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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이 잡지의 황혼에서 마지막 춤사위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GQ 초대 편집장이었던 이충걸씨의 이 한마디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든 글들이 과거의 플래시처럼 터지며, 회오리 같은 향수에 잠시 휘말렸다. 집착적으로 치밀한 감정의 풍경에 대한 묘사, 독특하고 낯선 감각으로 정련된 표현들로 가득 차 있었던 그의 글들... 감수성이 젖과 꿀처럼 흘러넘치던 시절, 나는 전대미문의 이충걸씨의 문체에 강렬하게 매료되어, 열정적으로 탐닉하고 수없이 감격했다. 그 시절에도 그의 글은 한 번도 쉽게 내 품에 안긴 적이 없었다. 그의 글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경을 세우고 집중했어야 했다. 정성을 들여 감각을 조준하여, 두세겹의 막으로 둘러싸여 어렴풋이 실루엣만 보이고 있는 감정 속으로 뚫고 들어가면, 그제서야 그의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과 밀착하여 교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교감의 찰나에는 나만이 감지하던 특별한 전율이 있었다. 그것은, 이 책 제목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류사회의 매력적인 일꾼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소녀적 감수성을 깨끗히 게워내고, 그 속을 자기개발서와 경제경영지식으로 단단히 메우는 동안, 특별한 감정적 몰입과 애정을 요하는 그의 글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책을 펼치기 전,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재회를 앞둔 여자가 느낄 법한 복잡미묘한 감정과 두근거림에 휩싸여 긴 호흡을 한 숨 내뱉고서야 표지를 열어젖힐 수 있었다.
목차를 찬찬히 살펴보는데,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머금어졌다. 과잉-반란-피상성-남자-행인들-외양-혼자-어제. 세련되고 매력적인 모호함(역시나..)의 리본으로 가지런히 묶어둔 8개의 작은 선물 상자들을 풀면, 그 안에 어떠한 눈부신 글이 들어있을까하며 차오르는 기대감을 느끼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 어떤 파트는 차근차근 엮어진 순서대로 읽기고 하고, 눈길을 사로잡는 제목의 글만 골라서도 읽으면서, 모처럼 다채로운 주제와 낯설게 미려한 표현들과 다층적인 사색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미지의 숲을 혈기왕성한 방랑자가 되어 떠돌다 머무르다 흐느끼다 깔깔대다 안식했다.
'소더비에서 종일 머물건 말건 우리 마음 속엔 오래된 포도나무가 살아서 땅의 가치를 극한으로 이끌만큼 뿌리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나의 포도나무는 악기. 땅은 악보. 와인 농장의 진실이 존중 받지 못하면 테루아르가 무슨 소용인가? 마음의 농부로서 나의 의무는 포도나무가 테루아르를 순전히 표현하게 하는 거라고...' (P156)
'자동차와 사람으로 질식하기 전의 세상은 주인이 몇 없는 왕국 같았다. 새벽은 갈라진 달걀껍데기 사이로 빛이 들어오듯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 사는 존재에게 시간의 선물은 빛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것. 새벽의 포플러 섬유 같은 빛이 바람의 끝자락에 얹히면 공원은 순간적으로 정오보다 깊은 담청색으로 바뀌었다'(P34)
'서른이 되어서도 그 나이가 얼마나 소중하지 모르는 사람은 싫었다. 농담으로 시간이나 죽이던 이들을 가판대로 끌어들여 나 개인의 운을 점치고 싶지 않았다.(...) 독자는 옷깃을 끌어당겨 차분하게 비밀을 나누고 서로 감정적 파문을 맛보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 독자들이, 이를 테면 요리가 맘에 들었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빵으로 소스를 닦아 먹는 손님이었으면 했다'(P208-209)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통찰력이 저절로 새겨진 자유 승차권은 없습니다.'(P205)
18년이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월의 내공이 녹여진 글들을 단번에 제대로 소화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나의 책은 감격스러운 발견과 다시 음미하고픈 부분들에 대한 표식으로 온통 밑줄 투성이가 되었고, 세모낳게 접혀진 책 귀퉁이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니 마치 오랜 내 감성의 허기가 비로소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잘 먹었습니다'라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인사를 (리뷰로라도) 꼭 전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이충걸 편집장이 잡지의 황혼에서 보여준 마지막 춤사위는 근사하고 황홀했다. 사뿐히 품위있게 들어올린 발끝, 절도있지만 유연하게 공기를 가르면 뻗어내던 팔동작과 섬세하게 구부린 손끝. 혼신을 다해 펼치는 장인의 독무를 본 것 같았다. 그리고 intro,outro, 마지막 에디터스 레터에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덧씌워진 하얀 꼬깔 사이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흠뻑젖은 사내의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언뜻 본 것도 같다... 그의 마지막 춤사위에 오랜 독자로써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낸다. 커튼콜은 팔근육에 경련이 올때까지 계속 할테다.
' 글을 읽을 때 막연히 슬퍼질 때가 있다. 슬픔은 글의 힘을 증명하고, 저자의 부드러운 영혼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증명하고, 단어 자체가 갖는 힘을 증명한다. 페더러의 서브처럼 그 재능이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걸리지 않고 나에게 바로 꽂힐 때, 완전히 서로에게 속해버리는 것이다.'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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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큐를 접하면 광고나 내가 살 수 없는 물건으로 뒤덮인 페이지는 대충 넘기곤 했다. 다만 이충걸 씨의 글은 멈춰서 읽곤 했다. 어떨 때는 피식, 어떨 때는 캬아, 어떨 때는 우와, 어떨 때는 갸우뚱. 작가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가지지 못해서인지 공감-비공감의 갭이 꽤 컸다. 그래도 그 글들을 책으로 가지고 싶었던 이유는 공감과 표현의 재미를 얻은 면이 컸기 때문이고 다행이 그 예상은 맞았다(어차피 300페이지짜리 책을 사도 300페이지 다 재밌고 읽을만한 책은 많지 않다.). 기발한 표현들, 그 글을 읽는 잔재미, 특유의 독특한 관점들이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그 글을 찾는 재미들로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 특히 아무 페이지나 펴놓고 읽으면 되는 책이라 하루에 하나의 글정도를 키득대고 정독하다보면 짧지만 일을 포함해서 '해야만 하는 것들'에서 잠시 떨어질 수 있는 기분, 주어진 역할의 나. 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나'를 잠시나마 느낄 수도 있다. |
| 이충걸 님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남성잡지 GQ의 편집장이었던 저자가 매달 쓰던 에디터스 레터의 단문들을 모은 산문집입니다. 냉소적인듯 하면서도 그 안의 다정을 간직하는 글을 쓰는 저자의 감각적인 에세이가 읽어나가기 즐겁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