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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한 후배가 카카오 스토리에 클로버 사진을 올려놓았는데 세잎 클로버만 있다고 써놓은 걸 보았었다. 댓글에 남기기를 세잎클로버는 행복이라며, 행운을 뜻하는 네잎보다 더 좋은거라고 했더니 즐거워 했었다. 우리가 하는 일에 항상 행운이 따르길 바라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너무 흔한 것 같은 세잎 클로버, 행복도 이처럼 너무 흔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늘 하는 말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내 마음을 비우는 것에 따라서,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는 것 같다.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있는 결국은 내가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잘생긴 부처님'을 네 글자로 줄이면 '부처 핸섬'이라고 한단다. 그래서 '부처 핸섬'인 원빈 스님의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세지라는 부제로 우리에게 행복을 말해주는 책을 쓰셨다. 너무 흔하디 흔한 말이 '희망'이란 말과 '행복'이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장 간절한 순간에 생각나는 것, 뒤돌아보면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느끼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한다.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도 나를 조금만 바꾸어도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을텐데 우리는 어쩌면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는것 같다.
법명이 '원빈'으로 영화배우 원빈과 동명으로 또한 미남형의 얼굴을 가진 스님은 국군장병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국군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페이스북에 열심히 글을 올리셔서 그 인연으로 이 책을 내셨다 한다. 가져도 더 가지려는 욕심이 많은 우리 일반인들과 종교에 귀의해 청빈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스님들이 말씀하시는 글들은 왠지 더 마음에 와 닿는걸 느낀다. 비운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시니 그런 것 같다. 평소에 하고 있던 생각들도 막상 책속에서 글로 만나면 감동하고 깊은 공감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때로는 짧은 글로, 때로는 약간 긴 글로 말씀하신 것들 중에서 몇가지 기억해 두어야 할 문장들을 여기에 옮겨 보고자 한다.
스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 특히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잘해주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자주 만나서 무심하게 대할수도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베풀고 친절하고, 먼저 웃고, 한마디 다정한 인사를 건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매일이 즐거울수만은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소중한 시간들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가를 말씀하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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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TV시청을 잘 하지 않는데, 요즘엔 드라마도 아주 가끔씩 챙겨보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예능 프로그램이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를 박장대소를 할 수 있게 만드는 프로그램을 특별히 사랑한다. 마음껏 웃으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 많이 웃고 나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에 나는 다시보기로 '무한도전'도 챙겨보고, '아빠 어디가' 같은 프로그램은 본방사수를 하고 있을 정도다. 어린 아이들을 보며 같이 동심에 젖어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처럼 웃는 일이 행복이 가까이 오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거울을 보면 웃는 연습을 하듯, 우리는 같이 만나면 즐거운 사람들, 웃음이 나는 사람과 함께 하며,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 활짝 웃어준다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세상에 되는 일이 하나 없어' 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되지 않을때, 나 보다는 타인에게 책임을 씌우는 경우가 있다. 누구 때문에 그랬어. 이런 말들로 자신을 위로하려 하고, 핑계를 대는데, 스님은 '나를 바꾸면 세상의 변화가 따라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먼저 변하고, 나를 바꾸면 되지 않을 일도 될 것이고,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내 삶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이런 말씀들을 새겨들으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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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투르니에는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느끼는 차이는 마음의 창窓이 다름이다. 유리창도 닦아야 빛을 발하고 깨끗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창 또한 그렇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의미와 자연에서 전해주는 것들에서 감동 받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삶에서 감동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서 늘 부정적인 것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긍정할 줄 모른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
시이불견 청이불문 (視而不見 聽而不聞)-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가 않고, 맛을 봐도 그 맛을 모른다
이 책 《같은 하루 다른 행복》도 같은 하루를 살지만, 다른 하루를 사는 우리네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이다. 누구에게든 아픔이 있듯이 원빈 스님이 겪었던 아픔과 고통의 시간들을 진솔하게 들려주며 인생의 한고비를 넘을 때마다 깨달았던 희망을 들려주고 있다. 희망이라......차동엽 신부님의 희망 바통을 이어 이젠 원빈 스님이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부터 시작하여 최근 읽은 차동엽 신부님의 <희망의 귀환>에 이어서 읽게 된 원빈 스님의 <같은 하루 다른 행복>까지.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보며 나 혼자 미소짓게 된다. 서로 같지만 다른 모습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혜민스님은 고요한 아침의 기상처럼 산뜻하며 타인과 원활한 소통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고 차동엽 신부님의 희망은 오후의 햇살처럼 강렬하며 맹목적이라는 점이 , 원빈 스님의 희망은 불타는 저녁노을처럼 우렁차지만 고독감이 느껴지며 마음의 치유라는 힐링의 희망이라는 점이 같지만 다르게 느껴진다.
영화배우 원빈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는다는 원빈 스님의 법명은 해나 달처럼 둥글게 빛나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책은 원빈스님이 트윗이나 지인들에게 보낸 지혜의 알곡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책이다.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찾아간 절에서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출가하게 된 이야기들과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힘들었던 일들을 통해 깨달았던 성찰이라는 여과기를 거친후 깊이를 더해 피어난 힐링의 글귀들이다..
무엇이 되는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을 요즘 실감하는 중이다. 가슴 아픈 일들이 있다가도 그것이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픈 일이 때론 기쁜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을 번복하다보니 이제 내 나이에는 사실 삶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일희일비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저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살아가면서 한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자아'라는 마음의 조각을 이쁘게 다듬고 꾸미지 않으면, 인생그림이 암울해진다는 것이고 '자아'라는 조각을 이쁘게 다듬은 인생그림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변화무쌍하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음에도 '자신'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 없다. 원빈 스님은 《같은 하루 다른 행복》에서 '나를 사랑하는 꼭 그만큼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량' 이라고 하며 '참나'를 아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한다. 참된 힐링은 상처를 곪아 터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에 메스를 들이대고 고름을 빼내는 것이다. 원빈 스님의 마음의 창으로 대신 들여다보게 된 '참나' 찾기의 시간으로 덩달아 내 마음의 창도 깨끗이 닦여진 기분이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이 마음에 비스듬히 스며들어 고요함을 선사해주며 삶을 응시하게 하는 마음수련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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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모두가 다 행복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행복함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기준과 상태에 대한 정의는 제각기 다를 것이다. 사람이란 욕망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취하기 위하여 행동하고, 그것이 만족되었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원하는 바가 현실 세계에서 성취 가능한 것인지 여부일 게다. 정신 없이 질주하는 현 시대에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나도 크다. 현실은 팍팍해져만 가고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기준은 높아져만 간다. 물질적인 측면에 초점 맞춰져 질주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기준에 물들어 버린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 너도나도 힘들다고 한탄을 뱉어내는 시대에 행복 찾기는 가능한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원빈 스님은 행복을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행복은 배워야 하는 것이며 마음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마음의 치유와 평정에 관련된 내용들만으로는 일시적인 위안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더 이상 이런 책을 읽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행복이나 힐링에 대한 좋은 내용도 내 마음이 어느 정도 평정 상태에 있어야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현재 처해진 상황으로 짜증스럽고 힘들고 괴로운데 책의 내용이 가슴에 와 닿을 리가 없지 않나. 스님의 말씀에 빗대어 생각한다면 내 마음 근육이 너무 약한 것일 게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사실 그 방법은 모두가 알고 있다. 먹고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뒷전으로 밀어두었을 뿐, 불행이나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처럼 행복도 그곳에서 얻어낼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가지도록 노력하고, 고집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등 간단히 떠오르는 것만도 수 가지이다. 책이 한 권 만들어 질 정도면 사람들이 참 다양한 이유로 행복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도 되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도 된다.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향해 정진할 뿐…… 항상 행복해 보이는 친구가 있다. 볼 때마다 그 녀석이 참 운이 좋고 잘 풀려서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기에 인생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이며, 잘 되어 간다는 말만 하는 녀석이 얄미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아내(둘 다 대학 동기)를 통해서 들은 얘기는 친구가 말한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 때 깨달은 것은 친구는 대부분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과 좋은 점만을 얘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 친구를 유쾌해 보이게 했고, 만나는 사람에게 즐거운 에너지를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 친구 역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행복을 찾고 있었나 보다. ‘행복한 친구 찾기.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찾고 함께하며 행복을 배워라’라는 스님의 말씀이 와 닿는다. 스님이 책을 통해 전하는 수많은 메시지 중,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키는 사람이다.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없고 만들어진 스트레스의 대부분이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환경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문제들 역시도 결국은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있지 않던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아등바등 살다 보면, 어느덧 시야가 좁아진다. 내 주위에 소중한 이들을 잊고 소홀해진다. 그것이 외로움을 만들고 외로움은 불행함을 만든다. 이런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세상에 행복을 되찾으려면,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상대 존재 자체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와 닿는 조언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메시지이든 마음에 새겨 넣고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가 변화하면 그 긍정적인 변화가 다른 변화를 이끌 듯이, 하나의 메시지라도 실천에 옮기고자 하면 다른 메시지들도 가슴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문제는 유기적으로 얽혀 있고 해법은 사람의 마음 속에 담겨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
내 주위에 있는 존재하는 행복들은 찾고자 해야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은 세잎 클로버입니까, 네잎 클로버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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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이 반입니다. [같은 하루, 다른 행복]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다른 행복을 찾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입니다. 그 누가 내게 택배로 보내주길 기다리면 안 되겠지요. 2. 지은이는 법명이 영화배우 원빈과 같아서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원빈(圓彬)스님. 은사 스님이 지어주신 법명 원빈은 '해나 달처럼 둥글게 빛나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3. '행복의 나라'로 반드시 가겠다고 다짐하는 서원(誓願)과 행복을 향해 직접 움직이는 행원(行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웰빙을 지나 요즘 많이 회자되는 단어가 힐링입니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많이 뜰수록 상대적으로 마음 깊숙히 자리 잡아서 아물고 있던 상처가 도드라지게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4. 지은이는 우리 모두가 힐링의 끝자락에 서 있다고 표현합니다. 많은 이들이 삶의 고속도로 위 휴게소에 멈추어서 힐링의 커피 향기에 취해 있다는 표현도 덧붙입니다. 우리는 이미 커피를 충분히 마셨고, 휴식했으니 이제 각자의 마음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야 할 때라고 합니다. 하긴 휴식이 너무 길어지면 몸이 너무 이완되어 버리지요. 5. 책에서 지은이가 하는 말을 마음에 담으며 떠오르는 단상을 붙여봅니다. 6. "가슴이 말하는 그 뜨거운 것을 좇는 삶을 산다면, 자유로워지지 않을까요?" -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내 가슴이 말하는 뜨거움을 외면하고, 남의 머리와 가슴이 말하는 차가움에 몸을 움츠리며 발을 내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7. "이기고 지는 마음을 초월 할 때, 이기는 것에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 경쟁 사회에 살면서 느는 것은 스트레스입니다. 짐짓 표현을 안 할 뿐이지요. 내가 조금 앞서간들, 내가 조금 뒤진들 그것이 과연 나의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봐야겠지요. 8. "아직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행복을 선택하고 행복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 웹 친구들에게 종종 이런 글을 남깁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그러나 정작 나는 '행복'의 실체를 알고 있는가?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를 수시로 점검해봐야겠습니다. 9. "다름은 축복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주세요." - 여전히 오른손(오른손잡이)은 '바른손'이라고 꿋꿋하게 이름 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보세요~ 당신 오른손만 '바른손'이면 왼손 쓰는 사람은 '틀린 손'입니까?" 10. "무엇이 되든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오래 전에 유행어로 돌던 말이 있었지요. '먼저 인간이 되어라' 아마 이 말은 생명력이 길것 같습니다. 나도 얼른 사람이 되어야하는데, 어떤 때는 내가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밥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지요. 간혹 내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며 뚜껑이 열리려고 할 땐..완전 밥그릇에 머리박고 정신 없이 밥을 흡입하고 있는 개의 꼬리가 잡아 당겨진 것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도 이제 그만 사람으로 머무르고 싶습니다. 11.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나에게 맞는 것을 할 때 행복합니다. 행복한 척이 아니라 정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즐기면서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지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은 표가 납니다. 몸과 마음이 늘 긴장해있고, 예민해져 있습니다. 12. "겸손이 미덕인 시대입니다. SNS가 발달할수록 겸손은 더더욱 중요해집니다. 소통의 기본이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 타인을 통해서 나를 돌아봅니다. SNS 중 페이스북을 주로 이용합니다. 상대방은 '우리 친구아이가~!'하면서 댓글을 아주 편하게 던집니다. 그런데, 참 나는 불편합니다. 뭐 굳이 나이를 들먹거리긴 뭐하지만, 어떤 땐 내 딸보다 어린 친구가 또래에게 글 남기듯 할 땐 화가 납니다. 대응은 안 합니다. 그렇다고 친구사이를 끊는 것은 좀 그렇고, 타임라인에서 그 젊은 친구의 소식을 안 보이게 설정합니다. 안 그럼 언제라도 부딪힐지 모르니까요. 우리 겸손합시다. 제발 예의를 갖춥시다~! 13. "나를 사랑하는 꼭 그 만큼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량입니다." - 혼자 살 수도 있는 사람이 결혼 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내가 보듬어 안아주지도 못하면서 남을 안아줄 수는 없지요. 나는 안길 생각만 하니 상대방이 부담스러워 하다가 그냥 도망가버리지요. 14. "정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싶다면 마음의 평화를 배워야 합니다." - 포커페이스. 그 페이스가 어떤 페이스인지 거울을 봐야겠습니다. 종종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에이오우]를 크게 몇 번 해봅니다. 은연 중 내 얼굴 근육이 굳어 있진 않나 점검합니다. 얼굴의 어원은 '얼꼴'이라고 합니다. 얼이 꼴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난 모양이 얼굴입니다. '별꼴이야' 소리는 안 듣고 살아야겠지요. 15. "병이 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들려주는 경고 메시지입니다." - 제가 존경하는 은사 한 분은 70세 중반의 연세에도 테니스 치실 때는 40~50대 상대방이 질 때가 많습니다. 예의상 져주는 것 아닌가?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더군요. 그런데, 그 분의 건강 철학은 딱 한 가지입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기. 마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원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몸 컨디션이 안 좋다 싶으면 주위에서 아무리 꼬드겨도 절대 테니스채를 안 잡습니다. 나도 그 분의 건강철학을 따르는 편입니다. 그리고, 제발 몸이 보내주는 사인을 절대 무시하지 마시길. 목, 어깨가 아프다고 치료 받으러 온 사람이 누워서 스맛폰으로 게임이나 카톡을 합니다. 내게 걸리면 나이를 불문하고 혼납니다. 목과 팔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 하겠지요. "치료 받는 동안만이라도 제발 좀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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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날은 세상이 아름답고, 기분 나쁜 날은 세상이 암담합니다.'그것'이 달라지니 세상이 달라집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이루어집니다. 당신이 보는 세상이 당신의 미래입니다.어떤 세상을 바라보실 건가요? 어떤 세상을 자녀에게, 후손에게 대물림해주실 건가요?
올해의 우리의 화두는 '행복'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서점가에도 '행복'이 들어간 제목의 책이 더 많이 우리를 찾아 오는 듯 하다. 우리는 늘 '행복'을 꿈꾸지만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세잎의 '행복'을 지나쳐 더 많이 기다리기도 하고 원하기도 한다. 왜 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행복' 바탕위에 있는데 그 행복을 지나쳐 행운을 기대하는지.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하기 나름이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이 행복이라 생각하면 행복이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으로 치닫는다.정말 위의 글처럼 기분이 좋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이고 기분이 나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암흑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세상을 기분 좋게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창'을 열어 주는 '부처 핸섬', 원빈 스님과 함께 하는 시간 기분 좋았다.
연애인과 같은 이름의 원빈 스님,내가 가끔 가는 절과 인연이 있는 스님이라 더 친근감이 가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원빈 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라 하는데 페친이 아니기에 몰랐는데 가끔 이런 글을 만나면 영양제처럼 하루가 에너지 충만하여 기분 좋은 하루가 될 수 있다. 행복은 타인이 줄 수 없다. 내 안에서 내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샘물'과 같은 존재이다.하지만 이런 기분 좋은 글을 읽으면 바이러스처럼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글,욕심을 내려 놓고 행복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메시지들은 대부분 우리가 지키기에는 어렵지만 읽는 순간에는 내려 놓아야 되는 것을 알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기는 것은 좋은 것이고, 지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정해놓은 개념들을 위치성이라고 합니다. 이 위성을 놓아버릴 때, 즉 이기고 지는 마음을 초월할 때, 이기는 것에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진다고 해서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이겨야만 하고 남보다 더 가지기를 원한다. 내가 가진 것을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내려놓기'란 정말 힘들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하여 만족을 한다면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있고 인정하게 되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행복'은 자꾸만 멀어지게 된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이 내 주변에 있다.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지 행복은 늘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나를 보고 인정하고 받아 들이기 보다는 남을 따라가거나 남보다 더 '좋은' 위치 더 좋은 것을 원한다. 행ㅂ복을 지나 그 행복을 맛보기 이전에 다른 감정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 많다.현재 자신에게 만족한다면 행복은 내 안에 있는데 그 '위치'를 보게 한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불행하기만 한가요? 착각입니다. 아직 행복을 선책하지 않.았.을.뿐입니다. 행복을 선택하고 행복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행복을 선택하고 행복을 느낄 무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결코 어려운 것들이 아니지만 평상시에 실천하기에 또 힘든 것들이 또한 너무 쉽다고 생각하는 것들일 수 있다. 나의 일상은 단조롭기도 하고 평범하기도 하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란 힘들다고 느끼겠지만 모든 것이 다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면 나의 하루는 행복으로 충만하다. 내가 늘 함께 하는 식물들에게서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행복이다. 어제까지는 아니 몇 년을 키워도 꽃대를 올리지 않았던 것이라 꽃이 피려니 생각도 못하던 것이 '오늘' 갑자기 보다보니 꽃대가 올라와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되면 무한한 행복으로 빛이 난다.그런 경우가 며칠전에 일어났다. 몇 년 키운 사랑초에 꽃이 피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꽃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행복이다. 그 꽃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이 결코 큰 것이 아니라 정말 작은,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식물인데 작은 꽃대 하나가 내 우주를 바꾸어 놓았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연습하세요. 먼저 다가가보세요. 먼저 칭찬해주세요.먼저 사랑을 말하세요. 다가가는 것은 사랑이요,물러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세상과 자신과 소통하고 싶다면? 한 걸음 더 세상을 향해 다가서세요.
부처 핸섬,원빈 스님의 말씀은 그런것 같다.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라' 물러서지 말고 두려움을 갖지 말고 다가가 사랑하고 칭찬하고 먼저 안아주는 것이다. 남이 내게 다가 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세상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는 것이다. 사랑은 받을 때도 물론 행복하지만 나눌 때가 더 행복하다. 내 안에 쌓아 놓을 때보다 나누고 베풀 때가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요즘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아 많은 이들과 나누려는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한편에서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해서는 안되는 욕심으로 망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행복은 내것을 두레박을 퍼 올리며 남에게 베푸고 나눌 때 더 배가 되고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런 자신으로 나를 먼저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서 세상이 바뀌길 기다리는 바보가 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값진 말씀들이 원빈 스님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기분 좋게 내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며 행복하게 해준다. 세상을 바꾸려면 힘들지만 내가 바뀌면 참 쉽다.그리고 행복하다.
지금까지 내가 소중히 여긴 고집은 나를 힘들게 만든 똥 덩어리일 뿐입니다. 인생이라는 등산, 그 냄새나는 고집을 끝까지 짊어지고 힘들게 가실 건가요? 던져버리고 가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가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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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스님들의 책이 자주 눈에 띄는 것 같다. 무슨 유행같기도 하고, 스님들의 말과 생각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다 좋은 말들이긴 하겠지만, 비슷비슷한 내용이 아닐까라는 건방진 생각도 잠깐 했었다.
근데,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스님들도 스님이기이전에 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각자 살아온 세월이 있고, 거기서 얻고, 느낀 깨달음이 다 다른 다양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텐데, 난 단지 같은 스님이라는 이유로 선입견을 가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않을 것 같은 원빈스님이다. 이 책은 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했다. 사실 스님이나 신부님,수녀님 같은 분들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뭔가 다른 성품과 깨달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같고, 생각하는 것도 너무나 고차원적일 것 같고, 내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분들이 아닐까란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원빈스님은 출가하기 전의 자신이 가출했었단 얘기도 솔직하게 하셨고,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러서 자기는 절대 그러지말자고 다짐했었는데,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렀던 어느날, 자신도 역시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대응하려했다는 그런 일화도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이 스님도 과거에도 하셨었고, 스님이 된 지금도 하신다는 말씀들에서 사람이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깨닫기를 반복해야 성장할 수 있음을 알았고, 그런 과정의 반복이 결국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제목에도 나와있듯이 행복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와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일텐데, 자주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뭔가를 열심히하긴하는데, 행복을 느끼진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흔희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곤하는데, 현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이 강조하신다.
읽는 동안 내 자신에 대해, 나를 둘러싼 주변환경과 가족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난 참 가진 게 많은 사람인데도, 끊임없이 뭔가를 더 추구해왔던 것 같다. 더 많은 걸 가지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지않을까란 생각이 많았나보다. 그러니 항상 현재에 만족을 느끼질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현재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겠다. 원빈스님을 뵙진 못했지만, 마치 스님께 좋은 강의를 들은 느낌이다. 문득 살아가면서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때 스님의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위안이 될 것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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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부처 핸섬, 원빈 스님과 함께 가는 행복의 길 저자 - 원빈
처음에 표지를 보고 살짝 실망을 했다. ‘부처 핸섬’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잘생긴 부처님을 네 글자로 줄인 말이 ‘부처 핸섬’이라고 한다. 종교계에까지 뻗친 이놈의 외모 지상주의!
하지만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는, ‘멋지잖아’라고 중얼거렸다. 외모보다 내면이 더 아름답고 잘생긴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런 글을 쓰는 스님이라면 충분히 핸섬하다고 불러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글의 분위기는 전에 읽은 명상만화 ‘네모가 동산으로 간 까닭은?’이나 얼마 전에 본 ‘마법의 순간’과 비슷했다.
하지만 설명이 좀 더 많았고, 일상에서 저자가 겪었던 일화가 담겨 있었다. 또한 저자가 말하고 싶은 중심 문장은 붉은색으로 쓰여 있었다. 거기에 색감이 예쁜 삽화까지 곁들여져 있다. 보고 있으면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일 귀여운 점은 오른쪽 하단에 위치한 그림이었다. 페이지를 촤르륵 빨리 넘기면 연꽃 한 송이가 곱게 피어난다. 플립북(Flipbook)이라고 하던가? 하여간 예전에 귀신 이야기 모음집과 김전일 소설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 때는 귀신이나 살인범이 다가오는 그림이었는데, 이 책은 예쁜 꽃이어서 자꾸 하게 되었다. 덕분에 책이 조금 휘어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이런 식으로 꽃이 핀다.
책은 행복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애기하고 있다. 결론을 내보자면, 사람의 운명은 각자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얘기를 통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인가보다.
모두에게 하루는 똑같이 주어졌지만, 그 날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리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바라고 있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원하는 것을 얻을지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이 느낀 행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원하는 것도 다르고 목표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다르니까. 그래도 상관없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개개인이 행복하면, 행복한 사회가 될 테니까.
다름은 축복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주세요 -p.36 상대방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받을 때가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받을 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p.66 눈빛이 변하면 관계가 바뀝니다. 관계가 바뀌면 내 우주가 바뀝니다. 내 우주가 바뀌면 우리들의 세상이 바뀝니다. -p.133 소리에 의지하면 뜻 전달이 잘 안 됩니다. 마음을 들어야 합니다. -p.202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 시간과 힘, 그리고 돈과 마음을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p,203
이 책을 읽은 다음에 나름 마음을 다스려 화를 안내고 성질을 안 부리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난 아직 멀었나보다. 하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었으면 이 세상엔 전쟁이나 불화란 없었겠지. 잊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 읽고 수양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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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참 많이 짧아졌습니다. 5월이 되자마자 은근슬쩍 무더워지기 시작하더니 과연 6월로 들어서자마자 사정없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군요. 연일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이건만 정부는 계속 블랙아웃을 경고하며 몸으로 깡으로 참아내라고만 하니 어디서 몸 안에 차오르는 답답한 열기를 내쏟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날씨만으로도 벅찬데 들려오는 뉴스 또한 참으로 갑갑하기 그지 없습니다. 블랙 아웃의 적색등이 켜지게 된 건 지금 수사중인 원전 비리 때문에 원전이 가동을 멈췄기 때문이죠. 처음 뉴스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나 어떻게 원전 부품을 가지고 장난칠 수 있을까요? 행여나 잘못되어 폭발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달리 살아날 방도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방사능이 자신과 자신의 혈육의 육체만은 비켜나가도록 할 수 있는 지금 과학으로서도 불가능한 뭔가 획기적인 수단이라도 마련해두었던 것일까요?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의 원전 사고가 있고 또 바로 얼마전에 일본 원전 사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분명히 보았으면서도 어떻게 태연히 그와 같은 비리를 저지를 수 있는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우리나라에 이런저런 강심장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만 그런 그들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강심장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날씨도 답답하고, 상황도 답답하고, 마음마저 갑갑하니 도통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만 읽었습니다. 실연을 당하면 일부러 일에 몰두한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뭔가에 빠져들어 그저 당면한 현실을 지우개로 쓱싹 지워버리려 한 것이죠. 적에게 쫓기는 타조가 제 머리를 땅에다 쳐박고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날 쫓아오는 적은 없는거다 하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처럼. 이성만 현실로 부터 뚝 떼어 내 잠시 냉동보관시켜 놓는 거죠.
배우가 아닌 스님 원빈의 '같은 하루 다른 행복'도 그러다가 잡게 된 책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글이 간결하고 쉬워서 소화기가 시원치 않은 사람에게 먹이는 미음처럼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잠시 발을 담그고 발가락 사이 스며드는 부드럽고도 시원한 물결을 감각하는 듯한 그런 글들이 모여있습니다. 딱히 뭔가 커다란 깨달음을 준다거나 지금 층층이 쌓여있는 갑갑함을 일시에 풀어 줄 혜안을 가져다 준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 책엔 그런 '쉼'은 있습니다. 저녁 무렵 오늘따라 사람 없어 문득 한적해진 공원에서 왠지 앉아서 다가오는 밤 풍경을 조용히 음미해보고 싶게 만드는 벤치 의자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 책입니다. 어떤 토닥임 같은 것. 손가락으로 갈 길을 가리켜보여준다기 보다는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 하는 식으로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 주는 것. 저는 왠지 그의 글들이 그렇게 여겨지더군요.
그렇게 텅 빈 공원 벤치 의자에 앉아 한적한 풍경을 바라보듯 읽으면서 저는 원전 비리를 저질렀던 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봤습니다. '쉼'이 그렇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사실은 여백으로 물러나야 더욱 제대로 보이는 나와 세계를 가만히 헤아리는 시간이지요. 그렇게 더듬어 봤습니다. 전문가들이니만큼 자신이 그렇게 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닥칠지 일반인들 보다 더 자세히 그리고 분명히 알았을 터인데 어떻게 그렇게 행위할 수 있었을까 하구요. 그러다 책에서 이런 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똑똑해 진다는 것은 내 기준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벌거벗고 있어도 하나도 불행하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 직장에서 벌거벗는 상황이 오면 체면 때문에 얼굴을 못 듭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대한 고집이 강렬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상(我相)이라고 합니다. (p. 57)
'아상(我相)'은 다름아니라 자기가 남에게 보이고 싶은 스스로 상정하고 또 그것에 이르려 고집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고집'은 이 책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버려야 할 것으로 원빈 스님이 누누히 강조하는 것이기도 한데 '고집'에 대해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고집(固執)의 고(固)는 오랫동안 반복한 습관이 마치 셩벽처럼 내 주변을 꽉 둘러싼 상태를 말합니다. 집(執)은 행복이라고 파난되는 그것을 꽉 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집은 온전히 나의 기준을 근거로 한 나의 다양한 습관을 가지고 마치 성벽처럼 단단하게 나를 만들고 그 기준에 맞는 좋아 보이는 것들을 잡아채어 놓지 않으려는 성향입니다. 단어 자체에서 이기적인 느낌이 많이 납니다. 고집의 질감은 딱딱함, 완고함입니다. (p.102)
이렇게 고집에서 만들어낸 '아상'이란 자기만 보고 남은 보지 못함을 말합니다. 원전 비리를 저질렀을 경우 어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 그 아픔이 타인에게 전가될 것임을 알면서도 자기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 자신의 아상만 상처입지 않으면 된다는 그 생각이 결국은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게 된 주 원인이겠죠. 검찰의 수사 결과 차츰 드러난 정황은 그 비리에 가담한 자들이 의외로 많고 뿌리 역시 깊다는 모양입니다. 가장 위험하고도 막대한 부작용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그 곳마저도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타인이야 어쨌든, 나만 예외이면 괜찮다'는 '아상(我相)의 고집'은 생각보다 꽤나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늘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하는 종교죠. 이걸 달리 해석하자면 '너만 예외라는 생각을 버려라'라는 뜻으로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고집이 자주 타인과의 소통을 불화로 만들고 결국 단절을 가져오는 것도 그 근본에 '너와 나는 달라'라는, 그렇게 나만의 예외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알고보면 이것이야 말로 근대 이후로 세계 역사의 모든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이기도 하죠. 같은 사람이지만 흑인들을 오로지 노예로만 바라보았던 노예 상인들이나 남부의 농장주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유태인들의 대량 학살을 계획했던 나치들이 그러할 수 있었던 근원에도 분명 그것이 있었을테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이 필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예외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조차 불변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예외로 얻는 공짜 점심이란 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딘가 자기만의 예외로 인해 비어버린 에너지는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원전 비리를 저질렀던 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그 때문에 혹시나 일어났을지도 모를 비극적 사태로 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아상의 집착은 뻔히 보이는 그 결말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자기만은 왠지 그 모든 것으로 부터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태연히 만들 수 있는 건, 아상의 집착이 그 주체를 근시안적으로 만들기 때문이겠죠. 예외란 어디까지나 근시안이 되었을때만이 가능한 현상이니까요. 그들이 보다 멀리 보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어리석은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단순한 생각인가요?
맞습니다. 나만 예외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을 끝없이 낮출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성인(聖人)들만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생명들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와도 같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가 증명하듯이, 아니 지금 초래되고 있는 우리 가까이의 여러 부조리를 보더라도 그렇다고 내버려둘수만은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울리히 벡이란 독일의 사회학자는 현대를 위험사회라 정의한 바 있지요. 한 마디로 위험원이 도처에 널려있고 또 그 위험으로 발생된 결과가 국지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로 광범위한 확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 사회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원전 사태에서 보듯 지금과 같이 세계 전체가 긴밀한 네트워트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선 어떤 에외의 집착이 화약고가 되어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예외란 생각을 버리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죠.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보리심'이라고 할까요.
원빈 스님은 보리심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런(나도 그리고 너도 행복할 수 있는) 목표를 '보리심'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궁극의 행복을 얻고 일체중생을 궁극의 행복으로 이끈다는 것이죠. 끝없이 추구할 수 있으며, 그 과정 자체가 행복의 성취인 목표, 보리심.(p. 179)
결국 나만 예외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와 너가 똑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 그렇게 우리들은 공동 운명의 존재임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보리심'을 향한 시작의 첫 걸음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무더위 속에서 남을 배려하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일단 나부터 시원해지고 나서야 타인들을 배려하게 되지요. 그와 똑같이 일상의 정해진 궤도 위에서는 타인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일단은 그 궤도 속에서 내게 부여된 일들을 먼저 처리하기 바쁘니까요. 그래서 우리들에겐 일상의 여백이라 부를 수 있는 '쉼'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일상에서 뚝 떼어져 나온 시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과 타인들을 헤아릴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쉬십시요. 보다 많이 비워진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십시요. 그렇게 자신의 아상을 스스로 허물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십시요. 어쩌면 바로 그 시간이 당신의 진정한 구원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6월에는 나의 예외됨을 희석시키는 보다 많은 '쉼'이란 여백의 시간들이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허락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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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음과모음 1기 서평단에서 열네 번째 받은 책이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는 저자나 책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능력이나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이해를 못했거나, 흥미 있게 읽거나 감동을 깊이 받고도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리뷰를 남기지 못하거나 부실하게 남겼을 때이다. 이 책은 내게 그런 책이 될 듯하다. 리뷰를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5월 14일에 책을 받자마자 이틀 동안에 완독을 마쳤다. 깊이 공감하면서 때로는 가슴을 칠 만큼 감동을 받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리뷰 작성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보름 가까이 지난 것이다. 나는 대부분 책을 읽자마자 사흘 이내에 리뷰를 작성한다. 읽은 동안에는 거의 메모를 하지 않는 습관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내용이나 감동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름이나 지났으니 무엇을 쓸 수 있겠는가? 좋았다거나 감동적이었다는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부실한 리뷰가 될 듯하다. 좋은 마음을 선사한 스님에게 이런 반응 밖에 보이지 못하니 이것도 인연일까? 그래도 책장을 더듬으면서 남아있는 마음의 조각들을 몇 가지 남겨 보겠다. 첫째, 스님의 책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공감의 마음을 느꼈다. 사실 원빈스님에 대해서는 지명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분의 책을 대하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스님의 책을 여러 권 읽은 바 있다. 학창 시절에는 법정스님의 여러 수필집과 성철스님의 어록을 읽었다. 최근에는 성철스님, 명진스님, 혜민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기대했던 이상의 좋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혜민스님의 책이 많은 사람에게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깊고 맑은 깨우침을 마치 블로그의 글을 보듯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도 그랬다. 담겨있는 내용은 법정스님과 혜민스님의 가운데쯤에 자리에서 들려주는 말씀이라고 할까? 여러 생각을 느끼게 하는 많은 삽화와 인터넷의 글을 읽는 듯한 문체에서는 혜민스님의 체취를 느꼈고, 담겨 있는 깊은 의미에서는 법정스님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러면서 때로는 성철스님이나 명진스님의 치열함과 엄격함도 느껴졌다. 셋째, 인연에 대해서 내가 지녀야 할 마음을 다시 생각했다. 아마 내가 교직에 머물기 때문일까? 인연이라는 글을 통해 전해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부처님이 인연의 귀함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1천겁의 인연은 한 나라에서 태어난다. 2천겁의 인연은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한다. 3천겁의 인연은 하룻밤을 한 집에서 잔다. 4천겁의 인연은 한 부족으로 태어난다. 5천겁의 인연은 한 동네에서 태어난다. 6천겁의 인연은 하룻밤을 같이 잔다. 7천겁의 인연은 부부가 된다. 8천겁의 인연은 부모와 자식이 된다. 9천겁의 인연은 형제 자매가 된다. 1만겁의 인연은 스승과 제자가 된다. (148쪽) 겁은 무한한 시간을 말한다고 한다. 세계가 성립되어 존속하고 파괴되어 공무(空無)가 되는 하나하나의 시기가 겁이라는 것이다. 즉 겁은 측정할 수 없는 시간, 몇 억만 년이나 되는 극대한 시간의 한계를 가리킨다. 같은 나라에 태어난 자체만으로도 1겁의 인연이 쌓여서 만난 것이라는 것은 그만큼 인연이 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함께 사는 부부보다도, 자신에게 몸을 준 부모보다도,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더 소중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교단에서 만난 그 많은 제자들이 아내보다, 부모나 자식보다, 형제보다도 더 깊은 인연이라는 의미일까? 그렇게 만난 무수한 인연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였던가, 라고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이 글 하나만 내게 들려준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는 더할 수 없는 큰 선물이다. 내가 깊은 인연을 생각하면서 아이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낮추고, 찌푸리려던 얼굴을 억지로라도 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이 책은 얼마나 큰 공덕이 될 것인가? 이 책을 통해서 나와는 다른 의미에서 더 큰 공덕을 만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보다 많은 독자들이 그런 인연을 만나게 되기를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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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서 뒤늦게 마스터의 자질을 발견하고 수련하는 주인공에게 스승이 늘 강조했던 것이 있다. 바로 ‘내면의 평화’(Inner peace)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무공을 연마해도 실전에서 적과 마주할 때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면 패배한다며 말이다. 작년에 유행하고 여전히 사그라들줄 모르는 ‘힐링’이라는 개념에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마음의 평화가 수반되어야 할 게다. 더불어 힐링의 반대 측면으로 볼수 있는 ‘멘붕’은 멘탈 붕괴, 그야말로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길을 찾는다. 아픈 청춘들이 김난도 교수를, 인생 패배자들이 이외수 작가를 멘토로 여겼을 때 혜성처럼(?) 등장했던 분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혜민 스님이었다. 필자는 아직 접하지 못했으나 여러 대중매체와 강연에서 그 분이 펼쳐놓는 얘기와 주제들은, 2013년 각종 사건으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한국 사회의 독자층에 잔잔한 파문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여기 또 한 권의, 스님 작가의 에세이집이 출간하였다. 경기도 의정부시 306 보충대 호국관문사의 주지로 계신 원빈 스님의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이다. 트위터, 페이스북에 등록한 글들을 일정기간 취합, 정리하여 펴낸 요즘의 책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어딘가 시류에 편승하여 급조된 듯한 인상 탓이었다. 하지만 페이스북 친구들과 여러 종교인들의 추천사를 일별하니 저자는 꽤 내공과 글발의 소유자일뿐더러 소통을 중시하는 따뜻함도 있다고 한다. 기대를 안고 책장을 넘긴다. 산만할 수도 있는 글편들을 차분히 읽으면서 나만의 어떤 것을 얻고, 느낄 수 있으려면, 몇가지 주제를 정하는 게 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불교가 말하는 ‘평화’, 인류에 대한 ‘자비’라는 관점에서 읽고자 노력했고, 혹시 더 나아가 사회참여(운동)적인 메시지까지 있다면 좋겠다는 기대로 읽어 나갔다.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의 앞부분에서는 ‘나’란 존재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들이 와 닿았다. ‘지금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세계관, 사고관이 넓어지면 사소하게 마음에 걸리는 문제들은 정말 별거 아닌 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울고불고했던 가슴 아픈 일들이 한순간의 추억일 뿐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p.25 <‘나’라는 소설>) 자유의지를 원빈 스님은 인간의 ‘선택권’이라고 표현하셨다. 세상이 불공평해보인다면 그런 시선때문이라면서, 세상을 바꾸려면 당신의 ‘눈’을 바꾸란다. 마음과 눈의 창을 바꾸고 선택하라고 하신다. 불교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많이 궁금했는데 그것을 작가 스님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많이 설파했다. ‘받는 것은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주는 것은 베푸는 마음입니다. 기대하는 것보다는 베푸는 것이 훨씬 행복합니다. 사랑을 주세요.’(p.32) 갈수록 타인에 대한 관용이 희미해가는 요즘의 때, 원빈스님의 글들은 타인과 소통을 중시하고 화를 다스릴 것을 조근조근하지만 힘있는 어법으로 이어갔다. ‘다름은 축복입니다. 그로 인해 내가 배웁니다. 그가 있어 내가 배웁니다.’(p.36) ‘다가가는 것은 사랑이요, 물러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세상과 자신과 소통하고 싶다면? 한 걸음 더 세상을 향해 다가서세요.’ (p.67) 많은 스님들의 글을 접한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법정, 성철 스님의 심오한 말씀들보다는 나보다 몇 살 나이차 안 날 것 같은 원빈스님의 글들이 친근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부분이 확실히 많았다.^^ 더욱 반갑고 친숙하게 다가온 것은 작가가 페이스북을 열심히 하는 신세대(!) 스님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내게도 SNS가 지인들과의 소소한 안부를 주고 받으며 일상의 힘듦에 서로 토닥여주는 인간적인 공간이었는데, 올해 들어 부쩍 정치적 이슈와 센세이셔널한 사고들이 주제로 개입하며 오염이 되어 슬슬 멀리하게 된 소셜네트워크였다.ㅠ 굳이 힙합 가수 리쌍이 ‘겸손은 힘들어’라고 하지 않아도 언젠가부터 SNS에는 자기 주장을 넘어 폭력에 가까운 언사들로 공격을 주고 받는 장이 되었다. 그런 SNS에서 겸손을 말한다는 건 꿈도 못 꿨는데 원빈 스님이 페북에 남긴 글들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했댜. ‘겸손이 미덕인 시대입니다. SNS가 발달할수록 겸손은 더더욱 중요해집니다. 소통의 기본이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제일이다, 나만 정답이다, 이러한 강렬한 집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렵게 만들어놓은 소통의 기반들을 하늘로 날려보내지 않으시길.’ (p.83 <겸손>) 흔한 자기계발서에서 단골 레파토리로 펼치는 이야기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실제 그렇게 된다’인데,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원빈 스님의 차분하면서 진솔한 말투로 인해 좀더 스며드는 특성이 있었다. ‘두려움, 슬픔, 절망, 죄책감은 우리를 불행하게 느끼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은 마이너스 감정입니다. 사랑, 기쁨, 희망, 자신감은 우리를 행복하게 느끼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은 플러스 감정입니다. 선택하세요!’ (p.84) 굉장히 근원적이지만, 불교를 자세히는 모르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궁금해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친절하면서 상세히 풀어주는 글들이 인상적이었고 나도 배울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고집을 버리라고 하는데, 직장/사회 생활에서 내 의견이 없어서 줏대 없어 보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 는 질문. 고집(固執)의 한자어를 쉽게 풀어서 그 뜻을 설명해 주시는데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의미로 무릎을 탁 치게 하였다. 고집 단어에서 ‘고’(固)는 오랫동안[古] 반복한 습관이 성벽[口]처럼 내 주변을 꽉 둘러싼 상태를 의미한다. ‘집’(執)은 행복[幸]이라고 판단되는 그것을 꽉 잡고 있는 상황이다라는 것! 즉, 고집을 버리라는 것이 내 의견을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의견을 반드시 가져야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매력이 없고 심지어 무시당할수도 있다고 한다. 무조건 내 의견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상대방의 의견과 내 의견을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의견에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와 닿았다. <Eye Contact>라는 문단에서는 우리가 점점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현상을 지적했다. 만약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어색하다면 반성 좀 하셔야 된다며. ‘스마트폰에는 시선과 마음을 그만 주고, 상대방 눈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진정한 대화를 한번 해봐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장소라는 의미로 사람에게 ‘적정처(寂靜處)’가 꼭 필요하다는 대목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정은 불교용어로 해탈, 열반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기독교인인 내게 생소하기도 했지만 넓은 맥락에서 누구에게도 피난처, 아지트가 있어야만 한다는 데에 백분 공감이 갔다. 원빈 스님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공간뿐 아니라 사랑, 용서, 평화라는 의식이 작동하는 마음의 적정처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일 수 있겠는데 그럴수만 있다면 아무리 많은 군중의 무리속에 있거나, 명동 한복판에 있어도, 언제나 어느 곳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다고 한다. 원빈 스님은 출가 한 후에 사회에 의해 주입당한 일방적인 관념들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출세 위주의 사회, 학벌로 차별하는 경쟁의 세상, 직업의 귀천을 구별하는 암묵적인 계급의식을 <같은 하루 다른 행복>에서 비판한다. ‘이 사회는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요? (…) 1등도 2등이 되면 실패자가 되는 사회, 이대로 우리에게 밝은 미래가 있을까요? 집단 최면에서 벗어납시다. 사회가 내게 주입한 잘못된 생각들을 벗어던집시다.’ (p.229 <아버지가 부끄러워> 中)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자비’의 뜻을 조금은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무조건적인 시혜와 베풂이 자비라고 피상적으로 알았는데 참된 불교의 자비란 그런 게 아니었다. 원빈 스님은 기록하기를 단순히 인정이 많은 것이 자비가 아니라고 한다. 인정이 있어도 지혜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순한 오지랖일 뿐이다. 자비나 자비로운 마음을 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혜가 수반되어야 한다. 도움을 펼치려는 상대방의 상황, 처지를 살피고 그에 맞게 도우며 타이밍도 잘 맞추고자 노력해야 한다.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도움’과 많이 비슷해서 왠지 뿌듯하고 기뻤다.^^ 올해 들어 부쩍 나 자신이 화를 많이 다스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ㅠ 물론 응당한 부당한 사건과 상황에서는 분노도 해야 했지만, 서른 후반에 진입한 작년부터 사사 건건 불합리한 건 따지고 넘어가야만 직성이 풀려 했던 것 같다.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의 곳곳에서 저자는 화(anger)를 많이 거론하고 그것이 왜 문제시될 수 있는지 조목조목 밝히기에 많이 뜨끔했다. 단순히 참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화를 다스릴 줄 알아야한다는 원빈스님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점만으로도 내게는 이례적으로(?) 완소 스님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얼마 전 부처님 오신 날에 공식 법회에서 대표스님이 했던 법회의 한 대목이 아직 기억 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갖춰야 할 가치는 공동체 의식이라고. 언젠가부터 개인주의적인 생활에 익숙했고 계속 그것을 지향하려 했던 최근의 나를 돌아보게 했던 단어였다. 오래전의 경험이 책을 읽으며 잔잔히 떠올랐던 시간이었다. 필자가 대학원 수업을 이수했던 학교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불교 재단 대학이었다. 강의를 들으러 분주히 왔다 갔다 하다가 스쳐만 갔는데, 캠퍼스 중앙에서 높은 곳에 사찰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법당이 있었다. 어느날인가 여유가 나서 무심코 들어가 본적이 있었다. 집에서 학교에 오기까지, 또 학교 내에서도 벽돌의 건물에만 (당연히) 익숙하다가 기와 지붕에 한옥이라는 것만으로도 이색적이고 다른 곳에 온 것 같았다. 문은 창호지로 인테리어 된 문들이 있었고 내부는 고요하게 기도를 드리거나 명상을 하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며 그 곳을 나왔던 아주 오래전의 기억-.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얼핏 알고 있어서 오해처럼 받아들였던 부분을, 상세히 읽고 나니 불교의 수행과 수련의 의미를 조금은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같은 하루 다른 행복>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속세를 부정하며 자신에의 도취에 젖은 외침이 아니었다. 그건 이 전문을 읽어보고 느낀 것이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그대와 관계를 맺으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가, 얼마나 기분이 좋아질까 같은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이해타산에 의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더럽혀져 있다. 손익을 따져 더러워져 있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있다. 만약 그대가 그런 인간들밖에 만나지 못했다면, 차라리 혼자서 걸어나가는 것이 낫다. 마치, 무소의 머리 위에 솟은 하나의 뿔처럼.” (부처. <숫타니파타> 경전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