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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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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북악산은 중국의 북악항산에서 따온 일제시대때 용어로 백악산이 맞습니다.   P36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 300만의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문민경제정책   P37 어제가 없는 오늘,오늘이 없는 내일 역사의 단절이 없다면서 역사의 상징물인   중앙청을 부수는 단절을 보여주었다.   -울산왜성,순천왜성,몽고정   신사앞에 있는 고마이누란 석상은 고려를 나타냅니다. -
"역사의 단절" 내용보기

P15 북악산은 중국의 북악항산에서 따온 일제시대때 용어로 백악산이 맞습니다.

 

P36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 300만의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문민경제정책

 

P37 어제가 없는 오늘,오늘이 없는 내일 역사의 단절이 없다면서 역사의 상징물인

 

중앙청을 부수는 단절을 보여주었다.

 

-울산왜성,순천왜성,몽고정

 

신사앞에 있는 고마이누란 석상은 고려를 나타냅니다. -출처 :일본의 신사

 

P74 '버르장머리를 가르치겠다'호언했을대 간도는 중국땅이라 호언했고 그의

 

후계자 노무현대통령은 중국정부에 대해 역사인식에 있어서 양국의 입장에

 

동의한다. (동북아시아 영토분쟁과 패러다임P201)

 

김영삼대통령은 박정희정부가 남북한이 통일된 이후 간도문제를 해결한다고하여 간도문제를

 

조사하는등 통일한국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을 모두 폐기처분했습니다.

 

동북아시아 영토분쟁과 패러다임, 우리가 배운 백제사는 가짜다  - 두 권 꼭 읽어보십시오

 

책을 쓰시려면 조사좀 철저히하시고 쓰셔야죠

 

한 시대의 역사유적을 훼손하는 것은 유적이 만들어진 시대를 망각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글은 좋은 말씀이신데 우리는 중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왕조의 농간에

 

놀아난 것인데 백성들은 조선이 독립국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해,일본해 &성폭력범죄자의 특징)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십시오

 

P98 죠슈군벌에 대해서는 '헌혈,사랑을 만나다P54' 읽어보십시오

 

무슨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은 우물안 개구리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예로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팔레스타인 현대사) 읽어보십시오

 

P99 조선은 자주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고 하셨는데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읽어보십시오

 

전두환,박정희시대는 군사독재정부였고 조선은 중국의 식민지였던 군사독재정권500년

 

이었습니다.

 

P53 3.5도 비틀었다는 것은 풍수지리에서 기를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한 각도를 말씀하시

 

는건데 이건 광화문처럼 6도를 비틀어야합니다. (도안계풍수지리)

 

P우리나라가 일본을 앞지를 정도로 잘살게되면 총독부건물은 오히려 추억거리로

 

남을 수도 있다면서 성급하게 감정적으로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에대하여 주의를

 

초구했다 옮은 말씀이시다 예로 합포의 몽고정..

 

12~13세기에 진봉선무역이라하여 1세기간 일본으로부터 고려가 조공을 받았다.

 

백제멸망후 조슈로 건너간 백제사람들이 임진왜란 36년통치를 이끕니다.

 

--대쥬신을 찾아서 ,국운풍수

 

총독부건물의 성급한 철거는 전시행정의 표본

 

일본이란 말은 백제의 다른이름입니다. - 우리가 배운 백제는 가짜다

 

한국현대사의 주요사건에 대한 기억이 응축된 중아청건물

 

시민다넻와 사회지도층 인사인 신용하교수의 무지에늦게나마 통탄한다.

 

일본국회의원이 중앙청앞에서 기념사진을 직었다면 김영삼대통령은 일본에

 

있느 5개의 백제사중 하나에서(우리가 배운 백제는 가짜다)기념사진을 찍으면

 

될것을 무지의 소산..

 

십자군의 침략해 유럽성을 아랍의 여러지역에 지어지만 이것은 헌

 

아랍국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 십자군전쟁1,2,3/시오나 나나미

 

사피엔스P293  인도붐바이 차트라비디쉬바리기차역

 

알함브라궁전-스페인

 

소피아성당 -7/25 KBS1  7:40

 

몽고정

 

백제사5곳   - 우리가 배운 백제는 가짜다

 

곤고구미 - 일본의 상도P63~72

 

성요셉성당/하노이, 다낭대성당1924년

 

베트남은 우리와 다르게 식민지시대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ㅡ 걸어서 세계속으로

 

베트남편에서 젊은 베트남 여자모델과의 인터뷰장면이 있었다.

 

딱정벌레/박해철 P387~391 금관총,황남대총과 오키나와의 비단벌레

 

대마도가네다성-고구려,백제성

 

오노성,다루키성,다카야스성,다카마스성,야시마성 -백제석성

 

 

 

 

 

 

 

제목 : 미즈노교수와 종로피맛골이야기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생글생글 잘 웃던 미즈노교수가 방송에 잘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서 토론하던 곳에서 미즈노교수는 "저희 일본에서는 자식이 사업자금이

 

 부족해 시골부모님에게 가서 가만히 있으면 말을 안해도 부모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또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해도 다 압니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은

 

"에! 그게 뭐야 말을 해야지" 하며 어이없어 했다.

 

이야기가 좀 다를진 몰라도 야만이란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말로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명보다 우수함을 말하기위해 만든 말이다.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예가 '야만'이라는 단어다.

 

12세기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무신정권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청기백기게임의 원형도 알고보면 운동회때의 청백전이 아니라

 

백강전투후 400년동안 일본에 존재했던 시대가 헤이안시대고 그 이후가 700년간의 무신시대다.

 

수도를 두 번씩이나 옮긴 간무천황이 794년에 헤이안쿄(현재 천왕이 사는 도시 교토)를 도읍으로

 

 정착시킨후 1185년에 이르러서야 미나모토가문이 다카모리왕의 손자 다이라씨와 전장에서

 

맞붙었을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한쪽은 등에 홍기를 꼽고 한쪽은 등에 백기를 꽂은데서 청백전이

 

유래한다.

 

이로인해 다이라씨가 궤멸하고 군사,경찰,행정권이 미야모토가문의 수장 요리토모에게 넘어간다.

 

이때 시작된 또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무신정권의 호화로운 요리인 가이셰키요리와 승려들의

 

공양음식인 쇼진요리가 합해져서 현재의 일식요리의 원형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1868년 메이지천황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700년 동안 무신들이 전국에서 난립해

 

싸우는 전국시대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 군청단위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현단위의 땅에 지배자인 영주가 있어 그곳의 무사집단과

 

농민집단이 영주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그들은 700년이나 지속시킨다.

 

만일 거기속한 사람이 자신의 불만이나 억압에 대한 표출을 하게되면 그곳 집단에 해를 끼쳐 단결에

 

 해가된다하여 자신의 욕구불만을 자신의 내부로 내면화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려 지금도 일본에선

 

 제일 심한 욕이 우리가 잘아는 '빠가야로'라는 바보란 말이 제일 심한욕이라 알고있다.

 

어느 기자가 그런다 한국과 일본의 고소고발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단순비교가 아니라 원인을 역사적 유래를 놓고 비교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럼 한국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보'는 욕도 아니다 그냥 애칭 정도일까

 

조선은 500년동안 양반중심의 중앙집권제가 뿌리를 내린다.

 

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천대를 뒤에서 욕으로 푸는걸로 해소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욕으로 푸는 문화를 발달시키게 되었고

 

일본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내면화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발원지를 보자.

 

진,송시대이후 사대부라는 명칭이 직업은 비록 달랐지만 농,공,상과 같이 섞여 살았다가 후대에와서

 

 사대부는 곧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들이 사는 곳은 농,공,상과 완전히 구별되도록

 

서로 섞여 거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압구정도 중국 송나라의 정승 '한충헌'이 황제를 새로 세운 공을 이룬뒤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후

 

 벼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논다는 겸손의 뜻이 원형이다.

 

그 압구정이 조선으로 넘어와 '계유정난'을 기획한 한명회가 갈매기압으로 부르던 정자를

 

지은후 그곳의 뜻이 서민들에 의해 누를압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발원지를 알면 재미나는 것들이 많다.

 

한강의 발원지도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황지의 창죽동의 검룡소를 발원지로 보기도한다.

 

여기는 귀한 곳이기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은 발원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문화유산은 또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안압지,불국사,석굴암,첨성대,무령왕릉,고인돌,장군총등 거의 다인 문화유산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유산이다.

 

그럼 우린 이런 문화유산을 정말 잘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약간이라도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싹쓸어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종로의 피맛골,중앙청,명성황후생가 담장의 일부,북촌을 밀어버리고 빌라단지를 만들자는 사람들,

 

창덕궁의 아기자기한 산책로를 시원스럽게 밀어버린 사람들,천재시인 백석과 길상사 자야여사가

 

사랑을 나누던 집,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조선시대 세운 단성사가 헐릴때 우리 영화인들은

 

 

돈세는 일만했다.

 

돈에 미친 한국영화인들,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건축가 김수근씨의 집도 싹 

 

밀어버리거나 밀려고했다.

 

이제껏 나온 문화유산중 95%인 서민들의 유일한 유산 한국에 욕이 왜 많은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바로 종로의 '피맛골'이다.

 

종로통 대로변 정승판서행차의'말을 피하다'에서 유래된 피맛골은 종로통의 뒷골목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은 한국이 지닌 약점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든 잊혀지는 법이지만 역사의 현장은 고이 보존되고 간직되어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져야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전통과 낙후를 구분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지않은지...

 

가난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시대적 발상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하고

 

있는 것일까

 

1392년 조선은 개국했고 그 시절 숭례문을 만들게된다.

 

숭례문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있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우를 범하며 주식회사와 보험을 탄생시킨 동인도회사의

 

대표적 건물양식이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69세 노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노인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감옥으로 향했다.

 

종로의 피맛골은 1392년 조선의 개국시절 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기게된다.

 

피맛골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존재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하며 주식회사를 탄생시킨 동인도회사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며 한국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으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거나 부순사람을 지지한다.

 

옛날 것을 없애는 것은 한국의 약점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몇몇 정치인의 생각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를 통째로 바꾸려는 발상 이제는 좀 바꿀때도 되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는 모짜르트생가 베토벤 생가에서 외국정상들과 칵테일 파티를 한다는데

 

왜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대에 살아야할까

 

 

 

참고도서 몇권만 추려서 권한다

 

서울, 북촌에서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일생에 한 번은 독일을 만나라

 

세계는 기다리지 않는다

 

빈곤의 연대기 

 

내사랑 백석

 

맨큐의 경제학 페이지230 (역사적건물의 외부효과)


 

제목 : 어느 운전사의 실수

 

 

1914년 6월 28일 오전11시 화창한 여름날 아침이었다.

 

승객 두사람이 탄 자동차가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비좁은 통로를 지나 막다른 골목을 만났다.

 

그런데 이날 이 자동차 운전사가 저지른 실수는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세계사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이 자동차는 불행하게도 열아홉살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학생 가브릴로 프린시프앞에 멈춰섰고,

 

 세르비아 테러조직 '검은 손' 에 소속되어 있던 프린시스는 눈앞에 다가온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두 번 당겼고, 차 안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소피 대공비가 30분만에 숨졌다. 오스트리아는 이 암살사건을 세르비아

 

침공의 빌미로 삼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편에 서자 세르비아의 보호를 공언하고 있던 러시아도

 

가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단 30일만에 국가들 사이에 실타래처럼 얽힌 위협과 동맹의 연쇄 반응으로 거대한 군대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러시아,독일,프랑스,영국,터키는 엉켜버렸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유이며 5년뒤 1,000만명의 목숨이 사라진 뒤에야 이 전쟁은 끝이 났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심심해하던 유럽역사에서 1914년 이전은 길고 평화로운 오후 같은

 

시대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 시대의 역사가들에게는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아닥친 듯한 사건이었다.

 

전쟁에서 영국은 미국을 끌어들이고 프랑스와는 기존의 두나라의 식민지로 있던 아랍땅을

 

 나누자는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체결하고 유대인에게는 독립국을 세워준다는 영국수상

 

 벨푸어선언을 해 군자금을 조달하고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랍의 하심왕조와는 전쟁후

 

팔레스타인을 주는 조건으로 후세인-맥마흔서한을 각각 체결하게 된다.

 

하나의 땅을 놓고 책임질 수 없는 세가지 약속을 해 오늘날 중동사태의 발발 원인을 제공한다.

 

연합국편을 들던 소련이 1917년 공산화되고 전쟁에서 빠지자 공산혁명주체세력중에 유대인이

 

많다고 잘못판단한 영국은 유대인에게 잘보이기위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적극지원한다.

 

형제국 터키를 배신할 수 없지만 결국엔 터키에 총을 겨눈 하심왕가에 의해 중동에서 겨우 승기를

 

 잡은 연합국은 승리하게되고 발칸의 산악지대에 각각 독립국으로 흩어진 소국들을 달래기 위해

 

미국의 윌슨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는데 대한민국의 선각자들은 이걸 잘못해석해

 

발칸반도에 국한된 선언을 우리에게도 해당되는걸로 알아 3.1운동이 촉발되고 이에 영향을

 

받아 두달후 중국에선 5.4운동이 그후 인도에선 비폭력저항운동이 간디에 의해 일어난다.

 

연합국이 독일에 전쟁배상금을 요구할때 정부의 간섭을 극대화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학설을

 

 주장한 경제학자 케인스가 만일 그렇게되면 인플레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고 다른 독재자가

 

 등장해 세계는 혼란스러워질거라 예견했으나 이를 무시당한다.

 

1933년 정당한 방법으로 집권한 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일으켜 3,000만명의 희생자를 냈고

 

 연합군에 항복한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에 몰두해있어 관동군에 정보가 거의 없는관계로  관동군의 전력을 너무

 

과대평가해 소련의 참전을 유도했고 천황직속군사령부인 대본영이 그은'38선'에 의해 그 북쪽은

 

소련군이 무장해제시키고 남쪽은 미군이 무장해제 시키는 선으로 그은 것이 영구고착화된다.

 

이후 중국대륙을 거의 지배한 국공내전의 승자 장개석에게 소련은 1946년 1월5일 '중,소우호동맹조

 

약'이 체결됨과 동시에 중국에 압력을 넣어 중국은 정식으로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1933년 10월부터 국민당 정부군에 쫓겨 중국대륙을 남쪽으로 반바퀴돌면서

 

 1만km를 걷는 이른바 대장정에 나서기도 했다.

 

1946년 6월 국민당정부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동북지역 남부권까지 밀린 중국공산당세력은

 

북한지역으로까지 후퇴해야했다.

 

국민당정부 세력에 의해 최악의 순간까지 밀렸던 중국공산당 세력에겐 두가지 행운이 있었으니

 

 하나는 조선인들의 목숨을 마다않고 전투에 임하는 적극적인 태도와 북한이 후방기지로서

 

역할해준데 힘입어 1947년 7월부터 대반격을 취할 수 있었고  이 시기를 틈타 소련군에 의해

 

 군사훈련도 더불어받아 강병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후 공업시설이 하나도 상하지 않은 미국의 제일 큰 걱정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는데 공산주의가 생겨난 가장 큰 배경은 '잘살아보세'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추워서 확산이

 

 어려울 것이고 발칸은 산악지대라 확산이 어려울 것이고 동서독 국경이 가장 위험한 지역인데

 

 여길 막는 길은 마샬플랜으로 이름지어진 막대한 경제원조를 서독에 하는 것뿐인데 그렇게되면

 

 독일에 감정이 상할대로 상한 우방국 프랑스가 등을 돌리게 되니 프랑스가 침략해 식민지로

 

 삼은 베트남에서 디엔 비엔 푸 전투이후 고전하고 있던 프랑스대신 베트남독립군(월맹)을 이끄는

 

 호치민과 전투하는 길 밖에 없어 월남전을 개시하게되고 여기에 한국도 참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은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었고 미국이 한국을 예쁘게 봐주어

 

 토목기술이 전수되고 중동특수를 누리게 되었고 미국에 의해 카이스트도 설립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간후 중국은 8로군에 편입되었던

 

조선의용군을 대륙평정후 북한으로 돌려보내 6.25전쟁을 수행한 중요한 병력이 되게한다.

 

 북한군의 전투력이 0.5라면 조선족의 전투력은 1.5였다고 한다.

 

이승만정권은 북한이 비밀리에 남침준비를 하는 위기상황에서 좌익 지창수의 선동으로 일어난

 

14연대 반란사건등 좌익에 의한 국가전복음모가 끊이지 않자 1948년 11월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당 그 전신인 김구,서재필,송진우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한민당과 협의를 거쳐 국가

 

보안법을 제정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처벌문제가  흐지부지된 것도 이승만정부로서는 공산당에 대한 수사경험이

 

 풍부한 일제 고등계 출신을 다시 쓰지않으면 나라전체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갈 위급한

 

 상황이라 김구선생님의 한민당과 협의하여 활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당시에는 좌익에 대한 걸름장치가 없어 사상에 관계없이 아무나 군대에 입대시킨 것이

 

현실이었다.

 

6.25발발이전 북한의 주력부대에 배치된 조선족은 무려 6만5천여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전쟁발발 당시 약20만명의 북한군 병력중 30%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후 새로수립된 일본정부는국민들에게 제대로된 역사교육과 민주교육을 시켰으나

 

 일본이 최후방어선이라 여긴 미국은 일본내에서 군,정에 경험이 많은 전쟁범죄자들인 우익세력을

 

 재등용하게 되고 오늘날 자민당차원에서 야스쿠니신사참배를 하게되는 우경화의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한.중.일 삼자구도와 중국의 남중국해로의 영해확장문제가 진행돼 2016년까지

 

 다투게 되는데 여기 산호섬은 수많은 생물의 서식처로 세계적 생태보고인데 여기다 군비행장까지

 

건설하고 지금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88

 

제목 :국제그룹에서 세종로까지

-김두규교수의 풍수강의    읽어보셍

 

프로스펙스신발로 대표되는 양정모회장의 국제그룹 5공화국 당시 서열 7위의 그룹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국제그룹 왜 사라졌을까

 

85년 2.12총선이 끝나고 승승장구하던 국제그룹이 무리한 사업확장등 경영부실을 빌미로 전격해체되고

 

 계열사들은 타회사로 인수합병됐다. 이것이 국제그룹해체사건이다.

 

당시 국제그룹은 롯데보다 더 큰 기업이었다.

 

국제그룹은 양정모씨가 고무신 공장으로 출발해 1962년 국내최초로 미국에 신발을 수출하며

 

 일군 회사이다. 이렇게 닦은 회사는 승승장구,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분야에까지

 

진출하였으며 국제상사.(프로스펙스,아티스) 국제종합기계,국제통운,동서증권등 계열사

 

만 21개를 거느리는 대형 그룹으로 발돋움한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 로비나 혈연,학연등 연줄(대우실업의 김우중은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던

 

 은사의 아들, 박정희시절에 급성장.)로 기업을 키우는게  정설이던 시대에 묵묵히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게 양정모였다. 그런 양정모에게 5공화국 출범은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이끄는 새마을운동본부는 농촌 개발을 위한 '보조금 지급'을

 

 명분으로 세워졌고, 새마을운동본부의 자금은 기업들이 내는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당연히 기업들은 그룹 명성에 걸맞은 기부금을 냈고 여기에 반발하는 기업들도 없었다.

 

그러나 양정모는 "난 누구의 도움 없이 고무신 팔아 여기까지 왔다.

 

누구에게 돈을 갖다 바치란 말이냐?"라며 새마을 운동본부에 기부를 거부한다.

 

기업들이 피를 빨리는 또 하나의 유명무실한 단체가 있었으니 바로 전두환의 호를 따서

 

만든 '일해재단'이 그것이다.

 

일해재단은 아웅산 폭발테러 사건 유가족들의 위로금과 장학사업,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선수 지원,육성, 그리고 통일연구등을 위해 세워졌으며 발기인에 정주영,구자경,김우중,

 

최종현,양정모등 재벌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설립기금을 모금하는데,자그마치 4,000만 달

 

러나 되는 큰돈이었다.

 

 이 돈은 당연히 대기업들이 앞다퉈 전두환에게 갖다 바쳤지만 발기인에 이사로 참여한 양정모는

 

 또 다시 기부를 거부한다.

 

  1984년 어느 겨울, 전두환은 직접 대기업 총수들과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총수들이 하나둘씩 청와대로 모이고 이윽고 주인공인 대통령이 등장하여 상석에 앉았는데

 

그날따라 눈이 많이와 양정모회장의 차가 30분이 지체되었다 양정모 때문에 모임은 시작되지

 

 못하고 전두환의 얼굴은 붉그락푸르락해졌다 같은 자리에 있던 총수들은 바늘 방석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들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양정모는 모임에 참석했다.

 

 나한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고 싶던 전두환은 부실기업 정리한다는 명목 아래

 

 재계서열 7위, 수출 실적 8억 달러 이상, 매출액 2조나 되는 대그룹을 공중분해해버렸다.

 

  계열사 대부분은 전두환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한일그룹에 넘어갔다. 한일합섬은 5공 정권

 

 초반에 30대 그룹이었으나 5공 말기에는 20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낸 기업

 

 중에 하나가 바로 한일이었다. 정부는 한일에 세금을 깎아주고 부채를 탕감해주

 

었으며 파격적이 조건으로 신규 대출을 알선하는 등 혜택을 주었다. 이에 화답하듯이

 

한일그룹은 대기업 중 가장 많은 헌금을 납부해 전두환을 기쁘게 한다.

 

결국 IMF로 한일그룹은 부도가 났다. 그룹이 해체되던 85년 2월 21일. 임원들과의 마지막

 

회의에서 양정모국제그룹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입니다. 운명에 승복합시다.---

 

양정모회장의 가정은 전형적인 한국가정이었다. 딸딸딸...아들  이 아들이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자 양회장의 부인은 눈이 실명위기에 놓이고 부부금실이 유난히

 

 좋던 양정모회장은 부인의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려했지만 양정모회장이 갖고있던

 

주식과 채권을 모두 내놓지 않으면 출국 못한다고해 모두 내놓고 출국 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정권이 바뀐후 재판에서 이겼지만 이미 공중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것이 국제그룹해체의 전말이고 표면에 드러난 진실이다 겉보기엔 그렇다 그럼

 

 속내는 어떨까 속내를보자...

 

1984년 완공돼 국제그룹 사옥으로 쓰인 지하4층~지상28층짜리 국제빌딩.. 용산 일대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건물이기도하다. 그 당시 멋진 설계라 하여 나라에서 수여하는 건축가상까지

 

수상한 건물이지만 건물 앞면,배면,측면이 어딘지 구분되지 않은 설계를 시도하여

 

건물 가상학적으로 매우 좋지 못하다.

 

풍수에서는 전면,배면,측면이 확실히 구분이 되어야만 좋은 가상의 건물이다.

 

이런 줏대없는 건물에 상주해 사업을하면 직원들의 애사심이 없어진다. 결국에는 건물의

 

소유주나 회사의 CEO의 존재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상실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상 받은 것이

 

무색하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첫 소유주인 국제그룹은 1985년 재계에서 사라졌고, 후속타로

 

 건물을 인수했던 한일그룹도 IFM 외환 위기 당시에 쓰러졌다. 소유했고 상주했던 기업마다

 

 도산이라는 쓴맛을 본 '비운의 빌딩'으로 소문이 났다. 현재는 3년간의 리모델링

 

기간을 거쳐 2010년 5월부터는 LS용산타워로 이름이 변경되어 입지하고 있다.

 

롯데가 상속문제 그룹경영,비자금문제로 시끄럽다 왜 그럴까

 

'군계일학','독야청청하리라','가다가 아니가면 아니간만 못하리'가 롯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63빌딩 혼자 우뚝 솟았고 혼자 오는 바람 다 맞았고 결국 주인이 바뀌었다.

 

혼자 우뚝 높이솟은 건물은 근처에 보호해줄 의지처가 없어 혼자 오는 바람을 모두 맞아야한다.

 

건물이 높으면 바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바람을 받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늘 바람을 타듯 구설수가 따라다니고 때로는 사람을 상하게도 한다.

 

잠실은 바람이 많은 곳이다.

 

비유가 맞을진 모르겠지만 '한산대첩'을 보자 자랑스럽다.

 

누가 그런다 "진정한 영웅은 기억되는걸 바라지 않는다."고 예로 댜큐멘터리,교과서,영화

 

 모두 이순신장군 혼자 한걸로 나오지만 참모들이 건의하고 회의에 수많은논의를 거쳐

 

 만들어진게 한산대첩의 시나리오지 '나를 따르라'식의 논리는 맞지가 않다 명량에서 '죽으

 

려고하는 자는 살 것이오...'는 장군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중국의 손자병법과 함께

 

양대병서로 꼽히는 오가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맥아더장군의 말은 그가 만든 말일까

 

참모들이 건의한 말일까

 

인천상륙작전도 맥아더혼자 '나를 따르라'가 아니다.

 

그의 책을 보면 워싱턴과 수많은 조율과,참모들과의 작전회의 토론 윗선의 조언들이 수없이

 

 얽혀서 이루어낸 결론이지 영화나 교과서에서처럼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다시 한산대첩으로 와 그날 이겼다 기쁘다 하지만 무기보충하고 손상된 부분 고쳐야하고

 

 휴식이 절실하며 식량보충도 시급하다.

 

야구선수도 한 경기후 며칠은 쉬어야한다. 그런데 이틀후 또 쳐들어온다.

 

그렇게 두세번은 이길순 있겠지만 그 다음엔 역부족이 된다 이길수가 없다.

 

다시 잠실 제2롯데월드로 가보자 바람은 한 번 불고마는게 아니다. 계속분다.

 

주변에서 가장 높다. 건물이 높으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일대는 성남의 남한산성까지

 

 트여 바람이 크게 드는 곳이라 큰 건물의 경우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아까 '가다가 아니가면 아니간만 못하다'했다.

 

청량리에 맘모스백화점이 있었다. 심심하면 불난다. 그걸 롯데백화점에서 인수했다.

 

또 심심하면 불난다, 하지만 지금은 불 안난다 왜 그럴까

 

내가 집안에서 대문은 바라볼때 왼쪽에 석사자의 숫놈을 오른쪽엔 암놈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외부의 나쁜 기운은 막고 좋은 기운만 흡수한다.

 

국회의사당앞의 해태도 광화문앞의 해태도 어린이대공원후분에서 리틀엔젤스회관쪽을

 

보면 무서운 맹수가 좌우로 밖을 보고 있다.

 

다시 청량리로 가보자 만일 두마리를 세울 수 없으면 암놈만 세우라고 했다.

 

지금 롯데백화점앞에 암놈만 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풍수를 보려면 끝까지 봐야지 왜 보다말아 이런 분란을 일으킬까

 

유산상속의 잡음을 없애려면 노년에 서향으로 자고 동북쪽에 흰꽃을 놓으면 잡음이

 

없어진다하였다.

 

나는 구의헌혈의집에서 금장,은장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 없어졌다 왜일까

 

택지에서 주택이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히 적으면 그곳은 흉하다했다. 구의헌혈의집

 

 언젠가부터 둥그렇게 간호사책상 둘레로 둥그렇게 구획을 나눈게 원인이라 생각한다.

 

방에서 가장 명당은 문을 들어서서 대각선 가장 끝부분인데 그것도 안맞았다.

 

만약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거쳐야되는 일들이나 사건들을 사람들이 먼저 알게된다면,

 

 차마 인생의 항로를 즐겁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대문안은 더 한심하다.

 

세종로로 가기전에 덕수궁만 짚고가보자.

 

'대한문'이란 현판이 있다. 이건 '대한민국'할 때의 '대한'

 

이 아니라 고종황제를 도둑놈으로 비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말이다.

 

옛날부터 궁중에는 권력과 암투가 많아 문마다 화할화자를 넣었다.

 

성종의 형 월성대군의 저택인 덕수궁의 현판이름도 '인화문'으로 지었는데 고종황제께서

 

 헤이그밀사를 보낸사건으로 고종황제는 조선이란 나라를 훔치려는 큰도둑이란 뜻에서 큰대

 

한나라한을 썼다 왜 한나라 한을 썼냐면 거기다 사람인변을 붙이면 일본의 전설적인

 

도둑인 '한조'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걸 박물관으로 이전할 생각은 안하고 박정희대통령의 친필인 광화문현판 뗄 생각만 한다.

 

별은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한 법일까

 

세종로에 왜 이순신장군상이 있느냐면 원래 왕은 궁밖으로 나오는 법이 아니다.

 

궁은 장군이 지켜야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세종로에 세종대왕상을 세우자하는 것이고

 

 풍수의 대가인 이은상선생님께서 박정희대통령에게 귀뜸하길 차들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는 도로살을 막으려면 방패막이가 필요하다해 서울미대교수로 있는 조각가 김세중씨에게

 

만들게하고 이후락안기부장이 돈을 내서 만든게 세종로에 있는 충무공동상인 것이다.

 

 

 

자미원88 

YES마니아 : 플래티넘 s*****6 2020.08.1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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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은 하나
"한일은 하나" 내용보기
제목 : 아사다 마오와 안톤 오노   한일어는 의태어 의성어가 발달했다.   슬슬 소로소로, 터벅터벅 토빠토빠, 깔깔 가라가라, 벌벌 부루부루, 줄줄 주로주로, 술술    스라스라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 삼천궁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한일은 하나" 내용보기

제목 : 아사다 마오와 안톤 오노

 

한일어는 의태어 의성어가 발달했다.

 

슬슬 소로소로, 터벅터벅 토빠토빠, 깔깔 가라가라, 벌벌 부루부루, 줄줄 주로주로, 술술

 

 스라스라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 삼천궁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썪은 무신독재의 척결과 외교적 현안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다

 

조선말 세도정치 60년이 곪아 터진것과  같다고 보면 얼추 맞다. 군사정권에 목을건

 

 삼별초도 어찌보면 조선말 사대주의자들의 시각에서 해석된건 아닐까.

 

조선이 금과옥조로 여긴 삼강오륜도 근본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몽골의 노재지학이 

 

뿌리다.

 

  일본은 천황을 상징으로 남겨둔 채 중앙집권기인 에도시대 전까지 막부로 대표되는 

 

지방군벌간의 천년 가까운 싸움으로 지방자치의 틀을 다지다 중앙지배로 하나 된 나라로 

 

역량을 집적해 우리의 세종시대라 할 수 있는 메이지시대에 일본인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등장한 가스라 고고로, 후쿠자와 유키치, 도고 헤이하찌로, 무쓰 무네미스와 같은

 

 근대사의 선각자들의 등장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져 막부로 다져진 지방자치와 에도시대의

 

 중앙지배가 조화된 가운데 메이지시대를 거치며 현대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나라가 된다. 

 

이 복받은 역사를 가진 나라는 근원이 어디일까

 

 최근 250만에서 1000만으로 늘어난 만주족의 정체성의 근원도 같이 느껴보자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일본인 구다라(백제),만주족(고구려),한국(신라)는 같은 언어 같은

 

 핏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란 증거를 제시하고자 구체적이고 긴 글을 올렸다.

 

만일 누군가 제 이론을 반박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와 같이 구체적인 자료로 반박해주시길

 

 바라며 그냥 감정에 복받치는 소리치는 글로 반박하신다면 정신은 사라지고 단지 

 

시정잡배들의 싸움으로 변질된 뿐입니다.

 

  2002년 우에다 마사아카(일본의 저명한 원로사학자)교수는 신찬성씨록 좌경황별조

 

 대원진인은 비다쓰천황의 손인 백제왕의 후손이란 대목에 대해 우리 기자에게 어떠한 대답도

 

 못한 채 우물거리다 인터뷰를 끝맺는다.

 

  구다라나이는 가치가 없다란 뜻이다. 구다라는 백제의 국명이고 나이는 무엇이 없다 이니 

 

원뜻은 백제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란 말이된다.

 

  2001년 12월 23일 월드컵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천황이 자신의 몸속에도 한국인의 

 

피가흐른다 는 즉 백제인의 후손이란 언급했고 일본언론은 아사히신문에서만 기사화했다.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한국인이라 발언’ 함.

 

이방자여사도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본천황가에선 숭늉을 마신다고 언급.

 

  동경대 인류학담당 하니와라 카즈로 교수는 동료교수들과 공동으로 일본 각지의 

 

고대 무덤의 두개골등을 통한 연구조사 결과 2300년전부터 건너온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인의 조상이란 사실을 규명하고 7세기초 백제유민이 대량으로 건너가기전 고대선주민인

 

 조몬계와 도래계인 야요이계의 비율이 1대8.6으로 나타났다 이건 현재 일본인구

 

1억4천만명중 도래인의 숫자가 1억1천2백만명이 넘는다는 수치이다.

 

  교과서에 실린 것만 보자 왕인, 한고안무, 수수보리, 아직기, 왕류귀, 오경박사, 호류지, 

 

시텐노지, 금당벽화 우리의 국보5호 일본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미륵보살은

 

 한국에서만 나는 적송으로 만들어졌고 한국인이 귀히 여기는 약지를 세웠으며 왕건릉에서 

 

나온 인물상과 같이 유희좌를 하고 있다.

 

  8.15광복후 우리정부가 일본에 요청했던 ‘한국문화재 반환1호’가 백제관음상인데

 

일본사찰에 내려오는 기록에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자세히 나오나 일본인들은 유럽에

 

순회전시할 때나 자국에서 전시할 때도 일본 고유의 작품이며 조선에서 안나는 녹나무로

 

 만들었다고 떠들지만  녹나무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벚나무와 함께 건너간 수종이다.

 

 스다하치만신사인물화상경이란 고대 청동거울은 503년 백제 25대 무녕왕이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 게이타이천황에게 보내준 이 거울에 ‘사마’란 휘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 8일 무녕왕릉에서 나온 매지권에 사마가 무령왕의 휘란게 밝혀졌고 거기 명문에

 

 적힌 무녕왕의 친동생인 왜왕의 쾌유를 빌며 이 청동거울을 내린다라는 게 사실로 밝혀졌다.

 

  무령왕은 물에서 태어났다하여 무녕왕인가 일본의 가카라섬 즉 왕이난섬이다. 무녕왕의 

 

껴묻거리중 여러 목재유물이 가카라섬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만들어졌다는게 발굴직후

 

 일본인학자에 의해 증명되기도 했다.

 

  다른 이야기가 많지만 칠지도가 발목을 잡아 우선 거론한다.

 

전통은 계승된다. 군수뇌부가 결정되면 대통령은 칼을 장군에게 하사한다. 장군이 나라의 

 

수반에게 칼을 올리는 일은 없다. 칠지도를 누가누구에게 올렸느니 내렸느니는 중요하지

 

않다. 

 

 칼을 만든 사람이 칼을 받는 사람에게 하사체로 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 칼을 가진 자는 어떠한 적병도 물리칠 수 있다’란 명문, 어느 미친분이 그런 칼을

 

 아무에게나 주겠는가 믿을 수 있는 같은 핏줄 아니면 어림없는 소리다.

 

백강전투에 패한 직후 왜군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며 왜군들이 귀소처의 상실로 눈물을 흘린 

 

사실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712년에 지은 고사기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 그의 부친은 황산벌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백제장수의 아들이다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안톤 오노 그냥 우연한 일이다.

 

 알타이의 아사달 아사달은 고조선의 수도로 아침해 뜨는 언덕이란 뜻이 담겼고 고조선의 

 

남하한 6부족유민이 세운 신라는 아사달과 김씨의 나라 김연아 그리고 아사달이 일본으로

 

 건너가 받침이 사라져 아사다 마오 아사히 신문 아스카문명 그냥 우연이다 로또의 6자리 

 

숫자처럼 가야 노부나가 이에야스, 백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도 

 

사실은 김씨다 노루하치의 성인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해석하면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말자가 된다.

 

  고사기보다 후대인 772년에 쓰여진 상표문엔 아스카 인구중 80-90%가 백제인이라

 

적고 있다. 

 

 아스카땅에 호류지의 찰주를 세우던 날,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대신과 100여명의

 

 만조백관은 모두 백제옷을 입었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했다 기록하고 있다.

 

현대에도 미치다 미치루 노루가 노로 미역, 미나리, 미늘, 미숫가루, 미꾸라지 모두 

 

미즈(일본말 물)로 통한다 미는 즉 물이다.

 

  김춘추는 왜사신과 대화에서 통역을 쓰지 않았고 백제 여인은 왜인과 대화했다고

 

 일본서기는 남기고 있다.

 

어느 신문사의 일본 속 한국이란 제목으로 일본문화답사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구르다+마(싣는 기구)=구르마란 답이 나온다.

 

하나의 언어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불과 2세대안에 끝난다 

 

어중간한 상태의 단계는 아주 짧다.

 

8세기중엽 만엽집과 10세기초의 고금집은 그 실린 시구가 크게 다르다.

 

시모노세끼 근방 해안에 도이가하마라는 야요이시대 공동묘지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유적이 있다. 모두 마한땅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귀소본능이 이런 것일까.

 

일본인들은 백강전투의 분을 풀기위해 신공왕후를 통해 신라정벌이란 글로써 복수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분을 풀기 위해 우리가 임난후 통신사로 보낸 사명당을 통해 글로써

 

 복수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두나라 사이에 대한해협이 끼어 있어서 조선동란(삼국전쟁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일본은 보다 일본적으로 바뀌어갔다.

 

신라는 백제의 문화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많이 가져갔으며 남은 백제의 명맥을 섬에서

 

 나오지 못하게해 결국엔 섬나라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은 조선의 문화재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잡아갔으며 조선이 반도국에서

 

주저앉도록 반도사관을 심고 우리의 옛강토인 간도를 빼앗아버렸다.

 

  신라는 백제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으며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다. 

 

역사에서 일방적으로 주는건 없다 뿌린대로 거둘뿐이다.

 

고대 백제와 일본은 누가누구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안에 경기도지사 강원도지사가 

 

있듯 그냥 하나의 나라였을 뿐이다.

 

  백제의 아비지는 황룡사탑을 조선의 심수관, 이삼평은 사쓰마 야끼를 선사했다.

 

삼국사기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과 무녕왕이 각기 일본에서 귀국해 백제왕으로

 

 등극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 일제시대에도 조선총독으로 재직하다 일본수상으로 옮긴

 

 경우도 있다. 생소해서 안믿기는가 중국사료엔 구려의 추를 유인해 죽였다고 했고 삼국사기엔

 

 추(주몽)의 밑에 장수가 잡힌 것이라 다르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엔 백제 26대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 말을 관리하던 하급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적고 있지만 일본서기엔 왜로 건너와 긴메이천황이 되었다 적고있다.

 

누가 그랬다 재료를 살 때 바가지를 안쓰려면 재료상 세 군데 들러서 값을 알아보라고...

 

중국측 자료엔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흐르던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었지만

 

 중국에선 해석하길 선조들이 실수로 적은것이라 말하고 있다. 어떤것이 진짜일까

 

왜국도 잃어버린 강토와의 연을 끊고 새롭게 나가야 자기들의 살길임을 알았을까

 

천무천황은 고대 영토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없앨것을 명하고 한일 양국은 동종이라는 

 

책들이 불태워진다 간무왕은 나라땅 선주민 세력등으로부터 질시와 견제를 받아 왕도를

 

 두 번씩이나 옮길 정도로 애를 먹었고 간무시절 분서사건에 대해 14세기 일본의 거물 

 

정치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도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이었느니라고 하는 책이 있어서

 

그 책을  간무 연대에 불태워 버렸다고 신황정통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교류가 없으면 언어도 이질화되고 결국엔 2개국어가 된다. 몽고어와 한국어는 유사점이 매우 

 

많지만 현재 지리상의 장애물도 많다 한국어 만주어 일본어는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도

 

 생각해봐야할 언어다 북한어와 남한어는 분리가 시작되는 단계의 언어다.

 

만주어, 고대한국어, 일본어는 모두 받침이 없는 개음절이지만 현대한국어만 받침이 

 

있는것도 한번 생각해보자. 또 현대한국어도 조사가 붙으면 개음절이 된다.

 

조선 일본 몽고 거란 고려 부여 여진 신라 모두 국호가 해를 상징하며 유목민은 해를 

 

숭상했다는 점이다. 유목민은 살찐 양과 큰 뿔 가진 순록을 귀하게 여겼는데 고려란 글자를

 

 풀이해보면 그게 나온다 신라의 금관이 사슴뿔과 자작나무를 상징하듯

 

생태학적으로도 시조는 같으나 오랜 기간 떨어져 있으면 별종처럼 보이는 종이 참 많다.

 

  고구려 사람들은 668년 이후 당으로 일부는 신라로 편입되고 일부는 돌궐방향으로

 

서진한다. 

 

일제시대 우리는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 구라파로 중앙아시아로 흩어졌고 결국 우린

 

 한반도에 남아 있지만 고구려는 민족 전체가 그 땅에서 사라졌나보다.

 

  일본이 도시락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국물에 건더기가 없어서다 그네들은 수저가 있을

 

 필요가 없다 단 한 사람 천황만은 한국사람처럼 수저를 쓴다. 고구려벽화엔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이 많다. 우리도 왕비가 주름치마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명왕이 큰 강을 만나 거북에 올라타 쭉 갔고 일본초대 천황인 진무도 동정하다 바다를 

 

만나 거북의 등에 올라타 쭉갔다. 거북을 신성시하는 것까지 공통이다 거북 참 오래도산다.

 

 고대 우리 역사의 흔적은 고베를 비롯한 세토나이카이(내해)를 따라 지명,유적,유물이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의 지배층에 편입된 신라인들은 그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완전히 없앴다고 해야

 

 조상의 위신이 서지 않았을까 만일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들이 다른 곳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면 신라의 최대치적인 삼국통일을 했다는 역사가 더럽혀질게 뻔하다 고려에 궂이

 

 ‘구’자를 집어 넣어 고구려로 만든 건 어쩌면 거란,여진이 고구려를 대신하고 남부의 일본이

 

 백제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자기들이 섬기는 나라 고려가 그 위에 고려인들이 세운나라와 

 

더불어 열도백제까지 같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위신이 무어가될까 그래서 우리의 역사서엔

 

 통일신라를 강조했고 한반도 남북부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까 그래서 소송녕과 

 

서희가 옛고구려를 들먹인 것일까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둔갑한 이유도 붓으로 싸운 조선군을 칼을 가지고도 못이겼으니 

 

무언가 그럴듯한 패전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1995년 8월 동몽골 다리강가에서 고구려식무덤과 성곽을 손보기교수가 발굴했다.

 

 7세기흉노는 10만가구를 남겨두고 서진해 질지(아프가니스탄)를 거쳐 훈족, 헝가리로

 

이주한다.

 

7세기말 동몽골에서 발원한 종족이 몽고인의 실질적인 조상이된다. 그리고 고구려가 역

 

사에서 사라진건 668년이다.

 

   한국사학계에선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지목한다. 헌대 그는 1933년 

 

발해에 관한 논문에서 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민은 말갈인이라 발표했고 현재 우리사학계는

 

 그 논문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 말갈이란 말은 5세기부터 사용된 고구려인의 별칭이란게 

 

이미 정설이 된지 오래다.

 

  우리아기 사진첩에 우리아기보다 다른 아기사진이 더 많이 실려 있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우리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처럼 일본엔 일본서기와 고사기엔 백제의 역사가

 

일본역사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 그들은 우리의 정수리에 앉아 조선을 통치하고 물러났다.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다스린걸 기리기 위해 일본궁,일본강, 일본마을을 만들진 않았다.

 

  교토 천황궁엔 죠메이천황을 안치하기 위해 구다라궁 북쪽에 지은 빈궁의 이름 역시 

 

구다라대빈(백제대빈)이었다. 백제교,백제문을 비롯해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가 

 

호류사에서 행사할때도 귀족들이 모두 백제옷을 입었다고 일본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군부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수도 없이 없앴는데도 백제강,백제역 백제신사 

 

백제마을등 너무 많은 우리고대 지명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규슈 기리시마공원에서 가장 거대한 산봉우리는 한국악이다.

 

일본땅을 만든 두신중 남신인 이자나기가 요미노쿠니(황천)를 탈출하여 온 곳도 히무키노쿠니

 

 현재의 규슈 아와키하라 해변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섬 규슈는 일본 고대사가 시작하는 땅이다.

 

우두산이 한국엔 거창, 소양강등 여러곳에 있다 일명 소머리산 일본엔 소시모리가 고대역사의

 

 중요한 지명으로 쓰인다.

 

소에 남부억양이 참가되어 시 머리는 모리로 변한다.

 

단군이 천부인인 거울, 북, 칼을 가졌고 천황가의 3종신기인 구리거울 ,칼 ,곡옥을 가졌다.

 

  신들의 이사를 간나즈키라 한다. 10월에 신들이 일본을 떠난다는 말이다. 우리의 영고, 

 

동맹은 10월에 한다.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다. 평안도말에 간나새끼가 있듯이

 

  백강전투 후 한국과 일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후에 각각에서 독립적으로 생긴말이

 

 가까운 것은 그만큼 한국과 일본의 기초어와 사유방식이 비슷했음을 의미한다.

 

고사기에 나오는 농업신 ‘히요우케 히매가미’가 죽자 그의 몸에서 곡식이 나오는데 

 

머리에선 소,말 눈에선 누에가 배에선 벼 귀에선 기장 코에선 콩 보지에선 보리라는

 

 한국남부어가 등장한다.  또 우케를 훈민정음에선 찧지 않은 벼라고도 말했다.

 

고대 한국어에는 ㅆ이 없었고 받침도 없었지만 중국식 원음대로 한자를 읽어온 한국은

 

 이두로 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음운범위를 확장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혁명적인

 

 한글이 창제되었으며 고대의 음운변화를 그대로 유지해온 일본어는 동음이의어가 많아져 

 

한자의 뜻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만일 백제가 백강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언어는 영국과 미국이 영어를

 

 쓰는 것처럼 백제어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수상 솔스베리가 남미에 대한 이권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남북미대륙의 

 

이권 독점을 내세운 먼로주의의 파기를 요구하자 미국대통령은 의회에 영국에 대한 전쟁

 

 선언을 요청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중남미에서의 이익이 엇갈리자 전쟁 일보직전의 험악한 

 

관계가 되고 미국민은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되새기게 된 것이다.

 

  이때 영국 외상 밸포어의 ‘서로 같은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 한마디로 전쟁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간 한일 사이에는 거듭되는 전쟁, 침략의 역사로 얽히고 있는데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지난 역사와 같은 극단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일본장군 도고가 대한해협에서 격파하고 이순신장군을 칭송하는

 

 한마디를 한다. 그는 억세게 운이 좋으면서도 무사가 갖추어야할 덕목을 두루 갖춘 명장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우리가 나폴레옹, 링컨을 이야기하듯 민족적 동질감을 상실한듯한

 

 느낌을 받아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합쳐지기 위해선 아직 우리가 갈 길이 많음을 느낀다.

 

우리가 하나되면 유물도 다 찾을 수 있다 통일이된 후 국립박물관이 평양에 있으면 어떻고 

 

제주에 있으면 어떤가 초기엔 반발도 국가적으로 거세겠지만 대한민국의 경상도, 전라도의 

 

현실이 나은가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싸우는게 나은가   밥을 들고 먹으면 우린

 

상놈이라 한다. 

 

일본은 밥그릇을 내려놓고 먹으면 짐승이라 한다.  우린 산꼭대기에 올라가 쉬고 일본은 

 

꼭대기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쉰다. 그 차이가 무슨 상관인가 서로 차이가 있는게 무슨

 

 야만족의 척도인가 이 세상엔 야만족이란 없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 못하는 외부인만 존재할 뿐이다. 우린 일제식민사관을 심각하게

 

 여기지만 인조반정 공신들의 여진, 몽골에 대한 더러운 협잡을 우리 뇌리에 깊이 심음과

 

 우리를 오랑캐로 생각하는 중국을 사모하는 소중화 사상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 생각한다.

 

충렬왕 같은 부마왕을 몽고가 만들었다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상할대로 상한 무신정권을 

 

뒤엎고 노련한 외교를 위하여 우리가 먼저 몽고와 왕실혼을 제안한걸 우리는 반대로 알고있다.  

 

고려는 역사서를 본기로 적고있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집현전학사들은 우리역사를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는 세기로 낮추어 적고있다는걸 우리는 지나치고 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33배를 했다고 배웠지만 그런 일은 

 

우리사서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의 100만대군이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대장금에서 중국사신이 그녀를 인정해주니 기분 좋은가 일국의 왕위계승 문제도 별볼일 없는

 

 중국사신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는 게 조선왕조는 좋았나보다 이성계가 이자춘의 아들이 

 

아니라 이인임의 아들이라 그들의 사서에 적어놓았기에 우린 주청사를 보내고 건국후 

 

180년 동안 굴종적인 자세를 유지했다는 걸 인조반정공신들은 애써 외면하고 오로지 

 

대사관만 후손들에게 심는 걸 최고의 덕으로 삼아 우리의 학창시절에도 소중화사상을 

 

참 많이 주입받은 기억이 난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국호가 없어지지만 왜국은 669년부터 왕 또는 대왕의

 

 호칭을 천황이라 고치고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백제의 강돌문화를 넘어 마한을 정복한 후 백제가 일본열도를  백제땅으로 끌어들인 것은

 

 오진왕 때부터라는게 통설이다.

 

  일본문화와 조선문화가 같은 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솔직하게 받아들여서, 일본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또한 그들의 고분에서 삼국의 유물이 나왔다고 우쭐대며 

 

식민지시절의 분풀이를 하듯 우쭐대기 보단 80년대초 잃었던 피붙이를 만나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이산가족상봉 같은 느낌을 가지라면 나의 욕심일까

 

 여진족은 중국각지에 만성(만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세워 260년간 350:1이란

 

 민족비율로도 팔기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해왔다.

 

 18세기초에 옹정제는 “앞으로 시위와 호군 및 황궁을 지키고 파수보는 모든 인원은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한어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된다. 훈련시 병사들이 소집되어

 

 연병장에 있을 때에도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할 정도로 정체성을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우리가 잘 아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리” 즉 일어서다란 만주어인

 

 일립비의 명령형인 일리뿐이었다 한다.

 

뇨후루씨의 뇨후루는 만주어로 늑대를 뜻하는 뇨허이고 한어로 늑대랑이라고 쓰다가 후에

 

 젊잖은 의미의 동음이의어인 사내랑으로 바꾸어 랑씨가 된다.

 

  만주족의 한화의 원인은 만주족의 후손들에게 중국이라는 또 다른 고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1750년쯤에 건륭제는 신강원정을 단행하고 시버와 솔룬은 탁월한 전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고 신강을 병합키 위해 수천명이 영구 주둔 임무를 띠고 가족과 함께 파견되어

 

 현재까지도 4만명가량의 시버족이 남아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만주족이거나 자신들의 

 

말이 만주어라고 알지못한 채 현재 지구상에서 만주어를 말하는 마지막 사람들로 남아있다.

 

  누루하치가 칼카몽골에게 보낸 서신에서 “중국과 조선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그들은 입는 옷도 같고 생활방식도 같다. 몽골과 여진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우리는 입는 옷과 우리의 생활양식도 같다.”  또 흑룡강일대 시보, 솔론, 다우르, 부트족은

 

 지리, 언어, 생활양식 면에서 여진과 몽골의 중간단계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대한해협이 있어 한일어는 중간지대가 없다.

 

그래서 두 개의 언어로 착각하게 된 건 아닌지

 

건륭제는 서몽골인 준가르제국을 정복할 때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도시를 점령하면 

 

그곳의 주민을 모두 죽이는 작전을 구사해 서몽골의 준가르제국을 점령한 후 서몽골에

 

 남아 있는 몽고족은 전쟁전의 10분의 1로 줄어들어있었다.

 

현대에도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뚱이 국토정화 명목으로 내몽골의 원주민 

 

수십만명을 죽이거나 몽고로 쫓아 보냈으며 대만의 20%의 소수민족을 구성하는 중국인

 

 정권의 수장인 장개석도 2만명의 대만원주민을 학살했지만 이들의 행각은 건륭제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고 건륭제는 알타이유목민이 정체성을 상실했을 때 같은 민족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군사독재의 척결과 외교적 현안들을 타파하기 위하여 조선말 세도정치 60년이 곪아 

 

터진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무신정권은 개성을 지키기 위해 모집된 정예군을 왜 자기집

 

대문앞에 배치하는가 군사정권에 목을건 삼별초도 어찌보면 조선말 사대주의자들의 

 

시각에서 해석된 건 아닐까.

 

조선이 금과옥조로 여긴 삼강오륜도 근본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몽골의 노재지학이

 

 그 뿌리다.

 

대륙을 넘어 정복활동을 한 몽고와 후금은 대양과 대해에서 무수한 수전을 경험한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지만 고려는 정책상 하위에 있었기에 강화도를 안건넌거 뿐이다.

 

금태조 아골타와 후금의 누루하치는 모두 아이신자오뤄란 성을 가지고 있다.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즉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두 사람도 모두 경주 김씨를 쓰고 있다.

 

금나라는 고려를 아버지의 나라라 보듬어 안았고 후금은 조선의 계속된 호전적 태도에도

 

 국채를 유지시켜 준다.

 

 현재까지도 청대 만주족 팔기의 후손들은 과거의 만성이었던 여러 도시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렵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고구려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말조차 잊은채 250만으로 줄어들어 중국에 흩어져 있다.

 

중국이란 나라가 만들어진 후 그들의 국시는 한결같이 주변 민족을 거란처럼 흡수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인조반정 공신들과, 이성계가 신앙처럼 여기는 새끼중국인 사상인

 

 소중화사상을 언제까지 중국의 전통인 장자세습, 과부의 재가금지, 남존여비, 시집살이 ,

 

 항렬(돌림자)를 가보로 간직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점점 인식하고 있는

 

 남아있는 주변의 형제들과 다시 한 집에 살 것인가

 

  문화적 특징인 언어가 사람들을 결합시킨다면 구성원이 모국어를 포기할 때 그 집단은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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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베총리 조상의 고향

 

 

아베총리는 도쿄 (관동지방)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야마구치다. 그이 지역구가 야마구치일 
 
뿐만 아니라 윗대 조상과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고향도 대마도 바로 밑에 
 
있는 야마구치현이다.
 
10선의원으로서 '정의 황태자'였다.
 
야마구치현(옛 이름은 조슈번)은 일본 정치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도 짓궃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9세기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자들과 한일병탄 후 조선을 통치하였던 주요
 
인사들이 바로 이곳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도 야마구치의 풍수에 주목한다.
 
 --- 보통 '조슈 타입'이란 말이 있는 데, 이 말은 머머리가 좋고, 분석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행정 능력이 뛰어나고, 정치적이며, 권력행사 특히 인사에 능숙한 사람을 
 
지칭할 때 쓴다. 메이지 이후 대표적 인물로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고, 2차대전 이후에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두 총리가 있다.  ......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을 볼 때 
 
그 땅의 유전자라든가 혹은 특별한 바일이러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할 
 
정도다.  --- [명치라는 국가]
 
 
 
조선 병탄의 주도적 인물 이토 히로부미,가쓰라 다로 ,명성황후 시해 당시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 총감을 지낸 야마가타 이사부로, 그리고 이들의 스승으로서 일찍이 
 
정한론을 주창했던 요시다 쇼인도 이곳 출신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것이 아니라 야마구치가 조선을 병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아베 총리는 동아시아 침략의 책임을 외면하고, '일본의 주권회복'을 내세우며,
 
 "천황 만세"를 외치고 있다. 야마구치가 그의 정치적 고향이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러한 야마구치 풍수는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주를 구성하는 4대 요소 지,수,화,풍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땅"이라는
 
 일본인의 대지관과도 연결된다.
 
 

 

 

2012년 12월 아베 총리가 총선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선영을 찾아가 '정권 탈환을 보고'한

 

에서도, 그리고 조상이 사살던 집이 지금도 그곳에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고향은 야마구치다.

 

우리는 시는 구로 나누고 도는 군으로 나눈다.

 

일본은 막부(도쿠가와 군사정권)시절 무신정권을 수호한다는 울타리란 뜻의 번으로 

 

행정구역을 나눈다.

 

200여년의 군부독재이후 1868년 메이지천황을 옹립하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곧이어 

 

조선의 갑오개혁에 해당하는 폐번치현이 단행된다.

 

폐번치현은 무사의 칼착용금지,전국민에게 성씨를 나누어줄 것, 번을 현으로 바꿀것

 

군사정권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뒷방에만 앉아있던 메이지천황에게 이양한다는게 골자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주도적 번은 조슈(야마구치현)번,사쓰마번,도사번이다.

 

야스쿠니도 사실은 이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만든 현충사 개념인데 여기에 

 

태평양전쟁 전범들을 합사한데서 문제가 야기되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야스쿠니(초혼사)는 좋은 뜻으로 세운곳인데 후세들이 나쁘게 이용했다고 

 

보면된다.

 

그럼 행정구역인 번은 모두 사라진걸까 우리주위를 보자.

 

번짓수 잘못찾으셨어요,번호,순번,주번,당번 모두 무신정권시절의 흔적이다.

 

후쿠오카공항에서 자동차로 3시간을 달려야 아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유야라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유야는 분지인데 서쪽으로는 바다가 이어지고 나머지 삼면은 병풍처럼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아베가묘소'라는 푯말이 길이 꺾이는 곳마다 박혀있어 선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야마구치에서 야마란 일본에선 대체로 산을 의미하지만 고대엔 야마토(경북고령)란 대가야를

 

뜻한 지명이었다.

 

85년 한국혈액원에선 전남지역에서 CIS-AB형을 찾아냈다.

 

보통AB형과 O형이 만나면 AB형이나 O형이 태어날 수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 서남부지방과

 

일본 큐슈(야마구치현)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서남부인 전북군산에서 옥포까지 일직선으로 활모양으로 연결하면 진도,목표쪽의 

 

모든 지역과 일본 야마구치현은 바로 삼국시대 백제문화권과도 일치한다.

 

고사기,일본서기의 제작시기도 백제가 멸망한 후 본토의 백제지식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온 직후 쓰여졌다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최근 학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광주 전남지역 헌혈잘자를를 대상으로 혈액형을 분석한 

 

결과 1만명당 3.5명꼴로 CIS-AB형이 나타나고 있다고한다.

 

다시 말해 아베총리조상의 고향은 큐슈의 야마구치가 아니라 전남의 목포,진도지역이라고 

 

보아야 정답인 것이다.

 

 


동북공정 고구려사

 

성서의 뿌리p254    읽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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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플래티넘 s*****6 2020.08.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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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만약권율장군이 역모의 수괴였다면?   학교에서 배운다. 소중화주의 한국은 작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여진,조선,일본을 오랑캐라 말하며 한국은 여진,일본을 오랑캐라 부른다.   권율장군은 충신이고 영웅이다. 소설을 한 번 써보자.   권율장군이 어디 권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원권씨라고 가정해본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전 조선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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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만약권율장군이 역모의 수괴였다면?

 

학교에서 배운다. 소중화주의 한국은 작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여진,조선,일본을 오랑캐라 말하며 한국은 여진,일본을 오랑캐라 부른다.

 

권율장군은 충신이고 영웅이다. 소설을 한 번 써보자.

 

권율장군이 어디 권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원권씨라고 가정해본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전 조선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시비를 건다.

 

연산군때까지 일본에 공녀를 바쳤던 조선은 중종때 자주개혁을 선언하며 이를 단절시키나

 

 다시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이를 요구한다.

 

10만양병설(한국사상식 바로잡기)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나 만일 실미도처럼 잘 훈련된

 

군대를 권율에게 맡기고 총지휘권을 주어 정벌하라 명했는데 낙동강쯤가다 지금은

 

 농번기라 안되고 비가 많이와 화살이 느슨해지니 안되고 북쪽에 있는 나라가 남쪽에

 

 있는 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다라며 다시 회군해 개혁을 하고 있는 조선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명을 권율의 고향인 철원으로 하오리까 가야라

 

하오리까 여쭌다.

 

  이에 고무된 도요토미는 가야란 이름이 아름다우니 (일본고대사서중 하나에 가야는

 

임라일본부 즉 일본의 식민지였다란 허구적이야기가 있다) 국명을 가야라하거라.

 

그후 가야의 태조 권율은 자신의 역모를 감추기 위해 소왜국주의사상을 내세워

 

조선은 작은 일본이라 칭하며 일본은 아버지의 나라라하여 큰나라에 빌붙여사는

 

사상인 사대주의로 일관한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도 중국의 동쪽에 붙어있는

 

중국의 속국이란 뜻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칠 수는 없다. 그럼 권율(이성계)이 낙동강(위화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게 정당화된다.

 

그리고 다시 공녀제도를 만들어 매번 공녀를 뽑아 왜국에 상납하고 그 반작용으로

 

조혼제도가 가야시절 내내 자리를 잡는다.

 

이게 오랫동안 정착되어 1909년 민적법에(노컷 조선왕조실록) 의해 성씨가 없는

 

노비나 백정,망나니,재주꾼들은 기왕이면 왕족의 성씨를 갖자며 철원권씨나 김해김씨를

 

 가져가고 이들의 후손중  성공한 사람들은 진짜족보를 사서 종친회에 나온다.

 

한술 더떠 어떤 이들은 진짜임을 강조하고자 권씨가 아니라 궐씨라고 고쳐부르기도 한다.

 

몽고는 세계를 휘두른 국가다 원도 몽고족이 세웠고 러시아인도 한꺼풀 벗겨내면 속은

 

몽고인(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도 무굴왕조,타타르까지 전세계를 휩쓸었다 황인종을 몽골리안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고려도 세계속에 그것도 몽고 바로 옆에 있다 모든 나라가 복속해야했듯 고려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고 앞에 충성충자를 왕에게 붙였으며 공녀를 바쳐야했다 

 

이건 고려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일이었다. 

 

명은 원을 물리치고 중원만 통일한다 그리고 고려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건다.

 

물론 여기엔 공녀도 포함된다. 고려 공녀는 공민왕이 등극함과 동시에 없앤제도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고려는 전군의 총지휘권을 이성계에게 

 

맡기고 명을 치라 명한다.

 

고려는 문무를 겸비한 국가로 무인기질이 강했고 여러 전란을 거듭하면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전권을 갖게된 이성계장군은 위화도에서 우기가 오길 기다리다 지금은 비가 많이와

 

화살이 느슨해져 안되고 농번기라 안되고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라며

 

 창끝이 겨눈 방향을 반대로 돌린후 고려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싸움을 건 적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 생긴 왕조의 국명을 이성계의 고향인 화양이라고 하오리까

 

 조선이라고 하오리까 묻고 명태조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우니 (고대 조선은

 

중국이 지배했다고 중국은 아직까지 우기고 있다) 조선이라고 하거라라고 명한다.

 

이 때 고려의 대신 이인임이 이성계의 선조라고 자기네 사서에 기록해 후손들이 조선에

 

대한 외교적 히든카드(조선도 몰랐던 조선)로 써먹도록 조치하고 이를 임진왜란 직전

 

오키나와 상인들에게  전운이 감돈다는 정보(풍수화/김용운)를 입수한 명의 관리들이

 

이 히든카드를 써먹는다.

 

홍역관과 병부상서 석성의 이야기는 얼굴마담일뿐이다.

 

공녀를 보자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공녀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

 

그리고 조혼의 풍숩이 조선내내 이어지지만 지금의 교과서엔 조선의 공녀이야기나

 

조선시대 조혼이야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온통 고려공녀 충성충자 고려임금 이야기뿐이다.

 

 우리 조상들도 항상 그랬으니까 조선이 중국을 사대주의로 떠받들고 사대로 일관하는건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죄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개척한 갈라전(동북3성과 함경도일대)도 윤관의 동북9성도 흥남부두일대로 

 

왜곡되어있거나 함경도로 국한되고 교과서엔 온통 세종대왕의 4군6진이야기뿐이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군관 출신이고 세종의 대마도 정벌도 사실은 태종의 작품이다.

 

다시 말해 고려의 무인기풍이 세종때까지는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군권은 모두 임금에게 집중시키는 체제를 만들고 공맹사상만을 강조하는

 

문치시스템에만 역점을두어 결국엔 임진왜란과 36년국치를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몽골제국시절 세계가 몽고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쳤지만 명나라시절 세계에서

 

명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친건 조선뿐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 전주이씨임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은 이씨가 아니고

 

리씨라고 주민등록증에 달고다닌다.

 

악인열전을 보자 히틀러가 있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가스로 살해한 인물 독가스를

 

누가 나치에게 팔았는가 유대인재벌 로스차일드가문 그 후손들중 일부와 관계자들은

 

 AP,UPI,로이터,워싱턴포스트,헐리우드 ,뉴욕타임스,뉴욕포스트등등 모두 그들 것이다.

 

위인전을 보자 이성계.나폴레옹(지식의 미술관) 모두 역모의 수괴인데 그 잔당들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너무 작아도 안보이지만 너무 커도 안보인다.

 

나폴레옹은 남의 나라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역모의 수괴인 이성계 이제 그만

 

이완용 같은 반열인 악인열전에 올릴때도 되지 않았을까

대쥬신을 찾아서

팍스 몽골리카와 고려

조선시대 궁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전통생태와 풍수지리

욕망하는 지도

노컨,조선왕조실록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

한국사상식 바로잡기

풍수화

 

제목 : 동해 일본해 &성폭력범죄자의 특징

 

요즘엔 전자발찌를 차거나 화학적거세를 한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처벌수위는 비슷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5분내지10분의 쾌락을 위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짖밟아버리는 범죄.

 

5~10분의 자신의 쾌락 떄문에 , 이게 성폭력을 즐기는 이유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페탱원수의 비시정부이다.

 

페탱원수는 1차대전의 영웅이었고 대통령까지 되었다가 2차대전떄 프랑스 온천도시 .

 

비시에 나치가 조종하는 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프랑스 국토의 1/3을 다스리다 전쟁이

 

 끝난후 처벌받는다.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한건 3~4년이고 프랑스가 독일에게 문화적 혜택을 받은건 없어도

 

빼앗기거나 당한건 많다.

 

이성계를 보자 한족 부흥운동인 백련교도의 난으로 홍건적이 쳐들어왔을때 무찌르고

 

60년간의 일본남북조시대에 남조의 패잔병들이 남원쪽으로 진군했을때 황산에서

 

대파시켜 전쟁영웅이 된다.

 

여러대째 다루가치집안이었던 그는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명나라 토벌을

 

 명받고 위화도까지 갔다 쿠데타를 일으켜 자주국인 고려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요동이

 

 우리땅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향보내고(오백년 도읍지를 ~)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나라이름을 지어달라고 애원한다.

 

조선은 500년내내 임금의 권한을 수행하려면 중국황제의 허락을 받아야했고 세자를

 

 지명하려해도 그 지명이 유효하려면 중국사신의 허락이 있어야 그 지명이 유효한

 

중국의 유일한 식민지였다.(대장금)

 

500년동안 중국만 바라보며 사대주의 쇄국을 하던 조선은 근대 서양문물을 1543년부터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이권을 먹으려면 먼저

 

식민지관계를 청산해야되는걸 알기에 강화도조약 1조에 '조선은 독립국'이란걸 명시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시킨다.

 

우리는 36년이라 배웠고 지금은 35년이라 가르치지만 사실 50년이 맞고 이건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이었다.

 

3국간섭을 보자 중국땅을 점령했지만 서양세력이 간섭해 할양받을 땅을 포기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비스마르크를 보자 나폴레옹3세와 전쟁후 파리를 함락시키고 배상금을 요구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대신 가지라고 했을때 그는 다른 나라들이 간섭할 걸

 

 우려해 돈으로 달라고 한다. (비스마르크평전)

 

만일 2차대전후 미국이 전쟁배상금을 일본정부에 요구했다고치자 그리고 대신

 

조선을 가지라고 했다면 우린 기분이 어떨까 그런데도 우리는 프랑스를 찬양하면서

 

 우리와 같은 역사를 안고 있는 월남은 무시한다.(호치민평전)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안한 두번째 이유는 군사력도 얼마안되고 아직도 활이

 

주력인 나라 학교도 지어주고 철길과 도로도 놔주어 주선사람들은 좋아하나 나중엔

 

 조선을 삼키기 위한 포석인걸 안중근의사등 몇몇분만 빼놓곤 모른다. (시일야방석대곡)

 

그래서 1909년에 하얼삔에서 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토의 자제 요청으로 조선을 삼키지 못한 일본은 바로 다음해 조선을 병합한다.

 

500년동안의 식민지배체제,쇄국정책을 이성계가 만들었고 그를 주도한 인물이 그의 군사(참모)

 

정도전인데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계략에 세뇌된 국민들에 의해 영웅이 되어 있고

 

너도나도 전주이씨라 자랑한다.

 

세계의 노예제도가 없어진건 1860~1870년 사이이고 일본도 1872년에 노예제도를 없앴지만

 

워낙 강고한 중국은 1903년에야 없애고 우리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제일 늦은 1909년에야

 

없앨 수가 있었다. (노컷조선왕조실록,청사)

 

누가 그런다 프랑스는 반민족 처벌했는데 우린 못했다고 그들은 3~4년 동안 우리는

 

50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는데 상황이 같은가 앞이 안보이는 상황인데 같은가 해방후

 

빨치산들이(권오석) 남한을 전복하려고 총파업,도로,철도 운행중단시키는데 이걸 막으려면

 

남로당같은 공산당을 색출할 능력이 있는 집단은 친일경찰뿐인데(한국보수세력연구) 상황이 같은가

 

 우리의 근대문물은  거의 100%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 들어왔다.

 

교육,문화,법률,의료,과학 혈액형별성격테스트도 한국과 일본뿐이다.(헌혈,사랑을 만나다)

 

김구선생님께서 해방후 말씀하신다.

 

마지막까지 내곁을 지킨 사람은 넷뿐이었다고.....

 

지금은 보는 사람마다 자기가 거기에 속한단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이었고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지만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변절한다.(한국분,한국인,한국놈)

 

유신반대 독재반대를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은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KTX승무원을

 

등친후 먹튀한다.(그대들을 희망의 이름으로 기억하리라:KTX여승무원문집)

 

그리고 우린 어떤 범죄자에겐 감투를 어떤 범죄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운다.

 

다시 말해 조선은 중국이라는 다국적기업의 현지인 사장체제였고 36년식민지는

 

 일본이라는 다국적기업의 본사파견제 사장체제였다는 이야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보자 개막식때 천장철도가 잠시 나온다. 이건 티벳에 대한 식민지배

 

 말뚝박기인데 우린 그런가보다한다.(중국의 거대한 기차)

 

폐막식때 보자 동해를 일본해라 표기하고 있다.

 

중국이 일본에 감정이 더 많을까  한국에 감정이 더 많을까

 

이건 이이제이,원외근공의 오랑캐토벌 수법이다.

 

 

한족은 강대국 요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멀리 있는 오랑캐인 금나라를 이용해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여진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후일 원나라를 세운

 

몽골을 이용해 금나라를 멸망시킨다.

 

멀리 있는 오랑캐를 시켜 가까이 있는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원외근공전략 폐막식때

 

일본해가 바로 그래서 나온 것이다.

 

지금 양국에게 가장 급한건 서로때리기 서로방어하기가 아니라 전권을 위임받은 양국의

 

대표학자 몇몇이 모여 양국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동해,일본해의 새로운 대안명칭을 찾는 것이다.

 

지금 양국은 명칭문제로 막대한 국력을 외교전으로 소모하고 있고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중국은 어부지리한다.

 

몽고,거란,여진,한국,일본,오끼나와까지 모두 알타이어족인 흉노유목민의 후손들이다.

 

(대쥬신을 찾아서1,2,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성서의 뿌리 p63,254)

 

오랑캐끼리 싸움붙이는 중국의 이이제이전법에 이젠 그만 놀아나자 가장 좋은예가

 

 임진왜란이다.(풍수화/김용운)

 

중국은 지금 칭기즈칸과 을지문덕을 중국인이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동북공정 고구려사)

 

만주와 요동이 한국땅이란걸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우리는 중국을 어버이로

 

 섬겨야한다는 소중화주의를 자신들의 6년간의 치부를 위해 자손들에게 심어주고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몇몇 동이족 반역자들의 논리에

 

 이제는 그만 놀아나자.

 

성폭력범이 5~10분의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일생을 망친것과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가

 

 6년간의 왕노릇을 해보는 쾌락을 만끽하기 위해 나라를 500년간 중국의 식민지배체제로

 

만든 역사의 과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한다.

 

시간나시면 단양 도담삼봉에 한 번 가보세요 

 

여기 한양의 풍수설계자이며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의 용비어천가가 있습니다.

 

 Re-born 888

 

제목 : 영화 '해적'을 보고

 

 

우리는 월드컵과 양대올림픽에서 뜨거운 환희와 함께 우리의 저력을 확인했다.

 

운동뿐 아니라 경제, 학문, 하다못해 세계요리대회 마술대회등 소소한 것까지

 

우리는 세계를 상대로 우리의 저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ODA 받던 나라에서 베푸는 나라가 지구상에 유일하다는게 괜한 소리는 아닌듯 싶다.

 

이렇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우리가 근세에 왜 그런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 역사를

 

 가지게 된걸까

 

나부터도 우리역사가 부끄러웠고 그걸 극복하는데 이십년 가까이 걸렸다 생각하지만

 

우리민족 대다수 특히 역동성 있는 88세대 조차도 마음한구석엔 근세 우리역사에 대한

 

 부끄러운 얼룩들이 지워지지 못한채 남아있을 것이다. 이걸해소하는게 나는

 

우리역사의 당면과제 중 가장 시급한거라 생각한다.

 

역사의 과오로부터 배우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반복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했던가

 

흔히 우리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나라가 이꼴이 났다고 말을하며 배워왔다

 

과연그럴까

 

만일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을 나라의 방향으로 잡던 그날 반대로 나라의

 

 문호를 활짝열고

 

외부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유연성을 발휘했다면 그런 근세의 비참한 역사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나더해 그시절 왕이 고종이 아닌 세종이고 병부를 이순신장군이 관장하고 있었다해도 역사는 달랐을까

 

나는 우리가 배웠듯 단 한차례의 싸움도 없이 국권을 넘긴 현실에 더해 장렬히 싸우다

 

 국권을 잃었다는 역사의 한페이지만 추가할뿐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는 같은 위치를

 

굴러갔을거라 생각한다.

 

조선의 국시는 사농공상으로 정해졌다 또 외국에선 우리를 조선이 아닌 코리아로

 

부른다 왜일까

 

천하최고의 약수라해도 한그릇에만 담겨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썩어서 아무것에도 못쓰는 물이되고만다.

 

고려는 상업을 귀히여기고 장인을 우대하며 자주성이 강해 금속활자 고려청자 북진정책 여러대장경

 

코리아란이름과 불교예술 황제의 칭호까지 조선의 김치 불고기 누룩(여진어) 거북선등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지금 우리가 원조하는 아이티와 필리핀은 6.25직후엔 우리에게 원조를 주던 나라들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상황이 뒤바뀐것 일까 어떤 생각을 하는 지도자를 세웠는가가 가장 클 것이다.

 

우리의 역량을 세계최고의 교육열에서 찾는분들이 많지만 만일 세계최강의 군대를 지도자가

 

 함정으로 이끌고간다면 그 부대의 역량은 아무 쓸모가없게된다.

 

조선의개혁정책은 그들이 요승이라 말한 신돈이 만든것을 패러디한 것이며 불교예술 자기

 

 그외 문화 공예품 어느것하나 독창적인 것은 없다. 한글은 두가지 의견이 팽팽하니

 

 접어두고라도 세종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있어선 안될나라라 난 생각한다.

 

몽고의 말발굽이 지나간 수에즈 오스트리아의 노이슈타트 무굴 베트남서북쪽 운남까지의 

 

나라중 그 나라의 국명이 제대로 보존된 나라는 지구상에 단하나 고려뿐이었다. 외세의

 

 침략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말기 바란다.

 

고려는 군부가 여러개고 지금의 대한민국도 정당이 여러개다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군벌중 잘난사람이 실권을 잡다가 또 잘못하면 다른군벌이나 왕이 실권을 잡는것이

 

 대한민국의 다수당제를 보는것같다.

 

조선은 어떤가 우선 탄생부터 사대다 자주성이 강한 고려인을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중국에 머리조아리는게 국시다.

 

 조선 군벌들이 난립하면 왕권이 위험할 수 있다하여 모든 군권은 왕에게 집중된다.

 

북한도 수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니 오랜가도 마지막엔

 

비실거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과 고려는 외부에 대해 모든 문호를 개방했지만 조선과 북한은 특정국가 한둘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문호를 열었을뿐 모든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했으니 지금은 북한도

 

 대원군시절의 조선도 오랜세월 바가지의 묵혀놓은 최고의 약수 신세가 되지 않았나 감히

 

생각해본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란 영화를 안보신 분이라도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장수이야기를

 

 안들어본 분은 별로 없으실것이다. 왜 될 성부른 사람은 싹부터 잘라버리는게

 

 조선의 관행이었다.

 

그 사람이 커서 왕권을 위협한다면 그보다 악한 상황은 없기에 이순신이 그렇게 잡혀갔나보다.

 

왜 우리는 위화도회군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는걸까 오로지 내 생각엔 왕십리 같은

 

스토리텔링과 일부 내러티브적인 면이 사람들이 흥미를 유발했시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웃민족의 뇌리에 중화사상을 주입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삼국지 하지만 그 속엔

 

 무한한 스토리텔링과 얼마간의 내러티브도 포함되었기에 중국을 적대시하는 나라에서도

 

 중화민족주의를 은연중 심어놓는 삼국지를 널리 권장하는건 아닌지 의심해본다.

 

대장금을 중국국민뿐 아니라 지도부까지 열렬히 환영한다. 왜 을지문던 강감찬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이 별볼일 없는 벼슬을 하던 명나라의 사신에게 최고의 실권을 가진

 

 조선의 정승이 벌벌기니 이미 우리 스스로가 중국의 속국임을 증명했다.  더이상

 

 동북공정이 아니라 한반도공정을 해도 우리가 대장금에서 모든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중국지도부가 좋아라할 수밖에 이제는 대장금을 중국에 수출해서 외화를 많이 벌고 한류가

 

뻗어나가겠구나란 생각은 버리자 조선시대에도 중국에 조공하는 물품보다 받아오는 물품이

 

 더 많았다.

 

우리가 위화도쿠데타란 역사로 인해 우리민족에게 씻지못할 오류를 저지르고 있을때

 

명나라의 침략을 받은 월남은 항복한 명군을 선처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는 오피러스를 타는데 그들은 자전거밖에 못갖는 처지라고 으스

 

대지말자 김연아의 재능을 가진 우리겨레가 지난600년 동안 이성계가 자기일족의 영화를

 

위해 우리민족에게 굴레를 씌웠던 사농공상의 허상에서 이제는 빨리 벗어나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는 일을 만들지 않는 각성이 온 국민적으로 인식될때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조

 

금은 우월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고려에는 벌리사란 직업이 있었다 한강이북에 왕기가 있다하여 오얏나무를 심었다 기른후

 

 자르는 직업이었다.

 

그 오얏나무를 심은 곳이 바로 강북구 번동이다.

 

제발 대한민국엔 벌리사란 직업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한국의 국무총리가 중국대사에게 벌벌기면 우린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대장금이 그런 스토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걸 보고 우리는 좋아라합니다. 그게 우리의 자화상이고요..88

 

한국,번영의길 

패권의비밀 

 

대쥬신을찾아서 

 

김용운교수님의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   읽어보십시오

자미원88 
YES마니아 : 플래티넘 s*****6 2020.08.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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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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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시려면 풍수공부는 기본입니다.  제가 글 두개만 올립니다.  제목 : 관용 소제목: 지도자는 재주보다 덕이 있어야 한다.장묘문화 윗분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지 ..묘지는 미세먼지를 막아줄 숲이 있던 곳이고 후손들의 터전인 집,공장,논밭을 위한 땅이다.민중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노회찬의원도 소도에 묻혀버린 브라만계급이 되셨다.안타깝다.풍수에 전순이란 말이 있다
"관용" 내용보기

역사를 공부하시려면 풍수공부는 기본입니다.

 

제가 글 두개만 올립니다.

 

 

제목 : 관용

 

소제목: 지도자는 재주보다 덕이 있어야 한다.


장묘문화 윗분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지 ..


묘지는 미세먼지를 막아줄 숲이 있던 곳이고 후손들의 터전인 집,공장,논밭을 위한 땅이다.


민중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노회찬의원도 소도에 묻혀버린 브라만계급이 되셨다.


안타깝다.


풍수에 전순이란 말이 있다.


혈앞에 내민 자리를 말하는데 산으로부터 내려온 지기가 혈을 이루고도 남아서 만들어진 자리이다.


원래 '전'이란 글자는 양탄자를 뜻한다.


한국의 국운은 백악(북악)산을 뒤로한 청와대와 경복궁이 혈자리이고 그 앞 광화문광장이 전순이라


할 수 있다.


묘를 지을때도 전순의 크기 유무를 보는데 보통 알맞은 터가 좋고 무악대사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도 전순을 보았을 것이다.


복수를 위해 수원에 있는 '화령전','운현각' 현판을 박정희대통령 친필현판 대자뷔일까 복수를 위해


광화문현판을 떼버렸다. 이런 발자취도 다 역사인데..


박정희대통령의 광화문 현판글씨는 광화문일대의 기운을 장악하는 글씨다.


왜 우린 관용을 실천하는 지도자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


김대중대통령이 그립다.


이순신장군동상을 세운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본의 침략야욕을 누르는것 풍살과 도로살을 제압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횡단보도는 자동차의 통행속도를 줄여주기 때문에 도로살의 강도를 상당히 약화시키는 의미가 있다.


,풍살은 음기가 가득 실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세종로의 일부를 공원화하기 위한 논의과정에서 충무공동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풍수적 이유로 무산되었다.


김대중대통령은 독재권력과 몸싸움,말싸움은 말할 것도 없고 목숨싸움까지 했지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셨다.


왜 이런건 본받으려하지 않을까.


진정한 복수는 내가 그 일을 당했을때 그것을 되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났던 원인을


분석하여 그 상황을 해결함으로써 그 문제를 푸는 것이 진정한 복수이다.


보수가 그렇지 못하고 군부독재권력이 그렇지 못했다면 진보는 달라야하는데 왜 모두 판에 박은듯


똑같은 것일까.


학생들은 지도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무얼 배울 수 있을까 또 수백년후 학생들은 싹 지워져 버린


이 시대의 흔적을 어디서 보며 배울 수 있을까 예로 숭례문 세로현판을 보자.


광화문현판도 독재자의 글씨가 아니라 이 시대의 역사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게 무얼까 창의력?


한국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된 가장 큰 요인중 하나는 우수한 인력을 쉽게 뽑을


수 있는 한국사회구조에 있다.


OECD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PISA): OECD에서3년마다 한번씩 실시하는 학업성휘도 평가.


최근에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한국이 여전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1등~7위까지 전부 동아시아 국가다.


그렇다면 한국의 창의력 지수는 얼마나될까?


한국은 2015년에 총139개국중 31위를 기록했다.


최상위 성적은 모두 유럽국가라는 것이다.


글로벌 창의력지수는 기술력,인재,관용성등 3가지 부분을 종합평가한 것이다.


한국은 1번은3위 2번은 50위 마지막의 제일 중요한 관용성은 70위를 기록했다.


관용성 지수도 두 가지로 평가된다.


1.인종,민족적소수자에 대한 포용력.


2. 성적소수자에 대한 포용력


1번은58위 그리고 번은82위를 기록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중용이란 어느 양극단의 중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겁과 만용의


중간을 중용이라했다.


즉,중용이라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비겁한 행동도 용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특정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눈앞에서 벌어진 구체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제기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을 모두 끄집어내어,거기서 가장 올바른 대안을 잡아내는 것이 바로 진짜 중용이다.


결국 새로운 상황에 얼마나 많은 대안을 꺼낼 수 있는가가 창의력의 핵심이다.


100C물이 든 양동이에 수돗물 한방울 넣는다고 양동이속 상태는 바뀔까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과학구조로는 잴 수 없지만 분명히 바뀌었다. 이런 물방울이 되어보자.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못된 시어머니밑에 있던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가 된다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들이 아무리 좋은 고참들이 있다해도 후임이 그 권력자리에 않은후


그 특권을 휘두르며 못된 짓하는 졸부는 어느시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게 되어있다.


그런 졸부가 있더라도 그런 양동이가 있더라도 우리 모두 한 방울의 물이되자.


모든 직업에는 권리와 의무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달콤한 권리만을 누리기를 바란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졸부라고 부른다.


권리와 의무를 같이 짊어질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의리 있는 사람이라 부른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더 많이 이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위인이라 부른다.


제목 : 골목길은 문화유산이다

 

 

애니메이션영화 Car2에서 일본고가위를 경주차들이 달린다.

고가옆에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있고 그 중간에 고대에 만든 높은탑이 잘 어울린다.

탈레반이 고대 암벽에 새긴 몇층건물 높이만한 뱌미얀석불을 로켓포로 부순다.

이라크 북부에 있는 IS무장세력들이 고대유물들을 폭파시킨다.

문민정부시절 재수없다고 중앙청을 헐어버린다.

600년 서민의 애환이 묻어있는 종로의 피맛골을 시원하게 밀어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북촌을 밀어버리고 빌라단지를 만들어야한다고 크게 외친다.

창덕궁의 아기자기한 산책로는 벌써 누가 넓게 밀어버렸다.

지금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비롯한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건물인 중앙청이 있었다는걸 알까

이렇게 밀어붙여도 어느 정치인 하나 안타까워하는 이가 없다 어느 국민하나 안타까워하는 이가 없다.

그저 IMF, 군사정권에 대한 말만 떠든다.

신라 혜공왕시절 에밀레종이라 불린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다.

그때도 군사정변과 IMF같은 환난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오죽 힘들었으면 만파식적이란 피리가 등장했겠는가.

지금 사람들은 그당시 군사정변이나 환난을 기억할까

경주에 있는 에밀레종만을 보며 조상들을 기억할뿐이다.

만일 그때 누가 재수없다고 에밀레종을 중앙청식으로 부숴버렸다면 우리는 무얼보며 그 시대를 느낄 수 있을까

아랍과 유렵은 지금도 '앙앙'거리지만 십자군의 침략당시 세운 중세성곽을 부순 아랍국가는 하나도없다.

로마의 지배를 받은 로만스어를 쓰는 유럽국가중 로마건축물을 부순나라는 없다.

백제 유물들을 보라 이 지배자 맘에 안든다고 이 문화재 없애고 저 지배자 맘에 안든다고 저 문화재 부순결과 남아있는 문화재가 얼마나 초라한 수준인가

이 성계 나도 맘에 안들지만 그렇다고 장인들이 만든 숭례문 부술 순 없지않는가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것도 떄려부수자고 말하는 이들의 글을 본다.

전두환시절이 암울했지만 올림픽에 나가 메달 받아온 선수들 대통령이 치하했다고 박수는 못칠망정

 

그분들에게도 돌을 던져야 쓰겠는가 우리의 문화의식은 아직도 IS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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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플래티넘 s*****6 2020.08.1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