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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 존재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죽는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죽음이란 막연히 나쁜 것 혹은 인간으로써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마 죽음이 가지는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를 불문하고 반드시 죽는다는 필연성,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가변성,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죽음의 편재성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나쁘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고, 또 인간으로써 어찌 할 수 없는 그래서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죽음은 시공간을 초월해 불가사의한 일로 여겨졌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내세라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이 불가사의 했기에 죽음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 죽음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죽음은 철저히 개인의 사생활이 되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죽음이 가져다 주는 불안이 전통시대와는 크게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집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기에 장례식은 거의 집에서 치렀다. 하지만 오늘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따라서 장례의식도 집에서 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떻게 보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집단의 일에서 개인적인 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이 책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오늘날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의학과 생물학, 윤리학 그리고 사회학에서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에 따른 문제점들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고 있다. 현대의학의 발달은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죽음의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에 근본적으로 맞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소생술의 발전은 때때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은 그 결과와 의미에 관계된 복잡한 문제와 책임을 부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의료행위는 인간을 진정으로 위한다기 보다는 죽음을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죽음을 실험 내지는 실적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탈에 빠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먼저 이 책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파리7대학의 면역학교수 장 클로드 아메장은 인간의 죽음을 생물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40억년 전에 처음 나타나 지금까지 이어온 생명의 역사에서, 생명의 연속성은 새로운 세계가 출현하고 이전 세계는 종말을 맞는 일련의 과정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우리 인간의 세계 역시 생명으로 잉태되는 순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생성과 해체를 반복하며 조금씩 죽음의 순간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은 그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세포의 형태로 시간을 거슬러 왔다. 우리 인간은 처음 난세포라 불리는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하여 수십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존재로 변화해 나간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세포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나 파괴의 결과 또는 마모와 세월의 흐름과 같은 공격에 견디지 못해서 일어나는 내재적 성질에 따른 것이라는 게 이제까지의 통념이었다면, 현대에 들어서는 세포가 자멸과 때 이른 죽음을 유발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세포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지속성은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가 가진 자멸능력과 재생능력의 지속적인 균형에 좌우되며, 죽어야 하는 세포가 죽지 않을 경우 질병이 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저항하려 하기 보다는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더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 다른 공동저자인 유전학자 베르나르 마리 뒤퐁은 삶이 끝나는 순간이 언제인지에 대한 의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21세기 들어 의학은 새로운 종교, 즉 죽음을 포함해 모든 질병에서 해방된 건강하고 젊은 몸을 약속해 주는 종교와 같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죽음을 삶의 끝에 자리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한 사람의 사망을 말해주는 것은 의학적인 죽음이다. 그런 죽음의 의학적 정의도 시간과 더불어 변화해왔다. 예전에는 심장의 박동수가 멈추는 것이 죽음이었다면 지금은 그 기준이 뇌로 이동되었다. 그러나 의학적 소생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혼수상태나 뇌사상태의 등장으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시간과 장소와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었다면, 이제는 법적 증명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사람이 과연 언제 죽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언제부터 도덕적으로 끝낼 수 있는 지와 같은 많은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 밖에도 저자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현대 의학 기술의 발달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모두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기 보다는 노화되어 생명의 쇠퇴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저 세상에서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죽음의 공포가 이제는 이 세상에서 버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관련된 노쇠에 대한 공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세상은 각종 위험으로 넘쳐나지만 의료혜택의 확산이 죽음에서 멀어지게 만들면서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지식의 진보와 죽음을 예방할 수 있게 해주는 의료수단의 발전은, 죽음을 특별한 의미부여가 필요 없는 자연적인 생물학적 과정의 한 사건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고 프랑스 종교학 비교연구소장인 다니엘 에르비외 레제는 말한다. 죽음은 타인에 관계된 개념이다.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죽은 자신이 아니라 살아남은 타인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장례의식은 무엇보다도 살아남은 자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죽은 자들이 떠나고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처럼 살아남은 자들이 아닌 죽어가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의료진들은 생명을 연장하는 일에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과 무언가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사람은 살아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 가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한다. 저자들이 쓴 삶과 죽음에 관한 쟁점들을 읽으면서, 뇌사상태 혹은 식물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것인지,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 옆에서 우리가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