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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將軍[임장군] 아버지는 큰 장자군였다. 自己[자기] 집인 단월 서말에 商品[상품]을 잔득 싫어가지고 各處[각처]로 단이며 이것을 팔어넘기고 다시 또 商品[상품]을 사서 집에 돌어왔다. 또 집을 나서〃 장사를 繼續[계속]하고 하였다. 그런데 將軍[장군]의 아버지는 늦도록 아들을 하나도 못 두어, 어떻게든지 하여 아들을 하나 어더볼가 하고, 여러 가지로 別[별]〃 짓을 다 하여보았다. 山神靈[산신령]도 爲[위]하고, 조상의 모이도 밀예를 하고, 七星壇[칠성단]도 모아보고, 절에 불공도 들여보고, 무당을 델여다 三神[삼신] 할머니한테 빌어도 보고 ―. 할 만한 手段[수단]은 다 써 보았으나, 永[영]〃 아덜을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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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했고,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創造)』를 자비로 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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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겪은 후의 조선의 혼란한 상황을 이야기한 책이다 삼일절에 이 책을 읽으니 이들이 친일이 되기전에 그래도 애국심은 있었다는 생각도 들고 아니면 당시 자신이 혼자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이광수작가가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다룬 것을 보고 다룬 것인지 궁금해지는데 정말 김동인은 글을 기막히게 잘 쓰는 사람이다 이 시기의 상황 사람들의 행동등이 앞에서 보이는 장면처럼 글이 느껴지는 장점이 있다 |
| 김동인의 소설인 임장군을 읽고 쓰는 감상 리뷰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같은 작품에 동시에 등장시키기에는 이질적일 것 같은 소재나 요소가 좀 있는데, 작중에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극적으로 납득되게 배치되고 활용되고 있어서, 특이하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작품 자체도 재미있게 감상했으며, 읽는 동안 내내 김동인의 문장력의 저력이 느껴지는 듯한 소설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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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덕유산에서 이렇게 당부하던 그 처사가, 자기에게 목숨을 청구하여 보지 못하고 먼저 죽었다 목숨가지는 혹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오른팔은 그 노인의 것이다. 뱀에게 물린 이상 잘라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것이 그냥 자기 몸집에 달려있는 것은 전혀 노인의 덕이 아니냐. 오른손이 남아있어서 돼지의 머리를 바숴버렸기에 황제의 총애를 사고, 오늘날의 이 영화와 지위를 얻지 않았느냐. 그 새 30년간을 한 번도 생각하여 본 일이 없는 자기의 오른 주먹의 은혜가, 통절히 느껴지면서, 동시에 그와 같은 팔의 ? 생명의 주인인 옛날 처사에게 대한 미안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그 오른팔은 말하자면 자기 몸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자기의 소유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팔의 덕에 오늘의 지위를 얻어서, 그러한 은혜 많은 팔을 감히 의주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함부로 놀려서 자기의 동족의 생명을 얼마나 빼앗았는가. 이곳서 이 노인의 주검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자기는 또 여기서 경성에 이르기까지에 얼마나 많은 동족의 피를 흘렸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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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원망의 눈이 하늘로 치어들 때에, 선비는 문득, 멀리 명멸하는 불그림자를 발견하였다. 벌써 사위는 캄캄하였는지라, 그 원근은 분명히 알기 힘들되, 건너편 봉우리의 중턱쯤 되는 곳에서 가물가물하는 불그림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뱀의 무서운 독은 벌써 선비의 전신에 뻗쳐 나가는 것이 분명하였다. 손가락만 저리고 아프고 하던 것이 어느덧 팔목까지 저리고, 이제는 팔굽까지 저린 것으로 보아서, 좀 더 뒤에는 팔쭉지까지 저릴 것이며, 그 독은 한 각이 지나지 못하여 온 몸에 다 퍼질 것이다. 선비는 숨을 허덕이었다. 물에 빠진 자는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법이다. 독사에 물린 이상은 손을 잘라내지 않으면 죽을 것이 뻔하였지만, 행여 살 길이 있을까 하여 무턱대고 그 불그림자가 보이는 곳으로 향하여 씨근거리며 기어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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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덕유산(德裕山)은 남방에 이름 있는 장산(壯山)이다. 송림이 울창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만학천봉(萬壑千峰)이 엉기어서, 백주에도 해를 우러러 보기가 힘들고 맹수와 독충이 행객을 위협하는 험산이다. 때는 선조대왕 말엽,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아직도 인심이 안돈되지 않아서, 흉흉한 기분이 남조선 전체를 덮고 있는 때였다. 가을해도 어느덧 봉우리 뒤로 숨어버리고 검푸른 밤의 기분이 이 산골짜기 일대를 덮으려 하는 때였다. 저녁해도 없어지고 바야흐로 밤에 잠기려 하는 이 무인산곡(無人山谷)을 한 젊은 선비가 헤매고 있었다. 길을 잃은 것이 분명하였다. 벌써 단풍든 잡초가 무성하여 눈앞이 보이지 않는 덤불 사이를 땀을 뻘뻘 흘리며 이 선비는 방황하고 있었다. 버석버석, 선비가 발을 옮길 때마다 잡초만 좌우로 쓰러지지 아무리 헤매도 길이 나서지를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