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자칫 언어의 감옥에 구속당하기 쉽다. 차라리 감정이 분출하고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시를 쓰지 말라. 자득한 것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묵히고 기다리고 또 묵히고 기다려라. 그렇게 하면 비록 한 달에 겨우 한 두 편의 시 밖에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가장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시를 자유롭게 지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에게 시선을 주고, 어디에 얽매이지않는 삶을 살아내고 청빈하고 소박한 삶을 고스란히 살아내어 적어내려가는 시가 어찌 뭉클하며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시집을 무던히도 많이 읽어냈던 요즘이다. 시가 가만히 가만히 내게로 온다. 의식적으로 읽어냈던 시가 말을 걸어온다. 시인으로 등단한지 8,9년이 되었는데 시집 한 권 없고 계속 시를 써 왔던 것도 아니다. 그동안 뭘 했을까? 봄여름가을겨울도 많이 바뀌었는데.... 잠깐 내가 시를 썼던 사람인 것을 잊어버렸나보다. <시의 온도>를 읽다보니 내가 시인이었구나! 어렵게만 생각했던 시, 멀찌감치 거리를 두었던 시를 내가 썼던 사람이었구나! 이덕무의 삶의 철학이 베어든 시 쓰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나도 나름의 정리가 필요한 사람인지라 마음잡기 부터 해야겠다. 책은 이렇듯 한 개인의 삶에 크든 작든 동기부여를 해준다. 잊혀졌던 잃어버렸던 어떤 기억의 순간을 떠올리게 해준다. 소홀했던 나의 글쓰기를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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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시간에 조선 후기 실학자들을 거론할 때 한번쯤 들어본 이름, 이덕무. 하지만 북학의의 박제가나 목민심서의 정약용 정도만큼의 비중으로 다뤄진 기억이 없어서인지 이덕무가 이렇게 단아하고 깊이 있는 글을 많이 썼는지 미처 몰랐다. 실학파하면 떠오르는 말이 '실용적', '실사구시'......이런 것들인데 그의 문장에는 오히려 노자나 장자와 같은 여유로움과 자연주의적 느낌이 많이 녹아있다. 자연과 사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발전하여 실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현실을 잠시 잊고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문장이 하나 있는데 '아침노을은 진사처럼 붉고, 저녁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 였다. 언젠가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의 다른 점에 대해 딱히 묘사할 방법이 없어 답답해 한 적이 있는데 정말 감탄스러운 관찰력과 표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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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로 마주하는 글에 감동하는 것은 글의 화려함과 세련됨이 아니다. 글이 소박하지만 내 마음에 스며들어오기 때문이다. 스며듦으로 내 마음이 글 따라 화안해지고 빛 난다. 내 마음에 빛살무늬처럼 아름다운 글들이 들어왔다. 이 봄에 소소하지만 따뜻한 글빛 한 줌 만났다^^ 18세기 후반 실용주의 실학의 한 갈래인 북학파 이덕무가 쓴 글들을 고전연구가인 한정주 작가가 엮은 책, <문장의 온도>이다. 요즘 말과 문장, 언어에 있어서 품격과 온도가 인기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과 언어를 얼마나 허투루 사용해왔는지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책에는 이덕무의 소품문 『이목구심서』『선귤당농소』에서 발췌한 글들이 담겨져있고, 고전연구가인 저자의 생각들이 쓰여져있다. 사실 참고의 역할을 하는 저자의 짧지만 굵직한 생각들에 마음이 닿았다. 달리 고전연구가가 아니었다. 이덕무와 동시대의 길을 걸어갔던 북학파 선후배였던, 박지원(열하일기)과 박제가(북학의)의 책 속에 나오는 글들과 이수광(지봉유설) 이익(성호사설) 방대한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까지도 골고루 발췌해 이덕무의 글과 문장에 꽃이 피게끔 했다. 이덕문의 소품문『이목구심서』『선귤당농소』제목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듣고 보고 말하고 마음에 담은 글/ 선귤당에서 한바탕 크게 웃다..... 일상속에서 신변잡기와 잡감(잡다한 감정?)에 대해 쓴 글이란 뜻이다. 소품문이란 주변의 지극히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물을 관찰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봍잡아 짧고 갈견한 글로 옮기는 작업으로 관물의 철학이라고도 한다.
우리 말(문장)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쓰이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덕무의 소품문에서 느꼈다.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다양했고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숨쉬는 자연과 생물, 생기 없는 사물에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이세상 어떤 것 하나 소중하지않는 가치가 없음을 이덕무의 삶과 그가 즐기며 아껴쓰는 글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에서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짐은 그가 당대의 선비들과 사고하는게 달랐음을 알 수 있었고, 그는 진정 말(문장)을 가지고 놀았던 선비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가 살던 때는 이로운 것, 유용한 것,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만한 때였다. 그랬기에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꽃 피고, 기술의 진보와 생활의 환경이 조금이나마 낫아졌지 않았을까? 관물(觀物) 즉 사물을 보는 방법의 철학적 전환은 사물을 관찰할 때 본질보다 개성을 파악하고 포착하는 18세기 조선의 신사조(新思潮, 새로운 사상)가 아닐까? 특별하지 않은것에서 특별한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일상의 재발견이다. 다르게 보기, 그윽히 보기, 한참동안 보기.... 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철학자가 되나보다. 관물이 철학으로 보면 어떤 사물도 완벽한 것은 없다.
잡문이라 하기엔 너무 정갈했다. 어떤 글 하나 쓸모없는게 없다. 더없이 철학적이면서 인간적이고 심오하고 따뜻했다. 문장 하나 하나에 내 마음이 쉬어간다. 고매한 선비이면서 공감능력을 지녔고, 그 본성이 타고났음을 알 수 있다. 연습되어질 수 없는게 본성이다. 주변의 사소하고 하찮은 사물도 이덕무를 만나서 재발견되어지고 재해석되었다. 그 눈이 보배이다.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사소한 삶과 미물들과 사물들을 그냥 허투루 보지 않는 안목 때문이다. 흔한 것이 다른 시선을 가진 자에겐 특별함이 된다.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박물지』는 중국의 위진 남북조시대에 장화라는 사람이 편찬한 책이다. 세상에 온갖 것들에 대한 당시 지식인의 왕성한 지식욕과 탐구욕에 대한 백과사전적 기록이다. 고대에서부터 18세기 당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삼국의 지식 정보를 한 곳에 모아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 이덕무였다. 그의 독서와 지적 편력이 얼마나 거대하고 방대했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이덕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 최고의 박물학자였다. (p118,119)
책 후반에는 김덕무의 책 욕심과 독서에 대한 담론들에 대해 얘기한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굶주리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고, 마음은 화평하고 기쁘며 몸은 건강하고 편안하고, 게다가 등불을 밝아 창이 환하고 책이 보기 좋게 정돈도어 있고 책상과 자리가 정결하면 독서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 낼 재간이 없다' 고 했다. 중국 위나라 사람 동우는「삼여지설」에서 '밤'과 '비 오는 날'과 '겨울철' 이 세 가지 여분의 시간이야말로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때라 말했다. 이덕무의 마음과 주변이 정갈할 때나 중국 위나라 동우의 시간과 상황이 딱 떨어졌을 때나 모두 내 경우에 딱 들어맞다. 그럴 때 저절로 책 읽을 마음이 생기니깐^^ 한걸찬 장부가 이덕무의 귀에 대고 탐하는 마음, 원망하는 태도, 시기하는 버릇, 자만심, 조금한 성격, 게으름, 명예를 얻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된다고 할 때, 이덕무는 '감히 말씀하신 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라고모두 대답했다. 그러나 '서책에 대한 기호를 버려야 하오' 라고 장부가 말했을 때 이덕무는 황당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서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나를 귀머거리나 장님으로 만들 작정이십니까?' 답하고 장부는 웃으며 '당신을 시험해 본 것일 뿐이오'라고 말했다. 시험할 것도 따로 있지. 어찌 이덕무에게 감히 책 욕심을 버리라고 하다니....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받아들인 이덕무의 책 사랑에 대한 일화가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이 일화에 대해 독서가 한 사람의 인생과 성격을 만든다면, 어떻게 그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말한다. 당연하지요^^
별을 보고 '달 가루'라고 말하는 아이,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루쉰(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혁명가)의 말..... 참신하고 예쁜 말들이다. 속담이라도 의미가 아로새겨지는 문장들...... 그것을 긁적거려 메모해두기엔 어떤 문장을 취하고 버려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데..... <문장의 온도>를 읽을 때, 솔직한 내 마음이다. 그래서 책을 사야겠기에 카트에 담아놨다. 도서관에서 어제 빌려온 책인데, 도서관 직원의 착오로 이 책이 관외대출용 책이란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오늘 6시 안에 도서관에 갖다달라고 하네. 어젯 밤, 오늘 낮까지 부지런히 읽고 정리했는데.,.... 자꾸 문장들이 눈에 아른거리고 밟힌다. 마음이 바쁘고,....^^ 아쉽지만, 반납하러 가야겠다. 구매해 내 것으로 몽땅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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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을 만난다. 편의에 안주하는 사람은 큰 고비를 만나면 어찌할 줄 모른다. 자신이 해오던 대로만 하는 사람은 큰 기회가 와도 붙들지 못한다. 임시방편으로 그때그때를 넘기는 사람은 큰 근심거리를 만나게 마련이다. 남에게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큰 적수를 만나게 된다. 일의 형세가 그렇다. 이목구심서2 크레마 사운드 구입기념으로 구매한 ebook이다. 좋은 문장들을 오래 오래 두고 보고싶어서였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 사물 벌레 사람 감정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글로 표현해낸 이덕무의 문장들. 계절이 바뀔 때 희노애락의 순간 다시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추가> 메마른 삶의 온도를 바꾸는 보통의 문장들 좋은 문장을 만나면 체온이 변한다. 따뜻해지거나 뜨거워지거나 시원해지거나 차가워진다. 왜 좋은 글인지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 달라진 온도를 느끼며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좋은 문장을 알아차린다. 이덕무는 이런 좋은 문장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관찰해 그 안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이 책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들어가는 말에서 글쓰기가 두렵다면 소품문의 글쓰기부터 시작해 보라. 일상의 사소하고 잡다한 것부터 무엇이든 형식 격식 상관없이 한 줄 열 줄 백 줄이든 써보라고 한다. 쓰는 곳도 휴대폰이든 어디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써보라고 .단 거짓으로 꾸미거나 애써 다듬지 말 것. 그럴 수록 글쓰는 것이 두려워질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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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덕무의 문집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의 글들 중에 발췌하여, 고전연구가 한정주가 해석하고 글속에 녹아있는 의미의 설명까지 곁들인 책이다.
책 감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처음 언뜻,
책을 읽어 갈수록
발췌된 글은 모두 짧은 단문으로, 우리 일상에 있으나 무심코 지나치고 마는 사물, 동물, 식물, 사람으로부터 습관, 감정(기쁨, 번뇌), 생각, 독서, 기이한 일들, 그리고 자신의 대한 성찰에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적은 것이다.
글들은 단문이지만 함축적이고,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의 철학과 삶의 지향하는 가치, 교훈, 성찰 등 많은 것이 넘치도록 담겨있다. 책은 크게 6가지 주제로
먼저, 온갖 사물과, 식물, 그리고 말똥구리, 쥐, 족제비, 벼룩, 이, 회충, 벌, 말 등 등장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하나 놀라운 것이,
이덕무의 꼼꼼함은 ‘서로 닮은 사물들(p.98)’ 이야기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마치 대나무 대롱에 콩을 담아 흔드는 소리와 비슷하다. 등불은 흡사 파리의 눈과 같다...
어찌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볼 수 있으며, 이리도 사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탐욕, 원망, 시기, 자만, 게으름, 명예 등은 기꺼이 다 버릴수 있으나,
또한 이덕무의 ‘좋은 글’에 대한 주관이 일관되게 흐른다.
“타인의 글을 답습하거나 모방하기만 한 글은 군더더기 일 뿐이다.
또한 책읽기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해서도 ‘독서의 등급’을 나누어
조선후기 당대 최고의 실학자 중 한명인 그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언급하는 것은 마치 입안에 피를 머금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뿜는것과 같아서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히는 법이다.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며 타인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내가 위안을 얻는 대목이다.
그냥 눈으로 읽고 지나치다 보면 넘어갈 수도 있는데, 저자의 해석에 이해안가는, 아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몇가지 있어 아쉽다.
그 중 하나만 예를 들면, 이를, ‘역자’는 최상의 즐거움은 드물기에 그것만 좇지 말라 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이 부분은 다른 독자들의 판단을 기다려 본다.
책을 읽어 갈수록, 글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생활의 곤궁함과 빈곤함 때문이다.
책 내용의 대부분은 이덕무의 20대 중반 시절에 씌여진 기록이다. 추운 겨울 초가집안에서 입김은 성에가 되고, 이불은 와삭 소리가 날 지경이다. 책으로 이불을 덮고 바람을 막으며 동사를 면기도 하고(p.257).
심화된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잘먹고 잘살기 위해 노력한다.
가난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며 초탈한 그의 나이 불과 서른이 채 되지 않았다.
이덕무는
이 책 내용의 문장들이 주는 온기는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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