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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토 발제문 개인 기록 소장용) 헤르만, R. 판 휜스테런, “시민권의 이론: 동시대 민주정들에서 다원성을 조직하기”
0. 서론 좋은교사운동 새움 이번 학기 독토 주제는 ‘아동 청소년 특징 이해’이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가 발달한 현실에서 그들의 물리적 조건이 전인적 발달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보고자 했다. “10대의 뇌”, “자아 연출의 사회학”, 중간에 넷플릭스 다큐 “소셜딜레마”, “아이들의 화면 속에선 무슨 일이”(내가 참석을 못함), “이데올로기와 커리큘럼”(학기말로 연기), “시민권의 이론”을 읽기로 했다. 분주한 학기 말이라 아예 못 읽고 오시는 분이 계실까 싶어 ‘시민교육’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가온 부분들을 발췌하면서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하였다.
1) ★72쪽. 세계 변화 특징 요약하는 재미있는 표(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언” 연상)
“오늘날 국민국가는 경계를 정하는 이 중심적 역할을 잃어버린 채 지역주의와 국제화 사이에서 불편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73쪽.
(참고) 신공화주의를 추구하는 저자가 제시한 ‘미지의 사회’ 의미 추측: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화주의자) 아렌트에 따르면 현대에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인 것(노동, 작업을 다루는 사적 영역, 사적인 삶과 구분) 확보 필요, 세계에 복수성(단수 아닌)을 가지고 탄생한 인간은 말과 행위를 통해 ‘정치적인 것(공적 영역)’에 참여, 이에 따라 세계의 미래는 불확실성(알 수 없음)이라는 특징을 가짐. 세계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중. 역사란 후대에서야 이야기로 해석해 드러낸 것.
2) 책의 구조 - 1부: 시기별로 시민권의 의미와 정치를 개괄 - 2부: 특히 격동하는 포스트1989 시대의 민주정들에서 동시대의 시민들이 차이들을 조직하기 위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 => 자유의 실천 - 3부: 해방의 과정에서 자유로운 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 교육, 이주, 사회화 관련 제도들, 시민을 다원주의 정체의 조직가로 보는 일관된 관점을 제시, 동시대 민주정들을 위한 시민권 이론을 제시=> 각자의 국가와 공동체에서 공화주의 질서의 구성/헌정 및 계속되는 진화에 시민으로서 더욱 능동적으로 기여하게 하고자 함. 7-8쪽.
1. 1부 왜 시민권인가?: 시민권 이론들, 옛것과 새것 “이 책에서 제시하는 입장은 신공화주의 시민권의 입장이다.”, 32쪽
1989년 이후 정치적 지각변동으로 인해 시민권이 정치 의제로 부상했다. 국민 국가 의미와 그들의 통치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고 불안정성이 높아졌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세계화 현실과 맞물려 여러 이유 때문에 다른 사회에 시민으로 진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복지 축소로 인한 신빈곤,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 그들을 받아줄 것인가, 어떤 조건을 걸어서 검증하고 절차를 마련?). 예전과 같은 ‘주어진 여건들’을 통한 결합이 느슨해지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1) 임시로 쓸 안전한 토대를 중심으로 강하게 뭉치려고 하거나 2) 소비하는 개인주의에 빠지거나 3) 새로운 시민권의 길을 찾는다. 동시대를 위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졌다. “국민에 기초한 사회는 이제 정치 행위와 질서의 자명한 맥락이 아니다. 다른 맥락들이 더 중요해지곤 하는데, 기업들뿐 아니라 국민국가에 속한 관계당국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양자 모두 ‘불가피한’ 국제 현실을 좇아 정책들을 만드는 빈도를 높인다. 그들은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지만 동시에 다른 국가들과 체제 경쟁을 벌인다. 국가들은 두각을 나타내고, 세제와 사업 기회, 생활양식 면에서 이목을 독차지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기업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현실의 정치적 재현/대표에서도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합리적, 중앙집권적 통치의 논리에 기초를 둔 피라미드 모형은 구식이 되었다. 주권은 분할, 파편화되었으며, 그 개념 역시 진부해져 버렸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전에 단일한 중심으로 재현/대표되던 독립체들과 관계를 맺을 때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교점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기왕의 중심들은 갈수록 장악력을 상실하고 있다.”, 16-17쪽.
“... 사람들은 서로에게 훨씬 더 ‘적나라하게’ 의존한다. 제도적으로 정의된 정치적 현실이 더 이상(공용어나 운전 시 우측통행처럼) 자명한 문화적 사실로 간주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부득불 자신들끼리 의미와 지향, 믿음직한 관계들을 마련한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혹자는 인종이나 국민, 종교나 국제무역 같은 여건들(givens)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는데, 이런 류의 공동체들은 제한적이기는 해도 가끔 임시로 쓸 만한 ‘우리’를 제공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총체화 일체를 거부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삶을 즐기고, 자구책을 마련하며, 소비에 몰두하는 등 극히 개인주의적인 활동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리고 세 번째 길이 시민권의 길인데, 여기에서 개인들은 운명을 나눈 공적 공동체를 받아들이고 신중하게 빚어낸다.”, 18쪽.
요즘 국가 단원 수업을 하고 있어서 윤리와 사상에서 제시하는 ‘자유주의-공화주의-공동체주의’ 맥락을 토대로 저자가 신공화주의를 어디에 위치 시켜 제안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공동체주의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국가의 통치를 정치적 본성을 타고난 인간이 따르고, 필요할 경우 공동체 유지를 위해 헌신과 희생하기를 바랐다. 자유주의는 합리적인 개인이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와 계약을 맺었고, (로크 이후... 헌)법에 기반해 권력을 분립해 신탁 받은 국가가 불간섭하는 통치(소극적? 자유), 재판관으로서 중재를 수행하기를 바랐다. 공화주의는 국가가 시민에게 불간섭 뿐만 아니라 자의적인 통치를 하지 않는 비지배(적극적 자유 보장)하기를 추구했다. 여러 이론가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주장한 이 세 맥락을 다루다보면 그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저자는 현대 세계 시민주의가 추구하는 ‘보편성’이 시민권 개념에 한계를 불러왔다고 봤다. (1970년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국가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시민권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러므로 저자는 신공화주의 입장에서 동시대 시민권이 집중해야 할 지점이 ‘시민의 역량’(누스바움, 아렌트 연상)임을 주장한다. 시민은 시민으로서의 기여가 필요하다.
“시민권의 세 가지 구성적 측면은 ‘민주정’, ‘법치’, 그리고 ‘복지국가’라는 기치 아래에서 가일층 발전하였다. 이들 원칙은 국민국가 영역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기업이나 관국민적인 협약에서처럼) 국민국가 너머에서도 적용되었는데, 이때의 목표는 인류 전체를 위한 정의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시민권 개념이 모든 것을 망라하게 되면서 차츰 시민권은 사실상 모든 의의를 잃게 되었다.”, 33쪽. “기업들은 이윤 창출이라는 본래의 사명에 재차 집중하겠다며 관료제의 굴레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33쪽. (개별시민) “권리의 보유자이자 돌봄의 수령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다양한 선택지들 가운데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의 귀결을 받아들이는 책임감 있는 개인들이었다면?[자유주의?] 또는 서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연결된 인민이었다면?[공화주의?] 또는 (시민들이 그를 위해 희생을 불사하는) 공적 공동체의 자랑찬 구성원들이었다면?[공동체주의?] 이상 시민권에 관한 세 가지 서로 다른 이론적 구상들, 곧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구상, 공동체주의적 구상, 공화주의적 구상은 서로 대결하면서 한층 연마되었다. 시민권의 질문은 ‘시민권을 어떻게 얻는가?’에서 ‘시민권이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33-34쪽.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시민권을 둘러싼 논쟁들이 이동했음을 강조했다.(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연상). 신공화주의적 시민의 역량을 갖추고 시민으로서 기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적, 국지적 특징에 따른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인정과 공존이 오히려 중요해졌으므로 시대에 걸맞게 시민권의 목적을 재정립하고 시민 역량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배타적 원리보다는 공통의 시민권을 보장해야 한다. “인민으로 하여금 다원성을 조직하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 차이들에 평화롭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 35쪽. “오늘날에는 시민권의 본질적 요소보다는 상황적 판단에 관심이 더 집중되고 이전까지 권리를 강조했다면 이제는 거기에 덧붙여 제도적 의무와 관심사, 충성심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분석의 출발점은 더 이상 통일성이 아니라, 한 공화정 안에서의 시민으로 공존할 책임이 있는 소수자/약세자들의 다중적 정체성들이다.... 국지적이고 상황적인 요인들에 대한 주목은 높아지고 있다...”, 35-36쪽.
신공화주의적 시민 역량을 갖추기 위해 공화정은 시민성을 적극적으로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푸코의 ‘자유(자유의 실천들)’, ‘권력’, 통치성(자기배려, 자기통치) 이론 연상) 예전에는 해방의 실천들을 추구했지만, 이제는 시민 스스로 서로 통치하는 권력 게임 맥락에서 자유의 실천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공화정은 개인들이 자진해서 시민으로 나서는 것을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독립적이고 능숙한 시민들로 성장하는 것을 장려하기도 한다. 개인들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공화정은 기존의 공동체들에게 시민들의 ‘재생산’을 그냥 맡겨 두지 않고, 이들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회적 교육이 시민권 가입을 실질적으로 고려하고 있는지 여부를 검증한다.”, 54쪽. “이하의 세 개념을 참조하면 신공화주의 시민권의 요소들을 더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공적 영역, 다원성을 조직하기, 행위가 그것이다.”, 55쪽. (아렌트, 인간의 조건 연상: 공적/사적 영역/사회적인 것) (푸코 재인용) “...문제는 완벽하게 투명한 의사소통이라는 유토피아 안에서 그것들[권력관계들]을 해소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법의 규칙들, 관리의 기술들, 아울러 도덕, 기풍(에토스... 도덕 윤리), 자기의 실천을 주려고 시도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들 권력놀이 안에서 가능한 최저한도의 지배와 놀 수 있을 것입니다...”, 63쪽.
2. 2부 시민들이 하는 일 (서두의 표 참고) 미지의 사회에서 다원성- 시민성 어때야 하나? 미지의 사회에서 다원성을 개념화하고 수용하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개인이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다원성을 받아들이는 게 ‘의무’다. 정치적 삶을 영위하려면 다양한 가치관을 다루는 과정에서 중립이 필요하다(종교-정치 구분, 도덕-법 구분, 옳음-정의 구분). (아렌트, “인간의 조건”에서의 복수성, 말과 행위 연상)“다원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절대적 조건”이고, 자유는 정치적 삶의 “존재이유”다... 다원성이 정치적 삶에 생래적이기 때문이다.”, 69쪽. “... 개인적 자유의 행사가 다원성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자유를 원한다면 다원성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정에서 다원성은, 우리의 개인적 찬반과 무관하게 원칙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입장은 종교와 정치, 도덕과 법, 선 관념과 정의의 분리라는 학설로 표현된다.”, 69쪽.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자연스럽고 강요된 듯한, 자명해보이는 표준적 분류는 사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실재를 사회적으로 구성하고 의미 부여하는 행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1) 개인적 정체성들은 사회적으로 부여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이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감정들(누스바움, “정치적 감정” 연상?), 다원성은 감정을 수반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다원적 시민들의 정치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감정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3) 능력과 제도들, 다원성을 조직할 수 있도록 시민 역량을 사회적으로 숙련되게 다루도록 하는 교육과 함께 이를 위한 제도들을 보장해야 한다. 다원성을 맹목적이지는 않게 수용하면서 위와 같은 노력을 수행해야 한다.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생산되는 자명한 의미들에 대해 우리에게 공동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79쪽. “정체성들은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내적으로 경험한 자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81쪽. “우리의 호오와 무관하게 다원성이 감정을 수반하는 것은 분명하다. 감정을 묵살하거나 무시한다면, 감정은 형편이 좋지 않을 때 정치적 상호작용을 방해하는 난폭하고 변환불가능한 요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인정한다면, 다원성을 경험하고 구성하며 (가공)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 안에 감정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다원적인 시민들의 상호작용 안에 있는 의미 있는 장소에 감정을 배치한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86-87쪽. ★시민 역량의 구체적인 내용 “... 자기표현만으로는 시민다움을 보장할 수 없다. 표현은 모름지기 상황에 적합해야 하고, 타인들이 알기 쉬워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감정이 담긴 의견제시와 어우러짐으로써, 시민으로 함꼐 살아가는 존립가능한 방법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능력과 제도들이 입장한다. 능력은 알맞은 판단과 실제적인 사회적 숙련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자신의 입장, 착상, 감정을 또렷하게 표현하고 청취하는 솜씨, 자제력과 자각을 발휘하는 솜씨, 상황을 가늠하는 솜씨, 불안정함과 놀라움에 대처하는 솜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움직임을 좇는 솜씨 등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나타내는 솜씨(“만일 내가 이 일을 용인한다면, 스스로를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신뢰와 이해가 가능해지는 맥락을 자아내는 솜씨, 스스로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신중하게 상대하는 솜씨를 가리키기도 한다.”, 87쪽. “실천에서 다원성을 상대하는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87쪽. “일정한 숙련이 없는 시민들에게는 학교 교육이나 정보, 보조금이나 권고가 제공될 수 있다.”, 88쪽.
(아렌트가 칸트 미학을 정치철학에 끌어온 주장 연상, 실천적 판단력!!) “일반적 규칙과 이론적 통찰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능숙한 행위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어떤 규칙이 언제 적용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을, 갈등하는 가치와 소망들을, 그리고 특이한 상황들을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이런 종류의 상황에서 능숙하게 행동할 수 있으려면 실천적 판단력이 필요한데, 실천적 판단력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다양성과 특수성에 대한 주목이다. 시민의 능력은 유연성에 있고, 이 유연성으로써 시민은 공화정의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본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일반적 규칙, 통찰과 특수한 상황들을 매개할 수 있다.”, 89쪽.
실제로 공화정에서 시민들이 다문화적 표층 아래의 심층 집단들, 운명공동체, 배타적 문화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저자는 새로운 시대에 시민권을 정의할 때 공화정-배타성은 양립 불가함을 분명히했다. 신공화주의 관점에서는 국민국가 힘이 약해 불안정해진 시대라고 해서 임시 안정성을 추구하기 위해 운명공동체 개념을 협소하게 가져가셔는 안 된다. 공화정에 속한 시민은 (정체성) 갈등이 심화되는 다원주의 시대에 다원성 조직 역량을 실천 속에서 형성하면서 운명공동체 의식을 가져가야 한다. “그러나 이들 요인으로는 오늘날 여러 운명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운명공동체를 이렇게 분열적이고 적대적인 방식으로 지각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집단으로 나뉜 사람들은 나름의 정체성과 문화를 갈수록 찬양하고 고집한다. 한편 국가들은 시민권에 접근하는 규칙을 더 엄격하게 만들고 국민(문화)의 유일무이함을 고집하고 있다. 종교적 소속은 공적 영역에서 한 사람의 위치를 정의하는 요소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화하는 중’이라고 간주되던 세계, 계서제의 경직성이 줄어들고 차이들에 대한 관용이 높아진다고 간주되던 세계에서 이렇게 지역적이고 특수한 문화적 유대들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121쪽. “집단들을 한데 묶는 것은 신념과 문화, 올바른 생각이다. 세계 안에 있는 자신들의 자리가 안전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집단과 국가들은 이런 식의 문화적 재생산 전략들에 도움을 청한다. 만일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한데 묶지 않는다면, 응당 하나의 공통된 핵심, 하나의 정체성이 그 일을 해야 한다. 정체성,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열띤 논의와 폭력적인 싸움들은, 바로 이런 정체성이 쉽거나 자명한 현실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다...”, 121-122쪽.
공화주의적 비지배적 자유(자의적 통치에 예속되지 않는 상태)를 누리기 위해 서로 동료시민들을 통치하기 위한 기술이 필요하다. 특히 공직에 있는 시민들은 직책들 간에도 역할 갈등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권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푸코) 공직 역시 우월한 위치에서 권력을 부리는 직책이 아니다. 신공화주의적 시민이 서로를 잘 통치하려면 정상성이 시공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특정한 ‘정상성’을 근거 삼은 ‘도덕들’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기존 ‘자연본성’을 근거로 삼는 ‘정상성’은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를 ‘괴물’로 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민의 실천/관행들 맥락에서 도덕들을 (섬세하게, 함께) 구성해야 한다. “신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 시민권/직이란 안전하고 분리된 소유물이라기보다, 성가시고 놀라운 차이들을 상대하면서 장시간 논의 끝에 타결에 이르고 구체화되는 것이다.”, 131쪽. “... 정상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는 점이다. 한때 정상이던 것이 나중에도 정상일 필요는 없다. 시민권의 관점에서 보면, 정의하는 권력의 불평등과 시간에 따른 변화라는 이 두 관찰은 우리로 하여금 정상성을 문제시하게 만든다... 시민은 모두 정상성의 정당한 공동정의자다. 정상성은 시민들의 개입에 의해 조정될 수 있으며, 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결정적 여건이 아니다.”, 144-145쪽. “사회에서 완제품 상태로 솟아나는 단수의 도덕, 한 가지 유형의 ‘자연스러운’ 시민적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중적인 도덕들로, 이 도덕들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실천/관행들과 연결되어 있다. 시민들의 과업은 시민들의 재생산을 저해하지 않고 심화하는 방식으로 이 도덕들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 과업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완제품 상태의 공식은 없다.”, 145쪽.
★3. 3부 시민들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발제 질문들 연결] 1) 시민교육 시민을 형성할 때 시민교육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특정 공동체의 ‘정상적 도덕’을 염두에 둔 기존 정치인들의 비판-저자가 말하는 신공화주의적 시민이 갖추어야 할 역량에서의 ‘책임감’, ‘충성심’, ‘정체감’은 어떻게 다른가. 교육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시민교육 과정에서 정치를 다루는 일은 때로 위험하기도 하다. “도덕에 대한 불평불만도 나타난다. 상대주의와 냉담함이 만연하고, 사회적 응집력과 공동체, 책임감과 시민다움이 실종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적 갱생도 의제로 올라 있다. 도덕 개혁과 정치 개혁, 교육 개혁의 의제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시민권 교육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정치적 능동성과 충성심이 있고, 도덕적 가치와 규범을 보전, 존중하며, 격동하는 최첨단 시장에서 너끈히 한몫하는 능숙하고 유연한 시민들을 길러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작할 수 있으려면, 교육의 어떤 특성이 시민권의 효과적 실천에 필요한지를 반드시 검토해야 한다.”, 151쪽. “다원적 사회에서의 삶을 대비하는 교육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시민권의 핵심 덕목이나 능력이 다원성의 조직화라면, 이런 교육은 본성상 시민권을 대비하는 교육이다. 따라서 시민윤리 과목에서 이루어지는 시민권에 대한 명시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교육 일체가, 통치와 피통치를 형성하는 연습이다... 교실에서 합류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공동체를 모든 구성원 각자에게 자리와 목소리가 부여되는 연합으로 변형하는 법을 배운다. 이를 달성하려면 서로의 차이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연과 학습의 주된 대상은 다원성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라기보다, 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 방식 곧 조치들의 연행목록과 조치들의 적용 지점에 대한 판단들, 이 연행목록이 여타의 연행목록에 부합하게 하는 방식에 대한 판단들이다. 성공적일 경우 이런 식으로 다원성을 조직하면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충성심과 정체감이 부산물로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직접적 목표로 삼는 교육은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교육은 충성심과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여러 경험과 능력을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156쪽.
2) ‘신공화주의적’ 충성심과 자유에 대한 저자의 입장 1) 충성심(신공화주의적 충성심): 넓은 개념의 운명공동체(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삶) 안에서 서로의 다원성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에 대해 헌신하는 태도-> 그 역량을 갖추고 공개적으로 숙련되게 발휘하는 시민 “충성심은 시민들의 공동체를 향한 것이고 다원성을 상대하는 특정한 방식들을 향한 것이다. 시민들은 이런 종류의 충성심을 국민이나 조정자 역할을 하는 다른 믿음 체계들과 열광들에서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고, 공적 영역 자체로 몸을 돌려야만 한다. 거기에서 그들은 다원성을 상대하는 특정한 방식들에 대한 헌신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하되, ‘기존의’ 국민 같은 국가가 제조한 신화에 의한 은밀한 방식이 더 이상 아니라 공개적인 방식을 취한다. 시민권, 따라서 시민적 충성심의 재생산은 공화정의 과업이며 따라서 시민들 자신의 과업이다. 이 충성심은 지고한 것이 아니고, 일체의 상황에서 다른 충성심들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충성심들에 대해 메타기능,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분명하다.”, 258쪽.
2) 자유: 불간섭(소극?적, 주권적 자유; 해방의 실천들) 뿐만 아니라 비지배적(적극적 참여를 통한 자유; 자유의 실천들) 통치에 의한 자유 “자유를 묘사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 유명한 묘사 중 하나는 (타인들로부터 간섭이 없는) 부정적 자유와 (타인들의 자유를 고려하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는 상태인) 적극적 자유다. 양자를 개인적 자유라는 표제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울러 두 가지 다른 의미를 구별할 수 있는데, (타인들의 바람에 반하더라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주권적 자유와 (당신이 구성원으로 속한 공동체의 삶과 행정에 참여하는) 시민적 자유가 그것이다.”, 263쪽.
(푸코) “... 역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유는 여건이나 일종의 객체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 출현하고 운동의 지향점이 되는 무언가이다. 자유는 저 운동 속에서 출현하고 일어나며 해석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무언가이다. 행위하는 시민들은 자유를 출현하게 만든다. 그들의 행위들을 관찰하면 이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구성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유라는 특정한 지위와 위치에서 행위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수행한 시민 행위들의 [불확실한] 결과가 자유의 경험이다. 이 초기 지위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거나 불확실한 것일 때 우리는 해방의 실천들을 말한다. 이 지위가 여건으로 간주되고 기정사실로 활용될 때, 우리는 자유의 실천들을 말한다. 이 구별은 강조점을 달리할 뿐이다. 두 측면 모두 어느 정도는 늘 문제가 된다. 자유는 둘 사이의 운동에서만 출현한다.”, 263쪽.
3) 가입과 배제 동시대에 어떤 사회에서 ‘누군가’를 받아들이기를 어떤 근거를 걸어 왜 허용할까, 진입하는 시민들에게 무엇을 교육해야 하나. 가입 청구권들과 거절의 근거들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저자는 신공화주의자로서 ‘동화주의’를 반대하면서, 진입하는 시민들이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들을 유지하게 해야 하며 그들이 예전 시민권을 포기하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 후보들이 (국민적이건, 전통적이건, 또는 다른 무엇이라 불리건 간에) 지역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세 번째 요건은 신공화주의자들이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시민권에서 문제는 문화적, 사회적 차이들을 상대하는 방법들을 수용하는 것이자 관련 능력을 갖추는 것이지, 어쩌다가 지배적이 되거나 유행하게 된 생활양식 하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신공화주의자들은 시민권에 관해 공동체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이들과 뚜렷하게 다르다.”, 176쪽. “신공화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장기 거주자들은 시민권을 수락하라는 요청을 받을 수 있지만, 이때 그들의 ‘예전’ 시민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지는 않는다. 신공화주의의 입장에서 다중적 시민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중적 시민권이 운명공동체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결합관계에 기초해 있는 한에서, 퍽 쉬운 일이다. 근래 들어, 새내기들이 새로 가입한 나라의 문화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순응하라는 요구 일체가 신공화주의의 관점에서는 잘못이다. 규범에 값하는 것은 다중적 시민권이지 단수의 지배적 단일문화가 아니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를 조직하는 정치적 규칙들은 모두가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181쪽. “시민권의 범위는 제한적이고 국지적이다...”, 181쪽.
4) 일과 제3기 인생의 시민들 또한 저자는 “사회권은 시민의 권리가 아니다”, 즉 ‘만인을 위한 시민권=사회권’으로 보는 시각이 위험함을 주장하면서, 노동을 하고 있는지 여부가 시민권과 결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은퇴한 노인들이나 본인이 가진 조건들로 인해 노동이 어려운 사회적 약자, 또 동시대가 요구하는 경쟁적이고 유연한 노동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잉여가 되기를 선택한 일부 청년들, 공동체를 위한 가치로운 ‘무급’ 노동을 하는 사람들 등등 역시 특정 조직에 고용되어 유급 노동을 하고 있는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평등하게 나눠가져야 할 기본권인 시민권을 똑같이 보장받아야 한다. “고용을 시민권에서 이처럼 중심적인 쟁점으로 만드는 일에 당연히 반대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실업자의 시민적 지위는 한층 주변화되기 때문이다. 무급의 활동들은 가치절하된다. 시간제로 일하는 사람들은 부분 시민이 된다. 자격 있는 빈민과 자격 없는 빈민을 구별할 때 수반되는 처치 곤란의 문제들이 모두 정치 의제로 되돌아오는데,... 일에 대한 시민적 의무는 자산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과되고, 부유한 시민들은 이 의무를 짊어지지 않는다. 이는 정치적 평등과 갈등을 빚는데, 정치적 평등은 사적인 부나 빈곤을 막론하고 견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3쪽. “...일에 초점을 두고 시민권의 생명력을 증진시키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놀랍고 슬프다. 만인을 위한 시민권을 만인이 접근할 수 없는 수단을 통해 어떻게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더 놀랍고 슬픈 점은, 여러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이 없는 채로 또는 시간제 일자리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시점에 정부들이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노년층과 장애인, 실업자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들 중 다수는 피터 래슬릿이 ‘제3기 인생’이라고 부른바 있는 시기에 속한다... 제3기 인생에 속하는 이들은 늘 하고 싶어 하던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연금을 받는 노년층뿐만 아니라, 무한경쟁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지만 소득을 창출하는 젊은 예술가들과 독립적인 청년층이 포함된다.”, 198쪽.
5) 도덕적 통일성vs 갈등? (저자 입장)“국민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구성된 인공물이다. 국민주의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면, 그 방식은 문화적으로 특정적이고, 특수한 인간 욕구에 대한 문화적으로 특정적인 해석이나 구성을 포함한다.”, 232쪽.
현대에 시민적 책임을 설교하는 정치인들은 옛날 국민국가 같은 ‘정상적인 도덕’ 공동체를 회복하기를 주장한다. 국민주의의 자연화를 주장하는 부류는 ‘정상성의 도덕’을 벗어나는 시민을 ‘자연스러움을 뚫고 나온 괴물’에 비유한다. 저자는(참고,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연상) 요즘 이론가들이 주장하듯 정말 언어집단, 본질주의 등을 토대로 한 국민국가 공동체가 자연본성(국민국가의 자연화)이고, 민주주의적 시민사회가 역사적으로 구성(자유주의, 민주정 탈자연화)된 것인지 의문을 표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는 결과적으로 존재들을 “유용한 인간, 물질과 잉여적 인간, 물질을 나누는 내적 질서...”, 231쪽. 에 따라 구분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신공화주의적 시민권에 대해 논의할 때 오히려 반대로 보아야 한다. 정치적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를 토대 삼아야 한다. 더불어 이 논의에서 개인의 이해관계가 결부된 권리 추구 욕구도 무시할 수 없다(선의지만 가지고 정치 어려움). 예전처럼 ‘계산적 시민(자유권=생명권과 재산권, 공리주의? 사회 계약?)vs책임 있는 시민’을 대결 구도로 가져가서는 현실을 반영한 정치를 수행하기 어렵다. 이해관계를 배제하면 무관심한 시민을 양산한다. 다원주의 사회에 민주공화정을 잘 유지하며 법적/도덕윤리적 기준을 합의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유용성 계산도 필요하다. “...교육과 정치적 행위, 설득이나 행정적 조치들을 통해 이들 원천을 유발, 강화하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이 장에서는 도덕적 갱생과 도덕 공동체 회복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는데,...”, 202쪽. “이 입장 변화의 성격을 국민주의의 자연화인 동시에 자유민주정의 역사화(탈자연화)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지식인들에게 국민주의는 구성된 무엇, 인공물이었다... 반면 오늘날 국민주의를 주제로 저술하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있어 국민주의는 자연스러운natural 동시에 인간적인 현상으로, 악한 요소들뿐만 아니라 평화공존의 잠재력도 포함하며, 정치질서의 필수불가결하고 중심적인 원칙을 이룬다.”, 224쪽. (재미있는 표현, 그러나...)“자연화에는 이점이 있다. 자연을 들먹일 수 있는 사람은 현실이 자기 편인 사람이다.”, 230쪽. “국민주의가 자연화되는 동안, 자유주의는 탈자연화된다/변성을 겪는다. 이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역사적으로 발전한 합의가 존립가능한 정치공동체의 불가결한 요소이자, 자유주의의 조건이나 심지어 핵심 요소라고 역설함으로써, 세계 안에서 자유주의가 점하는 자리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이로 인해 자유주의는 보편적 호소력과 개방성을 상실하고 역사적 산물로 전환되는데, 그 결과 모든 국민이 자유주의에 접근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된다... (헤르칸 필립서는) 자유주의와 특수한 역사적 문화를 이런 식으로 결합하는 것이 함의하는 바를 명확하게 진술한다. (이주자 유입 반대 맥락 연상... 그는)... 국민주의 자연화가 함의하는 바를 지체 없이 진술하는데, 새내기들의 양적 억제와 교육이 그것이다. 따라서 국민주의는 특정 자질을 우리들 내부자뿐만 아니라. 그들 외부자에게도 귀속시킨다. 그들은 다르고, 그들에게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231쪽.
“필자는, 도덕성이 시민권에 중요하다고 추정할 것이다... 의문에 부치려고 하는 것은, 도덕적 통일성을 부르짖어 소기의 도덕성을 회복시키겠다는 시도들이다. 이런 설교는 나름의 차이들을 자유롭게 조직하는 시민들의 공화정에서 역효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않다. 합의나 도덕적 통일성은 여러 시민 활동의 성과일 순 있어도, 시민들의 행위를 시작하기에 앞서 당연히 충족되어야 하는 요건은 아닌 것이다.”, 203쪽. “정치, 즉 우리 다원적 사회의 참여자들은 스스로 정당성을 유지, 갱신해야만 한다... 저 문화가 단일하지도 않고 다원적인 것이다. 따라서 시민적 책임에 호소하는 것은, 그 존재가 당연시되는 공통의 문화적 기준에 준거할 수 없다.”, 215쪽. “과거의 상상적인 안정성에 오도된 정치인들은, 계산적 시민과 책임 있는 시민을 그릇되게 대립시킨다. 그들은 다원성의 조직화에서, 또는 근대적 형태의 모든 사회 질서에서 계산이 수행하는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오인한다. 심지어는 노예라 살지라도 일부는 자기 일을 하기 위해 계산이 필수였다. 하물며 시민은 어떻겠는가. 시민들더러 기준을 고수하고 계산적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부적절하다. 계산하지 않음으로써 이 호소를 따르는 시민은 다원성의 조직화를 자주 방해하고 말 것이다. 어쨌든 계산은 변화하는 다원성을 조직하고 기준들을 분별 있게 적용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는 서로의 계산을 신뢰한다. 계산이 없다면, 동시대의 다원성을 조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계산과 도덕적, 법적 기준의 고수는 반대말이 아니다. 기준이 없다면 계산도 없다. 계산의 전제는 일부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가치 부여, 아울러 이들 요소를 결합하는 규칙들이다.”, 215-216쪽. “이제는 이해관심의 부족이 민주정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219쪽. “[법] 1. 법을 지키고 사회를 통치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돌봄] 2. 복지국가에서 국민적 연대를 보존하고 서로 돌보는 것 [정치] 3. 정치 참여와 민주정의 존립 가능성 [고용] 4. 고용 참여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존립가능성”, 220쪽. “(파울 스헤퍼르) 모든 사회가 스스로 ‘한 줌의 도덕’ 같은 것을 확보할 필요가 있고, 이 도덕은 보편적이기만 한 가치들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226쪽.
6) 시민사회(퍼트넘, “사회적 자본” 연상) “시민사회의 특징은 다양성이고, 다양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여러 갈등을 상대하는 제도들이다. (시)민법이라는 제도는 사람들에게 같은 가치를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갈등적 활동들을 규제한다. 시민사회는 산산이 흩어지지 않는 보통의 사회는 아니다. 시민사회는 동질적 공동체도 아니고 시장도 아니다. 시민사회는 이들 요소를 갖고 있지만, 이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국가와 언제건 완전히 일치할 가능성도 없다. 양자 사이에는 늘 거리가 있으며, 이 거리는 양자의 관계를 매개하는 여타 제도들과 독립적인 사법부의 감독을 받는다. 시민사회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관념들을 형성하고 스스로를 조직한다. 관념들과 관심사들이 자라나 탄탄하게 조직되었을 때 시민들은 이것들을 공적-정치적 영역 안에서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권의 생명력은 시민사회의 생명력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시민사회가 통상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국가와 시민사회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한에서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너무 가까워지거나 동일해질 때, 양자 모두 생명력을 잃는다.”, 236쪽.
4. 질문들 1) ‘신공화주의’ 입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다원성을 조직하기’는 어떤 행위이며 왜 필요한가? 이 책 저자는 자신이 신공화주의 입장에서 이 책을 썼음을 명확히하며 신공화주의를 따르는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민 덕목 역량으로 ‘다원성을 조직하기’를 제시했고, ‘조직’ 과정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시민 역량(능력)을 습득(형성, 능숙, 숙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다원성을 조직하기’를 실제로 어떻게 교육할지는 남겨진 과제임.
2) ‘글로벌’과 ‘로컬’은 중요해지는데 기존 ‘국가(정부)’의 권력은 줄어들고 있는 동시대에 저자는 ‘시민권’을 둘러싼 질문이 ‘시민권을 어떻게 얻는가?’에서 ‘시민권이 무엇인가?’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권은 무엇인가?, 34-35쪽.
3) 또한 ‘누구를 시민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전에 읽은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에서도 국민 국가 힘이 약해진 이후 불확실과 혼란 상황에서 세계 시민 연대가 필요함을 제안했다. => 한 공동체에서는 기존 공동체에서 공유한 내용을 외부에서 진입한 시민이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약속도 필요하다는 입장도 있음, 향후 윌 킴리카 참고 “국가라는 공통 기반이 약해지면서 어떤 사람들은 ‘세계화하는 중’이라고 간주되던 세계, 계서제의 경직성이 줄어들고 차이들에 대한 관용이 높아진다고 간주되던 세계에서 이렇게 지역적이고 특수한 문화적 유대들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121쪽.
4) 공교육 기관인 학교는 (사회, 윤리) 교과와 일상 잠재적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의 시민 역량(능력) 습득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저자는 특히 ‘3부 시민들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서 교실에서 다원성을 조직하는 역량을 어떻게 교육할지 등을 다뤘다. 기존 정치인들이 공동체주의적 희생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도덕성이 실종했다고 비판할 때의 ‘도덕’과, 신공화주의에서 말하는 더욱 적극적인 ‘시민성(시민윤리)’(정치적 능동성, 충성심, 가치와 규범 존중, 능숙하고 유연한 시민)은 무엇이 다른가?, 151쪽.
5) 교육 현장에서 아동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대하며 시민교육을 수행해야 하는가? 일상에서 아동 청소년을 시민 교육할 때 ‘오늘의 시민 주체’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신공화주의의 시민은 차이를 조직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신뢰 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참고. 퍼트넘, 사회적 자본)하면서, 특히 시민윤리(도덕-사회 경계에 있는 성격?) 교과 및 잠재적 교육과정에서 아동 청소년에게 ‘아동이 될 권리’를 보장하며 성장 가능한 존재, 교육이 필요한 존재로 대하기를 요구했다. 이를 위해 학교에서 교육자는 중립적인 정치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 실제 교실 상황에서 윤리적 쟁점 현안을 다루는 일은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 저자는 권력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시민이 서로를 통치하도록 하기 위한 역량이 필요하며, 이런 능력이 학습 대상일 수 있는지 물었고, 어떤 식으로 학습시킬 수 있는지 방식도 제안하고 있다. 8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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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R. 판 휜스테런 (Herman R. van Gunsteren)은 솔직히 처음 듣는 학자였다. 시민과 시민권에 대한 여러 저서를 남겼고, 법학과 정치학에 모두 밝았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대가들은 많다.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된다. 이 책이 신공화주의에 대한 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은 역시 파생적인 공부를 요구하고 있다. 여러 번 정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