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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흥미로웠다. '평등은 미래진행' +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린 철학가들의 평등 이야기" 하나같이 그저 흘려보낼 수는 없는, 곰곰히 되새기게 만드는 표지의 글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유명한 철학자들에게 '평등은 무엇인가'를 묻고 그 평등의 기본 조건 즉,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되는가를 철학+평등+여성주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서양 철학은 철학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던- 자유로운 백인 남성의 주도로 진행되었고 그들의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에 다양한 계급, 빈부, 인종이 들어갔으나 끝내 여성의 시선 -그들의 철학적 성취에 비교하면 더더욱 실망스러운-으로 제대로 된 담론과 상상을 하지 못했음을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자들의 철학으로 하나하나 보여준다. 물론,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고 사상가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p.4) 라며 들어가는 글에 그 한계는 인지/인정하고 시작하며 독자들에게 철학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을 함께 제공하여 철학자들의 사상에 날선 비판을 가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과 사상이 시대정신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고대, 중세의 빛나는 철학과 사상이 지금에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철학을 하는 모두 (독자나 철학가)는 비판적 다시 읽기를 해야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전달한다. 책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 : 인간에 대한 관찰과 가능성 근대 : 근대적 인간에서 배제된 여성 현대 : 혐오와 폭력 으로 큰 주제를 정하여 각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초대한 뒤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의 핵심을 제시하고 그들의 철학과 사상에 그 시대와 사회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알려준다. 그리고 나서 각각의 서양 사상가들이 여성에 대해 어떤 관점과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더 큰 위대한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던, 백인 남성 사상가들이 거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늘 선지자와 공감자는 있는 법!- 뛰어넘지 못한 시대와 본인의 '성역할' 관념의 어디가 잘못 되어 있는지에 대해 각 사상가의 책에서 발췌한 문구, 철학가와의 Q&A 코너를 통해 밝힌다. 교과서에서 배우고 막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사상가들의 철학이나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창피하게도- 꼼꼼히 정독하지 않았던 그들의 책에서 인용한 문구들은 사실, 좀 충격적이다.
단순히 시대적 한계로만 원인을 찾기에는 계몽의 시대를 살았던 '그' 칸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도 이 책의 제목에 다시 불을 밝혔다.
평등은 과거의 투쟁을 거쳐 선조들의 노력으로 지금 존재하여 누리는 것이 아니고 '평등'을 가져오기 위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노력하고 나아가는 현재의 노력이 겨우 미래가 되어서야 '평등함으로의 변화'를 '진행'시키는 것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고대의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그리스 공동체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역할/고정관념이 정치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에 기반한 제도가 확립/발전/수정을 거치며 경제력, 자본에의 접근 가능성, 소유와 활용을 통해 과거의 노예제와는 닮은 듯 다른 종속관계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것을 '교육'이나 '계몽', '문화'를 통해 내면화 하는 근대를 넘어 법과 제도, 인간의 이성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이 철저히 파괴된 세계전쟁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차별, 억압, 혐오, 폭력의 보편적임과 평범함을 다루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적으로 임신, 출산이 가능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받고,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도 조금씩 지평을 넓히고 성장해 온 여성인권에 대해, 책을 읽으며 화를 내고 슬퍼하기도 하며 생각해 보았다. 저자들은 독자가 책을 읽은 후 남성혐오적 시선으로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의 '편견'에 갇힌 철학자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바라고 쓰진 않았을 것이다. "~해야 한다"라는 당위의 문제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 개인의 선택에 족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는 아렌트의 예를 보면 확실히 다가온다.
책에서 '여성'이라는 말을 특정 종교/국가/이념을 가진 집단으로 바꾸면 왜 '평등'이 인류의 평생 과제인지, 화들짝 놀라며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떠한 기준으로든 구별될 수 있는 두 집단을 만들어 대립시키고 갈등을 야기하며 어떤 '권력'이 시대를 지배할 힘을 계속 공고히 다져가는지 우리 시민들은 둔감해지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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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이 아니라 ‘성향’에 따라야 재능이 빛난다! [서평] 『평등은 미래진행형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철학)』(김윤희, 송샘, 양명운 외 1명 저, 다온북스, 2020. 04.10.)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고 사상가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평등은 미래진행형』은 여성에 관한 핵심 문제를 다양한 쟁점들과 연계시켜 고민할 기회를 제공한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관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당시의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이를 미래로 전개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사상가는 그 시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후대에도 계속해서 인간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철학과 사상이 시대를 뛰어넘어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당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다시 읽히고 논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전에 대한 해석 역시 시대정신과의 조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전에 대한 반복적인 해석에만 그친다면 교조주의에 그칠 뿐이다. 철학자들의 여성관에 대한 경험들 첫째로 나온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남성과 여성이 어떤 기술이나 일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고 판명되면 서로 다른 일에 배정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남자들은 아내들도 같은 업무에 종사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과도 같다. 플라톤은 성별에 의한 종적 차이란 없고,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통치에 재능이 있으며 적절한 교육을 받는다면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성별이 아닌 성향에 따라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당시 그리스 여성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에 대해, 정치 분야에서 남성과 같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이성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저서에서 “자유민의 절반을 여성”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그렇다면 근대는 어떨까. 근대 철학자로는 루소, 밀, 니체, 칸트, 살로메 등이 소개되었다. 개인의 시대인 근대에서조차 여성은 여전히 개인이 될 수 없었다. 한 사회나 조직 내에서 소수자 혹은 유일한 존재로 남아있는 한 여성은 개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루소의 경우 그가 남긴 저작의 가치만이 오늘날까지 크게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루소는 애초에 제대로 가정을 꾸리고 책임질 의사가 없었음에도 결혼을 하였으며, 자식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비정한 남성이기도 했다. 루소는 여성이 능동적이지 못하고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보았다. 이는 독립적이고 지성을 갖춘 여성과 제대로 된 교감을 경험해본 적 없는 개인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었다. ![]() 지적인 여성과 교류한 니체와 밀 존 스튜어트 밀은 성별이나 국가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인물과 교류했고,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으로 지식과 사고의 개방성에 영향을 받았다. 지적인 여성들과 학문적 교류를 했고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개개인의 다름이 차별과 종속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이러한 철학자들을 통해 우리는 여성성과 남성성은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적 편견은 유능한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정말 다양했다.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제도는 사회 구성원의 충분한 논의를 바탕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여명기에 여성은 남성에 비해 육체적인 힘이 부족했고, 생존을 위해 남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애썼고 이는 모든 여성이 일부 남성에 종속되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결과가 지성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성차별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은 자각해야 한다. 밀은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이미 당시에 발견하고 공론화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했다. 비주류인 여성이 사회와 가정에서 제2의 성으로 길러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19세기 여성 해방 페미니즘이 여성성을 죽이는 운동이라고 여겼다. 남성과의 동화를 통해 여성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다. 시대성을 갖춘 글은 당대에는 반짝할 수 있으나, 시대성이 사멸하고 나면 무상하게 빛이 바란다. 하지만 비시대적인 글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기에 영원을 얻게 된다. 철학자의 여성관이 그가 겪은 시대정신 및 상황과 개인사 중 어디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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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어떤 기자가 쓴 페미니즘책은 별로였다. 이 책은 철학자들의 생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얘기한 거니까 읽을만하다. 철학은 밥을 먹여 주지는 않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여성을 여성답게 할 것 같다. 미투운동은 잘 일어난 것 같다. 하지만 여성 남성을 서로 적으로 만드는 건 이제 그만하고 성평등과 성화합을 좀 말했으면 좋겠다. 밀이 여성참정권을 말했던 게 밀의 아내가 굉장히 지적이고 밀의 책들을 전부 편집해주고 아이디어를 줬다. 프랑켄슈타인도 남성이 쓴 줄 알았는데 메리 셀리라고 엄마가 메리 울스턴 크래프드라고 페미니즘책에서 봤던 여성이 썼다. 페미니즘책을 읽다보니까 뛰어난 여성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자부심도 생기고 그 책들을 읽다보니까 나도 능력을 키워서 남자도 내가 선택해야 겠다. 저자들이 외대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분들이다. 여성의 억압과 소외를 이야기할 때 여성은 시대와 사회에 갇힌 존재들이다. 사상도 시대의 산물이고 시대나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 철학의 세계도 여성의 눈이 아니라 남성의 눈으로 대변해져서 그 세계는 반쪽의 세계이다. 이 책은 과거 철학자들의 그시점도 반영을 하면서 여성주의를 재조명하려고 한다. 철학자들이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각자의 시대에 갇혔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저작이 고전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계속 읽히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철학이 시대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이다. 철학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깨우침을 얻는 학문이다. 자신이 아는 지식에 만족하고 거기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여 자신의 사상에 폭과 깊이를 더해야 한다. 정말 공감하는 얘기이다. 난 압도적인 지식의 우위를 선점하고 기존 지식에 갇히지 않고 계속 한 차원 높게 올라가고 싶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는 남녀로 구성된다. 역사와 이론 영역의 성평등에 관련한 논의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의 틀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요즘에 여성 혐오에 맞서는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차이에 대한 혐오와 분노는 사유하지 않음에서 발현되는 비정상이다. 이 책에서 나오는 여성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가 유일하다. 여성화가에 대한 책도 읽었는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아, 프리다 칼로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여성으로서의 자부심도 생기고 그녀들의 너무 힘들었던 삶에 마음이 아팠다. 한나 아렌트는 항상 소수의 자리에 섰다. 한나 아렌트는 로스쿨 문제를 풀 때 나왔다. 아르테미시아도 로스쿨 문제를 풀 때 나왔다. 소수는 수적으로 작은 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대칭적인 권력 구조에서 열세에 놓여있는 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시대에 갇혀 있다. 그녀가 살던 때는 여성과 유대인에게 차별적이었다. 개인을 강조하던 아렌트와는 달리 당대는 그녀를 개인이 아닌 여성, 유대인, 유대계 여성으로 가두었다. 철학자의 사상을 분석할 때 그 철학자의 삶을 배제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렌트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사회 민주주의의에 동화된 사람들이었다. 사회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자였겠지, 프리다 칼로 부모도 사회주의자이고 왜 이렇게 사회주의자 부모가 많냐,,, 아렌트는 일곱 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열세 살에 어머니가 재혼하며 새아버지의 자녀와 어머니를 공유했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에 대한 불완전한 공유는 아렌트를 성장기에 외롭게 만들었다. 그 시간에 사색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사색은 아렌트가 정치사상가가 되는데 영향을 미첬다. 1924년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 입학하며 그의 삶에 새로운 만남과 학문의 길이 시작되었다.
열여덟 살의 아렌트는 이곳에서 서른다섯 살의 하이데거를 만났다. 두 아들의 아버지였던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집필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이 둘은 평생 편지를 주고 받았다. 젠탈르스키도 그렇고 프리다 칼로도 그렇고 아렌트랑 비슷한 연애구조를 가졌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연인으로 학문적 동료로 변화하며 주고받은 편지는 세상의 편견과 선입관을 대신해 실제 둘의 관계를 보여 준다. 아렌트와 하이데거는 연인이자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지만 아렌트의 박사과정은 하이데거가 아닌 카를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진행되었다. 야스퍼스도 책에서 읽었던 사람이다. 1928년 아렌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연인기를 지나 맞이한 두 번째 시기에 이 둘은 역사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다. 하이데거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총장에 임명된 후 총장 취임사를 통해 나치즘을 지지했다. 1920년대부터 나치당원이었던 아내 앨프리데의 영향을 받아 그 역시 나치즘당원이 되었다. 아렌트는 독일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취득을 금지당햇으며 시오니스트 조직에서 반유대 표현을 수집하고 정리한 일을 계기로 체포되었다. 아렌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하이데거는 나치당원으로 승승장구하며 나치의 선전 인물이 되고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박해의 대상이자 저항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남자도 다 소용없다. 자기자신 혼자만 중요한 거다. 아렌트와 하이데거는 멀어지고 이 시기에 아렌트는 망명 중인 독일 출신의 시인이자 전 공산주의자인 하인리히 블뤼허를 만나 결혼한다.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나중에 또 다시 만나는데 그때는 하이데거가 나치 전력때문에 강의가 전면 금지된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구명을 지지해줬다. 왜 해주냐,,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용서로 반유대주의 혐의에서 벗어났다. 하이데거와 연인이었고 하이데거를 용서했다는 이유로 여성사상가로서 비판 받고 폄훼됐다. 하이데거와 관게로 인해 아렌트를 여성으로 읽으며 그녀를 성별에 가두려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별과 민족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직 개인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선택하는 사람으로 살려고 했다. 그녀를 유대인으로 보지만 아렌트 자신은 자신을 독일인으로 봤다. 아렌트는 타인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되고 스스로는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해야 하는 생을 살았다. 유대계 여성이라는 집단 정체성으로만 그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를 독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 인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해야 했다. 그녀는 고향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었고 그녀를 독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일종의 배신처럼 여겨졌으며 그렇다고 해서 독일인 내부에서 독일인으로 제대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타인에 의해 인정받아야만 집단에 속하거나 벗어날 수 있던 시대를 지나오며 그는 집단이 아닌 자신 개인에 집중하는 것을 택했다. 아렌트는 스스로를 철학자라 인식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정치이론가로 규정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냐가 중요하겠지,, 개인의 삶이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는 시대를 겪어내며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여전히 유대인 여성으로 존재해야 했고 그러한 이름으로 시대에 갇힌 삶을 살았다. 개인의 시대인 근대에서조차 여성은 여전히 개인이 될 수 없었다. 한 사회나 조직 내에서 소수자 혹은 유일한 존재로 남아 있는 한 여성은 개인이 될 수 없다. 사회 내의 유일하거나 몇 안 되는 여성일 경우 그의 개인적인 삶과 말, 글은 모두 여성 전체를 대변하거나 대표하는 것이 된다. 유일한 여성 철학자는 철학자 개인이 아니라 여성으로 일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자신을 집단으로 분류하여 가두려는 시도를 평생에 걸쳐 단호히 거절해왔다. 철학은 남성적인 것이라고 가두려해도 그녀는 개인으로 살고자 분투했다. 여성이라고 해서 개인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아렌트는 여성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 자체로 존재하고 싶다고 표현했다. 이런 아렌트를 성별과 민족으로 제한한다면 오독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여성 철학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 될 때 비로소 그의 사상이 개인의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다른 남성 철학자의 경우 삶과 사상을 분리하여 분석하고 다루어지는 반면 여성의 경우 반드시 삶과 함께 해제된다. 사상은 살아온 삶과 시대의 영향에서 분리될 수 없지만 성별을 이유로 그 비중을 달리 보거나 다른 기준으로 다뤄서도 안 된다. 아렌트는 유대인 가정이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았다. 20대 초반까지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시각은 자신의 스승인 야스퍼스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그런 전쟁과 나치즘을 경험하면서 시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렌트는 독일 나치즘이 하는 짓을 보면서 방관자로 살 수 없었다. 그녀는 유대인 혐오 표현을 모아 정리하는 것은 나치의 골포 프로파간다 활동에 반하는 것이기에 신변의 위협에 시달렸고 체포돼서 독일 국경을 넘어 망명한다. 청년 알리야에서 활동하며 반유대주의 역사 자료를 계속 수집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전쟁과 망명의 경험, 그리고 반유대주의 역사에 대한 탐구 과정은 아렌트에게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여전히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만을 강조하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달리 아렌트는 유대인을 넘어 개인으로서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아렌트를 처음 만난 건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와 함께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진술을 말하기 무능력이 생각의 무능력이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괴물 같은 악마라기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평가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출간 이후 아이히만이 지적인 사람이었지만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악의 평범성을 설명한다. 아이히만에게는 악마성이 없으며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려하는 단순한 심리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이런 공감 능력이 아렌트 사상의 핵심이다. 공감 능력의 부재가 살인의 책임을 면해주지는 않는다. 독일인이 특별히 악마성이 있는 게 아니라 문제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아렌트의 책은 아이히만을 절대 악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이 책은 유대인과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금서로 분류된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대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게 된다.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에 있어서 전제주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대중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 하더라도 대중이 없이는 어떠한 권력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대중은 그냥 다수의 사람이 모여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대중은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인간 집단이다. 정치적 의사 표출을 위해 집단적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대중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은 거창한 이성적 사고를 거쳐서 이를 행위로 옮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의사 표현보다는 집단적 감정 표출이다. 대중의 탄생은 잉여 인간의 등장으로부터 비롯된다.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자신의 노동력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 개성과 다양성이 사라지고 삶이 획일화되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인 잉여 인간으로 느낀다. 잉여 인간들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으며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 혹은 지도자를 바란다. 분노에 찬 대중인 폭민들의 집단성, 폭력성, 획일성 등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할 수 있는 지도자의 출현으로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등장이다. 나도 요즘에 정치에 관심이 있었는데 정치가는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 나를 구원하는 건 나의 실력과 하나님뿐이라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전체주의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 및 재생산하기 위해 끓임없이 대중들을 창조한다. 대중들을 창조한다는 것은 그들의 분노를 이용하고 분노표출의 대상을 설정해 준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의 획일화가 인간성을 파괴할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대중 속에 있는 개인은 대중밖에 있는 대상과 상호 교감할 수 없다. 개인과 대상 사이에 집단이라는 장애물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집단은 개인과 대상 간의 교류를 희석시킨다. 대중이라는 존재는 다수에 속해 있다는 감정, 세상에 대한 분노, 자신들이 옳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개인의 눈을 가린다. 이 때문에 타자의 상황, 감정 등은 대중 속의 개인에게 도달하지 못하며 그의 인간적 반응,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이 구조 속에서는 타자에 대한 대중의 반응만이 남는다. 대중의 반응은 곧 전체주의의 움직임이고 인간성과 합리성이 결핍된 채 지도자의 입맛에 따라가고 있다는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나 분노에 사로잡힌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전형으로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있는데 사상적으로는 반대라고 한다. 지도자가 가진 무소불위의 군력은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 이들은 대중의 지지를 이어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통의 적을 상기시켜 그들의 분노를 자극한다. 히틀러의 경우는 분노의 대상을 유대인으로 설정하고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였다. 잉여인간을 만들기 위해 히틀러는 개개인의 다양성을 없애고 집단적인 문화와 상호 감시 체제를 만들었다. 이들은 대중의 지지를 근거로 악행을 저지르고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여 수백만을 살해했고 소련은 부르주아나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을 가두고 살해했다. 이런 악행은 대중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다. 요즘의 적폐청산과 막말프레임같은거네,, 전체주의는 지금도 되살아나고 있다. 지역주의도 극명하게 되살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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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내일을 그리는 사람들의 신념이나 미래를 그리며 버티는 노력, 이를 폄하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바라는 개인상이나 인재상, 개인들이 바라는 사회제도나 관련 인프라의 구축, 우리는 누구나 평등을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차이와 차별을 원하기도 한다. 그만큼 사람은 주어진 환경이나 직업적 가치나 직급, 지금 살아가고 있는 조건들에 따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지라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되며 이는 어쩌면 당연한 정서적 반응인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을 알아야 하며, 당대에는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가받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논리나 이론을 배우며,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 하거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며 삶의 방식이나 인생을 대하는 나름의 처세술, 자세 등을 배워야 할 것이다. 책이 주목한 의미는 평등이라는 단어이며, 이는 사회학적으로 봐도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용어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완전한 평등을 바라진 않고, 우리가 대세로 인정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나 물질적 가치는 항상 차이와 차별을 종용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인 해석이나 성향, 개인의 이념에 따라 평등이라는 용어가 매우 위험하게 활용 될 지 모르나, 이는 잠시 접어두며 진정한 의미의 사회의 안정,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 상승은 무엇인지, 항상 미래에는 장미빛 전망이 쏟아 질 거란 막연한 희망과 기대, 이런 가치들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하며 비판적 사고를 갖는 것도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혹은 살아가는 하나의 자세가 될 수도 있다. 서양철학을 주로 얘기하며 근대철학, 나아가 현대철학에 기여한 다양한 학자들의 논리와 이론을 소개하고 있어서, 교양학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평등은 미래진행형이라는 말처럼, 항상 평등이라는 용어를 통해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정말 희생하거나 배려하며 모든 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기여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법이다. 너무 편향적인 시각을 갖지 말고 다양한 관점에서 조금 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며, 평등이 주는 긍정적 현상과 우리가 이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접목시켜 활용 할 것인지, 나를 위한 방향성도 좋고, 넓은 의미에서의 풀이도 괜찮을 것이다. 책을 통해 왜 저자는 평등에 주목했는지, 배우면서 공감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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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후원해 준 어머니뻘의 바랑 부인과 연애하고,오직 귀족 부인들과 관계를 맺어왔다.이후에는 온전한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여성들과 결혼하여 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버리는 등 책임감 있는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가정이나 사회에서 여성을 온전한 대화와 관계의 상대로 접해본 적 없기 때문에 여성은 능동적이지 못하고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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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미래진행형이라는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아직도 불평등한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니 플라톤부터 칸트, 니체, 한나 아렌트까지 시대적 한계에 부딪힌 철학자들에게서 배우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용이 흥미로웠다. 나 또한 대학원을 다니면서 페미니즘 이론 수업을 듣게 되었고 그때부터 여성주의, 페미니즘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성 철학자들에 대한 이론을 주로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기존의 유명했던 남성 철학자들의 한계에 대해서는 크게 알지 못했다. 책을 읽을 수록 이들의 관점이 굉장히 흥미롭단 생각을 했고, 고대, 근대, 현대로 오기까지 여성주의는 점차 자기의 자리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제목처럼 평등은 미래진행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는 조금 더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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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5일 오늘은 국회의원 총선거 일이다. 너무 당연한 일정한 나이가 된 모든 국민은 선거권을 가지는 보통선거는 오랜 역사가 있지 않다.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 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은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권리의 행사이다.
가장 먼저 여성의 참정권을 허용한 뉴질랜드는 1893년, 미국 1920년, 영국 1928년 심지어 우리나라는 1958년이 되어야 여성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00여 년 전의 여성은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했을까
좀 더 오랜 시간으로 돌아가서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땠을까
그리스는 너무 오래되어 그리스 국민들 조차 과거지사로 잘 거론하지 않는데, 근대의 여성의 지위와 생활은 어땠을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의심에서 이 책 <평등은 미래진행형>의 저자들은 고대, 근대, 현대의 철학자들 저작을 통해 여성주의에 관한 내용을 고찰한다.
마침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부터 플라톤에 관심이 있어 탐독하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 반가운 내용이었다.
고대를 대표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 루소, 에밀, 칸트와 현대의 니체, 데리다, 아렌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의 철학 중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한 부분은 신선했고, 그들과의 가상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통치자는 금의 성분, 수호자는 은의 성분, 장인은 동의 성분을 타고난다. 만약 여성이 금의 성향이 있고 태어나면, 플라톤은 여성도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 철인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서 여성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고, 처자식을 공유라는 표현은 남성 중심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했다. 바로 이 점에서 스승인 플라톤과의 차이를 보인다. 그는 당시 남성과 여성이 종적으로는 같지만 역할과 기능이 다르다고 보았다.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당시 여성들이 가정에서 가사를 책임지고 있었던 반면, 남성들을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다.
근대의 철학자인 루소와 밀의 여성주의에 관한 비교는 흥미롭다.
<에밀>은 인간의 본성과 교육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루소가 말하는 인간은 남성을 의미한다. 즉, 당대 여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여성이 태생적으로 열등하므로 교육을 통해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길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홀아버지 손에 자라다가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외삼촌의 손에 자란 시기를 죄수 생활이라고 표현한 루소는 바랑 부인이라는 후원자 덕분에 죄수 생활에서 벗어난다.
어머니와 같았던 바랑 부인과의 관계는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그 후 루소는 여러 귀족 부인들과 연애하지만, 결혼은 귀족 부인이 아닌 세탁부 하녀와 했다.
아내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순진한 사람이었다. 루소는 아내를 집안일을 하는 사람, 성적 대상에 불과하다. 그는 아내가 낳은 아이 5명을 모두 보육원에 보내고 저술 활동을 이어간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아내에게 양육을 전담시킬 수 없을뿐더러 자녀가 많으면 저술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논리이다.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인류의 반인 여성이 성별을 이유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침묵했던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달랐다.
밀은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힌 것과 아울러 적극적으로 선거법 개정을 시도한다.
밀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이 시민으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정의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공화주의 원리를 제시하며, 투표란 권리이기에 앞서 정의라고 보았다.
밀은 훗날 자신의 배우자가 될 해리엇과 만남과 우정은 생애의 영광, 으뜸가는 축복으로 여긴다. 해리엇을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존 테일러의 아내였다. 밀과 해리엇은 20년 동안 우정을 나누고 존 테일러가 죽은 지 2년이 지나고 결혼한다.
밀과 해리엇은 지적 교류를 바탕으로 한 평생의 동반자였다. 1848년 <정치경제학 원리>와 그들의 사상적 교류와 토론이 집대성된 책이 바로 <자유론>이다.
밀은 해리엇과 함께 나눴던 여성과 시대, 역사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여성의 종속>을 발표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어느 저작물에도 해리엇의 이름을 남기진 않는다.
현대의 철학자 중에서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발표한 한나 아렌트에 관한 이야기는 주목할 만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지적인 사람이었지만 심오한 의미가 있고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은 아니라며 ‘악의 평범성’을 설명한다.
아이히만에게는 악마성이 없으며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가 있다고 한다.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공감 능력’이 아렌트 사상의 핵심이다.
이 책 <평등은 미래진행형>은 여성주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철학자들의 모습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여성주의와 철학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이 책을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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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있는 문구처럼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린 철학가들의 평등이야기가 이 책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당대에는 맞게 통용된 것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다르게 인식되는 것들이 하나둘이 아닌 만큼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자들과의 가상 대담을 통해 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고자 저자는 말한다. 철학과 사상이 시대를 뛰어넘어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끊임없이 하기에 현대사회와 다를 듯 같은 철학 속 의미 찾기는 계속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은 고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여성주의는 핵심적 관심이 아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들이 가진 여성에 대한 관점은 결격 사유를 가진다. 그러나 옛날 그 시대에 맞는 철학이 지금까지도 재해석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김용민 교수의 말을 빌자면 '철학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깨우침을 얻는 학문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페미니즘이란 화두를 던져서 철학자들이 시대에 갇혀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들의 시도는 상당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지식에 만족하고 거기에 갇혀서는 안 된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여 자신의 사상에 폭과 깊이를 더해야 한다.' 이 책은 동일성과 차이가 대립과 배제를 넘어 조화와 혼합의 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분명 다르다.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여성 지위 향상 및 평등을 외치면서도 이 두 가지 개념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 마지막으로 각 철학자들의 에피소드 형식 이야기와 가상 토크가 인상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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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를 따라서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철학자가들의 평등이야기는 과연 어떠할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린 그들의 평등이야기, 철학가들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했는지를 따라가보는 것이 이 책의 흐름이다. 그 흐름 속에서 페미니즘이란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러면서, 철학자들이 각 시대에 어떻게 갇혀 버렸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제일 먼저 고대철학가인 플라톤을 이상적인 국가를 다스리는 금의 성분을 가진 통치자를 이야기한다. 여성 철인왕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여성성을 제거한 여성’을 말할 뿐이다. 이러한 시각이 페미니즘 운동의 변천 과정 속에서 답습된다는 저자들의 이야기는 일간 날카롭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고 이론화하며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러하기에 여성 철학자를 그 시대에는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근대철학가로는 제일 먼저 루소를 불러온다. <에밀>, <신엘로이즈> 등에서 루소가 여성을 어떻게 보았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여성을 배제하고 여성 혐오를 어떻게 정당화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밀이 여성참정권을 지지하게 되었는지는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평생의 동반자인 해리엇과 함께 <자유론>, <여성의 종속> 등이 저술했다는 것은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러브스토리로 박제된 뮤즈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성들의 그 시절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계몽시대를 이야기하는 근대 거장인 칸트에 이르러서는 그가 남성과 여성을 지극히 불편등한 시각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먼저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는 입장도 살펴본다.
현대 철학에 이르러서는 ‘혐오와 폭력’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프리드리히 니체, 자크 데리다를 먼저 우리들에게 불러 온다. 참으로 니체의 삶과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이리 저리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은 가히 길을 잃기 쉽다.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한나 아렌트는 익숙하지 않은 철학자였다. 물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철학자들이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여성과 유대인이 차별을 겪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온 <전체주의의 기원>속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대중’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저자는 많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이끈다. ‘잉여인간’, ‘혐오주의자’ 등을 생각해 보도록 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철학적 사유의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책 중간 중간에 있는 각 시대의 철학자들과의 대담을 통한 여성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저자들의 상상이 가미되어 있어서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철학과 평등, 그리고 여성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시도에 신선했으며, 철학을 또 다른 창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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