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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는 정말로 놀랍다! 온 땅을 지으시고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그 신실함과 정교함! 과학이 모든 자연현상의 원리를 탐구하여 '어떻게'에 대한 질문을 답하지만 한가지 답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왜' 그렇게 작용하는지이다. 과학은 왜 여성의 평균키가 163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여성의 평균키가 163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하루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에게 열어주신 현장을 품고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코로나 시국이지만 더욱 감사한 일이 풍성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남의 축복이 끊이질 않는다. 감사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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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삶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전해주는 책이다. 용서 받기 어려운 사람까지도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은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읽는 동안 내 삶을 돌아보며 받은 은혜를 다른 이에게도 흘려보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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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내내 나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미쳐 생각하지 못한 내용들이 있어 읽는 내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삶속에서 그 은혜받은 자녀닮게 살아내는 실력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
| 거듭남에 대해 공부하고 읽게 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치는 과정에 구입하게 된 책이다.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늘 좋은 기독교서적을 추천해주시는데 이 책도 그 중에 선정되었다. 사실 아직 읽지는 못 했지만 먼저 읽은 아내가 좋다고 해서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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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얀시는 “왕이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받는 것과 달리 기독교 신학은 종이 잘못하면 왕이 벌을 받는다”면서 “은혜란 주는 이가 친히 값을 치렀기에 값이 없다”고 말한다. 얀시는 재난이나 참사가 있는 곳을 많이 다녔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토록 비참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았지 싶은 곳들이다. 그는 “왜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그토록 엄청나게 해를 입히도록 그냥 두는가?” “왜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가?”란 질문은 열린 질문이며, 하나님은 그 답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한다. 세상 앞에 실효성 있는 신앙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우리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글로 쓴 ‘신앙’이 현실에 부딪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 답을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에서 이야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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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일을 하다 보니 종일 단어 놀이를 하게 된다. 단어로 장난을 치고 속뜻을 헤아려 보고 잘게 쪼개도 보고 머릿속을 온통 채워도 본다. 그러다가 단어도 세월이 가면 오래된 고기처럼 상하는 것을 발견했다. 의미가 변질되는 것이다. ‘charity’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라....내가 이것을 ‘마지막 최고의 단어’라 부르는 것은 그 단어의 용례마다 하나같이 그 본연의 영광스러움이 웬만큼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거대한 암반처럼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명을 떠받치고 서서, 모든 좋은 것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요즘 같은 세속적인 풍조에도 불구하고 근본은 여전히 은혜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자. 식전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say grace) 이들이 많은데 이는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친절에 고마워하고(grateful), 반가운 소식에 기뻐하며(gratified), 성공했을 때 축하받고(congratulated), 손님을 정중하게(gracious) 모신다. 서비스가 마음에 들면 팁(gratuity)을 놓는다. 이 모든 용례마다 과분한 것을 받은 자의 순수한 기쁨이 배어 있다....“은혜는 어디에나 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죽어가는 신부가 한 말이다. 맞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쳐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중 발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다시금 제고케 도와준다. 교회 공동체 일반에서 언급되어지는 은혜 받았다는 말이 참으로 비성경적인 안목에서 쓰이고 있는지를 재삼 깨달았고, 어떠한 삶이 은혜 받은 삶인지 어떻게 삶을 사는 것이 은혜 받은 것인지 숙고케 돕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