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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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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깊어진다. 하루에 한 끼는 비빔면이나 냉면을 먹고 서너 잔의 냉커피를 마신다. 이 여름의 끝에는 가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분명한 사실은 때로 위로가 된다. 밤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오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우리 생엔, 멈춰진 삶의 조각들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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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깊어진다. 하루에 한 끼는 비빔면이나 냉면을 먹고 서너 잔의 냉커피를 마신다. 이 여름의 끝에는 가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분명한 사실은 때로 위로가 된다. 밤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오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우리 생엔, 멈춰진 삶의 조각들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시간 말이다. 한세정의 첫 시집 『입술의 문자』속에 그 조각들이 있다.

 

 구름이 구름으로 태양이 태양으로

 

 벽지에 줄기를 뻗은 모란이

 집 안을 둘러싸는 여름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며 언니가 걸어오네

 경쾌한 발소리를 따라

 헤진 가방 속에서

 터진 우유갑이 달그락거리네

 비릿한 냄새가 등 뒤를 감싸는 한낮

 

 끈적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굳게 닫힌 대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더딘 숨으로 종이배를 접네

 햇빛 찰랑거리는 대야에 띄워 놓고

 가만히 입김을 불어 보네

 구름이 구름으로

 태양이 태양으로 자라는 시간

 

 마주 댄 두 뺨에 서로의 얼굴이 묻어날 때까지

 한여름 내내 언니의 가방 속에서

 산수책이랑 공책이랑

 사이좋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네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 주며

 구름 너머로 달려가던 날들 (62~63쪽)

 

 토요일에도 학교는 쉬지 않았고, 수학 과목이 아닌 산수였던 시절, 교복을 입은 언니는 내게 위대한 존재였다. 여전히 벽지에는 수많은 색들의 꽃들이 피어나고 집 안 가득 여름이 고여있지만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오롯이 이 시를 읽는 순간에 그 여름으로 뛰어든다.  

 

 미로의 방식

 

 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모은 미간의 힘으로

 덜미가 잡힌 뒤통수에 대해

 호두알의 주름에 대해

 

 침수되지 못한 머리를 흔들며

 우리는 눈꺼풀을 닫는 자,

 빈 가지 사이 형체를 드러내는 허공처럼

 암흑의 동굴 속에서

 동공의 궤적은 깊어질 것이다

 

 지하 감옥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죄수의 눈을 나누어 갖자

 지문이 모든 사물의 무늬가 될 때까지

 더디고 느린 손 그림을 그리자

 

 너의 눈이 닿는 가장 먼 곳에

 내 눈동자의 자리가 생긴다

 감은 눈의 실금 안에서

 다다를 수 없는 길들이 번진다 (42~43쪽)

 

 당신의 왼쪽

 

 그림자가 깊어진다

 길은 외로워서 왼쪽으로 굽고

 오른손을 들어 당신은

 머리칼에 쏟아지는 햇살을 쓸어 넘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사이

 섬세하고 가는 소리로

 낙엽이 쌓여 간다

 발등 위의 낙엽은

 당신의 것이 아닌데

 그늘은 몸 위에 드리워진다

 잎새의 무성한 지문이

 당신을 어루만지는 오후

 바닥에 고인 그림자가 붉어진다 (47쪽)

 

 한세정의 시는 불안한 주저흔 같다. 그러니까 완전한 시를 향한 갈망, 자신만의 분명한 소리를 찾고자 애쓰는 모습이 말이다. ‘암흑의 동굴 속에서 동공의 궤적은 깊어질 것이다’  를 통해 어떤 간절함을 본다. 한데, 이상하게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신영배의 시집 『오후 여섯 시에 나는 가장 길어진다』가 떠올랐다. 아마도 여름과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입술의 문자

 

 입술의 주름으로

 결별한 이름을 기록하는 시간

 

 산발한 걸인이 되어

 우리는 머리칼이 끌고 가는 바람의 문자를 해독했던 것

이다

 

 살갗과 살갗이 스쳐 만든 인장(印章)은 문자가 없는 페이

지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마침내 바닥에 목을 누인

 기린의 긴 혀처럼

 우리는 서로의 경전을 천천히 쓸어내렸던 것이다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수면에 얼굴을 묻고

 입술이 뿔나팔이 될 때까지

 머나먼 이름을 향해 입술을 움직일 때

 

 물살을 문 입가에 되돌아와 겹쳐지는

 입술의 무늬

 

 우리는 각자의 입술을 만지며 붉게 물들었던 것이다 (14~15쪽)

 

 안부

 

 낡은 운동화를 모래 더미에 묻고 있는 오후, 안녕하세요

벤치에 놓인 스카프에 촘촘히 묶인 그러니까 손으로 쥘 수

없는 구름의 엽서

 

 이방인의 발이 머문 아름다운 이국의 묘비, 색 바랜 회

전목마를 타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발자국의 궤적들 그

러니까 하품할 때마다 깊어지는 노인의 이마 주름 같은, 단

정하게 나비넥타이 목에 달고 누워 있는 George Mcgrath

(1870~1874) 안녕하세요 별사탕 같은 눈동자가 총총 박혔

을 오래된 어린애, 귓불이 둥글었을지도 모르는 모래의 아이 (73쪽)

 

 여름이 가을로 이어지듯 아이는 노인이 되는 건, 자명한 진실. 문득, 시가 슬프다. 이 시집,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입술에 매달 있는 듯하다. 그 말들이 시가 되어 세상에 뿌려지기를 바란다. 그 시가 우리의 입술에 스며들기를. 시는 언제나 어렵고, 여름은 뜨겁게 익어간다.

 



r*********s 2013.07.26. 신고 공감 1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