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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의 저자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산티데바(Shantideva, 寂天: 687~763)로 부처의 아들이다. 지혜를 읽고 싶다. 덕을 짓고 죄를 참회하며 인내하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 살고 싶다. 나를 내려놓고 지혜를 얻고자 책을 펼쳤다. 이 책에는 보리심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곧 보리심이기 때문이다. 보리심을 마음에 염두해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하는 것, 몸을 움직여 실천하는 일이 최상의 방법이다. 깨달음은 원대하고 이룰 수 없는 큰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열심히 바르게 해내는 일이 성불이라고 금강경 첫 장에도 나온다. 겉표지 1에 "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이끄는 입보리행론 "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설법이라 짐작한다. 5장을 읽다보면 이 말들을 뒷받침할만한 내용들이 있다. 헛된말, 욕심 부리는 행동,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나 허황된 생각이 들 때는 " 움직이지 않는 나무토막같이 가만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 축생이나 아귀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며 사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단단히 다스리며 살아야 할 일이다. 내가 하지 않았는데 했다고 했을 때, 내가 한 일인데 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나는 화가 난다. 용납하기가 어렵다. 인내하며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크고 작은 일을 떠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참아서 화를 면할 때는 있어도 화를 내서 화를 면할 때는 드물다. 인내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서 싸우는 일이다. 그 또한 선행은 아니다.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티베트본 제목으로 " 입보살행(入菩薩行) "이다. " 대승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육바라밀에 대한 내용 "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 이 책에서도 윤회설을 이야기 하며 악행과 악업을 짓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기를 당부한다. 계율을 지켜 정진하여 지혜를 펼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 책에서 깨달음 바가 있다면, 나를 겸손하게 하고 남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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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구절 버릴 곳이 없었다. 불교 신자만이 보고 느낄 책이 아닌 대다수에게 받아들여질 내용을 담고 있다. 보리심이란 자애. 그것으로써 전하려고 하는 지혜의 확대와 발현을 불교적 의미로써 풀이하는 책. 이런 책은 사실 서평이 불가능하다. 그냥 문장 하나하나가 물안개처럼 가슴과 뇌속에서 피어나고 스며드는데 이를 스토리처럼 전달한다는게 어려우니까. 불교의 윤회라는 말을 예전엔 그나마 단어적으로는 공감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냥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러나, 이 말을 꺼내는 건, 윤회의 의미를 거짓이나 믿기 어렵단 의미로 꺼낸 건 아니다. 그저, 윤회란 단어마저도 자꾸 깊게 생각한다는 건 개인적으론 미련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뿐. 책이 나름 심도있게 불교적 지혜를 전하는 책이라 그냥 에세이처럼 읽히는 부분들만 있는건 아니지만, 그중 편하게 다가오면서도 진중한 느낌으로 남는 그런 부분들을 소개해 보려한다. 선업과 악업. 선업을 쌓았다, 악업을 쌓았다. 그럼 이 둘은 어떤 발자국을 남길까. 선업은 쌓아도 그 발자국의 흔적을 지속시키기가 어렵다, 하지만, 악업은 잠깐의 일탈 정도일지라도 그 흔적을 오래 그리고 깊게 남긴다. 맥빠지는 얘기다, 좋은게 오래가고 나쁜게 쉬이 증발해야 희망적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아쉬운 표현은 살다보니 참으로 진리임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선업은 공기와 같다. 하지만 악업은 미세먼지와 같다. 공기는 그냥 마셔지고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존재감은 너무 미비하지만, 악업은 미세먼지처럼 오감을 자극하고 그 악영향이 치명적이고 할퀴듯 흔적을 남기는 거 같다. 그렇기에 책속 악업과 선업의 표현에 있어 난 공감의 고개짓만 끄덕일 뿐. 현대적 감각으로 잘 풀이된 불교서적이라 전혀 불교적인 내적동의 없이도 매우 잘 읽히는 신기함을 경험할 수 있을 책이다.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책 제목도 이미 이 책을 어떤 사람이 읽어야 할지 이리 오라 손짓하고 있는 듯 하다. 지나가면 그만인 한 순간이니 현재를 탓하지 말고 누군가와 어긋나지 않게 그 인연을 잘 누리라는 충고같은 글귀들. 글들을 읽으며 계속 생각이 정화되고 있다는 구도적 편안함에 그 감사함을 지울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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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1300년 전 남인도의 한 승려가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설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 승려의 이름은 바로 산티데바, 한자로는 적천(寂天, 고요한 하늘)이고 이 책의 원제는 그 유명한 <입보리행론>이다. <입보리행론>은 엄밀하게는 산티데바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한 법문을 들은 대중들이 후에 모여 결집한 것이고 구전된 것이기에 다른 초기경전들처럼 운문체이지만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에서는 번역할 때 산문체로 바꾸었다. 이유인 즉슨, 운율이라는 것이 언어적 특성에 기인하기에 번역하면 본래의 느낌을 살리기가 어렵다. 거기다 시구들은 그 내용을 함축하고 있어 10장 971송으로 된 원전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난해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요기들이 많이 보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도 운문체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보더라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입보리행론>을 번역한 하도겸 역자는 문체와 같은 부분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바꾸었기에 단순히 '옮김'이 아니라 '편저'라고 했다.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책의 원전인 <입보리행론>의 제목부터 생소할 것이다. 한자를 직역하면 '보리행에 입문하는 방법을 논한 책'이라는 뜻이다. 역자는 보리행에 대해 '대승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육바라밀'이라 했다. 육바라밀이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6가지 방법이라는 뜻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가지 수행법을 뜻한다. 혹, 생소한 종교적 용어에 너무 머리 아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본질은 어려운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보리행을 하는 사람이 곧 보살인데, 그래서 역자는 이 책을 '보살 따라하기 지침서'라고 했다. 금강경에 보살의 정의가 나오는데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고자 마음 낸 선(善) 남자, 선 여인'라고 했다. 보살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소승불교가 자신의 해탈, 열반이 최우선인 것에 비해 대승의 보살에게는 자신의 해탈, 열반 못지않게 중생의 해탈, 열반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소승, 대승이라는 용어도 나만 탈 수 있는 작은 배(小乘),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타는 큰 배(大乘)라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대승의 지장보살은 당장 해탈열반을 할 수 있는 경지임에도 지옥중생을 내버려두고서 자신만 괴로움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나서 제일 마지막으로 해탈열반하겠다 서원한 보살로 대승의 사상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불교서적이기에 불교용어나 윤회 같은 종교적 세계관, 개념들이 나온다. 불교서적이라 불교도들에게만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 나는 이 책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역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라 했다. 1300년 전 인도에서 쓰여진 이 책은 현대 문화와 인식의 잣대로 보면 불편하거나 허황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신격화된 표현이나 남성수행자 중심으로 언급된 부분을 예로 들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도, 신화를 읽을 때도 우리는 가려서 읽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 문헌에는 비유와 은유가 많이 사용되어 있고 그 시대의 문학적 표현들이 담겨있기에 곧이 곧대로 믿거나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고 있는 유익한 지혜를 잘 찾아내야 한다. 이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관점으로 읽는다면 얻어가는 것이 많을 것이다. 보리심은 깨달음의 지혜(Bodhi)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산티데바는 보리심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마음(원보리심)과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 실천하는 마음(행보리심)이다. 신라시대 원효와 더불어 최고의 승려고 꼽히는 의상조사가 방대한 화엄경을 짧은 시구로 압축해서 표현한 법성게에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보리행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그 첫 마음(초발심)만 내도 부처의 깨달음(정각)을 이룬 것이라 했다. 결론적으로는 실천이 중요하겠지만 그 실천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기에, 원보리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서술방식에서 조금 독특한 점은 의문문이 많다는 것이다. 심할 때는 페이지 문장의 반은 마침표고 반은 물음표로 끝나기도 한다. 대부분 수사의문문의 형식으로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는 물음인데, 서술이 진행될 만하면 연이어 나오는 질문공세에 처음에는 살짝 어색하기도 했는데 간화선이 떠올랐다. 스승에게 받은 화두로 자나 깨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간화선의 수행자처럼 독자들에게 계속 질문과 의심을 던져 스스로 참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책에서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라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기사상은 불교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사상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모든 현상에는 다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을 공간에 대한 연기라면 뒷부분은 시간에 대한 연기로 말할 수 있다. 공간에 대한 연기는 결국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라는 동체대비의 개념으로 연결되어 불교의 이타심과 자비심의 뿌리가 된다. 그리고 나와 당신이,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생각은 나라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와 공(空)사상과도 연관된다. 시간에 대한 연기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결과가 있다면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인연과보(因緣果報)와 이어지고 나쁜 원인을 차단하여 해로운 결과를 막는 계율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공간적 연기의 자비심과 시간적 연기의 인연과보는 불교사상의 근간이며 보살 수행법에 녹아들어 있다. "모기나 쇠파리 등 해충에 물리거나,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옴 같은 가려운 피부병이 걸리는 등을 인내의 기회로 보지 못하고, 아무 의미 없는 하찮은 고통으로만 여긴단 말입니까?" 굶고 목마르고 아픈 것은 분명 큰 고통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을 피하고 싶은 기피 대상이 아니라 나의 인내를 키울 기회로 볼 것을 제안한다. 불교의 묘미는 저런데 있는 것이 아닐까. 부처님과 이름있는 보살님들에게 나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들 속에서도 나에게 이로운 점을 찾아 삶의 기회로 삼아버리는 '관점의 전환'이 핵심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다음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염리심(厭離心)'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행복은 씨앗조차 좀처럼 쉽게 생기지 않지만, 고통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세속이 싫어져 멀리하는 마음인 염리심도 생기지 않아 해탈할 수가 없게 됩니다." 건강할 때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잘 지켜나가면 제일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 작은 병이 찾아오면 그에 따른 고통과 불편으로 경각심을 느껴 더욱 건강에 힘쓰게 되고 큰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염리심은 '싫어하여 떠나는 마음'인데, 이 책에서는 닥친 불행이 너무도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그 염리심을 고통이 아닌 오히려 해탈로 나아가는 변곡점으로 보면서 최악의 불행마저도 축복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과도 같은 관점 전환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에 대해서 재밌는 표현이 있었다. "우리는 몽둥이에 맞았더라도 몽둥이가 아닌 때린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분노에 휘둘린 것이니 분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몽둥이가 나를 때렸지만 그것은 사람이 휘둘렀기에 사람을 탓하는데 까지만 생각이 미친다. 하지만 산티데바는 '휘둘린' 몽둥이가 아닌 '휘두른' 사람에게 화내듯, '휘둘린' 사람이 아닌 '휘두른' 분노에게 화내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발상이 재밌지 않는가. 그리고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분노에 '휘둘린'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사람에 '휘둘린' 몽둥이에 화를 낸 것과 같다는 말이되어 사람에게 화내면 몽둥이에게 화내고 있는 바보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화를 내는 것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산티데바의 재치를 엿볼수 있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용서의 가르침이 있듯 불교에서도 같은 내용이 있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강조하기에 그런 공통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으나 그 당위성을 말하는 논리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표현이 있었다. "원수를 통해서 제가 인욕을 성취했다면 인내의 결과를 원수에게 먼저 보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분노를 통해 인욕(인내)를 기를 수 있으므로 인욕을 가르쳐 준 원수에게 복수가 아닌 보답을 하라는 것이다. 죽일 놈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애시당초 그는 나에게 인욕의 가르침을 준 스승이기에 용서할 것도 없고 오히려 내가 존경하고 감사해야한다는 논리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법'과 동일하게 공양해야 마땅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산티데바는 '남에게 이것을 주면 무엇을 먹어야 하나?'라는 우리의 질문을 '내가 이것을 먹으면 남에게는 무엇을 주지?'라는 보살의 질문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가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얼핏 들으면 너무 손해보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 두려움, 고통은 모두 '나'라는 집착에서 오는 것인데, 나를 온전히 버리는 이타행을 통해서 괴로움, 두려움, 고통도 함께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 행복은 남에게 주고 남의 고통은 내가 받고" 라는 표현은 이타행의 끝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보통 세상 살이의 상식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 같고 그런 것은 책에서나 가능한 소리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우리가 삶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이런 것을 동떨어진 소리로 여기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그 병에 대한 약입니다" 하고 이미 약을 받아 손에 지녔음에도 먹지 않고 '누가 이런 약을 먹겠어' 하며 계속 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는 몰라서 길을 못가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길을 안가서 못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영화 <두 교황>을 봤었다. 거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인류적인 문제에 대해 기가막힌 대사를 날리는데, 너무도 인상적이라 따로 적어놓았었다.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When no one is to blame, Everyone is to blame.)" 진리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그 과정과 경로만 다를 뿐 결국은 한 곳으로 수렴하는 것일까. 한 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했던 저 명언은 1300년 전의 다른 종교 수행자의 법문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그 고통이 누구의 것이라 할 수 없다면, 우리 모두의 고통과 다르지 않습니다." 산티데바는 자비심과 연민을 이야기하며 저런 명언을 남겼다. 앞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록과 산테데바의 경구가 묘하게 서로 닮아있지 않은가. 진리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너와 내가 따로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데 종교의 구분이란 그저 방법론의 차이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종교적 배타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비종교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산티데바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해보자면 그의 삶은 부처님의 삶과 묘하게 닮아있다. 그도 부처님처럼 고대 인도의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다. 왕위에 오르기 전날 밤 꿈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는 홀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된다. 산티데바의 어머니는 바즈라요기니로 소개되어 있는데. 바즈라는 한역하면 금강을 뜻하며 요기니는 요가수행자를 의미한다. 이 책의 중간에 요가나 요기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나오는데, 아무래도 불교든, 요가든 결국 인도 고대 철학인 베다의 사상적 풍토 위에서 탄생한 것이니 상호간 연관성이 있기에 책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책의 중간중간에는 인물사진, 풍경사진들이 담겨있는데 '나마스떼코리아'가 주최한 히말라야사진공모전 수상자들이 재능기부를 해준 것이라 한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의 장엄함과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이 담겨있어 책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사진 중에는 들판에서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는데, 이 책의 인세는 전액 NGO로 기부되어 네팔 안나푸르나 산골 오지마을 어린이들을 지원하는데 쓰인다 하니, 이 책 자체가 보리행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나도 과거 네팔에 갔을 때 아이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열악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직접 보았던 경험이 있어 역자의 기부가 더 따뜻하고 훌륭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제목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표현은 윤회사상과 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윤회론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려면 과거에 엄청나게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선업을 쌓아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전생의 인연으로 어렵게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괴로움의 윤회를 끊어버릴 지혜를 얻기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여기고,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불행하게 살며 나와 남을 해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의 무상함을 통해서 늘 지금 여기서 만족하고 행복할 것을 가르쳐주려 하는 것 같다. 달라이라마도 이 책의 원전인 <입보리행론>에 대해 언급하길 "일체중생을 위해 깨닫겠다는 마음인 보리심에 대해 설한 책 중 이보다 더 뛰어난 논서는 없다"고 했다한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이끄는 1300년 전의 지혜 <입보리행론>의 우리말 번역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책의 내용도, 책으로 인한 수입도 보리행, 보살행으로 가득 차있는 이 책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보면 어떨까.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한 그 첫 마음만으로도 이미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던 '초발심시변정각'을 다시한번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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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절대자를 믿고 숭배하고 받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고 깨우쳐서 도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삶의 목적을 찾고, 고뇌를 벗어던지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불릴 정도로 깨달음이란 말을 많이 한다. 깨달음이란 말은 열반, 해탈, 성불, 득도 등의 다른 표현으로도 사용되는데 불교의 교리는 열반에 든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으며, 참다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주된 불교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하면 우리도 성불하고 해탈할 수 있는가를 공부하는 것으로 믿음이라기보단 자아성찰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불교에선 깨달음을 중요시 하는데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대승불교의 본질이며 불도의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널리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을 가르킨다. 보살은 보리심을 길러야만 성불할 수 있다. 보리심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책에서는 보리심을 강조한다. 보리심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마음인 원보리심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 행하는 마음인 행보리심이다. 말하자면 보리심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자 타자의 고통과 슬픔에 깨어 있는 마음인데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을 원보리심이라고 하고, 그런 마음을 기반으로 깨달음을 스스로 깨우쳐 실천하는 것이 행보리심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행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과 유사한 내용이다. 윤회하면서 고통받는 중생의 불행을 모두 없애고 행복해지고 공덕을 얻으려면 보리심이 필요하다. 혹은 보리심만 있으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남을 도우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공덕보다 더 큰 공덕이라고 말해지는데 보리행을 통해 불행의 수렁 속에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하려는 노력은 더 큰 공덕을 쌓게 되는 행동인 것이다. 악이를 품거나 나쁜 생각을 내지 말고,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선의를 베풀고 보리행을 행한다면 죄업은 일어나지 않고, 선업만 늘어나서 깨달음에 가까워진다는 의미이다. 불교인들의 최상의 목적은 결국 부처처럼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깨우치고 고통에서 벗어난 보살은 부처보다 덜 완성된 존재지만 우리가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가능의 영역이므로 차라리 부처가 아니라 보살을 지향하여 범은들을 깨우쳐주고 이끌면서 보리행을 행하며, 선행을 쌓는 것이 더 가치있고, 보람있고, 의미있는 것이라고 새로운 시각과 목표를 제시한다. 책에는 보리행을 행하고 보살이 되기 위한 10가지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공덕을 쌓고, 악업을 행하지 않는 지혜와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범인과 함께 하는 보살이 될 수 있도록 정진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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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의 가르침은 결국 대승적이다. 세계종교에는 그런 대승적 가르침의 핵심을 압축한 일종의 '대승선언서'라 지칭할 만한 대표적인 기도문이 있다. 가령 천주교에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일명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다면 불교에는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이 있다. 짧은 시적인 기도문인 '평화의 기도'가 가톨릭의 입보리행론이라면, 장편의 운문체 논서인 입보리행론은 불교 특유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라 할 수 있겠다. 당연히 10장 971송의 입보리행론이 평화의 기도보다 훨씬 길지만, 10장의 제목만을 이어놓고 보면 나름의 짧은 기도문이 되어준다. 일테면, '공덕을 찬탄하라, 악업을 참회하라, 온전히 잘 지녀라, 까불며 놀지 마라, 계율을 잘 지켜라, 잘 참고 용서하라, 열심히 정진하라, 선정을 잘 닦아라, 지혜를 성취하라, 여법히 회향하라'가 된다. 소승에 머문 믿음과 신앙은 비밀결사나 부족 차원의 수준에 그칠 뿐 세계종교로 커나갈 수 없는 법이다. 불교의 대승정신은 한마디로 말해서 보살도다. 그런 보살도를 아름다운 운문체로 소개한 경전이 바로 『입보리행론』이다. 저자인 산티데바(적천보살)는 나가르주나(용수보살)의 계보를 이은 인도 중관학파의 위대한 수행자다.구전과 암송을 중시하는 다른 초기경전들처럼 운문체이지만 역자 하도겸은 이를 현대적인 산문체로 바꾸었다. 또한 책에 인물과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나오는데, '나마스떼코리아'가 주최한 히말라야사진공모전 수상자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와 적천보살의 대승적인 가르침은 일맥상통한다. 두 기도문 모두 보리심과 보살행의 매뉴얼인 것이다. 평화의 기도 첫 구절인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는 대승적 깨달음을 지향하겠다는 보리심의 결단을 보여준다. 보리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마음(원보리심),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 실천하는 마음(행보리심)이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는 이처럼 보리심의 '원/행'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보살도의 대선언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인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는 이타행의 궁극적인 메뉴얼과 연계되는데, 이를 또 세분하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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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보리행론을 전에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하도겸 박사님의 번역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건국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이며 나마스떼코리아 대표이신 하도겸 박사님. 입보리행론을 읽어본 바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쳐 들었는데 이해하기 쉽고 핵심을 짚어 우리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적어두어 감명깊게 읽었다.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두기가 아까워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불보살님이 산티데바를 통해 전해주시는 가르침이라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다시 만나기가 어렵다는 입보리행론을 다시 번역한 책이라는 점에서 불교서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불교이기 이전에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인문학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에서는 10가지로 나누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다 깊은 뜻이 있고 마음에 새겨두고 실천해야할 내용들이고 읽을수록 울림이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절을 하고 있는데 절을 마친 후에는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가난,질병, 전쟁 등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큰 깨달음을 얻어 만중생 다 구제하게 하소서. 하는 발원을 한다. 오래 전부터 하던 발원인데 이 책에서도 이런 내용을 만날 수 있었다. 절하고 공양 올리고 참회하는 등의 모든 선행으로 지금까지 제가 쌓은 공덕으로 모든 중생의 고통이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소서. 이 세상의 병든 중생들 모두가 완치될 때까지 제가 약이 되고 의사가 되고 간병인이 되어 이들과 함께 하소서. (p. 56) 요즘은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이 부분이 더 와닿았다. 우리들은 번뇌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속의 온갖 생각들. 내가 끌려다니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아 바른 행동을 하겠다고 다짐해보았다. 마음이 해이해질 때 마음대로 먹고 입고 놀고 마음의 방황을 하게 될 때 항상 곁에 두고 읽고 쓰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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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무얼까. 음... 질문이 어리석어 보인다. 삶은 그저 별거 아닌 게 아닐까.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고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고, 그저 그런 게 아닐까. 오히려 삶에서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내려고 하고 대단한 것을 이루어내려고 하고 큰 재미를 얻으려고 하는 '과함'이 우리네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 '죽지 못해 산다'며 현실의 삶의 하염없는 피폐함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은 눈꼽만치도 개의치 않으며 완전한 '망각' 속에서 새털같이 많은 날들과 시간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도 일반적이다. 예전에, 이런 취지의 글귀를 봤던 기억도 난다. 정확한 건 아니고, 대충 이런 뜻이었다. 음... 인류의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 낸 뛰어난 분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분들이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이라고 규정한 그런 취지의 글귀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난 그 글귀에 큰 공감을 하였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보살', 그리고 '보리심'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 스스로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 와서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 보리심으로 일상에서 실천을 통해 남들의 고통을 더불어 나누는 사람. 보살. 그리고 이 책은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보살 따라 하기 매뉴얼"로서, 일상에서 좋은 생각과 좋은 말 그리고 좋은 행동을 하게 하는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나는 여기서 출발하고 싶다. 난 죽는다는 것. 언제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죽게 되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바로 그 순간에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다. 그래야 현재의 일상, 주위의 사람들, 그리고 이번 생의 소중함을 비로소 진정으로 알게 되지 않을까. 가만히 세어 보았다. 100년 장수를 한다고 해도 36500일. 그리고 난 벌써 17000일 가까이 살았다. 언제 죽어도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지 못할 만큼 벌써 살아버린 것이 아닌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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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 출판사에서 새로 출간된 책 <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는 입보 리행에 대한 책이다. '입보리행론' 뭔가 심오한 말 같지만 단어 그대로 해석해 보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행위 다시 말하면 수도자로서 삶 가운데 행해야 할 행동 가짐이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책이다. 책 대로 행한다면 과연 나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품으며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원작자 산티데바는 8세기 경 사람으로 인도 날란다 승원에서 나가르주나의 대승불교 가운데 중관학을 선양한 학자이며 승려이다. 8세기경에 살았던 승려가 설법한 법문을 21세기의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 편저자의 약력도 살펴 볼만 하다
편저자는 하도겸 교수로 사학을 전공한 박사이면서 명상을 하는 구도자이기도 하다. 편저자는 산티 데바가 설법해 놓은 입보리행을 우리말로 친절히 그것도 열 가지 계명으로 나누어 설명해 주고 있다. 나처럼 미약한 중생이 쉽게 읽을수 있는 법문을 쓰셨으니 편저자도 이 책을 통해 선업을 쌓으셨다.
자 그렇다면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열 가지 계명 중 네 번째 계율 '까불며 놀지 마라' 라는 계율이 있다. - 매우 공감가는 제목이다. 이 계율을 읽다 보니 연휴 기간에 이태원 클럽에 갔다가 다시끔 전염병을 야기시킨 젊은이들이 떠 올랐다. 편저자는 우리의 무심히 행하는 행동 하나가 악업의 씨앗이 될 수 있으니 매사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 p69 지극히 얻기 어려운 인간의 몸을 받아 운 좋게도 이 복스러운 땅에 태어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음을 스스로 이미 잘 압니다. 그런데도 또 다시 지옥으로 자신을 이끌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주술에 걸려 혼미해져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무엇이 저를 이토록 어지럽혔는지 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제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마치 매일 쾌락과 탐욕에 이끌려 살며 무엇을 행해야 옳은지도 모르는 삶을 지적하는 글이다. 심지어 편저자는' 의자 같은 가구들을 옮길 때도 조심성 없이 끌어 거친 소리를 내지 않게 하며, 문도 세게 꽝꽝 두드리거나 막 열고 닫지 말아야 p91'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며칠 전 한 아파트에서 경비일을 하시던 선한 분이 입주민의 갑질과 폭력에 못 견뎌 목숨을 져 버린 사건을 목도했다. 마음으로도 말로도 모자라 무도한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하여 귀한 목숨을 져버리게 하는 악업을 쌓은 가해자분을 보며 도대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다보니 더 크게 와 닿았다. 의자하나도 조심스럽게 옮기고 문도 꽝꽝 닫지 않으며 매사 주변을 돌아보고 의식없이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가 닿을 때 혹여나 그것이 악업으로 전달되지는 않는지를 살펴도 부족할 텐데 말이다.
물신이 왕이 되고, 갑질이 만연되고 있는 현 시대에, 우리는 정년 얼마나 내 맘대로 살고 있나 반성하게 하는 지점이다. 내가 꼭 불교도가 아니여도 그래서 입보리행에 뜻을 세우지 않는다해도 하루를 깨어서 내 삶과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삼게 하는 책.. 부처님의 살아있는 설법을 말로라도 또는 글로라도 기회가 닿는 다면 기꺼이 가까이 해 볼 필요가 있는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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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불교입문자를 위한 수행 지침서이다. 인도의 산티데바라는 스님이 쓰신 입보리 행론을 편역한 책이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과 바른 행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행을 하며 정지를 어떻게 지키는지, 어떤 마음가짐을 지켜야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고 업장을 만들지 않는지, 지금 내가 받은 인간의 몸이 불법을 이루기에 얼마나 귀중한 찬스인지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불교 책을 보면 마주치게 되는 어려운 용어, 어려운 개념이 문맥상에서 잘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되어 있다. 불자로서 열반에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지만, 일상에서 금방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불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데, 불교 경전이나 스님 법문은 초심자에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의 내용은 초보 불자가 불법을 기준으로 사고방식에 변화를 주고, 신심을 고양시키기에 좋은 책이다. 이 책을 보면 내가 누리고 있는 시간, 온갖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지 느끼게 된다.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세속을 떠나고 싶은 염리심이 없어서 해탈을 위한 마음이 생기기 힘들기 때문에, 고통도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인간의 몸은 해탈을 위해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정말 희귀한 찬스이다. 인간이 가진 학벌, 외모, 돈으로 도구처럼 가치를 평가하는 피곤한 가치관을 떠나 불법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고귀한 느낌이 든다.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초심자를 위한 불교 수행서이다. 독자 자기 자신, 자신이 보내는 시간, 맞닥뜨리는 사건 등을 다른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다. 초보 불자로서 마음가짐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