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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1905-1944)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경주(慶州) 석굴암의 본존불로 가는 오솔길 옆에 있던 씨의 비석에서였다. 2013년 5월의 일이었으니, 5년 전의 일이다. 최근 조선일보(2018년 4월 11일자)에 "한국 대표 미술사학자 4인 추모비, 동해안 감포 바닷가에 나란히 건립" (출처: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0/2018041000223.html)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요지(要旨)는 경주 감포에 있는 우현의 추모비석 곁에 제자인 초우와 수묵의 비석 외에 새로이 호불이 추모비가 세워졌다는 것. 우현, 초우, 수묵,호불 4인의 제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이다. 한국의 미술 사학자 4인의 비석이 감포에 세워져 있는 것은 초우, 수묵, 호불의 스승이던 우현에서 비롯됐다. 그 사정은 우현 고유섭 전집 제9권 『수상(隨想). 기행, 일기, 시 』에 나와 있다. 아래에 보이기로 한다.
이곳은 오히려 속인(俗人)의 잡담(雜談)이 많고, 양양 · 강릉 · 삼척 · 울진이 다 보암 직한 곳일 것이로되, 이 장기(長嗜) 남쪽, 지금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경주군(慶州郡)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에 속하는 땅에서 보이는 바다, 이곳이 잊히지 못하는 바다이다. 세상 사람들은 번화한 모란을 좋아하듯 바다도 해금강 · 해운대 같은 호화판을 좋아하겠지만, 경관이 그에 바이 못한저 용당포의 바다를 나는 사랑한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글의 일부이다. 용당포, 그러니까 감포 앞바다를 좋아했는지 나와있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여러 개울과 합쳐져 바다로 흘러가는 와중에 대본리가 있고, 앞바다에는 대왕암이 있다. 불국사에서 놀다가 석굴암을 누구나 찾지만 감포는 찾지 않는다는 것. 동 전집 9권에 곧이어서 수록된 「경주기행의 일절(一節)」의 일부.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文武王)의 위적(偉績)을 찾아보라. 구경거리로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위업(偉業)과 김유신(金庾信)의 훈공(勳功)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기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遺跡)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건천의 부산성도, 남산의 신성도, 안강의 북형산성도 모두 문무왕의 국방적 경영이요, 봉황대의 고대도, 임해전의 안압지도, 사천왕의 호국찰도 모두 문무왕의 정략적 치적(治績)이 아님이 아니나,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으라.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 호국의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의 역사는 잘 알고 있는 일화이다. 신라시대에도 이미 대왕암은 존재했을 터. 단지 문무왕의 유골을 뿌림으로 하여 장사지냄으로서 해중릉, 수중릉, 대왕암이라는 이름과 별칭이 붙었을 터. 대본리에 있는 이견대 아래에 우현과 제자들의 추모 비가 있고,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 대왕암이 아득히 보인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여기련가.
전집에는 우현의 일기(日記)가 269~291쪽에 걸려 수록돼 있다. 1929년 10월 28일 결혼당일 부터 일기는 시작된다. 우현의 나이 25세.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디 어린 나이로다. 제법 느낀것이 있었던 일기를 보이기로 한다.
"졸업 후 처음으로 급료를 받다. 육급봉에 하루는 사령장이 나온 날이라 빼고 71원 78전이 나오다" (1930년 4월 21일)
"내청각(來靑閣)에서 미술전람회를 구경하다. 미나카이(三中井)에서 하복(夏服)을 찾다. 26원인데 정찰 37원 50전으로 붙었다." (1930년 6월 4일)
"개성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에서 퇴직금 228원이 나왔다. 조수 삼 년분." (1933년 4월 19일)
"병원에서 돌아와 『과학펜(科學ペン)』 6월호를 들췄더니, 바바 슌지란 사람의 「소세키와 류노스케(漱石と龍之介)」란 잡문이 있는데, 두 사람이 다 위병으로 평생 고생하다 죽은 것이 겨우 오십이라니, 나도 앞으로 잘해야 십 년 남짓 수명이 남은 모양이다. 류노스케가 죽은 것이 겨우 서른 다섯이라니, 그렇다면 무위(無爲)의 내가 더 오래 사는 셈이 된다. 이것은 무위의 탓으로 더 오래 살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여튼 같은 정경임을 생각하고 앞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라도 일기나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1941년 9월 15일 월요일의 일기 중에서)
"이와나미 서점으로 주문했던 세키노 다다시 박사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은 출판되자 곧 주문한 셈인데 품절이라 하여 왔다. 근자에 책이 잘 팔리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조선 것은 잘 아니 팔릴 줄 알았는데, 황수영 군의 동경 동향을 듣건대, 고서점 같은 데서도 조선에 관한 것이 상당히 비싸다 한다. 결국 이것은 조선 내 책사들이 가끔 가서 몰아오는 까닭인 모양이다." (1941년 9월 29일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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