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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신자들의 고난 가운데 신은 왜 침묵하는가. 신자로서 신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작가가 보여주는 소설의 세계는 이런 두 가지 질문에 한정하지 않고 다채롭게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계속 마음속에 맴도는 문제의식이기도 해서, 많이 와 닿았던 소설이다. 당시 일어를 배우고 있던 터라, 작심하고 이 책의 원서를 구입하기도 했을 정도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보자고 했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작가의 에세이 <인생에 화를 내봤자>를 읽고 ‘<침묵>의 작가 맞아?’ 할 정도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면모에 반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이 매력적인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자고 했다가, 최근에서야 신간으로 나온 <전쟁과 사랑>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1982년 출간됐고, 작가는 1996년 소천했다.)
이 소설은 역자의 말대로 <침묵>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그 소설에서 제기된 두 가지 질문이 동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도 다시 그때의 문제의식이 솟아났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1930~1940년대 일본의 전시 상황, 소설 속 인물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전쟁의 한복판이다.
경제학도지만 시를 좋아하는 문학도인 슈헤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문학과 시를 배워온 인간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괴로워한다. 그는 지금까지 믿었던 교회가 가르친 내용(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과 정반대의 태도(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국가에 대해 방관 혹은 묵인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입대 전에 그는 사회 비판적 식견을 가진 나카조 씨로부터 “나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달라”는 말을 듣는다. 나카조 씨는 나라와 국가를 구별하는데, 그가 말하는 나라란 국가의 폭력 앞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로 보낸 후 가슴 졸이며 지내야 하는 이들이다. 이 말에, 슈헤이는 곧장 좋아하는 사치코를 떠올린다. 그렇다고 국가가 함부로 개인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 그곳에서 자신이 죽게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해병대로 강제 징집된 후에도 그의 고민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그는 특공기 공격에 참가하기로 자원하는데, 그 이유가 비록 전쟁이라 해도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이상, 자신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빼앗은 것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도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다.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희생된 일본 국민들도 안타깝지만, 슈헤이를 보면서 일제치하 학도병으로 전쟁에 끌려간 우리나라 젊은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우리 역사, 그래도 분명히 이 땅에 존재했던 사람들, 지금의 우리와 다름없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고 싶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 현재 내 나이보다도 훨씬 어린 사람들...
이 소설에서는 어린 시절 사치코가 잠깐 보았던 폴란드인 콜베 신부의 모습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그는 네 명의 수사와 함께 일본에 선교하러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콜베 신부에게 울부짖는다. 어째서 신은 침묵만 하고 여자나 갓난아기를 태우는 검은 연기를 보고만 있냐고, 이 수용소가 바로 지옥이라고. 그때 신부는 말한다.
“신은 저 가스실의 검은 연기를 능가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의지입니다.” “여긴 아직 지옥이 아니요. 지옥이란, 사랑이 완전히 없어진 곳이에요. 그러나 여기엔 아직 사랑이 남아 있소.”
수용소에서는 도망자 한 명이 생길 때마다 스무 명이 임의로 선택돼 죽는다. 탈주자가 잡히지 않자 이번에는 열 명이 죽게 된다. 그나마 부소장이 스무 명에서 열 명으로 줄인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신음하자, 콜베 신부가 자기가 그 대신 죽겠다고 나선다. 예전에 콜베 신부가 어린 사치코에게 주었던 성화에는 다음 성구가 쓰여 있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등장한다. 성당 사람들을 감시하는 오노 형사, 목숨 걸고 탈주하다가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는 어떤 사내, 콜베 신부에게 반박하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가 남긴 말을 되새기는 헨리크, 자기 자녀들 또래의 아이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봐도 점점 무감각해지는 수용소 부소장, 어릴 때 추억이 있던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맡은 짐 등을 통해 여러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 가운데 그들 생각의 파고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치코는 은연중 슈헤이의 입장을 지지하고, 콜베 신부의 희생이 주는 의미를 반추하게 만드는 존재다. 삼십 년 후 사치코는 아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엄마가 왜 신앙을 갖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만약 하느님이 계신다면 왜 나가사키에 있는 신자들을 원폭으로 죽게 내버려 두었어요?”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도 하느님이 안 계셔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그곳에서 많은 신자가 살해된 것처럼 원폭도 같은 게 아닐까? 그건 아무 죄 없는 하느님께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야.”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대화 같다. “만약 하느님이 계신다면 왜”라는 질문은 매순간 하게 되니까. 그만큼 우리 삶을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가 크기 때문에. 과연 전쟁(같은 현실) 자체를 당장 없애주는 게 아니라면 전쟁(같은 현실) 가운데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의 힘이란 무력하고 무의미할 따름인가. 이 소설이 내게 남겨준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