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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기 -
저는 영화 ‘아수라’를 참 좋아합니다. 영화 내용 중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이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그 영화의 분위기, 영화 속 캐릭터들의 악한 모습, 마지막에는 모두 죽게 되는 결말까지,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왠지 제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말입니다! 마치 선원들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노랫소리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는 이 영화가 왜 제 마음에 드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제 관점과 영화 속 세계가 비슷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또는 좀 더 포괄적으로 표현해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국가는 원래 어떤 곳입니까?’ 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저는 ‘어두운 곳, 희망이 없는 곳, 그러므로 항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곳’이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희망을 잃은 청년 세대를 표현하는 N포 세대라는 말도 유래를 따져 보면, 처음에는 미약하게(?) 삼포 세대로부터 시작하였으나, 이후에는 오포 세대, 칠포 세대로 점점 확대되더니 종국에는 그 숫자를 무한히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N포 세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단 청년의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영하의 날씨에 거리에서 24시간을 지내는 노숙자들, 알코올 중독 아버지 또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 몇 천원을 버는 독거노인들, 쪽방촌 사람들, 도움 없이는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들, 요양병원에서 사실상 감금되어 하루 종일 TV만 보며 의미 없이 살아가는 어르신들.. 어떻게 보면 위 모습은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바라볼수록, 세상을 살아갈수록, 과연 이곳에 행복, 아름다움, 기쁨, 이런 좋은 것들이 존재하는지 항상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제가 믿는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비종교인들에겐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기독교인이 ‘세상엔 희망이 없다, 원래 고통으로 가득한 곳이다’고 말하다니요. 무언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20대 후반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교회와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어떻게 보면 ‘가나안 성도(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나 제도적 교회에는 안 나가는 사람)’라고 불러도 될 듯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가 됩니다. 교회를 안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공무원 시험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사람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 등으로, 시험 합격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범죄를 다루는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특성 등의 이유로, 항상 저는 ‘세상은 결코 살 만한 곳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 앞에 플레밍 러트리지의 <예수가 선택한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의 시작인 고난 주일부터 시작하여, 이후 고난주간 및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세족 목요일을 거쳐 십자가에 못 박힌 성금요일을 지나 부활주일 이후 성령강림절까지 포괄하여 각 시기 때에 맞는 설교문을 실은 책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 한다면,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신앙에 쌓인 먼지를 털기도 하고 닦기도 하며 조금씩 깨끗하게 정리시켜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 ‘십자가’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음을 통해 복을 얻기를 구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직장 내에서 승진 등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소위 말하는 SKY 대학에 가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사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공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플레밍 러트리지는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들이 아닌 십자가에 집중합니다. 이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의 비유나 추상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현실적인 십자가를 말합니다. 나아가,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는 과정에서 당하게 되는 수치, 모욕,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읽다 보면 그 고통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플레밍 러트리지는 이 고통의 십자가를 마음 깊이 묵상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보통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의 아름다움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 전에 엄연히 존재하는 십자가는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거나 굳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부활은 희망, 승리, 기쁨을 나타내니까요. 그에 반해, 비록 십자가는 우울하고 무섭고 슬프고 추하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부터 흘러나온 피, 그리고 예수의 몸에 새겨진 못 자국 상처를 깊이 묵상한다면, 비로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보기에 좋은 것을 말하며 그것이 기독교를 믿는 이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 그 자체인 십자가를 통해 예수의 사랑, 능력,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후 예수의 ‘부활’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으시는지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레밍 러트리지는 추상적인 부활이 아닌 예수의 ‘몸’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불신했던 사람은 비단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우리들에게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끝까지 독려합니다. <예수가 선택한 길>는 균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끄러운 부분을 숨기지 않으며 연약한 믿음으로 인한 불신의 모습도 굳이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통해 더욱 더 독자들을 격려하며 그들이 그리스도 앞에 다시 바로 설 수 있게끔 지속적으로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오롯이 성경 말씀을 통해 힘있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 주장이 아닌 성경 말씀 묵상을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날 아침, 회사에서 근무 중 ‘정신지체 1급 장애인인 아들이 흉기로 아버지의 머리를 가격해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는 취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읽을 때 저는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또 한편으론, 철탑 위에서 200일 넘게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서운 것은, 저 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좋은 것이란 게 과연 있는 걸까요? 저는 매번 시험에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힘을 내고자 합니다. 사실 저의 이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원래 어두운 것, 악한 것이라는 관점이 아직도 저에겐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이후 부활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마음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플레밍 러틀리지의 <예수가 선택한 길>은 담백하지만 강렬하게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더 일깨워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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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의 길
플레밍 러틀리지(Fleming Rutledge)의 고난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주일, 그리고 성령강림주일까지 이어지는 부활절기 설교를 모은 이 책은 1976년부터 2001년까지 러틀리지가 26년간 미국 전역의 여러 교회에서 다양한 청중들에게 했던 설교이다. 러틀리지의 설교 41편을 7부로 나눠 1부는 고난주일, 2부는 고난주간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부는 고난주간의 목요일인 세족 목요일, 4부는 성금요일, 5부는 부활주일, 6부는 부활주일 다음 한 주간, 7부는 성령강림주일까지로 구성했다. 러틀리지는 자신의 설교집을 설교자들이 예화를 구하듯 급하게 읽지 말고 절기에 맞춰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책을 집어 든 순간 술술 넘어가는 편안한 문체와 깊이를 찌르는 매력에 빠져 쭈욱 단숨에 읽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 속을 걷는 어린 양
러틀리지가 굵은 글씨체로 강조하기까지 하는 단어는 “죄”와 “사망”이다. 원제도 “The Undoing of Death”임을 생각할 때에 저자가 우리에게 깊이 묵상하기를 바라는 점은 우리가 사망 권세 아래 놓인 죄인 됨이다. 부활의 감격보다 “죄”와 “사망”에 지속하여 우리 시선을 집중시킨다. 현대 서구에서 “죄”와 “사망”에 대한 설교가 잊혀 가고, 부활절이 단순히 자본주의의 물든 상업용 오락을 즐기는 명절로 전락해 버린 상황을 매우 개탄하며, 선명하게 “죄”와 “사망”을 일깨운다. 러틀리지가 독자들에게 “죄”와 “사망”을 일깨우는 방법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현실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설교마다 인용되는 일상의 생활 또는 신문은 우리의 죄인 됨을 여실하게 보여주며, 우리 각자 개인 뿐 아니라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분명하게 하여준다. 나아가 음악, 문학 작품을 적절히 활용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를 적실히 깨닫게 하며, 특히 미술 작품의 활용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긴 사건이고, 부활의 감격이 이로부터 오는 것임을 명확하게 한다. 러틀리지는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걷는 어린 양
이 책을 읽으며 깜짝 놀란 것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어린 양의 심상이었다. 대게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십자가 사건을 어린 양에 대한 세세한 설명으로 그 의미를 깊이 있게 다가오게 하였다. 제사장이면서 어린 양인 예수, 속죄제의 제물이면서 대속죄일의 염소, 드려지면서 동시에 드리시는, 죽으시면서 승리하시는 예수를 어린 양을 통해 풍성하게 묵상하게 돕는다. 이런 예수의 어린 양 되심에 대해 당대에 사람들이 받아들였을 심상과 의미들을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십자가의 의미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십자가형의 합법성과 폭력성을 인지시켜 ‘악의 평범성’을 깨닫게 함과 동시에 십자가가 엄청난 “수치”임을 보여주고, 당대인들이 용납할 수 없었음을 폭로한다. 우리 또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으며, 십자가라는 수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도 고발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정의를 위해 아들을 비정하게 버리는 분이 아니시다. 함께 고통당하시며 “오는 세상”인 하나님 나라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현재에 침투하게 하신다. 러틀리지는 어린 양의 길을 따라 십자가의 풍성함 속에 거닐기를 도전한다.
말씀 속을 걷는 어린 양
러틀리지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풍성함에 집어넣는 방법은 현란한 말씀 넘나들기이다. 이 책에 설교 본문은 제시되지 않은 당혹스러움과 “세수 목요일”이 등장하는 낯설음을 뚫고, 툭 툭 소개되는 성경 본문들은 우리에게 다른 생각이 침투할 틈을 주지 않는다. 복음서 기자들과 서신서의 저자들이 지속해서 예수 사건이 말씀의 성취라고 떠들 때에 먼 곳에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는데, 러틀리지를 통해 말씀의 성취를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자 지진이 나고 무덤이 열리며 해가 사라지는데, 이것들이 예언서에서 예언 된 일임을 적확하게 짚어 설명하는 지점이다. 이 또한 말씀의 성취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예언서의 말씀들이 이를 향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안개가 걷히듯 선명해졌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을 풀어주심으로 뜨거움이 올라오듯 하였다. 러틀리지는 우리로 하여금 어린 양을 따라 말씀 속을 걷게 한다.
종려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러틀리지는 따라가다 보면 자주 만나는 단어들이 “죄”와 “사망”이다. 부활을 말하고자 할 때도 이 “죄”와 “사망”을 반드시 마주해야 한다. 참 거북스럽다. 집요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더불어 “수치”라는 단어도 지속해서 만난다. 지속해서 만나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본문도 비슷하다. 이사야 53장, 시편 22편, 빌립보서 2장, 고린도전서 등 반복해서 읽게 된다. 시선이 한 곳으로 갇히는 느낌이 든다. 편협한 느낌이 드는 지점은 특정 단어와 본문에만 있지 않다. 다종교 사회의 현실을 언급할 때에 타종교를 폄하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논의를 전개할 때는 아슬아슬해 보인다. 하지만 현재는 혼탁한 영성의 시대가 맞다. 타종교에 대한 편협한 생각으로 폄하하기보다는 영성을 팔아먹는 죄인의 상태들을 짚어내고 있다. 부활을 장사의 수단으로만 여기고, 즐기기 위한 오락으로 여기는 세태와 함께 꼬집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다른 어떤 곳에도 없고, 비교할 수 없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죽음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기꺼이 받아들여 수치를 씻어 버리는 일은 예수의 십자가뿐이다. 나아가 부활의 감격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집중해야 한다. 분명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은 부활이 생명이라는 선포가 얼마나 값진 것임을 알게 한다. 러틀리지는 성령강림주일까지 이르는 길의 문인 종려주일의 고난의 문을 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