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것이 실재(實在)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기억에 의존해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과 경험을 정리해간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이 모든 일들을 헷갈려 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증명해 줄 것인가. <나를 훔쳐라="">의 인물들은 바로 이런 상황 앞에 놓인 인간들이다. 주인공들은 지금껏 지내왔던 곳과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버리는 것 혹은 살아오면서 믿어왔던 사실들이 그 믿음과는 전혀 달랐음을 갑자기 알게 되는 것을 통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진다. 이런 이야기를 위해 작가 박성원은 컴퓨터로 사진을 조작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 물건의 일부분이 보이지 않게 되는 중심성 맥락 망막염에 걸린 남자, 자신이 어제 죽인 벌레들의 세상으로 가게 된 사내 등을 등장시킨다. 소시증 맥락 망막염에 걸린 남자는 자신의 성기가 쪼그라든 것처럼 보이거나 아예 없어져 보이는 것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갓 차려진 듯한 밥상 위의 숟가락에는 총살 당하는 남자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다. 황당하다고 말할 것인가? 물론 황당하다. 그러나 천방지축 좌충우돌 식의 황당은 아니다. 작가 박성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소설집의 첫 번째에 있는 '댈러웨이의 창'에서나 마지막에 있는 '왈가닥 류씨'에서나 지극히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그런 의미에서인지 박성원은 '여러분'이라고 독자를 불러 놓고는 바로 곁에서 말을 걸고 있는 듯한 어투를 자주 선보인다.). <나를 훔쳐라="">는 야생 육식 원숭이의 동물성으로 인간을 은유했던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 자살을 권고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내가 등장했던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무한한 상상력과 순수문학으로서 지녀야 할 사명을 두루 갖춘 소설들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또한 '새근발딱거리다', '야지랑스런', '뙤록', '씀벅', '가량가량히', '소들소들', '툽툽한', '씰긋거리며', '뜸지근하게', '꿀적거리다', '폭짝폭짝' 등의 참신한 표현은 멋부리기식의 식상한 문장에 흥미를 잃은 독자들의 눈을 밝혀준다. 의미있고(읽으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무엇인가가 있고) 게다가 재미있고 세련되기까지 한 소설.나는>목화밭>나를>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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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한 이유는 단순했다. 수능특강 언어영역 문제집에 '댈러웨이의 창'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는데 전문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구해 읽었다. 문제집에 실려 있는 작품 중, 내가 안 읽었는데 작품 전문이 실린 책이 절판되었다고 뜨면 참 난감해진다.(그럴 때 내 마음은-어쩌라고, 어떻게 수업하라고? 모르면서 아는 척 하라고? 에이!!! 하는 심정이 된다.) 다행히도 이 책은 2000년에 출간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살아 남아 있고, 아직 이 작가의 작품을 한 편도 안 읽은 사람으로서 좀 미안함도 느꼈다가 읽으면서 주목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제집이라고 하는 계기가 없었다면 내가 이 작가를 끝내 몰랐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용으로 봐서는 그동안 내가 즐겨 봐 왔던 작품 세계가 아니어서 다른 경로로 읽었더라면 마음에 두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의외로 꽂힌 작품집이라고 해야겠다. 최근에 알게 된 우리 작가들의 SF 영역에 이끌려 들어간 것도 한몫 했고.
유쾌하거나 단순하게 읽히는 글이 아니다. 좀 기괴하다고 할 수 있다. 뭘 이런 상상을? 뜬금없다 싶을 수도 있는데, 해 볼 법도 한 상상의 세계를 그려 내고 있다. 재미있다고 하기보다는 좀 섬뜩하고 좀 혼란스럽다. 이게 뭐지? 내가 보는 게 맞나? 내가 알고 있던 게 진실이었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기는 한 세상인가? 하다못해 나는 나 자신에게 진실하기는 한가? 등등
2000년이면 지금으로부터 17년이나 이전의 날들이었을 텐데, 작가가 작품을 쓰기로는 그때보다 더 이전이었을 텐데, 그때도 소설 속 세상과 같았다면,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면, 세상 참 바뀌지 않는 거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살기에 무서운 곳이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어떻게 여전히 속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다, 이제는 속으면서도 속은 줄 모를 정도로 더 철저해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악은, 불의는 선이나 정의보다 더 빨리 더 강하게 더 무섭게 자랄 수 있는 속성을 가진 건 아닐까?
편한 독서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고개를 돌리고 싶지는 않다. 작가의 최근 작품을 좀더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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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소설은 언제나 독자들과 버성기게 마련이다. 때로 다소 선병질적이기까지 한 작가의 의식이 소설의 전면에 도드라지기 때문에 작가와 독자 사이의 톱밥같은 긴장을 적당히 즐기지 못하는 독자로서는 난해하다든가 낯설고 지루하다는 평을 내놓게 된다. 불평(不平)이지만 불평(不評)이다.
그렇게 익숙한 관습적 불평을 돌파하는 도발의 힘으로 겨누고 씌여진 소설이 독자들을 서늘하게 하고 유쾌하게 한다. <나를 훔쳐라="">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을까. 독자편의 어림짐작 또한 낭창낭창하다.
일곱편의 단편이 함께 묶인 작품집에서 선수처럼 앞으로 치고 나온 작품이 '댈러웨이의 창'이다. 이 소설은 이를테면 고약한 인식론처럼 끊임없이 몸을 뒤집는 소설이거니와 한 마장 길이의 단편이 소설을 전복하고 진실을 전복하고 전복을 전복하며 다시 전복된 전복을 전복한다.
화자의 이층으로 새로 이사온 젊은 사내가 숭앙하는 '댈러웨이'라는 사진작가의 사진미학, '감추며 드러내기'라고 할 만한 그 미학 정신이 사실은 일련의 조작극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조작의 위선일 수도, 거짓의 진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거짓과 진실이 환상(環狀)으로 결합된 얼개는 그러므로 실재(reality)를 향한 갈구로도, 실재 포착의 열망을 방기한 니힐(nihil)로도 읽힌다.
'중심성맥락망막염'과 '이상한 가역 반응'은 '댈러웨이의 창'의 장,단조 변주에 해당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것이 몸을 뒤섞으며 부풀어오르고 그 사이에서 인물들이 겪어내야 하는 멀미가 넘쳐난다.
"나는 모든 게 헷갈렸다. 닥터 H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H라는 여인과 H라는 사내가 원래 없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애당초 나라는 인간이 없었는지......"(98∼99면)
앞의 세 소설들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그 멀미증과 대결한다면 뒤편의 소설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산해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확산의 사북자리에 놓인 작품이 '실마리'이다. 카프카의 <변신>의 번안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인간은 벌레다'라는 선언 앞에서 과거의 기억에 머리를 들이밀며 정체성을 확인받으려는 간절하고 가망없는 시도를 통해 환멸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보이고 있다.
"그렇군...... 당신은...... 당신들은...... 벌레들이야......"
"우리가 벌레면 자네는 뭔가? 자네는 그 사실을 아나?(중략) 너나 나나 모두 벌레지. 아는 건 많아서 지가 벌레라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어해요." (138면)
주인공의 애달픈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강박증과 변태적 성욕의 흔적들 뿐이고 정체성의 추구는 자신의 부도덕만을 드러낸다.
이같은 주인공의 환멸이 회색빛으로 굳어져가는 모습이 '런어웨이 프로세스'에 담겨있다. "그러니 친구여, 곧 전시될 나를 사주게나. 혹시 살 마음이 없거든 차라리 나를 훔쳐주게나"(168면)라는 전언은 고도로 자본화된 사회에서 자본의 질서와 생물학적 기제(Runaway process)로의 환원에 함몰되지 않는 길은 환각으로의 탈출밖에 없음을 우회적으로 토로한다.
중편 길이에 가까운 '호라지좆'은 함께 묶인 다른 작품들과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문제적 거리'라고 할 만하다. '자본과 의무의 나라' 하렘(Harem)의 지골로(여자에 기대어 먹고 사는 남자)인 호라지좆이 개선충(疥癬蟲)과의 사랑을 꿈꾸는 모습이 영화적 기법으로 그려진다. 고문의 기억이 갈마들며 독자(혹은 관객)의 의식을 깨우는 동안 눈 앞에는 아프리카의 기억이 방부처리된 동물원, 철저하게 단절된 공간 속의 죽음, 중앙도서관에서의 방화(放火) 장면들이 흘러간다.
작가의 영화 경력이 스며있는 이 작품은 논리적 연결고리는 느슨하되 본래적 의미에서의 실험소설이다. 불수의근처럼 퇴화한 자동적 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인 독자(혹은 관객)라면, 모든 의무의 볼모가 되어버린 독자라면, "이 자식, 이거 영 개수작 아냐?(235면)라고 항의하더라도 천연덕스럽게 기뻐하겠다는 작가의 언구럭스런 능청에 독자로서는 정신을 뒤채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경험'인 것이다.
책 뒤편의 해설에서 성민엽이 지적했듯이 소설가 박성원의 위치는 손에 왈가닥 인형을 들고 복화술을 구사하는 류씨의 그것과 겹쳐진다. 거짓이 넘치는 세상이고 이 소설 또한 한 겹의 거짓을 보탤 뿐이지만 적어도 그 가운데서 겪는 심한 멀미야말로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겠는가. [인상깊은구절] 이 자식, 이거 영 개수작 아냐? 라고 항의하신다면, 그는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와 단절되어 있음을 좋거나 싫거나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그로서 보면 성공을 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격렬한 항의가 이어진다면 약간은 아쉽네요. 왜냐하면 단절을 보이고 싶은 그의 마음이 또 다시 여러분과 단절되었으니까 말입니다.변신>나를> |
| 작가 박성원에 대해서는 이번 '나를 훔쳐라'라는 작품집을 읽기 전에는 부끄럽게도 잘 알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바로, 올해의 가장 화제가 되었던(혹은 좋은...잘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죄송^^)소설 1위에 박성원의 "댈러웨이의 창"이라는 소설이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 다음, 다음....순위에는 꽤 잘 알려진 모모작가들의 소설이 주욱, 언급되었는데, 정작 1위의 소설을 쓴 박성원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큰맘먹고 작품집을 샀다. 어땠냐구? 역시나~ 그는 대단했다, 였다. 이렇게 좋은 소설가가 아직도, 이땅에 살고 있다니. 그의 언어선택은 거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교한 세공을 가미한, 장인의 그것이 느껴졌고, 구성 또한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다. 왜 아직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는 소설가가 아직도 이상문학상을 받지 못했는지, 아니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다. 자아, 작품집을 읽어보시라. 그대들, 바로 이 책이었다, 생각하며, 동시에 무릎을 탁, 치게 될 것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