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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찾고 있었다, 찾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화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휴일 아침에 일어나 단장하고 집을 나서는 행위. 적극적인 동기 유발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설령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법적인 도덕적인 아무런 책임도 물을 수 없는 행위. 처음부터 선택적이었던 행위, 그러나 누구에게는 강요 누구에게는 부담 누구에는 의무 그래서였다. 무던히도 찾아다니면서 골라서 읽었다, 다른 길이 있을 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의 균열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발생했다. 누구도 내게 성경의 위서에 대한 존재는 알려주지 않았다. 구약은, 강조하는 바를 위해 극적으로 쓰여진 문학적 서사 내지는 현대의 관점에서 시적 허용으로 봐야 하는 부분이 많음에도 이에 대해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오랜시간 동안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 오랜시간 동안 성경 공부를 했음에도 이 기본적인 전제조차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동안 내가 믿고 있다 믿는 신은 누군가 나에게 말하고 내가 받아들인 왜곡된 거울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래서이다. 무던히도 찾고 찾았다. 나는 한 번도 크리스찬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믿고 있다는 믿는 신은 내가 믿고 있다 믿는 믿음은 왜곡된 거울같았다. 기본적인 전제마저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곡된 거울 속의 믿음은 전지전능한, 무오류인, 어느날 갑자기 한 번에 쓰여진. 그 신화같은 이야기는 모두 다 실재이고 있었던 일이고 ... 이 얼마나 유아적이고 유치한 신앙의 실체란 말인가.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며, 그 뜻이 중요하고 강조하려고 하는 바에 대해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중요한데도 그걸 잊어버린채 본말전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도 에리히 프롬의 그 저작은 참으로 혁신적이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어머니 외에 그 밖의 누구에게도 이러한 견해를 펼친바 없지만 우주만물의 작동원리가 존재한다. 그 원리로서 세상의 질서를 만들고 유지해 간다. 그 우주만물의 작동원리를 크리스찬인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은 그들 각자의 신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이렇게 보자면 나는 크리스찬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나름대로 범재신론 등 여러가지를 찾아본 후 내린 이 결론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왜 밝히지 않았는가, [우주만물의 원리로서 절대자가 존재합니다. 그 절대자의 가르침과 원리, 즉 뜻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책이 바로 성서입니다. 중요한 점은 성서는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며, 이는 모두 다 그 안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내린 결론이다. 아직 끝맺음되어지지 않은 중간 단계의 결론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이렇게 유치한 수준이다. 어쩌면 이 생이 끝나는 날까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는 사이에도 부지런히 책들을 찾아서 읽으며 깨달아보려는 노력은 하겠지만. 참 부끄럽다. 수십년을 크리스찬으로 살았으면서도 왜 그렇게 유치하고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 살았을까 말이다. 전지전능한, 오직 경외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나의 무지와 유치함이 정말로 부끄럽다. 믿음은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기 때문에 믿음이다. 믿을 수 있는 대상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에 불과할 뿐인데.... [*하나님'은 본래 실재가 아니라 휴머니즘에 담겨 있는 최고 가치를 시적으로 표현한 여러 단어 중 하나다. 하지만 유일신 사상을 언급할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매번 조건을 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내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싶다. 대충 정의르 내리면, 나는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신비주의(nontheistic mysticism)를 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26쪽 이렇게 선언적으로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명료함이 부러울 따름이다. [자유의지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다. 어떤 이가 선행과 바른 길을 지향하고자 하면,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어떤 이가 악행을 지향하거나 불의를 저지르고자 하면, 그는 마음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어떤 이가 지혜로운지 어리석은지, 자비로운지 잔인한지, 인색한지 관대한지는 그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인간에게 강요하건 인간이 해야 할 바를 정해놓거나, 둘 중 어는 한 쪽으로 인간을 이끈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마음먹은 쪽을 지향한다.]184쪽 -미슈나토라에 실린 회개에 관한 율법에 대한 히얌손의 번역본 중 구약에는 어떤 것을 꼭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 중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쓰고 있다. 즉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한 구절이 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숙제를 하지 않으면 벌로 엉덩이를 냅다 갈기겠다고 말하는 경우,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위협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위협은 자기 아들이 자제력과 책임감을 체득하지 못하면 학교생활이나 인생에서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의 간접 표현인가?] 197쪽 [..구약이 여러 군데서 아주 권위적인 태도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예언조차도 흔히 위협처럼 느껴지며, 많은 경우 그 예언은 위협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모든 위협이 예언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여러 위협이 사실상 예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어느 것이 위협이고 어느 것이 예언지를 구분하는 것은 여기서 다룰 사안이 아니다.] 198쪽 참으로 명료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자유의지대로 선택한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선택한 본인 스스로인 인간이 진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른 결과는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위협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살도록 하겠다는, 예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토록 찾았던 해답의 실마리가 조금 보이는 듯도 했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수사법. 극적으로 전달해 더 강렬하게 뇌리 속에 박히고 인식하도록 하는 극적 장치. 강조하려고 하는 바, 결국은 뜻하는 바, 그걸 잘 전달하기 위한 도구와 장치. 얼마만큼의 애씀과 깨달음이 있어야 에리히 프롬의 이 명료한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저자는 스스로 선언한 만큼 결론내렸고, 결론지었겠지. 끝나지 않을 화두를 붙잡고 있는 듯한 지금의 나는 언제쯤 혼란 속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될 지 모르겠다. 물론 난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무신론적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이 책에는 어떤 합리화일지도 모를 동조감이 숨어있다. 그래, 그래. 이렇게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내가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것만은 아니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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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일제의 만행에 분노했고 적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동기유발효과를 불러일으켰을까 시중에 나와있는 한일관계사 책은 모조리 읽었다. 어느날 부모님께서 우매보시란 일본식 짱아치를 사오셨고 난 그걸 모두 쓰레기통에 부어버린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성경도 수메르인들의 12진법을 사용하던 그들의 점토판에서 시작된게 정답일 것이다. 성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시절 유세비우스가 정치를 편안하게 하기위해 예수를 만들었다는 것에 분노하여 자기치부에 매달리는 우리교회 목사님을 비난한 적도 있었다. --지혜가 없던 시절의 나의 모습들이다. 페이지 218-9까지에 안식일에 관한 정의와 뜻이 자세히 나온다. 그리고 220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된 성경의 뼈대에 유대인은 자기나름의 온갖 발전된 살을 붙여 승화된 종교의식을 키운 상징을 만든다 책은 이렇게 푼다. "안식일은 태음월의 이렛날마다 거행된 고대 바빌로니아의 축제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의미는 성서의 안식일과 전혀 달랐다 바빌로니아의 샤파투는 비탄에 빠진 나머지 자기학대를 자행하는 날이다. 그것은 토성을 모시는 우울한 날이었다(토요일)은 토성을 모시는 날에서 유래. 인간은 그날 자기학대를 통해 토성의 분노를 달래고 싶었다. 그러나 성서에 언급되는 종교 축제일에서는 자기학대와 비탄이라는 특징이 사라지고 그것은 이제 나쁜날이 아니라 좋은 날이다. 안식일은 불길한 샤파투와 정반대로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된다 성서와 종교 문헌을 연구하는 것 말고 먹고 마시고 성애를 즐기는 것은 2000년에 걸쳐 지켜온 안식일에 거행되는 유대교 축전의 특징이다. 안식일은 토성이라는 사악한 세력에 복종하는 날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날로 바뀌었다." 한겨레신문에서 추천해주어 샀다 새책은 뭔가 덤으로 주는게 없어 기다리다 사는데 그래도 추천해주시는 분의 마음을 생각해서 샀다. 안식일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한다.
지은이는 독일에서 태어나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학자이다. 원로가 어느나라 태생인건 중요하지가 않다 노인의 지혜는 젊은이에게 전해질때 영원을 얻는다고하였다. 그분의 학식과 경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영원한 바이블이 될것이다. 제목에서처럼 신의진화 수메르,신들의 고향 신들의전쟁 인간들의 전쟁 예수는 신화다등 성경이 허구다라는 시중의 책도 아니고 성경이 영원한 바이블이라는 책도 아니었다. 이 책은 처음엔 성경의 허구를 은연히 재조명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려운 논리지만 재미있게 즐기며 읽어내려간다. 중간에는 난해한 구절도 있긴했어도 성경이 지난 인류사의 오묘한 철학을 재조명한 인류에 대한 삶의 지침서라 이야기하며 시편등 여러가지를 성경속에 담긴 삶의 지침들을 풀어주며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엄청난 이야기와 서사가 담겨있는 지구촌 어느곳에 있는 어느 원로분의 지혜가 담뿍담긴 책이다. 어울림의 책 이건 우리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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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에리히 프롬 지음 이종훈 옮김
급진적 휴머니스트의 혁명적 구약읽기. "나는 구약 속 '하나님'에게서 인간 해방의 실마리를 찾았다!"
나는 숫자로 기록되는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이과스타일로 역사, 종교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살아왔다. 학창시절에도 사회,국사를 가장 싫어하는 과목으로 꼽았고, 다행스럽게 대학 입시때 이과생은 사회탐구영역 점수를 제외하는 입시전형의 혜택을 보았다.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라는 책을 보며 급진적, 구약, 하나님... 아.. 너무도 어렵게 다가왔다. 하지만 30대의 나이에 책 편식을 해서 되겠는가? 세상 모든것이 호기심천국인 아들이 질문할지도 모르니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자 책을 펼쳤다.
저자 에리히 프롬은 한평생 근대인에게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으며, 소외를 넘어선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속의 적과 싸운 사람. 나치즘을 수용하고 지지한 대중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나아가 사회심리학적 시각으로 현대인들의 소외의 양상을 고찰하여 근대적 세계 속에서 인간이 참다운 자기를 실현해가는 길을 찾고자 하며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한 사람이다.
<<책소개>> 길 / 시편 / 맺음말 / 보론
급진적 휴머니스트의 혁명적 구약 읽기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에리히 프롬이 사회심리학과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구약의 새로운 가치 읽기를 시도한다. 절대 다수가 돈이라는 우상에 빠져 있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자유의지’와 우상숭배와의 투쟁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즉 구약은 끊임없는 우상숭배와의 투쟁을 그린 드라마이며 인류의 역사는 결국 우상숭배의 역사라고 단언하고 있다.
- 나는 구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구약이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쓴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유신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은 수천 년 동안 타당성을 유지해온 여러 규범과 원리를 표현해놓은 대단한 책이다.
-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은 역사 과정에 개입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외톨이가 되어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하나님은 돕지만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돕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줌으로써 돕는다. 어떤 신도 믿지 않는 내 어법으로 말하면 이렇다. 요컨대, 인간은 외톨이가 된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도 그를 대신해 처리해줄 수 없다. -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면,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원했다면,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이 모질어지게 놔두는 대신에 그의 마음뿐 아니라 헤브라이인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있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헤브라이인은 금으로 만든 송아지상을 숭배하지 않았을뿐더러 약속의 땅을 정복한 뒤 새로운 우상숭배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권능이 모자랐던 것일까? 단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성서 구절은 삶과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원리와 가치로 언급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성장하고, 발전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성장을 멈추고, 고착되고, 어떤 사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은 삶의 가치와 죽음의 가치 중에서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에 속하지 못한 채 몸은 살아 있으나 정신은 죽어버린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랑과 자유와 진리의 필요조건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다. 《시편》 작가는 그 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시편 115편 17절)
- 전통적 안식일의 개념에서 ‘휴식’은 일을 하지 않거나 어떤 활동을 하지 않는 ‘쉼’과 전혀 다르다(이는 예언자 전승에서 평화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다. 그 말은 조화, 곧 일체성을 나타낸다).안식일이 되면 인간은 생존 투쟁과 생물학적 생명 유지를 주요 활동으로 삼는 동물의 생활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안식일이 되면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그것 말고 다른 임무는 없다. 유대교 전승에서 최상의 가치는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휴식은 오로지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목적만 추구하는 상태다.
저자는 구약을 근본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인류의 조화를 강조하는 포괄적 사상을 언급했다. 교회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무교인 내가 구약, 하나님 이러한 것이 너무도 생소하여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파악하기란 너무 어렵다. 반복하여 읽어봐도 여전히 잘 알지 못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알 것 같다. 과거에비해 생활이 편리해지고 윤택해졌지만 인간미는 사라지고 있다. 부와 권력에 빠진 사람들에게 평화, 인류 공존, 다시금 휴머니즘을 강조하고자 구약을 통해 말했음을 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