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0년대 이탈리아의 삶을 풍자하는 대서사시 단테의 <신곡>에서 빌려온 두 안내자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희곡의 주인공 베아트리스와 버질과 맥락을 같이 한다. 기존의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혐오자들이 독일 나치스의 명령을 받아 유럽에서 자행한 역사적인 비극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에 작가는, 홀로코스트를 역사의 법칙이 아닌 우화 형식을 빌어 예술의 법칙에 따라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자행된 파멸적인 비극이다. 소설 속 희곡에 등장하는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의 이야기는, 아주 커다란 나라 크기의 셔츠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한국어판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제목은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지식백과에 의하면, 알레고리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을 뜻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 우화가 그것의 쉬운 예라 하겠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와 문명에서 셔츠는 닳아 해졌으며, 한 집단의 인격과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집단학살 뒤에 감추어진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팽배해져 있다. 이런 이유에서 얀 마텔은, 홀로코스트를 20세기의 셔츠라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
주인공 헨리는 소설가로 큰 성공을 거둔 유명 작가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과 평론을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완성했으나 논점을 상실한 실패작이 되고 만다. 출간하기도 전에 편집 관계자들에게 혹평을 받아 글쓰기를 포기한 채 새로운 나라의 도시로 떠난다. 그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헨리가 작가였음을 알려주는 독자들의 편지는 꾸준히 우회적으로 전달되고, 헨리는 빠짐없이 답장을 보낸다. 그러던 중 의문의 독자로부터 19세기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단편소설 <호스피테이터 성 쥘리앵의 전설>을 복사한 것을 받게 된다. 소년 쥘리앵이 동물을 죽인 장면, 무자비한 사냥꾼이 되어 수많은 동물들을 살상했던 행위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속죄에 대해서는 어떤 반론도 없이, 성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과정만이 이야기되고 있었으니 흥미로운 불균형이 눈에 띄었다. 쥘리앵의 이중적인 성격, 즉 인정 많으면서도 잔혹한 성격, 해피엔딩과 죄인의 구원이라는 결말, 반면 동물들이 살상당하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봉투에는 플로베르의 단편소설만이 아닌 독자가 쓴 희곡 <20세기의 셔츠>도 들어 있었다. 도대체 <호스피테이터 성 쥘리앵의 전설>과 이 희곡의 연관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헨리는 마법에 이끌리듯 그 소포의 근원지인 주소지를 찾아가 자신의 이름과 같은 헨리라는 노쇠하지만 강렬한 인상의 박제사를 만난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지닌 어두운 박제사의 공간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세계와 함께 그의 희곡은 헨리에게 삶의 매일을 기쁨으로 채워주지만 진실에 접근하고 방심한 순간 위기에 처하고 마는데...
『20세기의 셔츠』를 일종의 교훈을 주기 위한 이솝 우화쯤으로만 판단한다면 큰 오류를 겪게 된다. 현실 속의 헨리 대 헨리는, 희곡과 쥘리앵의 연결선상이자 홀로코스트의 현재진행형이다. 막판까지 지루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는 난폭한 소년의 단 한 번의 등장으로 일순간 모든 소음이 소거되고 환기된다. 뒤로 갈수록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대량살상이라는 거대한 시대극 앞에서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는 자못 순수하며 정결하다. 정결한 만큼 그 아픔이 더 극진하게 사무치고 슬프고 아려온다. 단테의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지옥과 연옥을 여행했듯이, 우리는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안내로 인해 역사적 진실과 조우한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목격한 산증인이자 희생양으로 상징화된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 구조가 들어 있는 구성방식인데다가 희곡 자체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는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소설이라는 기존의 문법을 깨고 소설 속의 희곡이라는 이중구조를 도입한 독특한 작품이다. 작가 얀 마텔은 인간의 잔인성에 근거한 극단적 낙관주의 내지는 합리주의적 폭력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상 속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끔찍한 삶의 현실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
|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다룬 소설은 누구나가 한 두편 이상은 읽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홀로코스트'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 등은 너무나 많이 접했고 그로인해 유대인들이 많은 상처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20세기의 셔츠'는 파이 이야기를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진 얀 마텔의 신작소설이다. 파이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20세기의 셔츠가 작가의 첫 작품이라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다.
주인공은 헨리란 작가다. 그는 두 번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많은 인기와 부를 얻게 된다. 성공을 하면 다소 거만해지기 쉬운데도 헨리는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는 사람이다. 여전히 독자들과의 만남을 즐기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가 5년에 걸쳐 같은 제목과 주제를 가진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쓰고 발표를 논하는 과정 속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홀로코스트를 픽션과 논픽션으로 출판업계,평론가들 사이에서 헨리는 상처를 받고 휴식을 갖기위해 사라와 함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한다.
소설가로서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 악기를 배우고 그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보내주는 편지나 독후감에 답장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무직한 소포를 받게 된다. 그 속에는 중세시대가 배경이 된 단편소설 '호스피테이터 성 쥘리앵의 전설'과 희곡의 일부분이 들어 있었다. 한 소년이 성 쥘리앵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많은 동물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장면에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서 보내준 소포와 단테의 신곡에 나온 이름을 사용한 희곡.. 여기에 도움을 청하는 간단한 메모까지.... 헨리는 아직 소년일거란 짐작을 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나선다. 개와 산책 중에 소포를 보낸 남자의 주소를 발견하고 들어간 곳이 '오가피 박제상회'다. 대번에 헨리를 알아 본 박제사는 희곡의 다른 부분을 헨리에게 보여주는데.....
박제된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고함원숭이 버질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헨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 소설은 읽는내내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킨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체 문장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로 박제사를 찾아간 헨리는 '20세기의 셔츠'란 제목이 왜 붙어졌는지 설명을 듣게 된다. 세계 모든 대륙을 셔츠를 통해서 풀어낸 어른을 위한 소설이였음을...
스토리 자체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줄무늬 파자마란 표현이나 홀로코스트라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호러스란 말로 표현하는 것, 여기에 받짇고리, 구스타포를 위한 게임까지... 직접적인 말보다 새로운 해석으로 표현된 단어들로 인해 더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주인공 헨리가 소설가이며 자신의 오랜 시간 애정을 갖고 쓴 작품의 주제가 홀로코스트였고 박제사 헨리를 통해서 만난 희곡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을 통해서 같은 홀로코스트를 이야기 하고 있다. 허나 박제가 헨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인물과는 다른 인물임을 알고 불편해 한다. 헨리는 불편한 마음을 안고 박제사를 다시 찾아간다. 헨리와 박제사는 작은 다툼을 하게 되고 갑자기 돌변한 박제사에 의해......
우화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풀어냈다는게 흥미롭게 느껴졌다. 처음에 다소 산만해서 집중하기 힘든 면이 살짝 있었는데 어느순간 이런 생각은 없어진다.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것이다. 독일인은 잘못을 인정하고 속죄의 모습을 보이는 반면에 일본은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너무나 뻔뻔한 태도를 보이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우리나라 역시 강하게 일본의 잘못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는게 안타까울뿐이다.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생각해 보며 작가의 이전 작품 파이 이야기를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
|
I. 역사가 예술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 역사가 아닌 문학이어야 하는 이유 혹은 진실을 말하는 픽션과 논픽션
얀 마텔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20세기의 셔츠』는 매우 우화적이면서 철학적이다. '우화적이다'와 '철학적이다'를 순접으로 연결할지 역접으로 연결할지에 따라 이 둘을 평가하는 그 사람의 인식이 드러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둘을 어떻게 연결할지와 상관없이 이 작품이 '우화적'이라는 것과 '철학적'이라는 사실은 불변하다. 사실 이 작품은 소설 작법이나 글쓰기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이고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성이라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얀 마텔의 문제제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왜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방식은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왜 상상력이나 비유를 개입시킬 수 없는가'
예를 들어 '전쟁'의 경우, 그것의 실상을 전달하는 표현 방식들은 전쟁 스릴러, 전쟁 코미디, 전쟁 로맨스, 전쟁 공상과학, 전쟁 프로파간다 등 다양한 방향과 목적에서 다뤄진다. 이를 통해 전쟁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력이 홀로코스트에는 허용되거나 용인되지 않는다. 그 끔찍한 사건은 거의 전적으로 하나의 관점, 즉 역사적 사실주의로만 표현됐다. 예술작품이 감동적인 이유는 사실적인 묘사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기 때문인데 왜 사실에만 입각해 표현하는 홀로코스트에는 어떤 반감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픽션'은 삶의 충실한 경험에 가깝기 때문에 논픽션보다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개인의 이야기든 가족의 이야기든 민족의 이갸기든 모든 이야기는 인간 실존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일관성 있게 짜 맞춘 것이다. 픽션은 사실이 아닐 수 있지만 진실을 말한다. 픽션은 사실이라는 꽃장식을 넘어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진실에 다가간다. 한편 논픽션, 예컨대 역사는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진실에 접근하기 힘들다. 또 역사에는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역사가 이야기 식으로 변하지 않으면, 역사학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잊히고 말 것이다. 예술은 역사의 여행가방이다. 예술은 역사의 구명부표이고, 씨앗이다. 예술은 기억이고, 예술은 백신이다.
독자들은 헨리를 만났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환한 얼굴로 헤어졌고, 헨리도 독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했다. 헨리가 소설을 쓴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 메워야 할 구멍이 있었고, 해답을 찾아야 할 의문과 색칠해야 할 캔버스 조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열망과 호기심과 환희가 뒤섞이는 곳에 예술의 기원이 있기는 하다. 헨리는 결국 그 구멍을 메웠고, 의문에 해답을 찾았으며, 캔버스에 책을 칠했다.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설을 발표한 후, 생명부지인 낯선 사람들이 헨리에게 그 소설 덕분에 그들의 내면을 공허하게 만들던 구멍을 메웠고 의문에 해답을 찾았으며 그들의 삶이라는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은 미소든 어깨를 가볍게 도닥거리는 손길이든 찬사의 말이든, 낯선 사람들의 격려야말로 헨리에게는 진정한 위안이었다.
헨리는 그 책을 2부로 써서, 출판계에서 플립북 flip book이라 칭하는 형태로 출간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각 부에 별도의 페이지를 매기고, 각 부가 등을 맞대고 뒤집어진 형태로 편집된 책을 만들고 싶었다. 플립북의 책장을 휙휙 넘기면 중간쯤에서 뒤집힌 면들이 나타난게 된다. 이렇게 편집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휙휙 넘기면 이란성 쌍둥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래서 이런 책을 ‘플립북’이라 한다. 헨리가 이처럼 파격적인 형태를 선택한 이유는 동일한 제목, 동일한 주제, 동일한 관심사를 다루었지만 형식을 달리한 두 문학작품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고민한 때문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헨리는 두 권의 책을 썼다. 하나는 소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논픽션인 평론이었다. 그가 이처럼 이중적인 접근 방식을 취한 이유는, 고심 끝에 선택한 주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픽션과 논픽션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 예는 거의 없었다. 이런 형태는 파격이었다. 픽션과 논픽션은 따로 떼어 두는 것이 전통이었다. 삶에 대한 우리의 감상과 지식은 서점과 도서관에서도 픽션과 논픽션으로 구분돼 다른 통로와 다른 층에 진열된다. 출판사들도 책을 기획할 때 상상을 다루는 픽션과 이성을 다루는 논픽션을 구분한다. 하지만 작가는 둘을 뚜렷이 구분하며 글을 쓰지 않는다. 소설이라고 철저하게 비이성적인 창조물이 아니며, 평론이라고 상상력이 철저하게 배제된 글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뭔가를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할 때 상상에 관련된 부분과 합리적인 부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이 있을 뿐이다. 우리 삶에서 그렇듯이, 책에서도 초월적인 기준이 있다면 진실과 거짓이다. 따라서 진실을 말하는 픽션과 논픽션을, 거짓을 이야기하는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하는 편이 훨씬 낫다.
II.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작품에서 작가인 헨리만큼 중요한 인물은 극중에서 희곡 「20세기의 셔츠」의 작가인 박제사이다. 그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때문에 박제사가 됐는데, 특히 그의 단편소설 「호스피테이터 성 쥘리앵의 전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이 저질러진 후에 어떤 것이 구해질 수 있을까?' 그 의문을 풀고 싶었기 때문에, 즉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그는 박제사가 됐다. 희곡을 쓰는 사람이 '박제사'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 그는 박제사가 되었다.
베아트리스 그런데 너 어제 나한테 질문한 거 있지. 버질 (여전히 균형을 잡고 서서) 그랬나? 허튼 질문이었겠지. 베아트리스 아니야, 좋은 질문이었어. 어젯밤 그 질문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 버질 (여전히 균형을 잡고 서서) 무슨 질문이었는데? 베아트리스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하고 물었어. (버질이 넘어진다.) 버질 그건 우리가 살아남을 때 말이지. “이 질문이 희곡에서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그들에게 닥친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그들은 틈날 때마다 그 질문을 거론합니다.” 헨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아까 카페에서 했던 질문에 답을 구한 것 같습니다. 희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여쭸지요. 결국,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뭔가를 가리키는 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르신의 희곡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나는 그걸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헨리는 좀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제야 헨리는 박제사가 희곡에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가 도움을 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의 희곡에는 어떤 행위도 없었고, 줄거리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나무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등장인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베케트와 디드로를 흉내 냈다. 그랬다. 그 두 작가는 뛰어난 솜씨로, 많은 행위를 겉으로는 무위인 것처럼 꾸며냈다. 그러나 무위는 「20세기의 셔츠」의 작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헨리는 박제사가 희곡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바랐고, 자신이 먼저 홀로코스트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먼저 홀로코스트를 거론하면 박제사가 더 협조적으로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헨리가 다시 말했다. “호러스의 반짇고리에 ‘노볼리프키 거리 68번지’라는 게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호러스의 모든 흔적이 정리되고 보관된 가공의 주소입니다. 호러스와 관련된 모든 기억과 보도와 역사, 모든 사진과 필름, 모든 시와 소설, 여하튼 모든 것이 있는 곳입니다. 호러스와 관련된 모든 것이 노볼리프키 거리 68번지에 있습니다.” “노볼리프키 거리 68번지는 어디입니까?” “모두의 마음 한구석, 모든 도시의 현판에 있습니다. 그 주소는 상징입니다. 베아트리스가 생각해낸 것이기도 하고요.” “왜 하필이면 노볼리프키입니까? 왜 그런 이상한 단어가 선택됐습니까?” “베아트리스는 울고 싶었고, 그때 ‘지금, 아 입술을, 떨지 말아야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축약한 겁니다.” “그러면 나우-오-립-킵-프롬-트렘블링 Now-oh-lip-keep-from-trembling 거리를 줄인 거군요. 68번지인 이유는요?”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아무 숫자나 내가 고른 겁니다.” 박제사는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노볼리프키 거리는 예부터 바르샤바에 있는 거리였고, 노볼리프키 거리 68번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온갖 자료가 빼곡히 들어찬 열 개의 금속 컨테이너와 두 개의 우유통이 발견된 거리였다. 문서는 연구 논문과 법정 진술서, 도표와 사진, 데생과 수채화, 지하신문 스크랩 등으로 무척 다채로웠다. 법령 같은 공식 문서와 벽보, 식량 배급카드, 신분증명서도 있었다. (중략) 그들은 주로 토요일에 만났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안식일의 즐거움’을 뜻하는 오네그 샤바트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했다. 그들 대다수가 게토에서, 또는 게토가 파괴된 여파로 목숨을 잃었다.
그 주소가 절박한 상황에서 남긴 기록물을 기억해내자, 헨리는 박제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박제사는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동물의 멸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불운한 동물들에게,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인간의 목소리를 주고 있었다. 박제사는 유대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동물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알레고리였다. (중략) 박제사가 호러스 손짓이라며 헨리에게 보여주었던 그림은, 버질이 손을 가슴에 올린 후에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헨리는 그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팔의 첫 위치란 걸 깨달았다. 히틀러식 인사법과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노인은 한때 나치스의 부역자였였던 것이 드러난다. 한 때 나치스의 부역자였던 박제사는 이제 죄 없이 죽어간 동물들의 옹호자가 되어 있다. 그 노인은 죽은 동물들을 보기 좋게 꾸며놓았다. 무모한 살상이 깔끔하게 포장되고 감추어질 수 있을까 박제사는 그렇게 했다. 헨리는 자신이 칼에 맞은 사건을 다룬 이야기에 처음에는 ‘20세기의 셔츠’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나중에 ‘박제사 헨리’로 바꾸었다. 그러나 결국은 만남을 주제로 삼아 ‘베아트리스와 버질’로 제목을 결정했다. 헨리에게 이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 즉 회고록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더 정확히 말해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쓰기 전에 헨리는 다른 글을 썼고, 그 글에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장편소설이라 하기에는 너무 짧았고, 토막토막 단절된 글이어서 단편소설이라 말할 수도 없었으며,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시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글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헨리가 오래전부터 써온 소설의 첫 조각이었다.
이 작품의 번역자인 강주헌은 '박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유일거라고 말한다.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만 반듯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들끓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런 모습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껍데기만 인간을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 올바른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 『신곡』에서처럼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안내자로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수밖에 없다. 단테의『신곡』에서 길을 잃은 단테에게 연옥과 지옥으로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버질)와 천국의 안내자인 베아트리체(베아트리스)가 필요했듯이,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확장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도 안내자가 필요하다.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은 얀 마텔이 우리에게 선사한 안내자인 셈이다. |
|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정말 감명깊게 봤었다. 영화도 책도 어쩜 이렇게 특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20세기의 셔츠>가 기대가 되었나보다. 책을 읽기 전 <20세기의 셔츠>의 첫인상은 <파이 이야기>보다 더욱 재미있어 보였다. 마치 영화 포스터같은 책의 표지엔 셔츠 자락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당나귀와 원숭이의 귀여운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책의 뒷편에는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 수 있는 설명이 있었다. '셔츠가 어디에나 있듯이, 홀로코스트는 어디에나 있다!' 여기서 홀로코스트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이라고 한다.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미스터리한 느낌과 함께 증오와 광기를 신선하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담은 우화라고 하니 얀 마텔 그를 믿고 드디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과연 이번엔 어떤 충격적이고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지만 얀 마텔 작가의 스타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초반부는 역시 아직 내가 충분히 글의 의도를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으로ㅜㅜ 솔직히 지루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헨리라는 작가가 등장하고 그는 그의 책을 통해 유명세를 타지만 그 이후 그가 진심을 다해 내고자했던 책이 여러 출판사에 깡그리 퇴짜를 당하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새로운 곳에 향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어느날 온 소포온 소설로 인해 그의 삶이 바뀌게 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오히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얀 마텔 그의 이야기를 접하려고 했던 사실에 내가 나에게 실망했다고 할까? 그래서 초반부를 넘기고 나서는 여러가지들을 검색하고 알아보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홀로코스트의 의미. 아직도 이해가 안돼거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두번세번 그의 이야기를 곱씹어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
|
영화화되기도 했던 파이이야기의 원작자인 얀 마텔이 쓴 20세기의 셔츠 책 제목을 보고 먼저 연상됐던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이 입었던 죄수복을 떠올렸었다 그리고 단순히 이 책자체가 우화라는 얘기를 듣고 당나귀와원숭이만 등장할거란 나의 편견을 깨고 이야기속의 이야기라고 해야하나 당나귀와 원숭이의 이야기는 소설속의 희곡으로 등장한다 중간중간 순서대로가 아닌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사실 첨엔 밑도끝도없이 나오는 이야기에 이건 뭐지? 이야기의 맥을 잡을수가없네 ㅋㅋㅋ 싶었는데 점점 뒤로 갈수록 단순히 당나귀와 원숭이의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아니고 이들의 상황 대화가 다르게 느껴졌달까 홀로코스트에 관한 플립북을 낸 소설의 주인공 헨리 그러나 픽션과 논픽션을 같이 낸 플립북은 출판을 거절당하고 글쓰기를 그만두고 다른도시에 가서 새로운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박제사를 만나게되고 박제사가 만든 당나귀와 원숭이 박제를 보게되는데 박제된 원숭이의 이름은 버질 당나귀의 이름은 베아트리스라는 사실을 앍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을 쓰고있다는 얘길듣고 그 희곡을 들어보게된다 (왜인지 읽게해주지않고 박제사가 읽어주면 헨리가 듣는방식) 박제사와 헨리의 대화 버질과 베아트리스의 대화 버질과 베아트리스가 있는곳은 셔츠다 뭔가 형이상학적인거같기도 하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듯한 느낌 박제사는 희곡에서도 이 두동물에만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다른 등장인물이 있긴하지만 그닥 중요하지않으며 오로지 동물에게만 포커스를 맞춘다 박제사가 관심있는건 동물들의 학살에 관한것뿐 첨엔 갸우뚱했지만 버질과 베아트리스의 우화에서 홀로코스트를 느낄수있었다 홀로코스트는 어떤배경 시간에서도 존재할수있으며 그 모습또한 다양할수있다는것 그래서인지 희곡의 마지막부부는 씁쓸했다 그리고 박제사와 헨리의 관계의 마지막은 놀랐으며 책의 마지막에 있는 헨리가 만든 게임을 읽으며 나라면 이 게임에 어떤대답을 할것인가 그러나 차마 생각조차 할수없었다는것 셔츠가 어디에나 있듯이 홀로코스트는 어디서나 존재할수있다는 그말이 얼마나 무서운말인가 싶기도 하다
|
|
|
|
얀 마텔의 20세기 셔츠..저는 얀 마텔의 유명한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책이 어떤책일지 무척 궁금합니다. 처음 책의 서문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을 쓴것처럼 작가가 이야기를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다른 전쟁과는 다르게..왜 다른 소설이나 영화나 그렇게 변형되지않고 항상 무겁게 진실만을 다루는 형식으로 남게됬는지.. 그것에 대해서도 서문에 썼습니다. 제가 지금껏 읽어봤던 어떤 서문보다도 좋은 서문이였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에 들어가서 시작된 소설은 정말 묘했습니다. 유명한 작가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5년간 책을 쓰고..소설과 평론 형식으로 된 2개의 책을 플립북 형식으로 출판하기로 계획하고.. 하지만 그 책은 탄탄하고 치밀하지 못하고 엉성하다는 판단으로 여러곳에서 외면 받습니다.
|
|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20세기 최대의 비극, 가장 잔인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세계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 단어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단어다. '홀로코스트'의 흔적은 유럽에도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유럽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은 취향과 목적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유럽 여행에서 이런 곳을 직접 방문해 평화의 중요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봤으면 한다.
작가 얀 마텔은 <20세기의 셔츠>에서 새로운 형식의 '홀로코스트'를 사람들이 인지해야 한다고 한다. 분명 2차세계 대전의 홀로코스트는 끝이났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이 '홀로코스트(대학살)'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원래 '홀로코스트'는 동물의 대량으로 태워죽이거나 대학살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직도 자행되고 있는 대학살을 이야기한다.
소설가 헨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쓴 글이 편집자들에게 혹평을 듣고 퇴짜 맞고 실의와 절망감에 빠진다. 아내와 함께 새로운 곳으로 가 새생활을 하자고 한다. 마침 그곳에서 우편물 하나를 받는다. 그 우편물은 '플로베르'가 썼다고 되어 있는 단편소설과 누군가의 '20세기의 셔츠'의 일부분이 들어 있었다. 우편물을 보낸 사람을 찾아가다 박제사 '헨리'를 만나게 되고 헨리가 건네주는 20세기의 거대한 셔츠 속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이 들려주는 셔츠 속의 이야기들. 두 동물은 어느날 소년을 만나게 된다. 소년은 두 동물을 괴롭히는 인물이다. 아주 잔인하게 괴롭히는. 그리고 이야기는 결말을 향한다. 박제사가 들려주는 버질과 베아트리스의 이야기 속엔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의 진실이 숨어있다. 버질과 베아트리스가 동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인간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인간을 고문하고 인간성을 무참히 짓밟아 한 인간의 정신을 파괴시킨 파괴자들이다. 그것이 전쟁의 모습 아닐까? 아직도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평화군이든 뭐든 가져다 붙인 이름하에 뚜렷한 명문없이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소년'은 독일 나치와 나치 소년단을 의미한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대량 학살뿐만 아니라 인간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스스로 죽게도 만든다. 총칼을 든 약해빠진 소년은 무력으로 버질과 베아트리스라는 약한 군중의 해치지만 진정 자신의 힘으로 이룬 일은 아니다. 무력일 뿐이다.
동물의 우화 속에서 인간의 잔학성과 더 동물스럽고 본성도 남아있지 않는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 |
|
사실 난 지금까지 얀 마텔과는 인연이 없었다. 얀 마텔이 아무리 세계적인 작가라고 해도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들을 보면 딱히 끌리지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책이란 세계는 워낙 방대한지라 다 읽고 죽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책도 어차피 사람이 읽는 것이니 베스트셀러 먼저 눈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베스트셀러만을 읽게 되는 것도 아니다. 책을 좋아한다고 무턱대고 읽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책을 웬만큼 읽으면 이 책이 나에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 내가 읽어 만족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감이 눈에 띄는 순간 판단이 서기도 하는데, 이것은 좋게 말하면 '감식안'이라고도 하고, 나쁘게 말하면 '편견'을 쌓는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나에게 맞는 사람이 있고, 그럭저럭 맞는 사람이 있고, 아주 안 맞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책도 어차피 사람이 쓴 것이니 이것 역시 그러할 것이다.
어쨌든 감식안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또 이것이 항상 좋게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책 중엔 또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좋은 책으로 와닿는 경우도 있으니까. 책을 선택하는데 표지의 영향도 무시 못할 것이다. 얀 마텔에 대해 눈길도 주지 않았던 내가 이 책을 읽어 볼 생각을 했던 것도 솔직히 저 표지 그림이 한 몫을 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줄무늬 셔츠가 정말 홀로코스트를 연상하게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번에 처음 나온 책도 아니다. 사실 이 책은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새롭게 재발간한 것이다. 만일 이 책이 여전히 똑같은 책으로 나왔다면 난 읽을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안 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긴 하다. 제목 하나 바꾸고, 표지 그림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놨으니 말이다.
꼭 그게 아니어도 난 올 봄무렵 저자의 새로운 책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란 책을 읽은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 책은, 책에 대한 책. 말하자면, 문학 작품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리뷰를 담고 있는데, 난 또 이런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래서도 작가와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각하, 문학을...>에서 본 작가에 대한 나의 느낌은 위트와 고집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작가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
이 책도 그런 작가 특유의 위트와 고집이 느껴져 일단 그점은 여전히 마음에 들기는 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역시 얀 마텔은 나와는 쉽게 친해질 수 없는 작가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읽는 내내(물론 다 읽지도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아유~'라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 찬사와 박수를 보내는가 본데, 이렇게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걸 왜 나는 좋은 줄 모르겠는 걸까, 약가는 좌절과 열등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작가가 얼마나 지명도 높은 작가냐에 따라 비례하기도 할 것이다. 비록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해도 얀 마텔이 좀 유명한 작가인가? 나도 좀 좋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좌절감을 느끼는 것도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뭐 꼭 그걸 가지고 언제까지고 좌절의 늪을 해메일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 거장의 반열에 올라 섰으면 모를까 아무리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자본주의의 틀에서 보면 책을 소비하는 건 언제나 작가가 아닌 독자인만큼, 독자가 먼저 작가를 선택하는 것이지 작가가 먼저 독자를 선택하는 경우는 아니다. 물론 얀 마텔 정도라면 매니아층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독자로서 얀 마텔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난 작가를 선택하길 꺼려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건, 내가 이렇게도 우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도 평소 홀로코스트에 관해 관심이 있었고, 홀로코스트의 우화라는 점에서 끌렸던 건데 말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이 책은 참 당혹스럽게도 썼다.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서론(?)이 이리도 장황한가 그저 한숨만 나올뿐이었다. 그렇다고 정말 장황해서 장황한 것도 아니다. 그래봤자 작가인 헨리와 박제사와의 대화가 다 일뿐인데 뭐가 그리도 당황스럽단 말인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얘기하는데 과연 이 두 사람의 대화와 관찰자로 작가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솔직히 짜증이 났다고나 할까? 이 습하고 더운 여름 날 무슨 X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작가는 과연 이래도 되는 건가?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애 좀 먹었다.
그래도 어느 지점에 가면 뭔가 나를(독자를) 사로잡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기대를 꺼버리지 않고 전체 분량의 반은 넘겼다(이 책은 300쪽이 좀 안 되는 책이다). 하지만 역시 나의 인내를 이 책은 여전히 시험하고 있었다. 시험 당하기 싫으면 어찌해야 할까? 내가 먼저 시험 당하기를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책을 웬만치 읽는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몇 가지 원칙이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있다. 뭐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고, 그중 하나를 말하라면 난 어떤 책이든 책 분량의 3분의 1이 지나는 싯점에서도 나를 사로잡는 뭔가가 없다면 더 이상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은 반 이상을 읽어줬으니 그래도 인심이 후한 편이다. 그렇게 읽어 줄 마음도 그전에 내가 작가의 책을 한번쯤 읽어줬다는 인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성격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에둘러 말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공법을 좋아한다. 아마도 처음부터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었다면 이 책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이 작가와 박제사의 대화가 왜 필요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읽고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란 책을 예비 지식으로 읽고 봐야하는 것이라면 이거야 말로 홀로코스트 아닌가?
물론 난 "역사가 예술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던 얀 마텔의 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이렇게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물론 그래봤자 대답도 안 해 줄 것이긴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예술적 표현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영화로 책으로. 난 오히려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적 만행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 상대적으로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홀로코스트는 홀로코스트 아닌가. 우리나라 예술가들 좀 더 분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이 책은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상징적이다. 특히 초반에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자신이 하려는 말을 풀어놓는 작가의 도플갱어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는 일말의 실망감도 들었다. 서문에 써있는 내용을 초반에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중요한 건 서문에 없던 내용이 시작되면서 부터 소설이 시작됐고, 그 인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또 다른 인물을 쫓고 있었다. 이 상징의 집약체 같은 박제사 영감. 음침하고 퀘퀘하기 짝이 없지만,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할수 없는 모종의 비밀을 안고, 그것을 혼자 간직하고 살아와 세상에 박제되버린것 같은... 이 인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라도 계속 글을 읽게 된다. (솔직히, 중간에 그의 직업에 대한 묘사와 동물들에 대한 묘사는 대충 넘겨 읽기도 했다.) 파이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작가는 독자를 조금은 혼란스럽게 하고, 그 안에서 우왕좌왕 하면서 자신을 쫓아오게 만든다음... 그 끝에서도 당근같은 달콤한 먹이를 내어주지는 않는다. 일종의 다른 채찍질을 가해,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책을 읽고 홀로코스트에 대해 찾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작가는 성공했다고 볼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할 법한 '배에 대한 대화'는 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로웠다. 그는 꽤 오래 고민했던 거다. 직접 보지 않고 맛보지 않고 느끼지 않은 것을 말로 (글로) 제대로 전달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그것을 애써 노력해 하는 사람들이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쉬운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친절한 방법을 선택했으리라. 안내자를 고르고, 그 뒤를 쫓게 만들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게 만들지만, 그것 또한 거쳐가는 과정일 뿐. 카드 게임처럼, 그 혼란속에서 자신이 내보이고자 하는 패를 독자들이 움켜쥐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움켜쥘 때까지 게임을 계속하기를 바랐는지 모르겟다.)
마지막 게임 이야기를 안할 수 없는데, 그는 충분히 그 게임만으로도 이 이야기를 전달할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앞의 그 모든 글이 없었다면 ... 또 게임에 이르러 느껴지는 묵직함이 없었겠지. 그런고로,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성미급한 사람처럼 끝을 보기 위해 중간중간 스킵하고 달렸으니, 언젠가 느긋하게 다시 봐야겠다.
그때의 감상은 또 다르겠지. 아니, 다를 수 밖에 없을거다.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과정에서 주어진 더 많은 힌트(미처 알지 못 했던) 를 캐치하기위해 노력할테니까. 누군가 이 책을 읽는다면, 끝까지 읽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