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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속과 성의 경계에 머물고 있다. 부처님은 절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두렁에 앉아 나를 생각하면 그 곳이 절이라고 했다. 요즘은 도인이 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들 한다. 외로움이 만연한 사회라고도 한다. 자살 소식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여고생 2명이 손에 끈을 묶고 뛰어내렸다고 했다. 사람이 있어도 모든 걸 나누고 같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할만한 사람이 있어도 외롭고 힘들었던 것이다. 혹시 모르겠다. 죽어버린 여학생은 외롭진 않았지만 상황이 너무 힘들었노라고 이야기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감당하기에 자신의 환경은 자신이 원하는 그 곳을 너무 많이 막아버려서 살아갈 가치가 없었노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성과 속의 경계란 삶과 죽음의 경계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기억과 잊음 그 어디쯤 있는 것도 같다. 3000년 전의 중국에는 '남자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라는 속담이 있다. 갈 수록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는 지금 가신의 가치는 존재의 이유에 흙칠을 한 번 더 해줄 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지금 가치를 잃어버리고 버려지는 것이 너무 많아지는 지금. (마치 먹음으로써 생명을 가치를 다하는 음식이 먹혀지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처럼) 가치에 대한 사색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이름을 불러줄지도 모른다. 릴케는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데 외로움이 느껴지면 아무라도 만나고 싶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 때가 지나면 외로움은 작게 압축되어 내 속에 나만의 세계를 만들게 되는 데 그것이 고독이라고 했다. 이 고독이 진짜 사랑의 조건이 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 자책하고 슬퍼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자신을 사랑해야 된다는 이야기만을 되풀이한다. 외모도 꾸미고 자기계발도 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꾸미지 못하고 자기계발이 아무 소용없었으며 자신과 타인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때는 다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스스로가 오랜되어서 헤어지지 못하고 메마르게 만나고 단점만 보이면서 투정부리고 마는 애인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단편에서는 모두 성과 속의 경계가 표현되어 있다.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아슬아슬하게 맴도는 주인공들이다. 첫 번째 단편 '고독의 발명'에서는 시인이 되고 싶은 남자가 자신의 고독을 찾기 위해 그 고독함만 찾는 다면 시를 쓸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위에 고독을 찾아 나선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해 시인이란 타이틀을 위해 사기도 당한다. 그리고 결국 우스꽝스러워진다. '너무 진지하면 우스꽝 스러워 진다.'라고 하는 주인공에게 한 이말은 자신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결국 다른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편을 나누고서 평화로워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국 다툼 또 다툼이다. 두 번째 단편 '누구의 무릎에 꽃이 피나'에는 불편했던 무릎에 꽃이 핌으로써 자신을 속박하던 것에서 벗어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같이 무릎에 꽃을 피었지만 한 사람은 평화를 얻었고 다른 사람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버렸다. 돌아가버렸든 자유를 얻었던 둘 다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각자의 삶의 지향점이 다를 뿐이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바다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고 본 사람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모르는 사람과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다. 처음에 이이야기를 봤을 때 참 오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탈무드에서 나온 이야기도 떠올랐다. 부자들과 함께 배를 탔던 학자는 가난 때문에 무시당했지만 배가 부서지고 재물이 다 없어지고 나서는 학자만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존경받으며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모두가 옳다는 가치는 있지만 지켜지지는 않는다. 서로 무시하고 무시 당하며 자신을 내세우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에게 마음의 눈을 뜨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하나님의 말처럼 원죄를 타고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독립적이지만 엮여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보듬어 가며 살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편을 나누게 되면 평화로워질 수 없다. 이어지는 단편에서도 현실에서 져버린 사람과 변기물을 내리면서 자신의 현실도 내려가버린 버스 기사 같은 고독이 절실한 아니 외로움에 지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들의 고독은 아직 성글고 우울해 보이며 또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불교의 최종 목표는 모든 것에 대한 적당한 무관심이라고 했다. 이 말에 완전히 동의 할 순 없지만 또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하기엔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다. 이 적당한 무관심이란 말은 적당한 관심도 포함하고 있다. 적당한 이라는 것은 중용에서 보는 것 처럼 공자의 외침으로 대변된다. '중용, 그 지극한 도여' 이 책에서 보여주는 이야기에서는 단지 '삶' 그 뿐일지도 모른다. 어떤 특별한 것 잊고 있는 것 이 아닌 단순한 삶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특별한 것은 특별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들은 삶의 지표들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모두 다르고 간섭할 수 없는 그 지표들 말이다. 이 소설집은 최근에 본 작품중에 가장 순수하다고 느껴지는 작품이다. 외로움과 고독 정말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혹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에 대해 모르고 있던 한 곳을 찾은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무심코 바라봤는 데 찾은 몸 안의 흉터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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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누군가와 마주한다. 혼자가 아닌 세상에 합류한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고독을 갈망한다. 부모와 지낸 어린 시절에도, 친구가 제일이었던 학창 시절에도, 사랑하는 이를 만났어도 혼자 만의 시간을 꿈꾼다. 우리가 꿈꾸는 궁극적인 고독은 나와 마주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노재희의 소설집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에는 고독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가족과 지인과의 단절이 아닌 진정한 고독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고독의 발명>은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엄복태의 이야기다. 그는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쓸 수 없다. 그에게 시라는 고독와 마주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 그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 해고를 앞둔 친구, 기러기 아빠로 회사에서 야근을 일 삼는 직장 상사, 그들에게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대학 시동아리 모임에서 시집을 팔아 풍류를 즐겼던 선배를 만나고 그를 통해 시잡지를 출판하는 대표를 만난다. 엄복태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잡지는 나오지 않고 출판사 사정을 빌미로 돈까지 빌려간 대표는 연락이 끊긴다. 엄복태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시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는 순간, 그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바랐던 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은 가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멕시코 지사로 발령을 받아 떠나면서 연락이 끊긴다. 20여 년 만에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무엇 때문에 가족을 버렸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자를 짓고 음식 배달일을 하며 혼자 자유롭게 사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질문이나 답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만이 느낄 수 있는 우주, 그 고요한 눈에서 말이다.
나머지 다른 소설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독립된 무언가를 갈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픈 무릎에서 꽃이 피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면서 두려움 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어 기뻐하는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의 춘복 씨. 그녀는 꽃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 손녀를 돌보는 피곤함에서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부모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인지 자신을 떠난 여자를 잊지 못하는 <시간의 속>의 화자가 원하는 건 시간이다. 아니 과거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징글징글한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문 앞에서 하나씩 받은 고깔모자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고깔모자에는 차곡차곡 지나간 시간이 쌓이고 있으며 우리 각자의 현재 좌표는 뒤집어놓은 고깔모자의 꼭짓점이라는 거였다. 현재가 늘 괴로운 건 과거로 가득 찬 고깔모자의 꼭짓점에 집중되는 하중 때문이었다. 나는 고깔모자 인생론이 꽤 그럴듯하다고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버린 그때, 그녀와의 과거로 가득한 고깔모자의 꼭짓점에서 나는 압사할 지경이었다.’ (187쪽, <시간의 속> 중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공무원인 아내를 대신하여 살림을 하는 <생활의 기술>의 주인공은 현실을 탈피하고 싶다. 집 안을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장을 보는 일상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지만 실천하지 못한다. 안주하고 싶은 현실과 벗어나고 싶은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는 주변 어디서나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내가 겪어보지 않는 일까지 통제하고 싶은 거야.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 견디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자신이 아는 질서 속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284쪽, <생활의 기술> 중에서)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는 책에 매료된 어머니를 추억하는 소영의 이야기다. 소영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무엇이 어머니를 빠져들게 하는지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소영은 이혼을 하고 아들을 키우면서 교정교열과 서재장식일을 한다. 읽기 위한 서재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서재를 갖기를 원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고급의 양서와 함께 낡고 오래된 책을 장식하면서 사람들의 결핍을 본다. 지식이 아닌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그들을 통해 소영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세상 의 별별 이야기 속에 쏙 빠져드는 것이 굉장했지. 그런데 말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싫어한다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야.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러면서도 계속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도. 있잖아, 우리가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걸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에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어떤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움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337쪽,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중에서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는 게 어디 책 뿐일까. 그것을 채우려는 모든 행위가 고독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는 시가,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 어떤 이에게는 돈이,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고독이다. 그러니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란 제목처럼 삶은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달아날 때 충만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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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저는 첨에 정말로 고독 속에서 니체적 독백을 잔뜩 늘어놓는 사소설류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내용은 완전히 딴판이던데요. 성석제씨나 천명관처럼 이야기의 재미로 일관하지는 않아도,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 내시는 그 입담이 일단 대단하게 느껴졌구요, 그리고 풍자적 어조와 잘 어울린 묵직한 주제 의식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겼습니다. 한 번에 다 소화하지는 못 할 여러 의문들이 듬뿍 담겨 있어서, 한 번의 완독 후에도 뭔가 숙제가 남은 듯 뒤를 당기는 느낌이었습니다. 리뷰를 쓰기 위해 일단 서둘러 읽었지만, 맛깔나고 해학적인 문장을 다시 구경하는 의미에서라도 몇 번을 더 읽고 싶은 소설들이었습니다. 우선 맨 마지막 357쪽 작가의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열 일곱 개의 고독을 나는 보았다. 그들은 각기 자기만의 울분, 열망, 시간, 기억을 가득 안고 있었다..." 어느 작가에게건, 작가만의 감수성으로 다가와서 포착되는 강렬한 이미지가 있나 봅니다. 이런 장면은 우리도 일상에서 흔히 접하죠. 급히 걷다 빨간 불 앞에서 멈춰 서는 사람들, 장을 보고 오는 주부이건,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미팅을 마치고 저발치에 세워둔 자가용을 향해 뛰던 회사원이건, 물 좋은 감을 찜해 두고 재빨리 공인중개사에게 향하는 복부인이건, 그저 마실 다니기를 전투 행하듯 하는 왕년에 좀 노셨던 할머니건, 갑자기 자기의 앞길을 막아서는 빨간불 앞에서 그 기세를 주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각의 사연을 강하게 현실화하려다 순간 동시에 멈칫하는 이런 모습이 사진작가에게는 순간의 장악 영감(공간 예술)으로 다가오고, 작가에게는 이런 소설집의 기나긴 내레이션(시간 예술)으로 창작 동기가 생기나 봅니다. 그런데 작가의 표현대로, 이 모습이 자기만의 울분, 열망, 시간, 기억일지언정, 고독일 수도 있을까요? 고독이라는 개념을 곰곰 생각하면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단어가 보통 환기하는 정서적 심상과는 잘 매치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열 일곱 수의 인생이 사실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나름 자기만의 강한 존재 이유를 내세우며 오늘도 허위허위 세파를 저어가는 인생은 사실 악다구니에 가깝지, 그로부터 고독이 생각나지는 않으니까요.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활의 기술>의 주인공 류는, 캐릭터들 중 가장 부적응자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하늘의 별만 보다 정작 자기 앞에 놓인 우물을 시야에서 놓쳐 주변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류는 그 탈레스적 어리석음을 가장 원형적으로, 또 직업적으로(그는 철학 교수직을 원하는 시간강사니까요) 지닌 인물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일상을 사는 생활의 기술이 가장 어렵고, 무섭게까지 다가오는 사람입니다. 사실 철학은 단순한 말장난이 결코 아니라서 깊이 파고들면 수학, 과학에도 능통해야 하는데, 그는 정작 마트에서 묶음 상품의 구매가 유리한지 불리한지의 기초 산수에도 약한 편입니다. 약할 뿐 아니라 이의 습득이 너무나도 큰 모험적 두뇌 사용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죠. 이런 타입이라면 진정 고독을 느낄 만합니다. 결코 부적응자가 아니나 나이라는 세월의 시련에 떠밀리게 마련인 노인 역시, 고독 한 켠으로 원치 않는 감금을 당합니다.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는, 손주 돌봄, 못난 자식과의 관계 설정에 지쳐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던 끝에, 정말로 무릎에서 꽃이 피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게 되는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는 기발한 설정인데, 시어머니가 신체의 희귀한 질환으로 불구가 되게 생겼는데도 고작 "애는 그럼 누가 돌봐주죠?" 같은 한심한 속물적 걱정부터 대뜸 나오는 며느리, 마누라를 탓하면서도 결국 이 현실적인 육아 문제를 며느리보다 더 치사하게 따지고 드는 한 술 더 뜨는 아들, 현실이 자신에게 오도가도 못하게 덧씌운 굴레를 우상화하며, 어느덧 전염되듯 자기 무릎에도 핀 꽃을 가차없이 뽑아 버리는 친구 서여사,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책을 직접 읽어 보세여. 스포일러라서 이 정도만)를 맞아 앞뒤 안 재고 과감한 연대 정신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결단이, 내용도 내용이지만(재밌잖아요?),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말투가 너무 재밌습니다. 실존 모델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실감나는 재연이 가능할까요? 카프카의 그 작품엔 최소한 해학은 없지 않습니까?
맨 마지막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는 다소 기이한 이야기더군요. 무릎에 꽃이 피는 초자연적 이야기가 나와서가 아니라, 세상에 그런 직업도 있나(무식한 자수성가형 재산가에 책으로 인테리어를 해 주는 여성의 이야기에요) 하는 생각, 무식하다고는 하나 의식의 작동이나 자신 혹은 타자를 보는 능력은 진짜 지적이다 싶은 묘한 캐릭터(박무석)를 참 잘 만들어 냈더군요. 그 이상한 반항기 가득한 딸이나, 그를 잘 다루는 머리 좋고 생각 깊은 진소영의 개성은, 잘 만들어진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입체성에, 작가의 깊이 있는 카프카적 고민까지 간직하고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제가 읽기도 했던 인테리어용 책(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 등장해서 다른 공감(?) 일어나기도 했구요.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는, 지금부터 10년 전에 이 작가분이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절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묘하게도 한 순간의 선택으로 다른 우주에 발을 들여 놓는, 일종의 평행 우주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2010년에 동아시아를 강타했던 하루키의 <IQ84>가 연상되던데요. 설마 하루키상이 우리 노 작가님의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요? 훗.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는 정말 초끈이론에서 숨어 있는 다차원 공간요소를 통해 존재의 기원을 탐구하기라도 하듯, 자신만의 차원으로 침잠하려는 한 늙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이야말로 제목을 잘 대변한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은 하나하나가 존엄한 우주입니다. 비록 부적응자. 미스핏에 가까운 인생도 그의 유니크한 고독이 우주적 중요성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독>이란, <존재>의 제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심각한 고민거리를 던져 준 작가님의 노고와 재능에 경의와 사의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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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큰 기대를 하고 책을 접한 것은 아니었다. 노재희 작가라는 이름또한 생소했다. 하지만 첫장을 넘기면서 이후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노재희 작가는 내의 머리에 박힌 또 한사람의 좋은 작가가 되었다. 이 책은 단편집이다. 중편집이라고 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짧지도 않고 아주 길지도 않은 글 8편이 들어있다. 첫번째 글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는 시인을 꿈꾸지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엄복태의 이야기이다. 고독하지 못해서 시를 쓰지 못하는 주인공...현실에서 진정으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냥 막연한 환상으로 고독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단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시간의 속'이었다. 나는 아직 노인만큼 나이가 들지도 않았고 그만큼 고독할 시간도 없지만 최근 나의 생각을 주름잡고 있는 단어 자체가 나이듦과 고독이다. 둘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될까? '인간은 시간 속에 던져지지만 누구나 똑같은 시간을 사는 것은 아니다.'는 명제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던 그리고 그만큼 내게 던져진 시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저마다 느끼는 속이 다른 '시간의 속'에서 나의 노년의 시간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이 작가 매력있다. 그래서 좀더 지켜볼 생각이다. 아주 기분이 좋다. 어쨌든 매력있는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나의 시간을 행복하게 채워줄 선물과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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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거의 모든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오기 때문'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고독의 부재함 속에서 불안이 오고, 불안은 곧 불행으로 이어진다...맞는 말이예요. 오늘 분양받은 고독의 씨앗을 잘 심고, 잘 키워봐야겠어요. 좋은 책.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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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고독은 부정적인 이미지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독의 재발견이라고 할까요? 작가의 특별한 시각을 엿보게 되는 책입니다.
가끔식 흘러가는 세상을 그저 지켜보듯 흘려보내는 생경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요.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일상적인 공간에서 특별할것 없는 주인공들이 만들어가는 에피소는 특별하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는데 작가는 평범한 주인공을 통해 자신만의 주제인 고독이라는 큰 틀속에 넣어두고 있는 것 같아요.
공감 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상황이지만 그속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라고 할까요 아님 느낌이라고 할까요 각각의 이야기가 주는 느낌이 살아있는 느낌이라 인상적입니다.
고독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등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해 보게 되네요. 일상이라는 공간에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각 이야기속의 등장인물에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어떤 특별한 공간속에 침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소설이 주는데요. 그러한 느낌이 외롭다거나 생경하다기 보다는 위로가 되네요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주는 묘미인것 같아요.
강요하듯 스토리를 주입시키지도 않으면서 너무 난해하여 작품속에서 이방인이 된것 같은 느낌도 아니라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작품속으로 침잠하는 느낌이라 책 제목인 '너의 고독속으로 달아나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는것 같아요.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실도피를 위한 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책속에 빠져 행복해하고 등장인물과 같이 공감하고 호흡하면서 책속의 시공간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을 통해 책을 읽는 시간동은 책속 시간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을 받게 되고 책을 읽는 동안 그 느낌을 즐기게 됩니다.
노재희의 첫 소설집 '너의 고독속으로 달아나라'를 통해 고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고독이 어떤 마음속의 어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엄복태가 원했던 고독속으로 저도 침잠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고독을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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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소설]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 작가정신
고독 그리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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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주 울지는 말고 고독이란 무엇일까요? 저도 잘 알지는 못했어요. 지난겨울 혼자 지내며 고독이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기 전까지는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저는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어요. 늘 누군가와 함께 살았지요. 작년엔 친구와 함께 방 2개짜리 집을 얻어서 살았어요. 누군가와 한 집에 있다는 건 외로움을 잘 막아주더라고요. 작년 12월 저는 인천으로 이사를 오며 드디어 혼자가 되었어요. 혼자 산다는 건 외롭다기보다는 고독하더라고요. 집이 고요했어요. 혼자인 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불을 켜고 잤어요. 책을 읽다가 잠들었어요. 혼자라는 게 정말이지 너무너무 싫더라고요.
외로움이 싫은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어요. 외로움은 고독이기 때문이에요. 집에 혼자 가만히 있는 건 미치도록 싫어요. 그래서 이렇게 죽자고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그냥 책을 읽거든요. 책을 읽지 않으면 시간도 가지 않아요. 요즘은 일부러 책 목표를 많이 세워요. 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어야 할 정도로요. 좀 덜 외롭더라고요. 좋아요. 이대로라면 좋아요.
작가 노재희 이 책은 노재희 작가의 소설집이에요. 오랜만에 소설집을 읽으니 좀 어렵긴 하더라고요. 역시 그동안 너무 쉬운 책들만 읽은 티가 나더라고요. 그래도 금방 적응이 된 건 문장이 쉬워서였어요. 긴 문장을 쓰는 작가의 책은 절대 읽지 않는 제게 노재희 작가의 문장은 제가 적당해요. 길지 않은 문장, 이해하기 쉬운 표현, 마음을 흔드는 줄거리.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되어 제게 평안함을 주었어요. 저는 이 책의 여러 소설 중에서 타이틀과 관련 있는 <고독의 발명>과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가 좋았어요. ![]() <고독의 발명> 소설을 읽는다는 건 곧 인간을 읽는 거잖아요. 이 소설에서 말하는 건 고독이에요. 사람이 얼마만큼 고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시인이라는 사람을 통해 말하고 있어요. 시인은 원래 고독한 사람인가 봐요. 시를 쓰려면 고독해져야 하나 봐요. 그래서 시인은 소설작가처럼 '시작가'라고 안 하고 '시인'이라고 하나봐요. 시가 곧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소설 속 남자는 시를 쓰려고 했지만 잘 쓰질 못해요. 고독해지려고 일부러 거실에 파티션까지 설치하지만 제대로 된 시를 쓰질 못해요.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 사장님과의 만남이 그를 바꿔요. 드디어 시를 올릴 지면을 가지나 싶었지만 세상이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어요.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는 시인이 사준 술을 마시고, 시인이 사준 커피를 마셔요. '이 세상에서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은 내가 이따금 울었다는 것이다.'라는 뮈세의 시를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시인의 이야기에요.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많이 들어본 글이지요? 선생님이 띄어쓰기를 강조할 때 쓰는 바로 그 문장이에요.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요. 소설의 시작은 정말로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물론 상상이지만요. 아버지는 가방을 사 모으더니 갑자기 해외로 나가요. 일 때문에 나갔지만 그후로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기고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와 이혼했다는 말을 들어요. 그런 아버지,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아들이 아버지의 가방을 들고 떠나요. 아버지는 국내에 계셨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는 가방을 보고 아들을 알아봐요. 그렇게 아버지와의 만남이 시작돼요. 이 소설을 읽으며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담배냄새 가득한 아버지의 방도 생각났어요. 아버지는 늘 그 방안에만 계셨어요. 저는 담배 알러지가 있어서 그 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퇴근 후에는 방에 들어가셨어요. 밥 먹으로 갈 때와 화장실에 갈 때 외에는 방에서 나오시지 않고 TV만 보셨지요. 소설 속 아버지는 거실의 TV를 봤지만 제 아버지와 비슷함에 많이 놀랬어요. 그래서 아버지 생각이 더 많이 났던 지도요. 소설 속 아버지는 가방에도 들어가시고 방에도 들어가세요.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 소설은 힐링이 되고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한동안 소설 쓰기를 못하고 있었는데 용기가 생겼어요. 다시 열심히 써보려고요. 제가 순수문학을 쓸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이렇게 좋은 소설을 읽으며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냥 열심히 쓸게요.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한 부지런히 써야겠어요. 지난주에 북잇수다 독서모임에 오셨던 분도 제 소설이 정말 재밌다고 연재 꼭 마무리하라고 응원을 해줬어요. 다시 부지런히 연재에 박차를 가해야겠어요. 계속 쓰면 노재희 작가님처럼 좋은 소설을 쓰는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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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소설 작품집은 1972년생인 노재희 작가의 데뷔작 격인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를 비롯하여 10여년의 세월에 걸쳐 창작된 8편의 단편 작품이 실려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작가의 첫 작품집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데뷔작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는 한 버스 운전기사의 환영과도 같은 우연을 통해 현대인의 자기상실과 존재증명에 대한 테마를 도드라지게 표출한 짧은 단편의 걸작이 아닌가 싶다.
-그제야 영환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를 증명해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내였고 아이였으며, 직장 동료들이었던 것이다. 어느날 문득 자기가 몰던 버스가 사라지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자 자기를 증명해줄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가 분실한 것은 버스만이 아니었다. 그는 직장을 잃어버렸고, 집을 잃어버렸고, 아내와 아이마저 잃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환은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분실당한 것은 아닐까.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그럼 여긴 어딘가. -P228
처음 발단부터 이어지는 호기심에 가독성이 뛰어난 진행이면서 독자로 하여금 스토리 전개상 여러 추측을 낳게하는 흥미를 더했다. 필자의 경우, 읽어가다가 운전기사 영환이 사고로 죽어 그 혼백이 떠돌면서 보게되는 장면들을 환영처럼 묘사한게 아닐까하는 다소 엉뚱한 추측까지 언뜻했었다. 짧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부터 문체에 스며나는 긴장감, 그리고 짜임새있는 구성속의 핵심 테마 메시지 전달까지 탄탄한 문학 작품으로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를 한 작가구나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이 책의 표지 타이틀 [너의 고독속으로 달아나라]는 문구가 포함된 단편[고독의 발명]은 시인이 되고 싶은 평범한 직장인 엄복태의 해프닝과도 같은 일상을 묘사했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요즘 신세대 작가들과는 다른 조금은 연륜(?)이 있는, 어쩌면 아마도 6,70년대생의 경우 한국문학을 좀 접해본 이라면 친숙하다고할 수 있을 법한 문체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는 시와 시인에 대한 글들이 주를 이루는데 특히 실명의 시인들이 등장하며 그들 시인의 시와 시작에 관련된 내용이나 각종 인용의 시론과도 같은 문장이 등장할 때면 친숙한 이름들이라(물론, 지면을 통해서) 반가웠다. 그리고 흥미롭게 읽혔다. 엄복태가 결혼전 살던 시인의 방 천정에서 발견한 문구 '너의 고독속으로 달아나라'는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가정의 가장이 된 이후의 시인 지망생으로서 분투하는 그의 행동지침이자 각오로서 시작(詩作)을 위해서는 일상의 틈바구니를 탈출하여 고독속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는 그이지만 그가 겪은 시잡지 시장(詩場)과 관련한 헤프닝으로 하승진이 말한 것 처럼 그에게는 시가 과연 덫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포기못할 닻이 될까하는 여운은 말미에 더욱 강하게 남았다.
그외에 노년 여성들의 실감나는 현대의 삶의 풍경을 잘 보여주는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등 작가의 문체향을 느낄 수있는 작품들이 상당한 흡인력으로 읽힌다. 노재희 작가의 단편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짜임새있는 구성과 문학 향을 느낄 수 있는 문체, 그리고 탄탄한 테마의 힘있는 주제의식 등은 모처럼 만에 느껴보는 현대 한국 단편문학의 그윽한 향취였다.
*도서협찬=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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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진정 고독과 통하였느냐!!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낄 때가 언제일까. 스스로 고독하다고 느낄 때는 또 언제일까. 사실 고독이 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지만 결론적으로 나에게 고독은 아리송하다. 혼자 외로워하는 것이라는 고독.
진짜 내 인생을 살려면 그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시인 김수영은 고독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했다는데.....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이 말은 니체의 문장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첫 번째 나온 <고독의 발명>.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직장인, 엄복태. 그에게 있어서 중견기업의 과장자리는 토끼 같은 아들과 여우같은 마누라를 먹여 살리려는 가부장의 궁여지책일 뿐이다. 실상은 오매불망 시에 목매달고 있다.
애초에 '시인의 아내로 만들어 줄 게' 로 시작한 청혼이 결혼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씩 아내는 '당신은 언제 시인이 될 건가?' 라는 질문을 무심코 던진다. 그런 아내의 질문은 심장에 가시를 박게 하지만 늘 그렇듯 시심은 말라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고 혼자 산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현실이다.
대학시절 시가 주구장창 써 지지 않을 때, 그가 발견한 문구는 바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이었다. 그 시절에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를 실수로 똥통에 빠뜨린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는 마음이 아팠다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시가 똥통에 거대한 뿌리를 박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워 열매 맺기를 기대해 보기도 한다.
그에게는 시적 미학의 완성이라는 시인이 되고 독자와 만나는 것이 언제쯤 이뤄질까. 그는 필살기로 거실에 있던 TV와 컴퓨터를 안방으로 치우고 책상도 정리하고 파티션도 세워서 자신의 영역을 마련한다. 그 공간에서 잠시 고독에 빠지는 늦은 밤을 보낸다. 그가 시와 노는 시간인 것이다. 시인은 고독해야 한다니까....
마음 속 스승 김수영을 생각할 때마다,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괄약근을 힘껏 조였다. 그럴 때마다 고독은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했던 김수영의 말을 곱씹었다. 엄복태는 무엇보다도 고독을 원했다.
진짜 내 인생을 살려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야.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는 건 이제 그만이야! 그는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가 날마다 괴로워하고, 고독해 하며 시를 쓰는데도 멋진 작품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고독이 덜 깊어서 일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시의 세계에 온전히 빠지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선배의 말처럼 힘이 너무 들어가서일까.
혼자 있을 수 있는 자만이 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좋은 인간관계를 꾸려 갈 수 있다.
어느 날 한 줄기 빛처럼 그에게 찾아 온 한 문장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 그게 시를 쓰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인가.
시인과 고독, 고독한 시인 그러고 보니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윤동주, 고향산천에서의 김소월, 제비다방에서의 이상..... 시심과 고독은 통하는가 보다.
시인이 되고 싶은 자의 절대고독의 경지가 어떻기에 니체는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고 했을까.
이 책에는 시인이 되지 못한 자의 애환이 담겨 있다. 작가는 고독을 유머와 기지가 번득이는 문장들로 승화시켜 놓았다. 정말 유쾌하게 읽어 버렸다. 작가인 노재희가 이미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이력에 고개를 끄덕인다.
고독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독은 비처럼
바다로부터 저녁을 향해 올라온다.
멀리 외딴 벌판으로부터 고독은
언제나 외로운 하늘로 올라가서는
처음 그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모든 골목길마다 아침을 향해 뒤척일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은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 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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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바투 깎은 뒷머리(표지)가 꽤나 충격적이였던 책,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이다. 꼭 스스로 머리를 밀어버린 듯한 인상 때문에 한동안 멍하게 쳐다만 봤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표지가 그 책을 살리거나 죽이는 한 방법이 되었다고. 최근에 표지에 끌려서 책을 선택하지 않는데, 이 책은 정말 묘하게 당김이 있었다.
인간 고독이 사회의 터부시할 문제가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주의를 넘어선 순간,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자아의 고독감. '고독을 사치품으로 전락한 피로사회' 에서 궤멸을 피하기 위한 격한 방법으로 자신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했다. 도대체 이렇게 극한으로 내달려도 되는 것인지.
시를 쓰는 고독한 시간이 보장되지 않지만 시인이 되고 싶은 엄태복씨, 손녀를 봐주며 아들내외를 돕지만 인생이 외로운 차에, 다리에 꽃이 피어난 춘복씨, 현실도피의 여행가방 샘쏘나이트를 신봉하는 아버지, 치매 노인을 돌봄으로 '허우적대던 시간' 속에서 빠져나온 나, 공중화장실 변기 속으로 '시간의 좌표'를 흘러보내버린 김영환씨, 토속신앙을 믿는 시어머니를 위시한 가족들과 갈등하는 천주교인 인주씨, 생활을 위해 전공인 철학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된 류씨, 자석이 영혼을 가졌다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는 소영씨, 출판업자 윤, 건축업자 박무석씨.
이 단편들의 주인공들의 면면은 어쩌면 '일상 속의 나'이다. 고독을, 외면당해야 하는 인간의 감정이 아닌 그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작가 노재희님. 다양한 인간 관계 속에서 피곤에 쩔어가는 '고독'의 의미를 건져올린 것에 성공했다. 주인공들은 고독한 자아를 발견(혹은 발굴)해 내었기에.
언제부터인가 고독의 의미가 폄하되어버려 인간이 가지지 말아야 할 독으로 여겨진 복잡다단해지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작가는 자아찾기의 한 방법으로 '고독'을 선택했다. 힘들면 쉬어가야 하는 그 쉼 혹은 힐링의 다른 이름 '고독'.
북적거리고 거짓된 밝은 사회에서 점점 지쳐가는 내 모습이 책에 살풋 비쳐보인다. 인간 관계 속에서 아둥바둥거리는 것만이 자아의 본질을 찾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심오한 고독. 그러나 오늘도 그 고독 속으로 달아나지는 못한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