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지나온 삶을 아프게 하는 책들이 있다. 내 삶에만 좌절하고 있었기에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 삼엄한 호위를 받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제기동을 지날 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안에서 돌멩이 하나가 대통령의 차를 향해 날아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중무장한 군인들이 교정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형과 누나들은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최루탄이 수없이 발사 되었고 수업하던 우리들도 콜록거리면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삼선개헌이 뭔지 알지 못하던 나는 데모하는 형들과 그들을 쫓는 군인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나는 목사님의 처남을 통해 간간히 외신에 보도된 광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데모하다가 잡혀간 친구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 역사의 현장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난 그저 배운 대로 기도하는 것이 이 나라를 위한 것인줄 알았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라” 수 없이 듣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면 내가 역사 앞에 죄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합왕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엘리야나, 나라의 멸망을 알았기에 눈물로 호소하던 예레미야 선지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는 목사님들이나 친구들은 엘리야나, 예레미야, 이사야 선지자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다. 또 데모는 신앙인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 주변에서 끌려가거나 맞거나 감옥에 간 사람들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 최성각의 삶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20대 중반, 나는 광산촌의 교사였다.’ 저자는 역사의 아픔을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저자보다 한 살 어린 나는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동동주에 쩔어 있었고 삶의 허무만 노래하고 있었다. 책을 가까이 한 것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삶은 회색빛이었다. 나 개인의 아픔 때문에 역사의 아픔을 외면했던 나의 20대는 보잘 것 없었다. 골목에 똥이 그득한 광산촌 사택 끝자락의 한 자취방에 엎드려,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흐느껴 울었던 저자는 그 아픔을 책으로 이겨 나갔다. 21살에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31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저자의 이력을 보면 문학에 대한 열정과 글 솜씨도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작가 최성각이라는 이름을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저자를 알게 되었다. 저자는 대중적인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글쓰기를 출세의 도구로 삼지도 않았고, 또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지도 않았다. 기존의 상업적인 대중음악과는 달리 독립된 자본으로 음악을 꾸려나가는 인디밴드들이 있는 것처럼, 영화에도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작가 정신에 충실한 작품을 추구하여 만들어지는 독립영화가 있는 것처럼 나는 작가 최성각을 독립작가라고 부르고 싶다.(3.1운동의 유관순 누나를 생각한다면 오해다^^) 최성각은 자기 스스로를 생태주의 작가라고 부르고 있다. 생태주의는 ‘환경 문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질서들의 문제가 겹치며 만들어 낸 표면적 증상일 뿐이다. 따라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에 있어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다음 사전에서 인용) 그렇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는 생태 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이 사회 문제를 비판하며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작가가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쓴 서평집이다. 이 책이 일반 서평과 다른 것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는 저자가 살아온 삶과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 또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써내려간 에세이에 가깝다. 이 책을 손에 들고 난 겉표지를 5분 이상 물끄러미 바라본 것 같다. 왜냐하면 슬리퍼를 신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커다란 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 저자의 모습이 너무나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사진 한 장으로 저자의 삶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이미 56세나 먹은 늙다리 아저씨지만 시골에서 오리와 닭을 키우며 자유인의 삶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오늘도 책만 읽는 것이다. 이 자유인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 했는지 옆에 있는 강아지의 표정이 압권이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이런 표정으로 강아지가 최성각 작가를 쳐다본다. 이 책은 3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1부 ‘쓸쓸한 젊은 날, 책으로 겨우 버텼다’는 작가의 젊은 시절에 영향을 주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다. 박정희, 전두환이 집권하던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최성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취방에 홀로 엎드려 우는 일이었다. 그때 그의 울음을 의미 있게 해준 책들이 헨리 조지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 이태준의 '밤길',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체게바라의 자서전, 체게바라 평전’ ‘오리아나 팔라치의 한 남자’등이었다. 책은 한 사람의 사상체계를 완성시켜 주는데 최성각은 젊었을 때부터 이미 주류의 삶보다는 비주류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토양을 만들어 놓았다. 2부 ‘시대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시대를 향한 책읽기다. 최성각에게 책읽기는 시대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시대를 변혁하는 방법이다. 그는 책을 읽으며 잘못된 국가권력, 권력과 하나가 된 대기업의 힘, 소외된 자를 약탈하는 사회적 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하는 양심- 카스텔리오와 칼빈>에서는 칼빈을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카스텔리오의 입장을 두둔한다. 칼빈이 누구인가 개신교 특히 장로교에서 거의 하나님의 수준에 올라가 있는 종교 개혁가다. 그는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독선은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신앙인을 단죄하고 말았다. 그리고 화제의 책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는 저자 김용철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한다. 법조인으로 삼성 입사 1호였고 7년 내내 승승장구 엄청난 신뢰를 받아 출세 가도를 누렸던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 일화를 소개한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임원들의 윤락사건을 무마해준 대가로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났는데 며칠동안 쓴 경비가 1500만원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소외감 느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삼성일가에 대해서는 ‘함량 미달의 얼치기 귀족’이라고 쏘아 붙인다. 늘 부자가 되어 편하게 살고자 하는 소시민의 생각에 가차 없이 저자는 메스를 가한다. 행복은 물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 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3부 ‘우리에겐 바로잡을 시간밖에 없다’에서는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다룬 책들을 소개한다. 프리먼 하우스의 <북태평양의 은빛 영혼 연어를 찾아서> 멸종위기에 있는 연어를 보호하는 것이 숲을 보호하는 것이고 연어의 행복과 인간의 행복은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스콧 니어링 <스콧 니어링 자서전>에서는 따라 살기에는 벅차지만 공감하고 바라보기에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카피를 통해 그의 삶을 요약해 준다. 환경과 생태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3부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더 풍요로워졌는가?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우리가 과연 더 행복해졌는가? 풍요는 어디에 소용되는 가치인가? 풍요는 단지 풍요를 위한 것인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 풍요가 만약 인간의 복된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조국 근대화가 얼추 완수된 이 시점이라면 풍요로 인해 우리는 바랄 데 없이 행복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오늘 행복한가?” (155쪽) 저자의 이 질문에 행복하다고 답할 사람이 몇 %나 될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서민들의 많은 행복을 빼앗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큰 행복을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 대다수의 많은 국민들은 좌절하고 고통 속에 있지만 이 정부는 괜찮다고 한다. 저자는 이 정부를 향해 딴죽을 걸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딴죽을 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자신이 읽은 책을 통해서 말한다. 저자 최성각은 이 시대에 주류보다는 의식이 있는 비주류가 존재해야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 비주류의 힘이 이 땅에 힘 있는 사람을 견제하고 나아가서 자연을 지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학습과 사고의 훈련을 통해 생기는 것이다. 저자가 읽은 책들은 잠들어 있는 나의 의식을 깨울 것이다. 그가 읽은 많은 책중에서 몇 권의 제목을 기억하는 것은 나도 의식이 있는 비주류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
|
생태주의 작가라는 표현에 좀 까칠해졌었다. 왠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아닌척을 잘하는 내숭쟁이라서 그런지 나 이런 사람이오하고 내세우는 사람들을 본시 좋아하지않는다. 작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책 표지에 부제처럼 붙었는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에 괜시리 속마음이 삐죽거려졌다. 본인이 그렇게 지칭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모든 사람은 다 기본적으로 생태주의자가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었나보다. 그러고는 책을 읽고나니 내가 삐죽거린 게 이렇게 민망할 수가. 뭐 생명사상가라고 하면 어떻고 환경운동가이면 어떻고 작가의 표현처럼 '얼치기 생태주의자'이면 어떻겠는가. 그런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가슴을 파고드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잡설'들이었다. 도대체 잡설이 이런거면 정통 '문학'이나 '철학', '인문학'은 어떤건지 잘 모르겠다. |
|
이 정도쯤 되면 '나, 책 좀 읽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가 보다. 거대한 책을 읽은 느낌이다. 소개하고 있는 책들도, 소개하는 내용도, 어지간해서는 따라 읽으려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
|
나에겐 일종의 카탈로그와 같은 책이다. 서평 중에서도 평론가가 쓴 서평이 아닌 책을 좋아하는, 소설가라던지 아니면 일반인들이 쓴 서평을 좋아라한다. 평론가들은 이성으로 무장한 것처럼 자위하며 서평을 쓰는 느낌인데다 평가를 직업삼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가나 기타 일반인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평을 쓸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게다가 이 아저씨, 관점이 심하게 뚜렷하다. 난 이렇게 관점이 심하게 뚜렷한 사람도 좋아라 한다. 나하고 다른 관점이라도 상관없다. 다른건 받아드릴 수 있지만 이도 저도 아닌 박쥐같은 사람의 글은 견딜 수가 없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 책-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생태주의 작가인 최성각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표지에서 쩍벌남 포즈로 책읽는 모습이 맘에 들었고 출판사도 맘에 들었고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나하고 맞진 않지만, 어찌 되었든 정직하게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는 그 자세가 너무 맘에 들었다. 덕분에 생태에 관심이 없던 내가 생태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책을 통해 다른 좋은 책들을 알게된 점이 좋다.
'자유'를 중심으로 하되 억압적이지만 않다면, 여러 사상으로의 사고의 확산을 하고자 하는 시기, 좋은 책을 접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
|
헨리 조지는 토지를 공동소유하거나 엄청나게 높은 지대를 물리고 다른 세금은 다 없앰으로써 인류의 궁핍을 타개해야 한다는 사상을 필생의 신념으로 밀고 갔다. 리카도는 비관했고, 헨리 조지는 토지를 사회 공동체가 관리할 수 있는 인류의 지혜와 이성적인 힘을 낙관했다(24쪽).
서양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헨리 조지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을 읽고 저자가 쓴 글이다. 우리나라에는 종합부동산세라는 것을 시행할 때 이런 저런 말이 많았지만 헨리 조지의 생각은 거기에서 더 멀리 가 있는 것 같다.
본시 반권력적인 시민운동을 무슨 새로운 형태의 권력으로 알고 설치던 1세대 시민운동가들이 그 추한 정체를 드러내면서 몰락한 뒤, “범죄의 징후가 짙은 질 고약한 지도자라도 좋다,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다오”라는 자기 파괴적인 선택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 지도자들은 산천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에서 밤낮없이 우리 산하를 망가뜨리고 있다(159쪽).
이 글은 저자가 김성동의 생명에세이를 읽고 난 뒤 쓴 글이다. 하지만 그런 시민운동가라는 자들이 지금도 있다. 시민운동을 하는 자들이 권력의 맛을 알면 더 심한지도 모르겠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뼈다귀도 안 남긴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일찍이 보기로 한 것, 보기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살고 있다. 세상은 열려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은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감옥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누가 닫혀 있는가? 인간의 야만에 침묵으로 대응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동물들이 닫혀 있는 존재일까? 기계처럼 자폐적인 사고방식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갑갑한 우리 인간들이 닫혀 있을까?(295쪽).
존 쿳시의 동물로 산다는 것을 읽고 쓴 글이다. 인간은 그동안 동물을 너무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물론 자연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사라는 것을 생각할 때 많은 반성이 있어야 진정 지속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저자가 생태주의 작가라서 그런지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 많았다. 책은 나의 담요이고, 모닥불이고, 때로는 몽둥이었다(4쪽)는 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책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책에 빠져 사는 삶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좋아 보인다. 책을 많이 읽되 실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공자의 논어의 첫 머리를 배우고 또한 익히면 이라고 해석하지 말고 배우고 배운 그대로 행동하면이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한다. 마음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운명을 정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습관은 실천의 개념일 것이다. 배움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회라면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도 없어야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면서도 읽은 책이 너무 적다는 반성도 해 본다. |
|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는 제목과 고목 아래의 데크에 앉아 슬리퍼를 신고 쩍뻘남(?)처럼 다리를 벌리고 편히 앉아 책을 읽는 저자의 사진은 하나의 선입견을 갖게 했다. ‘책을 좋아하는 어떤 이의, 요즘 유행하는 그렇고 그런 서평집이구나’ 라는. 표지를 넘기면 뒤이어 나오는 머리글을 읽어봐도 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금언金言이 아무리 ‘책 속에 길이 있다’고 권해도 책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성에 따라 제멋대로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옛날에야 책을 읽는 것이 곧 벼슬로 이어지거나 교양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첩경이었지만,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책으로 꼭 무엇인가를 얻고 취할 목적으로 책을 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비록 특별한 재주 없이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책을 좋아했다. 마치 책을 탐하는 게 나의 본성인양 착각할 지경이었다. 새 책의 잉크 냄새가 좋았고, 낡은 책이라도 그 속의 그림들이 좋았다.” 만약 환경책 목록이 실린 부록까지 합해 475페이지나 달하는 이 책을 머리글만 읽고 덮었더라면, 끝내 ‘두 차례의 신춘문예에 당선했다는 최성각이란 작가가 책을 좋아했고 흔하디 흔한 서평집을 냈구나’ 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의 문장 때문에. “책은 피로에 지친 나를 덮어주는 따뜻한 담요였고, 세찬 바람을 막아주는 천막이었고, 아주 가끔은 모닥불이었고, 때로는 등불이기도 했으며, 언제나 의지할 기둥이었으며, 책 속에 빠져 있던 시간은 혼자만의 잔치판이기도 했다. ”라는 5개의 쉼표로 이루어진 이 문장 하나 때문에 두툼한 그의 서평집을 반나절 만에 읽고 말았다. 뒤적이듯 별 기대 없이 시작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자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독서잡설’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그가 기고했던 서평 모음집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서평과는 좀 다르다. ‘책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저자 본인도 밝혔듯 에세이집에 더 가깝다. 에세이 같기도 하고 서평 같기도 한 이 책을 굳이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에세이면 어떻고 서평이면 어떠랴, ‘더럽고 냄새나는 산업문명에 오염된 하늘 밑의 벌레들이 반드시 읽어봐야 될 한 바가지 석간수 같은 글’이라고 말한 소설가 김성동의 추천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양서인 것을. 김성동은 이 책에 대해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이 책에 시린 몇 편은 안 읽는 것이 좋겠다. 너무나도 무섭고 끔찍하며 그리고 슬픈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라고. 최성각의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페이지수가 넘어갈수록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슬펐다. 거친 세상이 두려워 적당히 타협하며 살기로 작정한 내가 얼마나 비겁했는지, 풍요롭고 안온한 삶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물질적이었는지를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총 3부로 나뉘어 414페이지의 서평에선 내가 되도록 피하려고 애썼던 책들을 소개되고 있었다, 사실을 알게 되면 너무나 마음이 불편해서 차라리 잊고 지내자 했던 주제들(환경과 사회, 빈부의 격차와 같은)의 책들. 말랑말랑하고 읽기 좋은 저자가 말한 ‘식은 죽’같아 찬장에 올려두고 언제든 떠먹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신영복의 《청구회 추억》정도이고, 나머지는 생각을 하며 읽어야 하는(생각을 하다보면 복장 터지는(?)) 것들이다. 읽는 동안 가슴이 쿵쿵 뛰고 가슴을 치고 싶었다. 하마터면 이렇게 괜찮은, 아니 훌륭한 책을 그냥 놓칠 뻔했다. 최성각의 또 다른 책을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의 생태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훌륭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일약 시민운동으로 명망가가 되어버린 성직자들을 가까이에서 봤더니만, 사람을 그 학벌과 직위와 신분으로 은근슬쩍 가려 대하기 시작해 쓸개를 씹은 심정이 된 기억이 있다.” 라고 생각한 그의 인품에 반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쓴 책은 무조건 신뢰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언컨대 흔하디흔한 서평집이 아니다. 생각을 하고, 또 해야 하는 생태주의자의 에세이집이다. 혼자 읽기 아까운..
|
|
고기를 좋아하고,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고, 분리수거도 대충대충 하고, 식당에서 반찬도 잔뜩 남기는 나는 일단 환경 운동가나 생태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구와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다르지 않은데, 온통 그들의 어깨 위에만 짐을 지운 채 나 혼자 흥청망청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탓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