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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제자리에 머물다
마을 사람들은 해 떠오르는 쪽으로 중(僧)들은 해 지는 쪽으로 죽자 사자 걸어만 간다
한 걸음 안 되는 한뉘 가도 가도 제자리 걸음인데 - '제자리걸음'
마을사람들이 해 뜨는 쪽으로 열심히 달려간다면, 중들은 해 지는 쪽으로 열심히 달려간다. 해 뜨는 쪽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를 가리키고, 해 지는 쪽은 욕망과 사투를 벌이는 세계를 가리킨다. 지독한 욕망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면, 순간의 깨달음을 현실 속에서 맛보려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물론 어느 쪽 길을 갈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이란 그 사람이 사는 세계와 연동되어 펼쳐지는 법이니까.
시인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한 걸음/ 안 되는 한뉘"라고 표현한다. 한뉘는 한세상을 의미한다.
평생의 시간이 한 걸음밖에 안 된다면, 지금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시간을 사는 것일까? 구름을 탄 손오공은 한없는 거리를 날아갔지만, 결국에는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손오공 같은 능력을 지니지 못한 우리 인간이야 새삼 말해 무엇 할까? 욕망을 내려놓는 일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다. 어떻게? 그저 그리로 가는 길을 묵묵히 걷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일까?
죽음이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늦가을 오후 개울물 반석에 앉아 이마를 짚어본다 어머니 가신 후로는 듣지 못한 다듬잇소리 - '춤 그리고 법뢰(法雷)'
여기저기서 죽음이 밟히는 늦가을 오후에 시인은 개울물 반석에 앉아 가만히 이마를 짚어본다. 적막한 세상에서는 오로지 개울물 소리만 들려온다. "어머님 가신 후로는 듣지 못한 다듬잇소리"라는 시구로 시인은 개울물 소리를 표현한다. 개울물 소리에는 어머니의 다듬잇소리가 묻어 있다. 다듬잇소리에 개울물 소리와 같은 자연이 서려 있다고 말해도 좋겠다. 깨달음이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밀려온다.
개울물 소리를 듣는 일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법뢰가 일어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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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같은 인생길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조오현, '아지랑이'
나아갈 길도, 물러설 길도 없는 절벽에 시인은 서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허공만 보인다. 허웃음이 나온다. 무언가를 찾아 평생을 떠돌았는데 이른 곳이 절벽인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절벽이란 한계 상황과 같다. 인간의 한계 상황이란 죽음과 이어진다. 죽음만큼 인간을 얽어매는 게 어디에 있을까?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타자와 같다. 아무리 달아나도 벗어날 수 없는 타자가 바로 죽음이다.
시인은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이라고 쓴다. 절벽 앞에서는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다. 아니, 삶과 죽음을 나누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서는 이 절벽을 벗어날 수 없다. 자기를 내려놓는 위험한 과업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절벽을 벗어나는 힘을 얻을 수 있따. 목숨을 건 도약이니, 치명적인 도약이니 하는 말들이 왜 나왔겠는가? 목숨을 걸지 않고 다른 세계로 건너갈 방법은 없다.
목숨을 건다는 건 지금까지 마음 깊이 품은 이념=통념을 주저 없이 내려놓는 걸 의미한다. 한줌의 지독한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세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삶과 죽음을 명확히 구분한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져야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모 데우스'라는 말을 떠올려 보라.
삶과 죽음이 어울리는 절벽 앞에 서도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만 보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아지랑이들은 사라진다. 시인은 다시 "우습다"라고 쓴다. 평생을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들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죽음이 감도는 절벽 앞에서 깨닫는다. 절벽과 아지랑이를 따로 썼지만, 어찌 보면 절벽 또한 아지랑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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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조오현, 「아득한 성자」 하루살이는 하루를 산다. 하루는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백년을 사는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하루는 참 짧은 시간이다. 그럼 인간이 사는 백년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생명의 역사를 생각하면 인간이 사는 백년은 참으로 짧은 시간이다. 하루는 하루살이에게 한 생의 시간이고, 백년은 인간에게 한 생의 시간이다. 누군가에는 한없이 짧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긴 시간일 수가 있다. 시인은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보고, 지는 해도 본 하루살이를 이야기한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일이 하루이다. 시간이란 수많은 하루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았지만 봐야 할 것은 이미 다 보았다. 하루를 살든, 또 하루를 더 살든 해는 뜨고 해는 진다. 시인은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로 하루를 사는 한 생에 드리워진 진실을 이야기한다.
하루살이 시선으로 보면 하루는 영원한 시간이다. 영원이란 저 너머에 있는 시간이 아닌가? 인간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저 너머의 시간을 자식을 통해 보려고 한다. 인간만이 아니다.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존재는 종족번식의 본능을 지니고 있다. 하루살이라고, 인간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루만 사는 하루살이 떼도 알을 까고 죽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하루라는 시간이 아니다.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시인은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이라고 쓰고 있다. 죽을 때가 지났다는 걸 시인은 어떻게 아는 걸까?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하루라고 했다. 하루는 반복이다. 백년을 사는 우리는 결국 수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사는 것이 되는 셈이다.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에 나타나듯, 시인은 하루를 살아도 산 것 같은 느낌이 없으면 죽을 때가 지난 거라고 이야기한다.
돌려 말하면 시인은 하루살이에게서 하루를 사는 마음을 이끌어낸다.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아주 긴 시간이지만, 백년을 사는 인간에게 하루는 아주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백년이라는 시간에 매인 인간은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나이를 먹은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늘 ‘후회 없는 삶’을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후회’라는 말을 떠올린다. 왜 그런 것일까? 백년을 하루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마따나 그 어느 날 하루를 제대로 살지 않으면 다른 날 하루 또한 제대로 살 수 없다. 하루를 산 하루살이는 왜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일까? 시 제목이 ‘성자’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시인이 승려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성자(聖者)는 번뇌를 끊고 해탈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 번뇌를 끊는다는 건 욕심을 버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번뇌란 게 쉽게 말하면 마음속에서 이는 갈등이 아닌가.
백년을 사는 인간은 수없이 많은 갈등을 마음속에서 겪는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친다. 어느 수준에서 만족하는 법이 없다. 만족이라니? 만족을 하는 순간 무한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모르면 모를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외면하는 건 참으로 힘들다.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은 보지 않고, 남이 가진 것만 본다. 자기보다 적게 가진 이는 보지 않고, 자기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만 본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욕심을 부리는 격이라고나 할까? 욕심을 부릴수록 욕심은 더욱 더 늘어난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의 모든 욕심을 채워줄 만큼 이 세상에 물자가 넘쳐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자는 적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많으니 사람들은 서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루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마음은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빚어진다고 봐야 하겠다.
욕심은 지금보다는 다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오늘 만족하지 못하면 내일 또한 만족하지 못한다. 오늘 번 만큼 내일도 벌어야 하고, 모래도 벌어야 한다. 하루하루가 미래를 위한 하루하루가 된다. 하루가 지닌 의미가 그만큼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이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 떼에 주목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라고 시인은 단언한다. 하루살이는 오늘만 산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다. 내일이 없으니 하루살이는 내일을 대비하지 않는다. 내일 일어날 일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시인은 하루를 사는 마음으로 천년을 사는 사람이 ‘성자’라고 말한다. 성자에게 하루는 곧 천년이고, 천년은 곧 하루이다. 번뇌를 끊은 사람이 욕심에 매일 리는 없다. 성자는 그저 하루를 살고,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산다. 하루에 천년이 깃들어 있으니 하루를 사는 성자는 천년을 사는 꼴이 된다. 하루와 천년이 다르지 않는 시간의 역설을 성자는 삶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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