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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대항적 지식의 풍부한 보고《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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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적’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말 그대로 ‘식민’ 이후를 뜻하는데, 이런 일반적인 의미는 다양한 정치 형태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명료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비해 포스트식민주의는 그 용어의 의미론적 범주가 탈식민주의보다 더 넓다. 식민지를 벗어난 포스트식민국가에서 하는 정치적 모든 활동들을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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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적’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인 의미에서 말 그대로 ‘식민’ 이후를 뜻하는데, 이런 일반적인 의미는 다양한 정치 형태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탈식민주의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명료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비해 포스트식민주의는 그 용어의 의미론적 범주가 탈식민주의보다 더 넓다. 식민지를 벗어난 포스트식민국가에서 하는 정치적 모든 활동들을 ‘포스트 식민주의’라고 칭할 수 있기에 포스트식민주의는 탈식민주의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탈식민주의라는 역사적 상황들이 문학적인 성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름하여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이 식민국가에 나타나게 되었다.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의 특징은 제국주의가  수행하는 동일화 논리와 차별화를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저자는 대표적인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가 중의 한 명으로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에서  ‘트리컨티넨탈 포스트식민주의’라는 포스트식민적 문학에서 특징으로 삼아온 ‘정체성’을 되찾는 것을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색다른 글쓰기를 선보이고 있다. 저자는 기존에 포스트식민적 문학 개념이 세계 문학이라는 거대한 실체와의 관계 속에 흘러왔지만, 포스트식민주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 ‘억압적이고 객체적인 세력들 앞에서 주체적 힘을 재주장하는’ 제한적인 문학적 포스트식민주의의 형태와는 구분되어져야 하며  탈 세계의 민중들이 독재와 부정에 저항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형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포스트식민과 관련해 더 거대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는 개념으로서의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를 살펴보고 있다.

 

 

포스트식민주의가 비서양 세대륙(아프리카,아시아,남아메리카를 지칭하여 ‘트리컨티네탈’이라 한다.) 국가들이 대부분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종속된 상황에 처해 있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지위에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자원과 물질적 복지에 대한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권리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화,즉 현재 서양 사회에 개입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고 있는 문화들의 역동적 힘을 주장하기도 한다. (p20)  저자의 포스트식민적 문화 분석은 사물을 바라보는 이전의 지배적인 서양적 방식을 반박하는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포스트식민주의가 ‘서발턴'(Subaltern·하위주체)’  곧 종속적 계급과 민중들의 정치학을 정교하게 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바로 이 아래가 포스트식민주의가 존재하고 있고 당연히 존재해야 할 지점이라고 하며 ,  무엇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비서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권력 구조에 개입하여 그 안에 대안적 지식과 사유의 깊이를 제안한다. 저자는 이러한 포스트식민주의식의 사고로 인하여 사고를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의 다양한 민중들 간의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관계를 생산하고자 한다는 의미로서 변화하는 세계, 투쟁을 통해 변혁될 뿐만 아니라 참여 주체들로 인하여 변혁된 세계를 또다시 변혁하려고 하는 세계의 변화에 관한 이론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서양인과 비서양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를 바라보는 지배적인 방식을 변경하려는 일련의 문학작품들을 통해 살펴보는 동시에 각 문화가 가진 독특하고도 섬세한 차이들과  나라마다 가진 특정한 정치와 사회의 분위기를 이해하고자 한다. 서양에 있는 이들은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을 억압의 상징으로 페미니즘을 앞세워 여성을 보호하려 하지만, 이런 베일의 강제적인 제거를 주장하는 서양의 시선은 일종의 식민지적 폭력이라는 것이 포스트 식민주의자들의 시각이다. 이슬람의 베일은 억압으로 읽어서는 안되고 베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자기의 의미들, 여성들이 자신 스스로의 의지와 자신의 지위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서양에서는 자신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알제리의 라이 음악이 가진 의미도 마찬가지다. 라이는 자신의 시각, 즉 그 자체의 전복적인 권력의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포스트식민주의에 근본적인 많은 성질들을 압축하고 있다. 사회의 주변부에 처한 사람들, 즉 궁핍한 가난의 조건, 열악한 주거, 그리고 실업의 처지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 이주자들의 심정을 표현하는 라이의 음악문화는 젊은이들이 알제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주요한 대중적 수단으로 발전해갔다. 라이는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들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변화하는 역사적 힘에 대해 무슬림 사회가 보이는 수용과 전통적인 반응간의 갈등적이고 경합적인 공간에 존재한다.

이외에도 젠더와 근대성, 페미니즘, 서발턴, ,농민, 가난한 자, 온갖 종류의 버림받은 자들에게 깊이 공감하는 포스트식민주의는 엘리트 계급의 고급 문화를 피하고, 역사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문화와 대항적 지식의 풍부한 보고로 간주될 수 있는 서발턴 문화와 지식을 지지한다.

 

포스트식민의 급진적 의제는 지상의 모든 인간들을 위한 평등과 안녕을 요구하는 데 있다

 

포스트 식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서양과 비서양의 시선을 주체성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인들이 비서양 세계를 바라볼 때 그들이 본 것이 실제 거기에 존재하는 현실이라기보다는, 서양 밖의 사람들이 실제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보다는, 서양인 자신이나 자신이 전제하고 있는 것의 거울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 자신의 관점에서 타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슬람 여인의 베일을 서양인의 기준으로 바라볼 때는 억압이지만, 그 이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억압이 아닌 여성의 지위이자 의사표현이인 이슬람 문화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포스트식민주의는 사진의 이면으로부터 바라보는 시선을 의미하며 뒤집어 생각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식민이라는 그늘이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여전이 많은 사람들이 식민의 그늘에 잠식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문화는 아래로부터 태동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차별받아 왔던 흑인과 히스패닉계가 현재 미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하나의 동력이 되고 있는 것처럼 사회에서 오랜 세월 약자로 살아왔던  서발턴'(Subaltern·하위주체)’ 들의 역동적인 저항과 투쟁이 더 나은 삶을 위한 변화의 모토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역시도 이러한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에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주목되는 영의 이론서이다.



YES마니아 : 로얄 k********2 2013.07.05. 신고 공감 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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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주의, 그 알파와 오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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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에서 새로운 총서시리즈가 나오고 있다. '우리시대의 주변/횡단총서'로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사태와 그 뒤 유로 위기로 가시화된 서구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위기'를 그것을 상대적으로 객관화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주로 이 '근대성'을 타자화시켜서 바라보는 담론들을 주로 펴내는 총서이다. 그렇게 첫 권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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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암사에서 새로운 총서시리즈가 나오고 있다. '우리시대의 주변/횡단총서'로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사태와 그 뒤 유로 위기로 가시화된 서구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위기'를 그것을 상대적으로 객관화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주로 이 '근대성'을 타자화시켜서 바라보는 담론들을 주로 펴내는 총서이다. 그렇게 첫 권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기원을 두고 있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포스트식민주의)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인 로버트 J.C 영의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가 선정, 발간되었고 두번째 권은 프란츠 파농을 중심으로 유럽을 타자화 시키는 루이스 R 고든의 '유럽의 떠나가'가  발간 예정으로 잡혀 있다.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의 날개에는 앞으로 발간된 이 총서의 목록이 모두 10권까지 나와 있는데 니콜라스 브라운의 '유토피안 제너레이션'이나 마이클 키박의 '황색 신화' 그리고 월터 미놀료의 '모더니티의 어두운 이면'까지 들어가 있어 기대를 모은다.

 

 총서의 시작으로 로버트 J.C 영의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가 선택된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포스트식민주의야말로 서구 중심의 근대성을 가장 잘 타자화시키는 대표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에겐 생소할 포스트식민주의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거기에 대해선 로버트 J.C 영이 직접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포스트식민주의는 변화하는 세계, 즉 투쟁을 통해 변혁될뿐만 아니라 참여 주체들이 그 변혁된 세계를 또다시 변혁하려고 하는 세계에 관한 것이다.(P. 24)

 

 쉽게 말해, 포스트식민주의는 변혁을 위한 (아직도 이 말이 통용된다면) 이데올로기이다. 이것은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바로 '식민성(Coloniality)'이다. '식민성'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가치와 판단으로 타자와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단적으로 '우리는 무언가에 침식당했고 그 고유의 시선은 잃어버린 채, 이식된 시선과 사고로써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식민성이다. 예컨대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하에서 우리의 말을 잃어버리고 역사를 잃어버려 그들이 원하는 말과 역사만을 가졌던 것과 같다. 창씨개명으로 우리의 이름조차 잃어버렸듯이 그렇게 '나의 고유한 주체'가 지배하는 타자에 의해 소실되고 그들이 원하는 주체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식민성'이다. 식민성은 한 마디로 고유한 주체의 상실이다. 제 머리로 생각하고 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의 불가능이다. '식민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 눈이 사실은 남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며 나의 판단이 사실은 이식된 다른 이의 판단을 따르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 속에 들어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들을 분리하는 작업. 그것이 바로 '포스트식민주의'이며 때문에 그 포스트식민주의는 '변혁'인 것이다. 물든 나를 전복시키고 오로지 고유의 나라는 존재로 바로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걸 나라로 넓혀보면 동양은 동양 고유의 시선이 아닌 서양으로 부터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이식된 서양 중심의 시선으로 자신을 스스로마저 판단하고 있었다는 게 된다. 그걸 처음으로 밝힌 이가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였고 그의 첫 저작, '오리엔탈리즘'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에 의해 폄하된 동양의 모습을 싸잡아 부르는 이름이다. 일례로 우리는 영화 같은 곳에서 백인이 열등하게 묘사되는 것보다 아프리카 원시인들이 동남아시아인들이 열등하게 묘사되는 것을 더 즐긴다. 우리는 동양인이면서도 이상하게 그들을 바라볼 때 마치 우리 자신이 백인인 것처럼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다. 그건 우리의 의식 깊은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그 뿌리를 잘라내기 위하여 포스트식민주의는 부단히 노력한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오리엔탈리즘의 근본이 바로 근대성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바로잡아줄 것을 여러 곳에서 구한다. 대개는 그 근대성에 의해 억압된 것들, 혹은 버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포스트식민주의는 단일의 계열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포스트식민주의는 근대성이 구축한 권력구조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며 거기에 개입하여 그 안에 대안적 지식을 기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타파할 수 있고 대안적 지식의 창출이 가능하다면 그 어떤 것이든 된다. 엄밀히 말해서 포스트식민주의의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로버트 j.c 영이 하필이면 책의 제목을 '아래로부터'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그 내부 혹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타파의 움직임들 다 포괄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현재 권력구조를 재편할 대안적 지식은 지금 권력구조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 혹은 소외된 자들로부터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머무를 땅 하나 없어 이리저리 유랑할 수 밖에 없는 난민들, 망명자들 혹은 사회적 약자나 여성들. 이런 자들이 바로 포스트식민주의에서는 중요한 주체들이 된다. 현재 그들은 지배 문화에 의해 멋대로 번역되고 그들의 말이 아닌 다른 언어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된다. 누구도 그들의 맨 얼굴을 보려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이 원하는 가면을 덧씌울 뿐.

 

 바로 그 기만의 가면을 벗기고 그들의 맨 얼굴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맨 얼굴을 통해 그들에게 가면을 씌웠던 자들의 맨 얼굴까지 스스로 바라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포스트식민주의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로버트 j. c 영이 이 책에서 특히 천착하는 것은 여성이다. 소위 말하는 페미니즘. 그는 이 페미니즘이야말로 포스트식민주의의 대표적 유형이라 생각한다. '보이지 않으면서 볼 수 있는 이 여성이 식민지배자를 좌절시켰다'라는 프란츠 파농의 말을 충실히 좇아 제도화된 권력 형태에 맞서는 급진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의 궤적을 여성을 중심으로 그리면서 그것이 어떻게 포스트식민주의를 구현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간디의 비폭력운동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비록 그가 여전히 인도 사회의 전통적 여성상을 고수하려는 한계는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여성화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전혀 다른 비전을 보여주었던 것은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포스트식민주의는 결코 먼 나라의 이론 더미가 아니다.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무엇보다 '주체화'를 위한 노력이다. 내 고유의 시선으로 타자들을 바라보고 내 고유의 생각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포스트식민주의가 구현하려는 주체다. 혹은 식민화된 주체에서 나만의 고유한 주체를 건져내려는 구함이다. 따지고 보면 바로 우리들에게도 식민화된 주체는 많다. 지역주의에 휘둘리는 식민화된 주체, 학벌주의에 오염된 식민화된 주체, 색깔논쟁에 눈이 먼 식민화된 주체, 돈의 욕망에만 혈안이 된 식민화된 주체들이 우리 신체 곳곳에 침투되어 있다. 우리가 매일을 살면서 정말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사실 우리 몸 여기저기에 이러한 식민화된 주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나의 의지가 아닌 그들의 의지대로 나를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해, 포스트식민주의는 이러한 쇠사슬을 끊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위한 한 걸음을 떼는 것이다. 비록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그러한 흐름들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흐름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나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쓴 로버트 j.c 영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포스트식민주의가 가져다 주려는 것은 자유의 바람이다. 이 책은 그 바람을 위해 로버트 j.c 영이 돌리는 거대한 풍차라 할 만하다.

 



l****1 2013.07.15.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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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신식민주의에 하이킥 날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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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의 눈에 을(乙)은 언제나 게으르고 비겁하고 야만적이고 방자하고 불경스럽다. 백인의 눈에 깜둥이가, 일제의 눈에 불량선인이 그러했다. 자아는 언제나 타자를 만들면서 형성된다. 자아의 눈에 타자는 언제나 그렇게 비춰진다. 서양의 눈에 비친 비서양, 제국의 눈에 비친 식민지, 문명의 눈에 비친 자연, 이성의 눈에 비친 비이성,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 중심에서 바라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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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의 눈에 을(乙)은 언제나 게으르고 비겁하고 야만적이고 방자하고 불경스럽다. 백인의 눈에 깜둥이가, 일제의 눈에 불량선인이 그러했다. 자아는 언제나 타자를 만들면서 형성된다. 자아의 눈에 타자는 언제나 그렇게 비춰진다. 서양의 눈에 비친 비서양, 제국의 눈에 비친 식민지, 문명의 눈에 비친 자연, 이성의 눈에 비친 비이성,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 중심에서 바라본 주변이 모두 차이와 열등성의 신화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와 열등과 종속의 신화는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신식민주의의 밑바탕을 이룬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한다면 탈식민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탈식민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노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팔레스타인, 아일랜드, 티베트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외국인들이 남북한 통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주리라 믿는 것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화 시기에 일제 치하의 식민경험을 간직한 한국인은 탈식민적 시각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 모두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등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식민적 폭력과 억압의 기억이 여전히 피식민적 경험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우리 지식인들은 중국의 중화주의와 일본의 야마토주의, 인도의 힌두뜨와 운동 등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전형적인 탈식민적 문제들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일반적으로 탈식민주의는 과거의 제국주의를 업그레이드한 신자유주의라는 지배적 패러다임에 대항하는 대안 이론이다. 미국의 탈식민주의 이론가 로버트 J. C. 영은 한때 '제3세계'라 불리던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세 대륙의 서발턴 연구를 강조한다. 그래서 영이 강조하는 탈식민주의는 특별히 '트리컨티넨탈 탈식민주의'라고 불리고 이는 기존의 '문학적 탈식민주의'와 구별된다. 영이 강조하는 남반구의 탈식민주의, 즉 '트리컨티넨탈리즘'은 민중해방이라는 초국적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주류 영미 비교문학 교수들에 의한 문학 위주의 탈식민주의 연구에 대한 저항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탈식민주의라는 용어보다 트리컨티넨탈리즘이란 용어를 더 선호하는 저자의 입장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학술 유행어 '오리엔탈리즘'을 염두해 둔 혐의가 다분하다.

 

트리컨티넨탈리즘은 과거 식민주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던 기존의 제3세계 식민주의와 서발턴 연구를 달리 지칭한 용어다. 서발턴은 생산양식 서사의 외부에 있는 타자들, 사회적 약자들, 성적 소수자들, 말할 수 없는 사람들, 혹은 말했지만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의 개별 국가들은 독립을 통해서 식민지적 지위에서 자율적인 탈식민적 지위로 옮겨갔다. 전지구적 국제정치에서 본다면, 탈식민주의는 유럽과 북미의 보편적 관점이 아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특수한 관점이다. 또한 탈식민적인 저항 정신은 위로부터의 응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바라봄이다.  

 

저자는 탈식민성의 행위 주체성과 역사성, 공동체성, 혼종성 등을 강조한다. 혁명적 심리학자 프란츠 파농의 반식민지 투쟁이라는 가르침대로, 억압적인 '갑질' 앞에서 하위주체로서의 을의 자율적 힘을 재주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우선적으로 서발턴의 목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저자는 탈식민 시대의 구체적 현장에 살고 있는 서발턴 하위주체, 대지의 저주받은 자, 이산된 난민들의 뿌리 뽑힌 삶과 그들의 대지를 여행하는 여정을 떠난다. 서발턴은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 소수 집단 출신의 여성들, 항상 주변부에 있는 사람, 결코 규범적인 자격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국제 노동 분업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탈식민이론은 세계 인구 대부분의 일상적 삶이 처해있는 착취와 빈곤의 조건들에 도덕적으로 참여하고 그것을 변혁하는 정치적 실천의 활발한 사상들을 전개하는 데 관심이 있다. 탈식민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 가부장제에 대한 질타를 담지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식민적 투쟁을 계승한 탈식민주의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권리와 힘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파시즘, 식민주의, 자본주의에 철저히 반대한다. 그러나 최근의 탈식민주의 이론은 해방투쟁이나 무장봉기, 혁명적 주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탈식민주의 이론이 전문화, 엘리트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입문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탈식민주의 이론서는 프란츠 파농,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 등의 이론과 사상을 간추려 소개하는 데 바쁜데, 이 책은 탈식민주의의 연구테마에 근거해 이들의 이론을 교묘하게 적용하고 있는 학술서다. 가령 서양인과 비서양인 간의 관계, 오리엔탈리즘, 파키스탄의 난민, 이집트와 서아시아의 여성들, 스페인계 모로코 이민, 간디와 페미니즘, 알제리의 독특한 음악 장르 ‘라이’ 등 서발턴과 대안문화에 주목한다.

 

탈식민주의의 관점을 대변하는 혼종문화로 알제리의 독특한 음악형식 '라이'를 거론한 점과 라이의 여왕이라 불리는 셰이카 레미티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이다. 덕분에 유명한 라이 가수 셰브 하스니(Cheb Hasni)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베일'에 대한 견해와 입장 차이도 논란거리다. 이는 무엇보다도 전통과 근대화의 갈등, 문화주의와 발전의 대립이다. 우리는 근본주의 이슬람의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부르카, 히잡, 차도르 같은 베일을 떠올린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지역 가부장제에 맞서 아랍 여성을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베일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무슬림 여성의 인권 보호에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무슬림 여성들이 스스로 선택한 베일은 여성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사생활, 정체성, 친족 간 서열, 신분, 계급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식이 된다. 이처럼 베일을 제거하자는 서구의 페미니즘은 아랍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 의제를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온정적 가부장제는 이제 '문화다원주의'라는 차이에 대한 문화적 존중과 관용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z***a 2013.07.05.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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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많이 가는 도서였다. 늘 책을 읽는 분야가 한정적인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지냈는데, 인문/사회 관련 도서를 더 많이 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앞서던 차에 작년부터 자음과 모음에서 나오는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를 한두권씩 읽기 시작했었다. 나름 다양한 분야의, 잘 접해보지 못했던 내용의 도서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었는데, 이번엔 또 자모의 책만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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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이 많이 가는 도서였다. 늘 책을 읽는 분야가 한정적인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지냈는데, 인문/사회 관련 도서를 더 많이 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앞서던 차에 작년부터 자음과 모음에서 나오는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를 한두권씩 읽기 시작했었다. 나름 다양한 분야의, 잘 접해보지 못했던 내용의 도서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었는데, 이번엔 또 자모의 책만 열심히 파고드는 것이 분야는 둘째치고 출판사의 다양성이 심히 부족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마침 현암사에서 새로 기획한 '우리시대의 주변/횡단 총서'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표지부터 다소 딱딱한 감이 없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 내용은 생각 외로 재미있었다. 다른 시리즈 들도 천천히 기쁘게 만나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아 기대된다.

 

 포스트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을 다룬 이 책은 우리가 우리 사회와 현대 사회의 흐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서구화된 모델을 세련되고 합리적인 것이라 받아들이는가. 예를들면 분홍은 촌스럽고 핑크는 세련되었다는 감각처럼. 혹은 히잡을 둘러쓴 여자는 자신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라 딱하게 여기는 생각같이. 다국적 기업이 소비자를 기만하고 제 몸 부풀리기에 열중하는 것이 그저 자유경쟁체제 아래서의 당연한 결과인양 받아들이는 일이. 그런 구분을 두는 근간에는 어떤 사고가 작용되고 있는가 생각해 볼 계기를 주는 책이었다. 자립해서 섰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종속되어 있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서양국가의 현실을 깨우치며 읽은 기분이다.

 

 "흔히 두 가지 종류의 백인이 있다고 얘기되어 왔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이 백인이 아닌 상황에는 처해본 적이 없는 백인과 그 방에서 자신만이 유일하게 백인인 경우를 경험한 백인이 그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아마 처음으로 그들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은유적으로 말해, 서양 바깥에 있는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경험이 실질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즉 소수 집단 출신이 된다는 것, 항상 주변부에 있는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 결코 규범적인 자격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즉 발언할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서문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된 부분이었다. 한국에 온지 몇년이 다 되어가도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영어만을 사용하며 한국에서 살아가는데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레 영어로 말을 하고, 한국인들은 그들의 영어를 알아듣고 그것에 답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을 수 있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가 영어권 혹은 백인이 사는 나라에 가서 얼마간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 나라의 말을 못한다는 것이 불편하거나 부끄러운 일로 다가오지 않을까? 어쩌면 생활 자체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좀 더 비약적인 경우로, 백인이 아닌 외국인들이 한국에 온지 몇년이나 지났는데도 한국말을 거의 못한다면. 그 경우에도 주변인들은 그들이 한국말을 배우길 종용하지 않을까.

 

 일차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가 당연시 했던 작은 부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서구에 맞춰진 편협하거나 강제적인 잣대에서 비롯되었는가 였다. 서양인들이 비서양을 바라보는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 비서양인 우리들도 물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구분, 외국인 중에서도 백인과 유색인종에 대한 구분이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런 구분의 기준 역시 백인이 만들어놓은 기준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유색인종이면서 동시에 같은 아시아 계열의 타 민족을 무시하는 행태는 천박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유럽인들에게 베일은 동양의 에로틱한 신비를 상징하곤 했다. 무슬림들에게 베일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다. 오늘날 베일의 의미는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많은 서양인들에게 베일은 여성을 억압하고 예속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가부장적 이슬람 사회의 상징이다. 다른 한편 이슬람 사회나 비이슬람 사회의 많은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 히잡과 같은 베일은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을 상징해왔고, 여성들을 점차 스스로의 선택의 문제로 그것을 착용해왔다. 그 결과 베일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 널리 착용되고 있다. 오늘날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베일은 통제냐 도전이냐, 억압이냐 자율이냐, 가부장제냐 비서양의 공동체적 가치냐를 상징한다."

 

 또 하나, 표지에서도 그렇듯이 눈만을 내어놓은 히잡을 쓴 여인이 우리를 직시하고 있다. 자신을 두고 어떤 선입견이나 설명을 거부하는 듯한 확고한 눈동자가 표지에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상징적인지- 사실 표지를 본 순간 이 책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 그녀를 둘러 싼 우리의 시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쉽게 떠오른다. 히잡을 갑갑한 멍에로만 떠올렸으나, 그 것이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간과했다. 억압을 해방시켜준다는 시각이 또 다른 억압으로 존재한다는 것, 타자의 입장에서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여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와 다름에 대해 편협하고 폭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마주했을때 - 제목이나 표지의 색감마저 - 다소 어렵거나 재미없게 보여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좀 개선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 사실 보는 것과는 다른 면이 많은 책이다. 오히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접근하고 있고, 무엇보다 번역이 좋았던 것 같다. 이책이 쉽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많이하고 읽어서 그보다 부담이 덜해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문장이 꼬여지거나 어색하게 번역된 부분이 적고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여 읽기 편했다. 인문/사회 서적에 관심은 있는데 뭘 읽어야 좋을지 모르겠거나, 쌓아놓은 배경지식이 많지 않아 고민되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른 총서 시리즈들도 기대되는 첫 단추였다.

 

m******j 2013.07.10.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식민의 그림자 떨구기, 포스트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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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그림자는 짙다.멀리서 볼 것도 없다. 엊그제도 하시모토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인이라 칭하였고, 위안부를 부인하거나 필연적이고, 자발적인 것으로 호도하거나, 식민 지배로 한반도의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강변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만도 아니다. 식민의 그림자는 우리에게도 짙어, 역사를 서술하는데 문화를 정립하는데 끈질기게 일본의 영향을 마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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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그림자는 짙다.

멀리서 볼 것도 없다.

엊그제도 하시모토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인이라 칭하였고, 위안부를 부인하거나 필연적이고, 자발적인 것으로 호도하거나, 식민 지배로 한반도의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는 강변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만도 아니다. 식민의 그림자는 우리에게도 짙어, 역사를 서술하는데 문화를 정립하는데 끈질기게 일본의 영향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미국이라는 막강한 영향력 앞에 우리는 과거 신식국독자식반자니 하는 논쟁을 해야만 했다. (이 암호 같은 말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식민지 반자본주의의 약자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은 그나마 낫다.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기는 했지만, 기적적인 경제 발전으로 다른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나라들과는 다른 궤도에 올라선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분석 대상으로도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저자의 한국어 서문에 한국은 현재 이민과 같은 포스트식민 시대의 이슈들뿐 아니라 중국, 일본의 이주자들과 다수의 재일 한국인과 재중 한국인(일명 조선족)들을 포함하고 있는 나라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종속적 정체성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게 본문에서 그려내고 있는 풍경과 비교해서는 상대할 바도 못되는 문제이다. (저자가 선호하는 트리컨티넨탈(tricontinental)’이라고 하는 남반구의 세 대륙, 아프리카, 아시아(남부), 남아메리카의 범주에도 한반도는 사실상 포함되지 않는다.)

 

그만큼 전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아니 그 지역에 해당하는 문제를 비교해서 보았을 때 심각한 포스트식민적 문제가 도처에 존재한다는 얘기다.

로버트 J. C. 영은 그러한 포스트식민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풍경을 몽타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게 사실 더 도발적이고 선동적이다. 사람들은 이론화된 정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례를 통해 움직이니 말이다.

그가 몽타주라고 한 것은 이런 것이다: “몽타주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파편들을 의도적으로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조각들의 거친 단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정지 상태의 이미지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함으로써 현재의 역사적 모순을 연출하는 일련의 편린들이다.” (25)

사실상 이 두 문장에 저자가 의도하는 바가 거의 드러나는데, 그는 아프카니스탄 난민촌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짧은 르뽀, 1924년 할렘에 모인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의 혁명가들의 사진,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의 역사적 전개,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점령의 과정과 현실, 알제리의 라이라고 하는 음악, 이슬람의 베일의 양가성, 간디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인도에서의 여성의 문제(, 포스트 페미니즘), 프란츠 파농과 체 게바바 등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포스트 식민주의가 뜻하는 바를 펼치고 있다.

, 저자는 정의를 통해 안이하게 도출되는 편한 정답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시점을 통해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그로부터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본 현실은 얼핏 다른 모습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결합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하나의 문제의식이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물질적, 문화적 복지를 누릴 권리를 의미한다.

그런 문제의식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서양이라고 하는 바깥에서 그 문제를 그저 바라보아서는 어렵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고, 새로운 방향 설정이 필요한데, 바로 그 시각과 방향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브룩클린의 무슬림 여성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을 표지의 사진으로 쓴 이 책은 그 표지부터 도발적이다. 처음 이게 뭐지? 하고 쳐다보고, 아무 생각없이 책장을 넘기다 다시 돌아와서 표지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 사진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 무슬림이면서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여성이면서 베일을 착용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브루클린이라는 제국의 심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포스트식민주의의 온갖 모순 혹은 상황을 모두 체현하고 있는 듯한 이 사진에서 그 눈!

모순이 단순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동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니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듯 하다.

 

우리는 그 수많은 모순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미 제3세계, 혹은 트리컨티넨탈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듯 보인다. 아니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시각은 포스트식민주의의 시각을 애써 피하고, 당연한 듯 서양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도 다분히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 나 자신이 그걸 느낀다. 프란치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나 체 게바라에 대한 책을 읽을 때의 대학 시절과 비교하면 너무도 확연하게 다른 태도로 이 책을 나를 발견하니까.

그 객관화에 함정이 있다. 객관성이라는 것이 선()이고, 과학적이라 부를 수는 있지만, 그게 모든 것에서 선이고 과학적이지는 않다. 분노하고, 안타까워해야 할 때, 행동해야 할 때 그걸 외면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 객관성이기도 하다. 포스트식민주의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제국 자체의 이기주의, 폭력성만이 아니다. 정작은 그 제국, 혹은 포스트식민의 시대를 사는 이들의 그 영혼없는 객관성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

 



(2013. 7)

YES마니아 : 로얄 n*****m 2015.11.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주체의 회복은 연대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주체의 회복은 연대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내용보기
'~주의(-ism)'란 접미어에 대해 다들 얼마나 깊게 생각해 보셨나요? 사실 우리말 '~주의'는 '이념'만을 그 내포로 삼고 있어서, 예를 들어 '제국주의', '식민주의' 같은 흔하면서도 복합적인 의미를 담는 단어 속에서는 약간의 혼란을 유발합니다. 이런 단어들의 예에서는, '사상(체계)'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식민주의'가 있으면, '식민주의'도 있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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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ism)'란 접미어에 대해 다들 얼마나 깊게 생각해 보셨나요? 사실 우리말 '~주의'는 '이념'만을 그 내포로 삼고 있어서, 예를 들어 '제국주의', '식민주의' 같은 흔하면서도 복합적인 의미를 담는 단어 속에서는 약간의 혼란을 유발합니다. 이런 단어들의 예에서는, '사상(체계)'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식민주의'가 있으면, '식민주의'도 있어야 할 텐데요(이 책에서 알 수 있듯, '포스트구조주의'가 구조주의의 안티테제요,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의 이항대립[二項對立]객체이듯이 말입니다). 포스트콜로니얼postcolonial의 사상가라면 사이드, 바바, 스피박 등(그리고 우리의 이 책 저자 로버트 J C 영을 물론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떠오르지만, '식민주의'의 대표주자라면 누가 연상되십니까? 당연히 그 누구도 생각나질 않습니다. 왜일까요? '식민주의'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시시한 농담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사조(思潮)의 이름이, 기존 실체에 접어(prefix, suffix)만 붙인 형태라고 해서, 그 내용적 중요성이 부차적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활짝 열어젖힌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이제 철학, 사회학, 역사학, 인문학 영역에서 거대 비중을 뚜렷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혹은 구(舊) 식민지 출신이라고 하면, 으레 열위자, 미개발 토착민, 혜택의 반대어로서의 저주, 지배의 모순 개념으로서의 저항 따위가 떠오릅니다. 이들 개념의 공통점은 주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타자, 객체'이기도 합니다. 사이드 들은 기존 좌파 사조에 부가적 기여를 하기보다, 아예 발전적 해체를 도모하는 방법론으로써, 이른바 이 '탈식민주의'를 제창했습니다. 이는 식민지배착취시스템에 대한 전면적 거부일 뿐 아니라, 백인, 서구 중심의 좌파 사관, 철학 전반(이 중에는 심지어 맑시즘도 끼어 있습니다)에 대한 안티테제이기도 합니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그래서, 특정 개념의 수정이나 한정, 혹은 수동적 부정이 아닌,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대안의 체계를 갖춘 '떳떳한' 독립 담론 체계입니다.

(출처: robertjcyoung.com)


이처럼 그 본성의 뚜렷한 독립적 특질을 지니고 있는 사조, 혹은 진영(陣營)이, 마치 콜로니얼리즘(혹은 그 무엇이라도)에 대한 종속적 대립 개념으로라도 설정된 인상을 풍기는 명칭 '탈식민주의', 혹은 '포스트콜로니얼'은, 그래서 부당한 면이 있습니다. 주장하는 내용이 '탈객체', '주체화'인데, 이름이 고작 '무엇무엇의 포스트~이즘'이라면, 그 명(名)과 실(實)은 상부(相符)하지 못합니다. 로버트 J C 영의 '트리컨티넨탈(리즘)'은 그런 이유로, 이 굳건하고 정당한 사상 체계에 비로소 합당한 본명을 찾아 준 것입니다.


트리컨티넨탈리즘 역시, 로버트 J C 영의 순수한 창안은 아닙니다. 이 책에도 나와 있듯, 이는 이미 1955년 반둥 회의에서 제3세계(이 역시 지양되어야 할 이름입니다만)의 대유어로 제시된 바 있긴 했습니다. 비동맹권이 포진한 지리상의 위치가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였던 데서 유래한 이 말은, "알고 보니 수적(數的) 주류였음."을 깨달은 옛 피지배국 대표들의, 주체적 각성을 상징하는 단어이며, 단순히 '3개의 대륙'을 말하는 기표가 아닙니다. 이에서는 힘차게 전차를 이끄는 선두, 전위의 '트로이카'가 연상되기도 하며, 세 대륙이 뭉치면 두 대륙(유럽과 북미)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전망의 시사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단어를 '탈식민주의'의 대안적 명칭으로 제시한 건 로버트 J C영의 탁월한 통찰이 스민 대목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독자들은, 나이가 아주 많다거나 이 분야 독서량이 두텁게 축적되어 있지 않다면, 로버트 J C 영의 초기 경향이 어떠했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할 것으로 짐작합니다. 저 역시 그분의 이름으로부터 탈식민주의를 관성처럼 떠올리곤 했습니다만, 오히려 이 책(그의 이력에 있어 일종의 전환점이 된)을 읽고, 또 권말에 실린 역자 김용규 교수님의 해제('해제[解題]'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정답을 제시하는 듯했습니다)를 정독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분이 처음에는 자끄 데리다 등의 탈구조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J C 영은, 포스트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포스트식민주의에 안착, 현재 그 한 대지주가 되어 있는 셈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그가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대가[大家]라는 점에서), 로버트 J C 영은 그 두 발판으로부터 모두 비주류적 위상입니다. 혹은, 주변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비주류니 주변인이니 하는 말은, 최근까지도 세계 패권국의 지위에 있었고, 그 패권국이 마련한 시스템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고 확고한 학적 명성을 누리는, 백인인 그에게 매우 어색한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가 출신'이 아닙니다. 이유를 한번 대어 볼까요.


포스트구조주의의 모태는 다 알다시피 프랑스고, 좀 넓게 잡아도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일각 정도입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근대(그 말썽 많은!)의 시발점에 유럽 대륙을 주름잡았던, 합리론의 (아주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계승자들의 텃밭이라는 사실입니다. 대전제가 있고, 소전제를 거쳐, 구체적 결론이 도출됩니다. 보편 타당한 명제와 이의 거대 시스템이 먼저 상정된 후에, 개별 사례의 구체성이 고려에 오릅니다. 반면, 섬나라 영국은 어떠했습니까? 일백, 일천 마리의 백조를 살핀 후에, 비로소 보편 개념으로서의 백조가 안출되며, 그 띤 빛깔은 희다는 명제가 조심스레 정착하는 방식입니다. 구체적 경험이 먼저이며, 추상 일반 명제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이런 경험론의 본고장에서, 그 정반대의 방법론 전통을 이은 대륙(여기서의 대륙이야 물론 유럽입니다)의 합리론, 그것도 가장 전위적인 좌파의 산물을 연구하는 입장이니, 고향에서는 물론이고 본거지 유럽에 대해서조차 그는 주변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이어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실 겁니다. 원칙적으로 포스트콜로니얼은, 한때 콜로니(얼)이었다가, 이제는 그 착취적 기제로부터 탈(脫)한, 혹은 포스트(post-) 상태인, 3대륙 출신(트리컨티넨탈)이 논하는 게 합리적이고, 또 정당(proper)합니다. 로버트 J C 영은 어떤 의미에서, 트리컨티넨탈을 거론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입니다! 마치 프란츠 파농이 처음 '본토' 프랑스에 발을 내렸을 때, 그가 French improper 였듯이 말이죠. 그(파농)의 유명한 말을 잠시 패러디하자면, "나(영)는 그저 그들로부터 타자인 '흰둥이'일 뿐이었다!"가되는 거죠. 그는 적자(適子)가 아닌, 서출()입니다. 트리컨티넨탈의 세계에서라면요. 심지어 그는, 탈식민주의에 있어 뚜렷한 한 가닥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조차 improper합니다. 그는 분명 남성이기까지 하니까요!

왼쪽부터 데리다, 파농, 알튀세르 (출처: 자끄 데리다 공식 사이트, 오픈 인류학, 위키피디아)



그런데도 우리는, 그의 이름에서 대뜸 탈식민주의를 연상합니다. 이는 이제 교정되어야 할 부당한 선입견에 불과했던 걸까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그의 주변인적 신분 불안정성은, 굳이 그의 심오하고 명쾌한 명저들을 하나하나 들추지 않아도, 바로 그가 이 책 마지막 장을 할애하여 상론하고 있는 '번역(translation)'이라는 도구, 개념 단 하나의 제시만으로 완전한 명예회복(vindication)이 가능합니다. 번역은 '이식(translation)'이 아닙니다(이 책 p239:12). 번역은 한 마디로, '주체적 변용'이요, '능동적 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번역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메타모르포시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대상의 전과 후는 우열의 관계가 아닌, 평등과 연대, 친밀의 관계입니다. 혹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탄생한 제 3의 자아를 예비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산업 혁명으로 상징되는 근대가, 구대륙 북반구로부터의 일방적인 산물이 아니듯이, 포스트콜로니얼도 '아래' 고유로부터의 움직임만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이런 점에서 순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일체 만물이 다 혼종(混種)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년 전 극북 노르웨이의 테러범 브레이비크가 그토록 집착했던 가치가 근친상간적 순일성이었던 걸 떠올리면, 그것의 대척 이데아(누가 보아도 브레이비크와 로버트 J C 영은 극과 극일 것입니다)인, 이 상생, 조화, 성숙의 이념인 포스트콜로니얼, 혹은 트리컨티넨탈이 얼마나 탁월하고 보편 지향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점에서, 트리컨티넨탈의 최고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기에 완벽한 조건입니다. 누가 그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서, 대륙과 영국, 식민과 본토, 트리컨티넨탈과 구미를 매개, 번역할 수 있을까요? 그가 '번역'이라는 개념에 그토록 각별한 애착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기애의 발현이 아닌지 대단히 무엄한 추측도 해 봅니다(예컨대 p260의 5째줄, '현실적 실천 속으로 재맥락화하는 일종의 급진화 작업' 같은 것은,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오랜 뿌리의 좌파적 현대적 계승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고, 이런 점에서 適子인 그에게서만 가능한 작업입니다).


'무토지상태'라는 뜻의 landlessness는, <백경>의 작가 허먼 멜빌이 처음 고안한 단어라고 하는군요. 멜빌의 규정에 의하면 그 단어 안에 최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의미심장합니다. 멜빌의 시대라면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아직 문명의 단위로 채 인정조차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미국같이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나라에서 그 무주정당성을 주장한 것은 멜빌 뿐이 아닙니다. 이 분야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비슷한 시대의 헨리 조지 역시 미국 사람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바뀌어서, 미국은 이제 세계의 패권국이 되었고, 19세기 식민지배체제가 자체 모순으로 파국에 이른 지금, 다시 중동 이슬람에 대한 공략을 통해 영국을 대신할 슈퍼파워로 컬로니얼리즘의 재구축(p85:6 '재영토화')을 시도하려 합니다. 3대륙 인민이 각성하여, 진정 토지소유, 구획이라는 야만적, 반인류적 악폐를 타파해야 지구의 미래가 있을 수 있다는 이념이 팽배한 지금, 미국 문학의 아버지인 멜빌의 흔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합니다. 


억압과 부조리는 결국 경계를  횡단함으로써 가장 잘 해소될 수 있다. 이 말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명제인 것 같습니다. 탈식민의 궁극적 사명은 인간 존엄과 자유, 평등의 완전한 구현이니까요. 

k*********6 2013.07.1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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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쉽지 않은 주제, 하지만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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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버트 영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국 독자들이 경험하고 직접 스스로 연결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포스트식민 사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그 자체의 독특하고 섬세한 차이들, 그리고 그 문화가 직면해야 하는 나름의 특정한 정치적·사회적 쟁점들을 갖고 있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자기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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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버트 영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국 독자들이 경험하고 직접 스스로 연결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포스트식민 사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그 자체의 독특하고 섬세한 차이들, 그리고 그 문화가 직면해야 하는 나름의 특정한 정치적·사회적 쟁점들을 갖고 있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시각과 미래를 형성하기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식들을 의지처가 된다는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저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포스트식민주의는 서양인과 비서양인 간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바라보는 지배적인 방식을 변경하려는 일련의 글쓰기를 전개해왔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세계를 뒤집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것은 사진의 이면으로부터 바라보는 것, 베를린이나 보스턴이 아니라 바그다드나 베냉에 거주할 때 사태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를 경험하는 것, 그리고 왜 그렇게 다르게 보이는지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물질적·문화적 복지를 누릴 권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세계는 불평등하고, 서양인과 비서양인이 현격히 분리되어 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서양과 나머지 세계 간의 이와 같은 분열을 19세기 유럽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극심해졌다.

그 팽창의 결과 지구 전체 표면의 10분의 9를 유럽이나 유럽에서 생겨난 권력들이 통제하게 되었다. 하여 포스트식민주의는 자원과 물질적 복지에 대한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민중들의 권리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문화, 즉 현재 서양 사회에 개입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고 있는 문화들의 역동적 힘을 주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출발해서 식민권력과 해방후 식민화, 공간과 토지, 혼종성, 포스트식민 페미니즘, 지구화와 번역 등에 대해 포스트식민주의가 어떻게 관철되고 제3세계의 빈곤층에 영향을 미치는지 펼쳐 보인다. 그는 이를 위해 '몽타주' 기법을 사용한다. 이는 나를 비롯한 독자들이 역사와 현실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마치 여행자처럼, 혹은 로드 무비를 보는 관객처럼 사건으로 마주 대하게 해준다. 그래서 서양 식민주의의 지배에 저항해 온 사람들의 활동을 '현재형'으로 함께 하게 한다. 저자는 녹취와 증언, 음악과 사진을 곁들여 그 '현장'에 조금이나마 근접하게 만든다.

저자의 이런 노력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임이 분명한 이 책을 쉽게 읽히도록 하는 마력을 지니게 해 주었다. 또한 영문학과 교수답게 쉬운 글쓰기를 통해 자기 주장을 일관된 논리로 펼쳐 보이고 있다. 역자 김용규도 완전 번역에 가깝게 우리 말로 옮긴 탓에 술술 읽힌다!

책 뒷부분에 게재된 역자 김용규의 해제와 모토하시 테츠야·나리타 류이치의 해제는 저자의 관점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두 번째 해제에서 귀가 솔깃해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포스트식민주의라는 정신적 자세는 자기와 타자 간의 경계를 끊임없이 고쳐가면서 모든 시공간에서 자기와 타자 간의 이항대립 관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한 사고의 자세로 세계와 대면할 때, 식민지 관계에서 '타자'로만 여겨졌던 존재가 처음으로 '친구'로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영의 이 책은 그러한 자세와 작업을 우리에게 권하고 장려하는 힘과 깊이를 갖고 있다.

역자가 후기에서도 지적했듯이, 저자는 독자들을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라는 트리컨티넨탈 세계에 살고 있는 서발턴 하위주체, 대지의 저주받은 자, 이산된 난민들의 뿌리 뽑힌 삶과 대지를 여행하는 그들의 여정 속으로 데려간다. 떨어져 있지만 서로 공명하는 생생한 장면과 이미지들!

김용규는 이런 영의 작업을 "정지 상태의 이미지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함으로써 현재 역사의 모순들을 연출하는 일련의 편린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몽타주'의 강점이다.

개별성이 사상된 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으로 수렴되어 버리는 보편성이 아니라, 단편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개별의 '보편화'에 근접해가는 방식. 이를 과학에서는 '자기 유사성'이라고 한다.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취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구조를 '프랙탈(fractal)'이라고 한다.

어쨌든 로버트 영이 선보인 '몽타주' 기법은 포스트식민주의의 아픈 실상을 독자들에게 낱낱이 펼쳐보이면서 독자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탁월한 설득 기법이기도 하다. 혁명이 질식하는 시대에 그럴듯한 이론은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내가 특히 재밌게 읽었던 부분은 '4장 혼종성'이었다. 나는 저자의 독특하면서 탁월한 해석과 감각을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4장에는 알제리의 '라이(Rai)' 음악과 '베일(Vail)'에 대해 언급한다. '라이'는 알제리 사회 내의 분열적 지점에 위치하거나 사회적인 법적 규범에 맞지 않는 자들의 정서적 표현을 동일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히트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 가요의 현주소는 어떤지 되돌아보게 된다.

또한 저자는 서양 세계와 무슬림 세계의 차이를 베일만큼 더 잘 상징하는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제도화된 권력 형태에 맞서는 급진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를 구성하는 것은 베일을 쓰는 것인가 베일을 벗는 것인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질문을 접했을 때 단순히 한 마디로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제리의 프란츠 파농은 '베일의 역사적 역동성'을 얘기하면서 베일이 전략적으로 달라잘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유용하게 사용될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강조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남자임에도 베일을 썼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군대와 경찰로부터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베일은 왜 여성에게는 힘을 박탈하면서 남성에게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 대답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젠더의 문제라기보다는 상황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베일은 해당 사회적 공간 속에서 생성되는 지역적 의미의 관점에서만 읽을 수 있다.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저자의 독특하면서 창의적인 해석은 군데군데 또아리를 틀고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을 수 있다. 이런, 그래서 더 재밌다!

프란츠 파농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6장에서는 파농이 1960년에 펴낸〈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매개로 체 게바라와 인연을 맺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은 파농이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의 서장을 열었다고 평하면서 요소요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행복의 경제학〉을 읽으면서 얻었던 혜안-가령 IMF, 세계은행과 WTO 등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글로벌 3인방이 이끈 세계화는 경쟁과 양극화 현상을 초래-이 더욱 심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간 생물학 분야에서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 등이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면 앞으로는 인문학 특히 문학에서 로버트 콜스나 로버트 영 등의 저작이 새로운 시각을 싹틔워 줄 것 같다.

한편 책표지에 게재된 사진은 '체스터 히긴스 주니어가 찍은 '브룩클린의 무슬림 여성''이다. 이 사진에서 베일을 쓴 흑인 여성은 관찰자에게 직접적으로 도전적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카메라를 직시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 사진이 우리에게 심미적 거리감을 유발하기보다는 우리의 면전에서 어떻게 클로즈업되는가를 눈여겨볼 것을 주문한다(134쪽). 그러고 보니 책표지도 참 잘 골랐다싶다. ^^



YES마니아 : 로얄 h*******c 2013.07.1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위하여! 각자의 주권을 찾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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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위하여! 각자의 주권을 찾길!         18, 19세기는 경쟁적으로 세계를 점령하던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 개척의 시대였다. 유럽 제국의 붕괴 이후 많은 국가들이 해방을 이룬 시기를 새로운 역사단계라 하여. 흔히 탈식민주의(脫植民主義), 후식민주의(後植民主義)라고 한다. 탈식민주의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명료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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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위하여! 각자의 주권을 찾길!

 

 

 

 

18, 19세기는 경쟁적으로 세계를 점령하던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 개척의 시대였다. 유럽 제국의 붕괴 이후 많은 국가들이 해방을 이룬 시기를 새로운 역사단계라 하여. 흔히 탈식민주의(脫植民主義), 후식민주의(後植民主義)라고 한다. 탈식민주의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명료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비해 포스트식민주의는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의 양가적 의미(후기·탈)로 인해 용어의 의미론적 범주가 탈식민주의보다 더 넓다.

 

 

식민주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받는 것이고 탈식민주의는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것을 말하며 포스트 식민주의는 모든 식민주의적 잔재와 근성을 벗어나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물질적, 문화적 복지를 누릴 권리를 찾자는 주장이다. 아직도 세계는 유럽에 권력과 경제력, 정치력이 90%이상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탈식민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권력구도는 여전히 그대로인 상태다. 이제는 그런 구도를 벗어나 식민주의를 영원히 청산하고 정리하자는 주장이 포스트식민주의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J. C. 영.

그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의 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하위주체들의 민중적 저항과 이산 난민들의 의분에 찬 모습, 희생과 고통을 감당하면서도 독립을 구하는 지속적인 구체적인 정치운동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식민지 시절을 살아 온 우리도 세계중심에서 벗어나 늘 주변국 신세였다. 부당함과 억울함을 알면서도 세계질서의 논리에, 강대국들의 힘에 억눌려 발언다운 발언을 해 본적이 없을 정도다, 이제 경제력이 부각되면서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간 듯하지만 사실은 열강들의 힘의 논리에 샌드위치 같은 역할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에는 아직도 식민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곳도 있고 겉으로는 식민주의를 청산했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그 잔재가 남아 있는 지역도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아일랜드와 영국, 한국과 일본, 중국과 티베트, 아프리카와 유럽들......

 

 

1949년에 중국에 침략당한 티베트. 조국을 찾기 위해 분신하는 승려들이나 일반 국민들을 보고 있으면 세계는 약육강식임을 절실히 느낀다. 분명 주인인 티베트인들에게 돌려 줘야 할 그들의 땅인데....

우리의 독도와 대마도 문제, 조선족과 재일동포의 문제도 피식민지 시절과 연속선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서발턴 (하위 주체) 즉. 수탈당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일어나 변혁을 이루어 가는 아래로 부터의 반격으로 보고 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서발턴이라는 관점이다. 지속적인 난민 상태인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

 

 

나의 아들이 나무에 올라 무화과나무를 발견할 때마다

금발의 대영제국신사는 위험에 처하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계속해서 가장 소망했던 것은

그들 없이 우리 자신의 독립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디크 아마드 (본문 중에서)

 

 

 

 

 

포스트식민 페미니즘은 포스트식민지에서의 사회적 억압이든 구식민 종주국에서의 사회적 억압이든, 포스트식민적 환경에서 여성이 처한 조건이 남성보다 더 불안하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그리고 관심분야도 개인을 벗어나 사회 공동체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사회정치적 운동을 할 때나, 법과 교육의 현장에서 운동을 벌일 때 남성보다 더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마도 여성들의 모성본능이 사회적이거나 생태적인 문제에 쏠리게 하지 않았을까.

 

 

어떤 세계는 부유하고 어떤 세계는 가난하다.

오늘날 세계에는 2000만 명의 난민과 자국 내의 실향민들이 존재한다.

세계 인구의 나머지는 가난에서 부유함에 이르는

길게 늘어진 스펙트럼의 어딘가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다.

세계의 국민국가들은 불평등, 자원과 상품에 대한 불공정한 접근을

제도화하는 거대한 체제를 구축했다.

세계의 모든 국가가 미국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원을 소비한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본문 중에서)

 

 

 

식민주의란 타인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이자

타인에게서 인간성의 모든 속성을 부정하는 폭력적인 결정이기 때문에

식민주의는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프란츠 파농 (본문 중에서)

 

 

 

맞는 말이다. 이전가지 빼앗겼던 주체적인 본래의 권리와 자신의 목소리를 찾자는 주장은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역사의 주체라는 인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위로부터가 안되고 있기에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가 절실하다. 더 세월이 가기 전에 말이다. 이를 위해서 포스트 식민주의 문학의 대두는 반가운 일이다. 의식을 개혁해서라도 필요한 일이기에...

 

 

 

 

 

대표적으로 인도 출신의 영국 작가 샐먼 루시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작가 V. S. 네이폴, 케냐 출신 작가 제임스 시옹고 응구기 등이 있다. 특히, 프랑스령(領) 마르티니크섬 출신의 평론가이자 혁명가인 프란츠 파농의 《지상의 저주받은 사람들 》(1961)은 토착민의 관점에서 식민지의 경험을 분석하여 작품화하여 제3세계에 진보적 정치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문학들은 모두 제국주의 세력에게 자신들도 동일한 권리가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한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서양인과 비서양인간의 관계, 유럽과 비유럽의 관계, 그 속에서 진행되어온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뒤집어 제자리에 놓는 것이다. 원래 각자의 주인에게로 돌려 줘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주장을 자세히 들어 보면 그 속에 우리의 목소리도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내용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a******7 2013.07.0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포스트식민주의: 아주 간략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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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J.C 영(Robert J.C. Young)은 비서구권에서 새로운 사회개혁(New Social Movements)과 연관되어 있는 포스트식민주의이론에서도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론가이다. 이 책을 읽는 대분분의 독자들에게 포스트식민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면,이 책은 단순하게 이 이론을 머릿속에서 가득한 추상적으로 설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하기보다는 포스트식민주의가 일어나고 발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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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J.C 영(Robert J.C. Young)은 비서구권에서 새로운 사회개혁(New Social Movements)과 연관되어 있는 포스트식민주의이론에서도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론가이다. 


이 책을 읽는 대분분의 독자들에게 포스트식민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면,이 책은 단순하게 이 이론을 머릿속에서 가득한 추상적으로 설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하기보다는 포스트식민주의가 일어나고 발생하는 현재의 장소에 들어서서 생생하게 재현되고 선명하게 펼쳐지는 극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을 픽션적인 소설과 해설적인 문화 부분이 서로 혼합되어 버린 역사처럼 다루면서 매우 쉽게 접근하기 편한 스타일과 정통형식으로 쓰인 책이다. 종종 추상적이고 난해한 꼬리표가 붙어있는 이 이론을 단순히 논리적으로 포스트식민주의를 접근하는 방법이기보다는 이 책의 특징은 철저하게 예를 들며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예로써 성별, 언어, 원주민의 권리, 개발과 생태계를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며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적 가치(ambivalence)와 교배성(hybridity)과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과 하위종속(subalternity)으로 평소에 자주 쓰이는 포스트식민주의적 용어를 설명하는 데 그 주안점을 두고 있다.


로버트 J.C 영 http://robertjcyoung.com/ 은 한국어 판 서문에 밝히듯이 포스트 식민 문학과 세계 문학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로 그는 두 가지를 든다. 첫 번째로 문학의 장에 서양문학의 지배를 깨트리는 데 성공한 것은 포스트식민적인 것의 개입덕분이며 두 번째로 포스트 식민연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식민화의 역사를 재현하고 그 역사에 반응하고 저항하는 한편, 그 뒤를 잇는 포스트식민적 현실의 문화적, 정치적 복합성과 맞서나가는 문학들에 더욱 흥미를 느낀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대부분의 세계 문학은 소설이라고 지칭하는(로버트는 더 넓은 범위에 세계문학을 총칭한다) 한다고 가정 할 때 그 제국/식민의 구분을 수월해 진다. 그러니깐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고전문학은 거의 19세기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영국. 미국, 스페인 제국주의 시절 때 집필 된 모더니즘적 소설이었으며 현대문학은 거의 포스트식민주의 시절 때 창작되어온 말 그대로 포스트 모더니즘 적 소설이었다.


한국은 이미 동남아, 남미, 중동, 아프리카와 같은 선상에 서서 포스트 식민주의 한가운데에 있어야 할 국가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잊어버린 채 제국주의 시절의 제국주의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하여 답습하고 있다. 여기에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데 우리의 정신은 제국적이고 역사는 식민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그 괴리감은 이상하게 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역사의 존재적인 총체 헌법의 가치가 너무 서구적임에 반해 우리들의 세계는 제국의 이면은 밝은 면만 따로 때어놓고 학습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깐 정치는 계속해서 제국이미지를 파괴하고 탈주하려는 반면에 우리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포스트식민주의로 기어들어가는 형국이 되어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기 때문에 계속해서 진보정치와 현실적인 선거현장에서의 극단적인 거리감이 발생하며 그 결과는 항상 예측이 빗나간 결과만이 산출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포스트라기 보다는 그 이전 앞 단계에서 정체한 것처럼 보이며 오히려 보수 반동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해서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였던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 아닐수 없다.




n*****m 2013.06.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