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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무엇일까? 가치관? 혹은 신념? 아니면 믿음? 그것도 아니면 끊임없는 질문? 철학을 정의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철학의 사전적 정의는 네이버 사전 기준으로 요약하면 인간과 세계의 근본,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또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어쩌면 인간과 세계, 삶에 대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인생관이나 신조를 형성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정의해도 될까? 철학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돈이 많을 때도, 돈이 없을 때도, 고난이 있을 때에도, 모든 일이 다 잘되는 시기도 있다. 과연 운명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 과연 운명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가운데 철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현대는 점점 돈의 노예가 되고 있다. 돈이 행복의 가치가 되고 돈이 있고 없고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 가운데 철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철학은 자신의 인생관, 행복을 결정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가 사람의 운명과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학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삶의 본질이 돈이 될 수는 없다고 철학은 말한다. 운명의 여신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지금 현시대는 돈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그 가운데 우리는 철학을,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 행복을 찾아 살아야 한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운명이다. 그 가운데 주어지는 것은 운명의 선물이다. 그래서 삶에 감사를 가져야 한다. 철학이 주는 위안은 무엇인가? 그런 철학은 참된 행복에 대해 질문한다. 참된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만의 철학은 행복을 줄까? 돈이 행복을 줄까? 어쩌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우리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돈이 최고의 가치관이 된 세계에서 우리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물질만능주의의 극단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면 인간은 결핍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정말 현대 사회가 돈을 우상으로 섬기기에 현대인들이 늘 무언가 알 수 없는 갈증을 느끼며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부자는 돈이 많아도 더 많은 돈을 원하고 사실 돈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도 없다. 참된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돈을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권력과 명예는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까? 철학은 더 나아가 행복에 대해 묻는다. 최고의 선이 행복이라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가? 최고의 선은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가? 사람마다 다른 답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최고의 선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부족하다고 말할 것이다. 최고의 선이 행복이라면 그 행복은 결국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더 최고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 최고선을 향해 믿고 끊임없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철학은 계속 질문을 한다. 최고선이 곧 신이라면 신이 악도 행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신의 뜻에 반하는 것이 악이고 신은 절대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최고선을 믿고 그 뜻을 알려 노력하며 그 뜻을 따라가는 것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참 어렵다. 신의 섭리는 무엇일까? 신은 선한가? 혹은 악한가? 인간의 기준으로 신을 평가할 수 있는가? 가끔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의 중심에서 생각한다. 운명은 과연 정해진 것인가? 마지막으로 신은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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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욕망의 바람들이 불 때마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근심도 측량할 수 없도록 무한히 커져가는 도다." - P 39 중에서 올바름,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 탐욕의 배제, 후학과 동료 시민을 위한 진실한 학문의 추구, 권력의 오만함을 잊지 않는 태도와 같이 신을 향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도록 정진했던 인간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배신으로 유배되어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그 고통과 비탄을 형언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서기 475년에 로마 근방 명문 가문의 자식으로 출생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테오도리쿠스'의 '마기스테르 오피기오룸'(오늘날 비서실장)이었으나 일순간 역적이 되어 526년 유배지인 파비아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집필한 참된 선(善), 운명과 의지에 대한 치열한 자기 물음의 사유가 이 책이다. 역자의 해제에서 설명 되듯이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책이 아니라, 운명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신 안에서 위안을 받고자 했던 철인이자 정치가이며 신학자였던 한 인간의 간절한 철학적, 종교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과연 정의로 다스려지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그의 첫 의심이었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는 신의 피조물로서의 동일한 질문일 것이다. 이전에 누렸던 영화, 그 행복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어찌 쉬이 떨쳐낼 수 있으며, 악이 세상을 장악하는 그 불의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는가. 저술은 그의 감정에 공감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들을 내치는 철학의 은유로 등장하는 여인(철학의 여신인 아테나 이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에 나오는 필로소피아를 모델로 했다는 견해들이 있음)과 보에티우스의 대화로,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운 활용을 위해 시와 산문을 번갈아 쓰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5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보에티우스의 유배된 상황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 배경에 대한 진술로 이후의 물음들이 제기되는 바탕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장과 3장의 '참된 행복'에 대한 논의와, 제4장과 5장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와 운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과 보에티우스의 질문과 답변은 삶의 진리에 대한 간절한 앎이 더더욱 절절하게 울려온다고 할 수 있다. 1. 참된 행복에 대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슬퍼하는 일에 힘을 소진하는 것은 범인(凡人)인 우리네에게 으레 먼저 다가오는 사념이다. 여인은 말한다. "부귀, 명성, 권력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진정으로 인간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네가 다시찾고자 하는 것들이 너의 소유였음을 인정 할 것이다."라고. 사실 붙들고 싶어도 붙들어둘 수 없고 떠날때면 불행만 남기는 행운이라면 그런 덧없는 행운은 단지 다가올 불행의 전조 이외에 무엇이며, 단 한순간에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생사에 어떤 변함없는 것이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한 무엇이겠는가! "행복이 이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최고선'이라면 행복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즉 '선'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 93中에서 우리는 재물을 '부'라 부르고, 권력을 '힘'이라 부르며, 관직을 '영예'라 부른다. 그리곤 이러한 것들과 멀어질 때면 행복이 사라졌다고 슬퍼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원래 그것들에 속하지 않은 거짓된 이름들로 부르기 좋아하는 인간의 자기무지에서 오는 탐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 명예, 권력, 영광, 쾌락은 인간의 정신에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다시말해서 그 어떤 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이끌어준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얻게 될 때 행복해진다. 결국 이 다섯 가지가 동시에 완전하게 충족될 때 그것을 선이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완전한 것도 존재해야 한다.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완전한 행복이 참된 선이라면 그 완전한 것은 최고신 이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논리는 보에티우스가 위로를 구할 대상인 단일성, 근원적 존재인 '신'으로 향하게 한다. 그것이 종교의 유일신이든, 어떤 범신론적 대상이든,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근원성이든 말이다. 그런데 오직 선만을 갈구하는 신의 나라에서 악은 번성하고 미덕은 짓밟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 신의 섭리란 무엇이며, 운명이란 무엇인가? 완전성, 선의 총체라는 신이라며 어찌 이러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2.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해서 책 바깥으로 잠시 뛰쳐나가야 겠다. 선거에서 낙선한 한 인간이 충혈된 눈자위와 온갖 혐오의 표정을 짓고서는 부정선거라 악을 써댄다. 그에게서 '악(惡)'의 현현을 보게된다. 미덕을 버리고 악을 추구하는 것은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니 무지로 인한 맹목이다. 이보다 악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제력을 잃은 것이라면 결핍의 악이다. 그런데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힘이 없다는 것이니 존재하기를 멈추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극악을 향한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내재된 완전성, 선의 총체는 대체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만물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든 방식을 포괄하는 불변의 단일한 형태인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충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욕망이 그들의 심장을 비틀어 독기어린 탐욕을 분출시키고, 회오리바람이 바다 물결을 채찍질하듯 분노가 그들의 정신을 채찍질하니 고통과 비탄에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붙잡고 몸부림친다네." - P 199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밭을 갈다가 금덩이를 발견한 경우가 우연인가 묻는 일화가 있다. 이것이 무(無)에서 생겨난 것인가? 일련의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느닷없이 제멋대로 생겨난 어떤 움직임에 의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연이라 정의한다면, 이런 '우연'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일은 분명 여러 원인들(누군가 금덩이를 밭에 묻어놓았으며, 밭을 갈기 위해 땅을 파는 행위 등등)이 결합되어 일어난 긴밀하게 연결된 연쇄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신의 단일한 정신이 작성한 것이 시간 속에 안배된 만물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 질서가 우연이며 운명"이라면, 인간 의지의 자유는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과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사유의 깊은 심연을 지나가야 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경유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려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며, 미래는 아직 소유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단지 신속하게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따라서 삶 전체를 동시적으로 완전히 향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에티우스와 철학이 우연과 신의섭리의 문제를 논하다-P 221 삽화 발췌】 그러나 신은 존재해 온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의 본성의 단일성에 비추어 모든 피조물에 선행한다. 결코 지나가지 않는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을 알며, 미리 앞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한 눈에 다 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은 미래에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게 될 일들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에 이 일들은 신의 인식이라는 조건으로 필연적인 일들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그 일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단일성에 의거해서 모든 것들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즉자(卽自)적으로 본다는 이 의미를 심상에 담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어떤 위안이라도 매달려야 할 사람에게는 간절함에 맞닿았을 것이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명성, 그리고 쾌락에서 자유로워지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다고 악인의 현현이 되야 하겠는가. 자기를 살피는 일이란 지고한 자기물음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물질의 쇄도에 짓눌려 정신의 저 깊은 곳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운명의 범주가 아니라 미덕의 범주인 우정과 사랑, 지고한 선을 향한 참된 행복, 우주의 본성에 대한 겸허를 얘기하기란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네 인간은 불행이, 삶의 일상적 안온함이 물러날 때 그 허기와 상실의 고통으로 또 얼마나 아파하는가? 아마도 그러한 때가 되었을 때 이 책은 그 비탄의 통로를 빠져나가는, 죽음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는 헛수고를 멈추게 해 줄것 같다. 삶의 진실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의 평온함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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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다. 아직 읽을 여유가 많지 않은 탓인지, 책을 독파하기에는 수련이 덜 된 것인지 분간이 어렵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깊은 대화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든게 많이 없었다. 서양의 관점이다 보니 이해가 힘들었을 수 있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간독으로 읽었다. 다만 행간은 이해했으나 책을 읽으면서 좀처럼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아직 한 번 읽고 논하기는 어렵지만, 잘 맞지 않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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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최후의 철학자인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한'은 그냥 건네지는 가벼운 위한이 아닌 내적 울림을 주는 삶의 지주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의 분명한 원천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땅의 무거운 사슬을 끊어버린 사람은 행복하도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저승세계의 동굴로 다시 눈을 돌리는 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소중한 것들을 그 순간 한꺼번에 잃게 될 것이라네' 어렵고 지친 일상에서 행복한 내적 위한을 얻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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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관심이 늘어간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고 삶의 경험치가 그래도 어느정도는 쌓여간다는 것이겠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이전까지 거들떠 보지도, 아니 스쳐가는 눈길한번 주지도 않았던 철학과 사회과학 분야에 대해 이런저런 책을 읽어보고 또 책장에 그런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이 너무 어려워 그 다음단계로 눈길을 돌린것이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 책과 이 책이었는데, 나한테는 아직 너무 어렵다. 함부로 별점 까는게 미안할 만큼 내 내공은 형편없다. 나중에 다시한번 읽어본다면 더 큰 감동을 받으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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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어 처형될 날만을 기다리는 보에티우스는 자신에게 찾아온 철학의 여신과 대화를 나눈다. 보에티우스는 여신에게 자기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악인들에게 모함을 받아서 자신이 죽을 처지에 놓여있음을 한탄해하고 철학의 여신에게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이에 여신은 철학적 논리와 신의 이성적논리로 참된 행복과 최고의 선, 그리고 신의 섭리와 운명,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관한 이야기를 보에티우스에게 들려준다. 이책은 보에티우스와 철학의 여신과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대화문과 시로 표현하는 형태를 가진 옥중문학이다. 이 책속에 나오는 명언들을 발췌하여 적어봅니다. # 사람이 참된 생각을 내팽겨 쳐버리고, 거짓된 생각을 붙잡을때 그 거짓된 생각은 어두운 혼미함을 초래해서 참된 통찰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것이 인간정신의 법칙이다. #아무리 많은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늘부족하다고 느끼고 더많은것을 갖기를 안달하는자를 어찌 부자라고 할수있겠는가. #인간에게 주어진 행복은 완벽할수도 없고 영원할수도 없어서 언제나 근심과 걱정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재물은 한사람이 소유하고 있을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건네졌을때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운명은 불운의 모습일때가 행운의 모습일때보다 사람들에게 더큰 유익이 된다는것이다. #우리가 지닌 덕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온 행운을 보고서 우리에게 접근한 친구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줄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에게 행운이 찾아왔을때 친구가 된자는 우리에게 불행이 찾아오면 우리의 적이 되고 말것이다. 한때 친구였던 자가 적으로 돌변했을때 그것보다 더 큰해를 우리에게 끼칠수있는 재앙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이 배운다는것은 망각했던것을 떠올리는것이다. #선한자들에 대한 보상이 선자체인것과 같이 악한자들에 대한 형벌은 악 그 자체이다. #진정한 현자는 대중의 찬사를 받을때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당신이 부끄럽지 않게 행했을때 그것을 선으로 여기고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은 행복이고 선 그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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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원전 완역본으로 나온 철학의 위안. 이는 로마제국의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쓴 책으로 인간의 행복에 대한 방향성을 위한 것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성을 중시하고 신과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 이 다양한 것들이 곧 철학의 위안으로 귀결되며 우리 인간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그려집니다.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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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명예와 부유함, 권력 그리고 선하며 고귀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 똑똑하다 못해 천재급;(저자가 공손했지만 뉘앙스가...)인 아들 둘 아들 둘이 아주 젊은 나이에 집정관이 되고 자기는 권력의 핵심이면서 황제를 보필하며 원로원을 관리하는 아주 명망 높은 자리였는데 왠 누명으로 재판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반역죄로 쫓겨난 권력자가 자신의 상황에서 글을 쓴 겁니다. 왜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버렸는가..에 대한 철학의 여신이 대답해주는 건데 암튼 추천해요..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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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대 로마 제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보에티우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먼 곳으로 유배 보내져 억류되어 있으면서 처형당할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쓴 책이다. 산문과 시를 번갈아 사용하는 형식을 통해서 인생의 가장 근복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전반적으로 라틴어 원전을 매끄럽게 잘 번역했다는 대단함이 글을 읽으면서 느껴졌고, 뒷쪽으로 갈수록 내용이 어려워져 이해가 힘들었다. 어려운 와중에도 군데군데 철학이 들려주는 조언들은 밑줄을 죽죽 긋게 만든다. ㅡ 그동안 내가 네게 잠시 빌려준 것들로 풍족하게 살아온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들을 다시 거두어 갔다고 해도, 너는 내가 네게 그동안 베푼 것들을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고, 마치 원래부터 너의 소유였던 것들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불평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느냐.ㅡ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지혜들이 곳곳에 있다. |
| 보에티우스 저 [철학의 위안]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대 로마 철학자가 감옥에서 쓴 책이라고 해서 어려울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는데 저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신과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삶의 대한 여러가지 고찰로 어렵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는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