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食其를 '조식이'라고, 兒寬을 '아관'이라고 옮긴 것을 보면, 그저 한자를 흔히 아는 발음으로 옮기는 것에만 집중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걸 이렇게 읽으실 수가 있습니까... 이런 걸 번역하셨다면 당연히 이쪽의 배경지식을 갖추어 신경쓰셨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도 유감입니다. '光錄大夫公孫遺守少府'는 '광록대부 공손유수 소부'가 아니라, '광록대부 공손유 수소부' 즉, 공손유가 광록대부였다가 수소부(守少府·1년 임기제의 수습직 소부, 守는 정식 취임 전 1년간 수습으로 거치는 제도)가 됐다는 뜻으로 이해하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서 완역이 나왔다기에 정말 기뻤는데, 너무도 유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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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대전에서 유방의 휘하 장군들 중 가장 공이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 단연 한신이다. 황제에 오른 유방은 지략은 장량, 행정은 소하, 군사는 한신을 으뜸으로 꼽으며 칭찬했다. 유방의 휘하에는 뛰어나고 용맹한 장군들이 많았지만 그들 모두 한신에 미치지 못했는데, 다른 장군들은 그저 싸움에 특출난 반면, 한신은 전쟁의 판도와 대국적인 흐름을 읽는 전략가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한신은 병법에는 밝았지만 정치는 밝지 못했다. 고대에는 정치와 병법이 차이가 없었다. 손자병법이 군대와 군대의 싸움을 이익에 근거하여 분석한 책이라면, 한비자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이익에 입각하여 풀어낸 책이다. 즉 궁정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 역시 물리적인 전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군대의 싸움은 칼과 활을 통해 가시적으로 다투는 것이라면 권력싸움은 보이지 않는 창칼로 싸울 뿐이다. 아무튼 한신은 세련된 궁정 싸움에 능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큰 공을 이루고도 비명횡사했다. 한신을 보며 생각한다. 특출난 능력은 어쩌면 양날의 검일지도 모른다고.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시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최고지도자가 있다면 비극이 시작된다. 한신도 그랬다.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유방은 한신의 군사적 재능이 필요했지만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신은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순진하게 유방을 믿었으며 자신의 부귀가 영원할 줄로 착각했다. 그럼 한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가장 최선은 유방과 항우가 서로 싸울 때 제3의 세력으로 독립하여 스스로 천하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자면 한신은 정치적 처세나 식견은 부족하기에 독립을 하고도 끝이 안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한신의 선택을 쫓아 유방을 밀어주는 쪽으로 생각해보자. 유방을 밀어준 뒤, 천하를 통일하고 어떻게 처세해야 옳았을까. 가장 최선은 봉지를 반납하고 수도에 머물며 조용히 부귀를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유방으로부터 시기와 의심을 줄일 수 있으며, 특별한 모반을 하지 않는 이상 유방도 뛰어난 군공 때문에 한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신은 최악의 선택을 고수했다. 바로 제후왕이 되는 것. 봉지를 받고 스스로 왕으로 군림했다. 그 결과 한신은 토사구팽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신은 죽기 전 회음후로 강등되어 장안에 머물게 된다. 이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정치적 처세에 신경을 썼다면 목숨만이라도 보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는 높아졌던 왕의 지위에 걸맞은 자만을 부리며 공신 번쾌를 욕보였고, 고조와의 술자리에서 '황제께서는 10만 명의 군사를 이끄는 것이 고작이지만 자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망언을 퍼부었다. 물론 뒤늦게 '폐하는 장군들의 리더가 될 능력이 있기에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라며 아부했지만, 한신의 군사적 재능을 무척 경계하는 고조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매우 나빴을 것이다. 만약 한신이 자신의 특출난 재능만큼 정치적 처세에도 밝았다면 멸족을 피하고 부귀영화를 대대손손 전했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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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표》를 보면서 어린 시절 사회 시간에 부교재였던 '사회과 부도'가 떠올랐다. 당시 부도는 시험 범위에 들어가지 않던 계륵 같은 책이었기에 세심하게 살피지 않았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사회 공부를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부도를 보는 것이 필수'라는 조언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기전체 사서에서 <표> 역시 사회과 부도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물 중심의 기전체 사서는 각각의 개별 인물들을 살피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역사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을 두루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기전체의 결점을 극복하고자 만든 것이 바로 <표>라고 할 수 있다. 사서에서 <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꿰뚫어본 다산 정약용은 '요즘 젊은 선비들은 역사서를 보면서 표를 보지 않는데, 표를 살피는 것이야말로 정확한 역사를 아는 데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한서 표》는 한나라 시대에 지도자층의 가계(家計)를 상세하게 밝혔으며, 시기마다 고관대작이 누구였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왜 사회 지도층의 가계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냐는 점이다. 중국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한나라 시대의 공신들과 외척, 제후들의 가계도를 달달 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한나라를 좌지우지했던 고관대작들의 가계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서 표》는 이성제후왕표(천자와 성이 다른 제후들의 가계), 동성제후왕표(천자와 성이 같은 제후들의 가계), 왕자후표(동성 제후의 서자와 자제들의 가계), 공신표, 외척은택후표(황가의 외척 가계), 백관공경표(한나라 역대 수뇌부에 종사했던 인물표)로 구성되었다. 도표들은 다루는 계급에 따라 신분의 차이가 있고 시대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한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수뇌부 가계도를 다루고 있다는 점, 두 번째로 표에 나온 가문의 후손들이 대체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는 점인데, 반고가 밝힌 <표>를 단순화하면 결국 넘치는 풍요는 자손을 쉽게 타락으로 이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권세를 가지고 부귀했던 가문들의 후손들은 왜 타락하여 가문을 몰락으로 이끌었을까? 왜 선대의 공업을 대대손손 이어가지 못하고, 쉽게 타락하는 것일까. 반고는 지도층 가문에 반복되는 사실을 표에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두 가지를 황제에게 경고한 것 같다. 하나는 인재를 등용할 때, 선대의 위업이나 배경, 그리고 외척 등의 혈연을 고려하기보다 능력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 또 하나는 바로 황가 역시 세대를 거듭하다 보면 여느 사회 지도층의 가문처럼 쉽게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 황제들의 가계도 <표>에 나오는 고위 계층의 가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넘치는 풍요 속에서 타락했는데, 이는 역대 왕조 국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책을 살피면서 '풍요로운 유산'은 지도자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리더가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물적 토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물적 유산보다 중요한 것은 유산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품성이다. 아무리 유산을 많이 물려주더라도,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품성이 결여됐다면 넘치는 유산은 결국 지도자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두툼하고 묵직한 고전이 주는 역사적 교훈은 이토록 단순하고 명료하다. 《한서 표》 중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은 책 말미에 있는 고금인표다. 기본적으로 《한서》는 전한 시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고금인표에는 중국의 신화시대를 열었던 복희씨를 시작으로 황제, 요, 순, 우,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의 영걸들을 9개의 등급으로 나눠 평가하고 있다. (상상, 상중... 중상... 하하) 반고의 평은 유가사상에 무척 치우쳤는데, 이를 통하여 저자는 당대에 필요한 이상적인 인물상을 간접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고금인표에는 《한서》에 나오는 군왕과 인물들을 평하고 있지 않는데, 《한서》는 한나라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책이기에 한나라의 인물을 직접적으로 평하는 것은 저자인 반고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상고시대의 인물들을 빌려 자신의 인물상(像)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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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본기≫의 제왕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이다. 역사책에 기술된 고조의 행적은 ≪한서≫ 외 ≪사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두 책의 내용이 무척 상이하다. ≪한서≫의 고조가 인의를 상징하는 분위기를 풍긴다면, ≪사기≫의 고조는 세속적이며 모략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고조는 어떤 성격의 인물일까? 개인적으로 두 책을 두루 읽어본 바, ≪사기≫에 기술된 모습이 사실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서≫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왕조를 높이기 위해 집필된 책이다. 이렇다 보니 한나라 본기에 다루는 황제들의 치적은 드높인 반면, 과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생략한 경우가 많다. 고조가 인의와 거리가 있다면, 그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자신의 잘못을 재빠르게 시인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적극 수용한 점이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 실수를 대하는 태도는 무척이나 다르다. 한 고조는 무뢰배 출신이기에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프라이드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과오를 비판하는 조언가들의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과오를 재빠르게 인정했으며, 개선하는데 솔선했다. 반면 고조의 라이벌인 항우는 귀족 특유의 자부심과 허영심으로 인해 조언이나 충언을 무시하고 매사에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그 결과 유방의 주변에는 인재가 모였고, 항우는 있는 인재조차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현실적인 시야다. 한 고조의 현실적 감각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 바로 후계구도에 대한 고심이다. 천하를 통일한 고조는 황제에 자리에 오르자 고민에 빠진다. 힘써 일군 제국의 운명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가? 원래 고조는 장자를 폐하고 척 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한나라 건국은 고조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의 세력을 나누자면 첫 번째 유방과 유 씨 종친들, 두 번째 유방의 처가인 여 씨 일가, 세 번째가 바로 공신 집단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가인 여 씨 일가다. 유방의 본부인 여 씨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한 고조를 도와 한나라를 건국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으며, 통일 제국을 뒤흔드는 반역자(혹은 위험분자)들을 지혜로 처단했다. 그렇기에 왕위에 오른 유방도 현실적으로 여 씨와 처가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태자를 정하는 것은 결국, 태자를 후원할 수 있는 후견인을 고려하는 것과 같다. 고조 유방은 척 부인을 무척 사랑했고, 그렇기에 척 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유방은 끝내 여 태후의 아들인 태자(혜제)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여 씨 일가는 개국에 공이 있었으며, 날고 기는 개국공신들과도 무척 가까웠기 때문이다. 여 부인과 척 부인의 정치적인 자질을 볼 때에도 단연 여 씨가 압승이었다. 여러모로 현실적인 조건을 따져봤을 때, 한나라 왕조를 지탱할 수 있는 세력은 여 부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고조가 젊은 나이에 대륙을 통일했다면, 한신이나 팽월, 영포의 사례와 같이 여 씨 일가들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을 것이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조선조에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태종 이방원과 민 씨 일가였다. 태종은 처가인 민 씨 일가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 권력을 획득하고 보위에 오른다. 그렇기에 민 씨 입장에서는 태종의 왕권에 지대한 공이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일가의 사적인 권력을 드높이기 시작했다. 보위에 오른 태종은 그런 처가의 행동이 부담으로 다가왔고 그렇기에 태종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처가에 베풀었던 권력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한 고조와 조선 태종. 두 지도자의 공통점은 바로 비대하진 처가 권력을 마주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이라면 태종은 처가를 제압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고조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고조는 처가를 억누를 생각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여 씨의 자식, 장자를 태자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고민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보단 감정에 치우친 결정을 내리고 후회한다. 만약 고조가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척 씨 소생을 후계자로 내세웠다면 한나라의 앞날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여 씨에게 정복당하거나, 야심찬 개국공신들의 발호로 인해 어지러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조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최선의 결정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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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래로 왕조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를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특정 세력 안에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집단이 바로 외척과 처족이다. 한나라 역시 원제 이후 처족과 외가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외척이 커다란 권력을 가진 것은 한나라 초중기에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경제와 무제 시기에도 외척과 처족은 군권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두영과 전분은 경제의 외척과 처족이었고, 위청과 곽거병은 무제의 외척과 처족이었다. 두영과 전분은 경제 시대의 군권을 담당했던 인물들인데, 저명한 인사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결국 두영은 떠오르는 전분을 이기지 못했지만 전분의 세도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전분의 전횡을 경험한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을 크게 중용하여 흉노와의 전쟁에 투입하지만 이들이 사사로이 세도를 이루는 것은 무척 경계했다. 그 결과 위청과 곽거병은 군공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는데 이는 세도로 경쟁했던 두영, 전분과 무척 대조적이다. 그렇기에 위청과 곽거병의 경쟁은 두영, 전분의 경쟁보다 훨씬 깨끗했고, 국가의 공의(公義)에도 부합했다. 게다가 이들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그럴수록 교만하지 않고 세도를 이루지 않았기에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네 장군들의 사례를 보면서 생각한다. 왜 역대 군주들은 가까운 인척들을 요직에 중용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군주가 스스로 사람을 살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외척, 처족, 환관 등등 역사에 있어서 권력을 남용한 이들은 군주와 개인적으로 친밀감이 높은 경우가 대다수다. 누구에게 어떤 일을 시켜야 할지 모르기에 군주는 자신과의 친밀도를 중심으로 판단하여 인사를 단행했고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사유화로 이어졌다. 바꿔 말하면 군주가 사람을 볼 줄 안다면 요직에 처가 세력이나 외가 세력을 임명한다 할지라도 결코 위태롭지 않다. 오히려 무제의 경우처럼 처가와 외가의 사람을 적극 기용하여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만약 원제나 애제 같은 한나라 후기 군왕들이 경제와 무제 시기에 집권했다 가정해 볼 때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반대로 무제와 경제 같은 인물들이 원제 시대에 집권했다면 외척의 전횡을 저지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안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