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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하는 처조카에게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철학이나 사회학, 역사학 같은 데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사회에 대한 생각이나 역사, 그리고 음악에 담긴 철학에 관심이 없는 연주자는 그냥 기술자랑 뭐가 다른가 싶은 생각에서다. 물론 연주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당연히 그 음악에서 그 사람의 삶과 철학이 담겨 나올 수 있겠지만, 사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냥 기술자와 같은 음악가나 기교만 가진 미술가들이 적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물론 내가 그 사정을 잘 알아서 하는 얘기는 아니다). 미술 같은 경우엔 태동 때부터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림에 작가의 생각이 깊이 담기기 마련이다. 또한 미술가를 포함한 예술가란 시대의 상황에 대단히 민감한 존재이기 때문에(흔히들 그렇게들 말한다) 시대의 어떤 조짐을 상당히 민첩하게 담아낼 수 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래서 그림은 당대의 가장 최전선에 선 인문학, 혹은 사회학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과 인문학을 크로스시킨 『미술관 옆 인문학』은 당연한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림을 그저 기술로만 이해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을 것인가? 그 그림에 나오게 된 연유와 그것들이 그 시대에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지 등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그 그림들의 의미가 더 생생하게 다가오리라는 건 당연한 얘기다. 그럼에도 『미술관 옆 인문학』이 좀 더 특별하다면 그건 그 깊이에 있다. 특히 ‘인문학’의 깊이 말이다. 4부로 구성된 『미술관 옆 인문학 2』은 각 부에 다섯 꼭지의 글이 있어 모두 20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글들은 모두 그림 하나와 인문학 저서 한 편을 중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거기에 관련된 그림이 몇 점 더 붙고, 또 관련되는 인문학 관련 저서와 저자들이 더 소개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저자의 관점이 더해진다. 이를테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글은 토네의 <단두대의 승리>라는 그림과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데, 우선 <단두대의 승리>라는 그림을 설명하고, 그 그림과 관련한 역사적 상황들(‘프랑스 대혁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른 그림들을 등장시키는데, 그 유명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과 함께 그와 관련된 또 다른 그림들, 비어르츠의 <마라의 죽음>, 보드리의 <마라를 죽인 코르데>를 통해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뭉크의 <마라의 죽음>을 통해서는 역사가 아니라, 뭉크라는 작가의 내면을 ‘마라의 죽음’을 통해 표현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80년대, 90년대 초반 대학생 필독서로 꼽히던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역사관에 대한 인문학적 견해를 펼치고 있다. 주관적 해석과 사실의 서술이라는 서로 상반된 역사관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그것들의 한계와 성취 등을 간단히 살피고,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할지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쓰고 있다. 어쩌면 모든 글이 이와 같은 도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글 하나하나에 대한 맛은 떨어지지만 그림을 이해하는 방식과 그것이 우리의 역사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 인문학이니, 그림에 대한 지식이나 그가 소개하고 있는 책의 내용, 저자를 암기하는 것보다 이 20편의 글을 통해서 반복되는 훈련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익숙해지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술관 옆 인문학 2』을 읽고 다시 한번 내 생각이 그르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걸 인문학이라 부르던, 철학이라 부르던, 사회학이라 부르던, 뭐라 부르던 세상과 역사에 대한 공부 없는 예술가는 그냥 예술에 대한 기술자나 다름 없을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이런 책은 ‘미술’에 대해 모르는 이가 읽어도 좋고, ‘인문학’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읽어도 좋지만, ‘미술’을 하는 이들이 읽어서 자신이 하는 작업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다른 부분은 모르겠지만, 내가 조금은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들이다. 하나는 ‘진화심리학’에서 ‘원시인심리’라 하는 개념에 대한 부분인데, 원시인심리 때문에 ‘맞다, 틀리다’, ‘옳다, 그리다’보다 ‘좋다, 나쁘다’, ‘유쾌하다, 불쾌하다’와 같은 감정이 우선한다고 했는데, 이런 특징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만 보면 ‘감정적 판단’으로 인해서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원래 진화심리학에서 ‘원시인심리’ 같은 개념의 원래의 목적은 감정적 판단의 즉각적 유용성에 관한 것 때문이다. 즉, 그런 게 왜 생겨났느냐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데 걸리는 시간보다 빨리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상황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게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걸 ‘원시인심리’가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진다고 중간 과정 없이 설명하는 것이 좀 도약이라 여려진다. 또 하나는, ‘야만성’에 대한 얘기인데, 원시사회의 야만성을 부정하면서 현대 사회에도 야만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걸 ‘야만성’을 야만적이라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또한 영아 살해가 어떤 일정 정도의 이성적 목적이 있기 때문에(한정된 자연조건에서 급격한 인구 증가가 사회 전체에 위협이 된다는 등), 그걸 단순히 야만적이라 해서는 안된다고도 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에 야만성이 나타난다고 해서 원시사회의 야만성이 야만성이 아닌지, 살해는 살해이지 그걸 이성적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지 솔직히 의문이 든다. (2013.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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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관련한 분야를 전공하다 보면 관련주의와 형식주의라는 미학적 관점을 배우게 된다. 작품 밖의 사물과의 관련성에서 가치를 찾는 것이 관련주의고, 형식주의는 그 반대이다. 따라서 미술작품을 역사와 철학 인문학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이 책의 관점은 관련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두 관점 다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이지만 미술 작품을 특히나 해석할 때에는 관련주의 미학이 더 필요할 때가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술관 옆 인문학 1권과 2권을 모두 다 읽고서 간략하게 비교해서 말하자면, 1권은 그림이 주인공이고 2권은 인문학 서적이 주인공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1권에서는 섹션을 잘게 나누고 각각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비교적 충실히 했다면 2권에서는 주제를 더 크게 잡고 다양한 인문학 서적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해설하는 데 비중을 두어서 그림과 화가에 대한 지식을 아주 많이 얻긴 어렵다. 미술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 인문학에 비중을 더 둘 것인가의 선택에 따라 독자의 호불호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그림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은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2권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 죽음, 행복, 욕망 등의 철학적 주제와 함께 사랑과 성, 역사 이렇게 총 4가지이다. 앞서 인문학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대로 인용된 인문학 서적과 배경지식이 많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하나 더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이 사람이 인문학 서적을 정말로 자기 것으로 다 소화를 한 다음에 소개를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인용한 내용이 참 많고 깊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글을 쓴 저자의 목소리는 별로 안 들린다. 자신만의 해석 없이 여기 저기서 조금 잘라다 붙인 짜깁기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욕이 되려나.. 이렇게 불평을 쓰긴 했지만 다양한 그림을 보며 인문학 지식을 얻고 또 역사 이야기도 읽을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십자군 전쟁이나 프랑스혁명사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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