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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지만 큰 행복을 담은 책 <밥 짓는 일부터 시작합니다>(정청라 지음, 산티)를 읽고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던 날은 2009년 4월이었을 것이다. 합천 가회 황매산 아래 너른 마당에서는 흥겨운 잔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폐교가 된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황매산 기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마당을 건드리고 지나가면 하얀 꽃잎이 눈앞을 가릴 정도였다. 그 잔치는 도시 살이를 접고 귀농한 처녀총각 결혼식이었다. 농부시인 서정홍 선생으로부터 결혼식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알게 되었고, 가보고 싶어서 갔다. 흥겨운 잔치판을 보고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고, 운동장 모서리에서 소리 없는 웃음을 보태기도 했다. 여기가 아니면 또 어디서 이런 아름다운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을까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신랑 이름은 잊었다. 그런데 신부 이름은 기억하고 있다. 정청라! 이름이 곱기도 하고, 처음 보는 이름이다.(여자들 이름은 남자들에 비해 비슷한 경우가 많으니 더 기억에 남은 게 아닌가 싶다.) 서정홍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총각이 달밤에 처녀를 논으로 불러서는 벼로 ♡ 모양을 만들고 청혼을 했단다.(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음. 책을 읽는 내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 책을 만난 건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페이스북에서 지은이와 이야기 나누는 동영상을 우연히 보았다. 그런데 지은이 이름이 낯설지 않다. ‘단단한 일상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다. 먹고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룩한 과업이다. 그래서 먹고사는 일을 두고 시비를 가리는 일은 퍽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으니, ‘이렇게 부럽게 먹고사는 가족이 있구나!’ 하는 점이다. 부러운 이야기보다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게 순서지 싶다. 고마운 까닭은 책을 읽으면서 잊었던 지난날을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흑백 동영상을 보는 것과 같은 장면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호롱게(73쪽)인데, 아직도 쓰고 있단다. 발로 밟아서 탈곡을 하는,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손으로 모를 심고, 낫으로 벼를 베고, 호롱게로 타작을 하고 있다니, 그럴 수가 있을까 싶다. 그것도 남편 혼자서 한단다. 수십 년도 더 전, 시골 마을에 사람으로 넘쳐나던 시절에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시절로 잠깐 돌아가 보자. 모내기는 연중 가장 큰 행사였다. 품앗이에도 질서가 있었다. 새참 때가 되면 누구는 어느 집으로 언제 가고, 누구네는 언제 모내기를 해야 하는지가 정해졌다. 경운기도 없었고 이앙기도 나오기 전이다. 소를 재산목록 1호라고 하던 시절이다. 벼논에 나는 잡초는 손으로 메야 했다. 한 번, 두 번, 많게는 세 번까지 멨다. 쏟아지는 뙤약볕을 견디지 못해 버드나무가지를 등에 져야-꽂았다는 게 더 맞는 말- 그나마 논을 멜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들판 여기저기에 타작마당이 생기고 호롱게가 위력을 발휘한다. 전깃불이 없던 시절이라 어둠이 곧 알과 끝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고, 농사가 기계화 되어 ‘그 시절을 아십니까’라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기억을 되살려 주니 고맙다는 인사가 절로 나온다. 가족들이 보내는 나날은 부럽기가 그지없다. 다울, 다랑, 다나라는 고운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무공해 청정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작물로 이야기하자면 유기농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지은이인 어머니는 스스로를 부엌데기라고 부르고, 그가 지닌 ‘철저한 수동성’을 자랑으로 삼는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밭을 일구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는 자연이 베푸는 것을 따가갈 뿐이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건 단순히 내 욕망을 억누르고 자연스러움이라고 하는 가치나 명분에 질질 끌려가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동적으로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 하는 데서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으로! 철저한 수동성으로 나를 자유롭게 하는 건, 그 속에서 마주치는 맛의 세계가 훨씬 더 깊고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259-260) 그렇게 자급자족하는 삶을 누리고 있으니 부럽지 않을 수 있는가? 이뿐이 아니다. 신선놀음이 일상이다. “나는 밥 짓기를 신선놀음이라 생각한다. (신선놀음을 하는 내가 신선 팔자? 우와!) 그리고 우리 집 밥은 소농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 또는 사치라고 여긴다.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손수 여러 가지 잡곡 농사를 짓지 않고는 누가 이런 ‘명품 밥’을 먹을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명품 가방 같은 것으로 사치를 부리는 아줌마 따위가 전혀 부럽지 않다.)”(49) 신선놀음을 하면서 명품 밥을 먹고 사는 이 가정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먹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본다. “나는 요즘 사람들이 배가 고픈 줄 몰라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는 무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넘치다 못해 버리고 썩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가? 진짜 맛도 모르면서 ‘미식’을 논하고 음식을 가지고 장난까지 치는 것은 죄악 중에 죄악이 아닐까?”(77) ‘무례한 시대’라는 질책에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렇다! 여기에 덧붙여 ‘불친절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엄마들은 그저 아이 입맛에 맞는 반찬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떠 먹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고, 아이는 마치 엄마를 위해 큰 아량을 베푸는 듯한 자세로 마지못해 밥을 받아먹고 ….”(126-127) 요즘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게 되면 밥을 안 주는 것이 가장 큰 벌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 좋아졌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곰곰 생각해본다. 아이들과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도 부러운 모습이다. 아이들에게 읽힐 수 없는 아쉬움이 있는 책이지만 아이들이 읽는다면 누구라고 저렇게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이미 자연에서 멀어질 대로 멀어져버려 그런 맘이 내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241)에서는 밭을 잠식하고 있는 아이들을 감나무 아래로 ‘유인’한다. 거기서 놀던 아이들이 집을 짓자고 한다. 대나무로 인디언 티피 같은 뼈대를 만들어 꼭대기를 끈으로 묶고 얇은 이불을 둘러씌운다. 돗자리와 나무의자 들로 열 살짜리 목수는 솜씨를 발휘한다. 천막집이 완성되고, ‘펄쩍펄쩍 뛰고 뒹굴뒹굴 구르면 신나게’ 노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부럽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이런 경험이 있었는가 생각해본다. 자발성이 유지되는 지은이 나름의 거리두기 육아법이 부럽고 부러울 뿐이다. 큰아이 다울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게 문제가 돼서 집으로 찾아온 교장 교감 선생님께 들려준 지은이의 교육관은 이렇다. “도토리 한 알에는 이미 나무로 자라날 모든 정보가 입력되어 있잖아요. 그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고, 아이들에게 그와 같은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를 다니고 안 다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하루 잘 살고 잘 놀다 보면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가리라 믿는 거죠. 저희 가족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는 학교가지 않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방향이라고 여겨지고요, 다울이의 교육만을 따로 떼놓고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함께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살아보려고요.”(84-85) 그리하여 다울이는 ‘정원 외 관리’(학적은 학교에 두되 홈스쿨링을 인정해 주는 것)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지은이의 교육관을 따라가기는 어렵다고 해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학교와 학원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오늘날이 아닌가? 각자의 이름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어린이집부터 구성원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으니 지은이의 교육관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보자. 이 책은 요리책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조리법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요리가 없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아주 생소한 것도 많다. “다시물이고 뭐고 없이 맹물에 보리순이랑 시래기, 생들깨 간 국물 잔뜩 넣고 푹 끓여서 된장으로 간을 한 아주 단순한 음식”(22)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보릿국’이다. 이렇게 책 여기저기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대목들이 있다. 눈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귀로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속까지 환한 봄빛, 봄나물 샐러드’(52)는 눈으로 먹으면서 혀로 맛을 본다. “다울이와 내가 감나무 아래 나락망을 펼치고 서서 떨어지는 감을 잡는 거다. 감이 안전하게 사뿐히 떨어질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온 마을에 올려퍼진다”(107) 해맑은 웃음소리가 책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다. 냄새는 또 얼마나 나는지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메주 냄새’(124)는 누구에게나 구수한 것은 아니지만, 맛을 아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구수할 뿐이다. 청국장 냄새(125)도 빠지지 않는다. 수동식 기름 짜는 기계(195)로 짠 들기름 냄새는 참기름 냄새보도 더 고소하다. “찔레꽃으로 떡을 찐다면 골담초꽃으로는 못할까 싶어 혹시나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골담초꽃으로 떡을 쪄 먹는다는 내용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다만 ‘한다더라’ 알고만 있는 것과 ‘나도 해보자’ 달려드는 것, 두 가지 길이 있을뿐!)”(162) 골담초꽃떡은 어떤 맛일까? 산골이라 춥기는 추운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 생선이나 부엌에 서 있는 나나 별반 다른 처지가 아닐 것’(236)이라고 했으니 짐작하고도 남는다. 물론 한 감각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둘 이상이 함께 출동하는 공감각이다. 그래서 오감을 자극하는 강도는 점점 거세진다. 고맙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지나가는 낱말들은 참 많다. 행복, 기쁨, 감동, 추억, 지혜, 군침, 생명, 낙원, 과정, 자연, 순리, 웃음, 가치, 지혜 들이다. 일는 내내 글을 참 쉽게도 썼구나 싶었다. 그런데 글을 쓰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쓰는 게 아니라 짓는 경우는 더 어렵다. 그러나 글이 삶과 하나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삶이 곧 글이 되었다. 소소하지만 큰 행복을 엿보고 싶은 이들에게 딱 맞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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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지쳤을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책이에요
한 번 읽으니 쭉 끝까지 단번에 읽었네요
추천합니다 자신의 일에 회의가 들 때 무엇을 시작해야 할 지 모르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사는게 무엇인지 남의 눈치 볼 것 없니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라는 책의 메세지가
좋았어요
이 구절이 참 좋아요 만날 밥을 사 먹는 사람들을 보면 힘든 일로 지쳐있는 사람을 보면
토라진 얼굴로 등 돌린 사람을 보면 밥을 해 주고 싶다.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뭐라도 나눠주고 싶어하는 사람을 보면
밥을 해주고 싶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욕케 여기까지 잘 살아온 나를 위해서도 정성들여
밥을 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