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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바스 / 파트리크 쥐스킨트 대학 입학 후 어찌어찌해서 악기를 하나 고르고 배워야 했는데, 동기 중에 피아노나 바이올린 실력자가 많아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첼로를 배웠다. 나는 바이올린에서 밀리고 첼로를 선택하면서 ‘그래 첼로까지는 괜찮아, 콘트라바스만 아니면 됐지.’ 하고 자기합리화를 했던 것 같다. 콘트라바스는 인기 없는 악기여서 한 학번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했으니까. 그런데 동기 여자애 하나가 콘트라바스를 택했다. 그 ‘콘트라바스 하는 애’랑은 찐친이 되었고, 나는 지금도 종종 콘트라바스 얘기를 꺼내며 걔를 놀린다. 걔는 비기너임에도 불구하고 콘트라바스 연주를 진짜 잘 했다. 그러니까 내가 놀렸던 건 연주실력이 아니고 그냥 콘트라바스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뭐랄까, 콘트라바스는 좀 그렇다. 일단 아주 크고 무거우며(그래서 악기 케이스 밑에 바퀴가 달려 있다), 음색이 낮고 둔탁해서 즐겨 듣고 싶지 않다. 이름이 ‘콘트라바스’인데 ‘콘트라베이스’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아마도 미국식 이름이 ‘더블베이스’여서 그런 것 같지만. 무엇보다도 콘트라바스는 독주악기로서 빛을 발하는 악기는 아니다. 물론 오케스트라에서 묵직함을 담당하는 콘트라바스가 빠져선 안 된다. 하지만 콘트라바스는 주인공이 못 된다.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이러한 콘트라바스의 처지와 꼭 닮은 콘트라바스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모노드라마를 썼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대표작은 <좀머 씨 이야기>나 <향수>겠지만, 처음 유명세를 안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지는 이 <콘트라바스>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예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는 단연 콘트라바스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요. (p.7) 서른 다섯 살의 주인공은 국립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있고, 처음부터 콘트라바스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떠밀려 1열도 2열도 아닌 3열에 앉아 콘트라바스를 연주한다. 방 안에서 그의 독백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는 간간히 맥주를 곁들이며 말을 늘어놓는다. 초반에는 스스로를 속이려는 듯 콘트라바스를 말도 안되게 치켜세우더니 시간이 흐르며 점차 감정이 격앙되었고, 나중에는 거의 콘트라바스를 쓰레기 취급한다. 그 이면에는 '오케스트라'라는 깨뜨릴 수 없는 체계에 순종해야 하는 처지와 절대 주인공을 넘볼 수 없는 희미한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저 꼭대기에는 상임 지휘자가 있습니다. 그 밑에 제1바이올린 수석, 그 밑에 제2바이올린 수석...(중략)... 또 그 밑으로는 비올라와 첼로,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금관 악기가 차례로 뒤따르고, 맨 마지막에 우리 콘트라바스가 있어요. ...(중략)... 우리를 보면서 와, 콘트라바스다!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 소리는 다른 여러 악기 소리에 묻혀 드러나지가 않거든요. (p.42) 독백을 통해 그가 자신의 일에서 제법 만족하는 부분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말단 콘트라바스 연주자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소프라노 여가수 사라를 짝사랑하면서 이 남자의 자기 비관은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된다. 사라는 이 남자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고 남자는 그녀의 흐릿한 배경으로 기능할 뿐이다. -어느 측면으로 보나 콘트라바스 주자는,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정말 최악의 쓰레기입니다! (p.43) 게다가 아름다운 사라의 노래에 반주를 해 주기에도 그의 콘트라바스는 완전히 부적절하다. 그녀와 그의 관계는 소프라노와 콘트라바스만큼이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콘트라바스의 외로운 물성은 이 콘트라바스 연주자의 운명으로 옮겨 갔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분노와 체념을 반복하더니 이제는 달라지겠다 다짐하며 방을 나가지만, 내 생각에 오늘 밤 그는 다시 그만의 방으로 돌아와 같은 맥주를 마시며 같은 술주정을 반복할 것만 같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나는 왜 이렇게 살면 안 되죠? 내가 왜 당신들보다 더 나아야 하죠? 예, 당신들보다! 당신들 회계원, 수출 담당자, 사진관 직원, 혹은 법률가보다 왜 더 나아야 하죠? 당신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중략)...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흥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여러분을 모욕할 생각도 없었고요.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일을 하게 되었고, 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겠죠. (p.66-67) 이 남자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장소가 그의 방 뿐이고, 그가 오로지 독백으로만 솔직해질 수 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저마다 고뇌를 품고 있지만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고, 적당히 처신하며 산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나 자신만은 내 삶을 속속들이 인식할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에, 그러니까 나만의 독백을 읽는 순간에 외로움이 쌓이는 걸까?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는 정호승 시인의 말도 그래서인 건지. 그러고 보니 콘트라바스 연주하던 내 친구도 입만 열면 ‘인간의 외로움은 필연적인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각자는 필연적으로 외로울 지 몰라도, 외로움을 연결할 때 좀 덜 외롭게 된다. <콘트라바스>의 연주자처럼 우리도 이런 오늘을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이런 오늘에 닿았다, 만족과 불만족을 조절하면서. 그리고 아무튼 오케스트라에는 콘트라바스가 있다. -장담컨대 애당초 콘트라바스 주자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좌절과 우회를 반복하다 보니 어쩌다 여기에 닿게 된 것뿐이죠.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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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쥐스킨트의 책은 다 정말 술술 읽히는 것 같아요 특히 이 책은 꼭 1인극 같다는 느낌이 들어 읽지 않고 누군가 옆에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콘트라바스 하나로 이렇게 많은 영역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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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비둘기, 좀머씨이야기 그리고 콘트라바스까지.
어느새 나의 서재에는 고급스러운 연두색 책표지의 소장가치가 충분한 파트리크 쥐스킨트 작품이 네 권이나 꽂혀있다.
엄청난 덩치 때문에 악기라기보다는 질질 끌고 다니거나 상전처럼 모시고 살아야 할 짐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소리가 예쁜 것도 아니다. 깊고 굵기만 할 뿐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않다. 그렇다 보니 독주곡은 고사하고 독주 파트도 거의 없다. 오케스트라 내에서 서열이 제일 낮고, 공연 중에 관객들의 시선도 끌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찬밥 신세에도 오케스트라에서는 없어선 안 될 악기다. 콘트라바스는 다른 악기들의 소리를 포용하고 받쳐 준다. 그를 통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악기들을 더욱 빛나게 한다. 사실 세상에 홀로 잘난 것은 없다. 빛나는 것들 뒤에는 항상 그것을 빛내 주는 조연과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어둠이 없으면 태양이 어떻게 빛날 것이며, 못남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어떻게 도드라지겠는가! 그런 점에서 콘트라바스는 어쩌면 우리같이 평범한 존재와 비슷할지 모른다.
옮긴이 박종대는 콘트라바스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콘트라바스 주자의 삶과 사랑과 음악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
음악적 역량과는 아무 상관없는, 오히려 자리만 엄청 차지하는 짐 같은 녀석. 엄청난 체력이 필요한 악기..... 콘트라바스. 하지만 운명처럼, 삶의 무게처럼 짊어지고 사는 주인공은 우리의 모습이었다. 아~ 싫어도 살기 위해 짊어진 무거운 삶의 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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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이 희곡을 사랑이야기로 결론 짓고 있던데 아마도 결말이 그렇다는 것을 주목케하는 의도이지 않았나 싶다. 물론 결론은 사랑이야기로 끝맺어지는듯 하지만 그것도 화자의 공허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소리 높인 것으로 봐야 할거다. 시작은 콘트라바스의 예찬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며 거듭 악기의 가격과 물가 상승을 언급하는 화자의 세속성이 바로 드러난다. 그리고 지나가며 이야기 하듯 그의 짝사랑의 대상 사라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한참을 바스 연주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바스를 병든 삼촌처럼 관심을 끌려는 관심병자로 몰아간다. 그는 바스를 엉덩이 늘어진 노파로 상징하기도 하며 자신은 예술가라기 보다는 기술자라고 자학한다. 그와 바스는 이미 하나이고 그의 콘트라바스에 대한 비하와 혐오는 자기성찰이라기 보다는 그저 자학의 하나로만 보인다. 바스를 여자로 가정하거나 또 사라를 상상하며 사라를 안고서 콘트라바스를 연주하는듯한 장면은 그의 외로움이 극적으로 묘사된 장면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넋두리로 드러나는 그의 일상과 그의 내면은 공허가 엿보이고 극도로 외롭고 극히 불안정한 것만 같다. 콘트라바스의 예술적 가치와 휴대하거나 거치하기 어려운 속성은 사람의 영혼과 자아의 속성을 드러내려 묘사된듯 싶다. 여성과 사랑을 나누려할 때 바스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화자의 말은 언제 어느 순간이던 자기를 성찰하고자 하는 인간의 내적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공연장이 차가울 때면 한참을 체온으로 콘트라바스를 데워주어야 한다는 것도 우리의 내면에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듯 하다. 그에게 바스는 이렇게 사랑의 대상, 예찬의 대상, 자기애의 상징, 또 걸림돌이기도 하다. 콘트라바스와 그는 하나로서 인식되며 인간의 공허, 고독, 불안정함을 상징하고 있다. 반면 그는 세속적이면서 콘트라바스 같은 베이스적인 역할이 아니라 세상의 주류가 되고 싶어하는 깊은 열망도 지니고 있다. 사라라는 그의 짝사랑의 대상은 주류와 잘도 영합하는 속물적인 여성인데 화자의 아니마를 상징하고 있다. 연주자로서의 자부심과 그의 음악적 소양들로도 그의 공허는 메워지지 않는다. 그에게 그 모든 것은 허약한 지반이 덮고 있는 공동 위에 선 것과 다름없는 정도의 영향력만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메마른 일상과 영혼을 구원할 한줄기 빛은 사라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가 사라에 대해 언급한 일화들로는 사라도 빛이라기 보다는 그저 속물적인 여성일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저명인사들이 모이는 공연장에서 사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벤트 아닌 이벤트를 준비한다. 그는 과연 그 이벤트를 실행할까? 그 이벤트로 사라의 관심을 살 수 있을까? 사라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그녀가 과연 그의 공허를 끝내줄 진정한 빛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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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바스를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사람은 없다. 다른 악기나 성악, 작사/작곡을 하기에 부족한 능력과 재능에 밀려나버린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이 콘트라바스이다. 자리로 나눠진 명확한 계급이 있는 것도, 원해서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님에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우리네 삶의 모습과 무섭도록 닮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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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추천으로 휴가를 떠날 때 다운받아서 읽기 시작했더랬다. 워낙 취향이 뭔가 스토리가 있는 소설을 좋아하다 보니, 읽는 내내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생각만 하다가 끝! 아마도 난 한두번 정도 더 읽어봐야 할 듯하다. 휴가지에서 읽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았던 걸수도 있다. 누군가는 좋았다고 하니 정말 취향이다. '향수'는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콘트라바스'는 읽는 내내 물음표만 머릿속에 떠다니다가 갑작스럽게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당황스러웠던게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남는 기억. 언젠가 다시 읽어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