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에게 한유주 작가는 좋아한다기보다는 흠모하는 사람이다. ![]() 호감이라는 감정은 보통 두 가지 상반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첫째, 나의 취향과 비슷할 때. 둘째, 나의 취향과 완전히 다르긴 한데 신비하게 보일 때.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일상 모습에서는 경쾌하거나 경박하지만, 속으로는 진지함을 동경하는 드미트리 삶이 소설 취향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셈. 드미트리의 취향을 공개하자면, 최민석이나 박상 같은 작가는 첫째 이유로 사랑하고. 둘째 이유로 좋아하는 소설가가 박상륭이나 권리 그리고 한유주다. 안타깝게도 권리는 작품 활동을 관둔 듯하지만... 박상륭을 좋아한 계기는 명확히 기억난다. 문학과 미학에 정통한 한 블로거가 추천해서였다. 하지만 한유주를 흠모한 계기는 잊어버렸다. 대학 때는 몰랐던 사람이었고, 채널예스로 오고나서나 알게 된 작가 같은데. 그러다 크리스탈 킴과 찌깨다시 및 몇몇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한유주와 그녀 작품 세계에 관해 서서히 알아갔던 듯하다. 그리고 소설집 『여신과의 산책』 출간 기념에서 한유주를 실제로 봤는데, 일단 굉장히 아름다웠다. 호감 급상승! 그렇게 종이책은 품절이라 전자책으로『달로』를 사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읽어나가는 게 아니라 읽어내야 했다. 그저 줄거리만 읽어나가도 재밌는 소설도 있지만, 박상륭을 비롯한 몇몇 작가의 작품은 도서관에 틀어박혀 메모해가면서 진지하게 읽지 않으면 문자를 그저 흘러보낼 뿐, 문자와 하나되기가 어렵다. 한유주 글도 마찬가지였다. 진지하게 각 잡고 읽었어야 하는데, 누워서 크레마터치로 봤더니, 전혀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종이책으로 읽은 『얼음의 책』도 사정은 비슷했다. 오, 이 문장 정말 멋진데! 했던 순간은 반복됐으나 따로 적어둔 게 없어서 그저 지나쳤다. 그래도 확실한 사실은, 한유주는 정말 다른 글쓰기를 구사한다는 점. 왠지 멋있어 보인다. 여기서 잠시 한유주의 글쓰기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 보자. 데카르트 이후 근대철학은 인식론 위주였다. 올바른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까, 에 관한 물음에 천착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 즉 자아론도 근대철학의 핵심 주제가 된다. 그러다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 등이 등장하여 철학의 주제가 바뀐다. 인식론에서 언어철학으로 바뀐다. 이후 언어도 자아도 깡그리 부정당하는데, 데리다와 폴드만, 리오타르, 사이드, 스피박 등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주류 담론을 부순다.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어떻게 보면 한유주의 글쓰기는 이런 사상사의 흐름과 궤를 함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문장은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기 위해서 존재한다. 서사가 없다, 혹은 서사를 파괴하는 게 한유주의 문학이므로 그녀의 작품이 단편 위주로 이루어진 건 우연이 아닐 터. 그래서 한유주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불가능한 동화』에 거는 기대가 컸다. 2013년 5월에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드미트리는 바로 구매했다. 기대는 컸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이제서야 겨우 읽었다. 언어에 천착함으로써 서사를 깨려고 했던 한유주, 그녀가 쓴 장편은 어떨까. 대체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 작품 전체에 큰따옴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만큼 등장인물 내면에 침잠한다. 그래서 잠시라도 한눈을 판다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다. 드미트리도 여러 번 놓쳤다. 출판사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보고서야 스토리를 겨우 이해할 정도. 그러므로 일단 보도자료 내용을 그대로 긁어와 본다. ---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위한 동화가 아닌 아이로부터의 동화가 시작된다. 오로지 순수하기 때문에 가장 비겁하고 잔인할 수 있는 아이들의 세계. 가장 강력하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들 속에 한 아이가 있다. 아무도 이 아이를 알지 못한다. 눈에 띄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는 아이. 등과 허벅지처럼 옷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부위마다 푸른 멍과 붉은 상처가 돋아 있는 아이다. 자신을 둘러싼 폭력적 세계를 일기장에 담아낼 수 없는 아이는 “구체적 일상”을 요구하는 숙제 앞에서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다. 밤을 틈타 교실에 들어간 아이는 급우들의 모든 일기장에 ‘어른스러운 글씨체’로 자신의 문장을 적어 넣는다. 하지만 너무나 아이답게도 담임선생의 ‘경찰서에 가서 거짓말 탐지기를 해보자’는 허풍스런 겁박에 당황한 아이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기장을 들고 도망치다가 같은 반에 있는 ‘미아’와 마주친다. 너무 놀란 아이는 또다시 쏟아질 매질을 피하기 위해 아이만의 극단적인 잔인성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야기는 여기서 멈췄고 너를 한동안 잊었다 문학 강의를 하던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와 만난다. 당황한 아이가 나를 쫓는다. 아이가 자신을 쫓는 것인지, 자신이 아이에게 따라오도록 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분간할 수 없다. 아이를 집에 데려오자 아이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나의 일기장을 뒤적이며 창작 과정을 되살핀다. 나의 외투를 걸치고 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력발전소와 경기장을 주위를 소요하다 돌아온다. 하지만 집에 들어온 아이는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다녀왔다고 말한다. 나의 서술에서 벗어나는 아이를 나는 쓴다. 이것은 불가능하거나 불가능하지 않다. (http://www.yes24.com/24/goods/8924775 출판사 리뷰 중) --- 크게 2부로 나눠진 이 장편에서 1부는 다소 전형적인 소설의 문법을 따르고. 2부는 1부에서의 등장인물이 소설가와 직접 만나는 장면을 그린다. 다소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전개이지만, 이런 반전은 그리 새로운 시도는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공포영화나 도시괴담에서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지면서 창작자가 혼란에 빠진다는 모티브가 종종 발견되는데. 그렇다고 한유주의 시도를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는 법. 드미트리는 이 작품에 두는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는 동심을 바라보는 시선. 동심의 다른 말은 순수함인데, 이 작품에서는 동심을 잔인함 또는 기괴함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내용도 완전히 새롭다고는 할 수 없을 테지만. 둘째, 한유주가 쓴 문장은 여전히 강하다. 그렇게 새롭지 않은 반전, 새롭지 않은 주제지만 3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끌고 나갈 수 있는 건 그녀의 매혹적인 문장력 덕택이다. --- (이하 강조는 드미트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들은 1998년의 첫 나비를 본다. 이르게 나타난 하얀 나비가, 보도블록 사이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잡풀들 위를, 오후의 언저리를, 낮게 날고 있다. 아이들은 나비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배추흰나비라고 불린다. 아이들은 나비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단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배추흰나비는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초봄에 나타난 흰나비의 의미에 대해 알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배추흰나비는 봄날의 첫 죽음을 위한 상복을 의미하지만, 상복을 입어본 아이들은 아직까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이들은 죽음에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작고 하얀 나비의 움직임을 쫓는 대신, 공을 쫓거나 공깃돌을 쫓는다. 우연히 움직이는 것들을. 길섶의 나비는 작고 검은 그림자를 점 찍듯 홀려놓지만, 그림자도 나비도 좀처럼, 잡히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나비들도 곧 사라질 것이고, 더 이상 너울대지 않을 나비의 그림자도, 시멘트나 아스팔트 위의 화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나비가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표지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이가 나간 사기 그릇이, 얼룩진 베갯잇이, 천장에 말라붙은 벌레 자국이, 구멍난 양말이, 셔츠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가, 결로 현상이, 꺼지지 않은 불씨가, 활짝 피어난 꽃들이, 어린 새싹들이, 멈춘 지하철이, 되찾은 지갑이, 분필 가루가, 볼펜 얼룩이, 부러진 샤프심이, 올 풀린 스웨터가, 고장 난 시계가, 잃어버린 바람이, 강물이, 수돗물이, 개들이, 새들이, 쥐들이, 그리고 밤과 낮이 얼마든지, 봄날 흰나비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아이들이 죽어갈 것이다. 표본처럼.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표본처럼. 그리고 죽어갈 것이다. 빠르거나 느리게. 죽어가는 것들의 죽음이 가속화된다. 모든 속도는 항상 빠르거나 느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36-37쪽) 그때,를 그 시절, 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시절이라는 단어는 과거의 시간을 지나치게 아름답고 그리운 것으로 만든다. 그때. 시간의 때. 눈동자마다 유리 조각이 들어 있던 때. 보이는 것마다 꺾고 짓밟고 자르고 베고 구기고 망가뜨리고 싶던 때. 실낱처럼 가느다란 햇빛도 칼날처럼 목덜미를 겨누던 때. 그때. 비스듬히 떠오른 태양이 도살자의 칼을 쥐고 있던 때. 그때. 온갖 아름다운 사물들이 흩어지고 깨어지고 헝클어져 훗날의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모조리 소멸시키던 때. 기억은 추억을 거역하므로 추억은 추악한 기억으로 되올아오는 것, 그러니 기대 없이, 예감 없이, 감각 없이, 감정 없이, 없는 기억들이 되돌아온다. 그것들은 성긴 그물과도 같아서 아무것도 건져 올리지 못한다. (중략)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가 무슨 감정을 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도 없다. 너는 그저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없는 문장들이 너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그 문장들이 너를 추격하지 않기를. 공격하지 않기를. 너를 살해하지 않기를, 매장하기 않기를. (112-113쪽) 차가운 아이는 차갑다. 차가운 아이가 차가운 피를 흘린다. 차가운 피는 차갑다. 언제나 동어반복적 진술만이 윤리적이다. 의미를 배반하지 않는 표현. 자꾸만 되돌아오는 의미.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표현. (160쪽) 최상급 형용사가 어울리는 단어는 이 세상에 없어. 모든 단어는 그저 다른 단어의 반대말이거나 동의어일 뿐이야. 반대말의 동의어는 반대말이고 동의어의 반대말은 동의어지. (중략) 기억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기억의 반대말은 기억이야. 기억은 착란하고 망각은 찬란하지. 너는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본 적이 있니. 망각의 암각, 명암의 명망, 명망의 망명, 추억은 추악하고 기억은 거역하지. 그러니 착란의 반대말은 찬란이고 찬란의 동의어는 착란이야. (203쪽) 이 글은 기억으로 쓰고 있다.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펜이나 키보드로 종이나 노트북에 옮겨질 것이다. 기억 이전에 연상이 있고, 연상 이전에 꿈이 있다. 꿈 이전에 꿈이 있고, 꿈 이후에 꿈이 있다. (210쪽) “더 좋은 글을 쓰려면 반대자가 필요하다. 독재자가 필요하고, 고통이, 잔인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무너지는 세상이 필요하고, 죽어가는 세계가 필요하다. 나는 장악하기보다는 장악당하고 싶다. 생존자가 없다면 증언할 사람도 없다.” (260쪽) 번역은 여전히 활발하게 하고 있는 한유주. 그녀의 소설을 기대해 본다. 이제 나올 때도 됐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