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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 작가에게 몽테뉴는 사숙하는 스승이다. 아니 혼자서 흠모하며 배우는 정도를 넘어 성인처럼 공경하는 대상이다. 은연 중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동급 반열에 올리고 우러러보기도 한다. 이 글은 그런 구름 위의 스승에게 바치는 지극한 헌사이다. 그 스승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는지 경탄하며 고백하고 있다. 작가는 어떻게 몽테뉴를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육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게 무너져내린 때였다고 한다. 자기 붕괴와 남은 자 특유의 회한 때문에 차라리 죽음을 맞는 게 낫겠다고, 그게 오히려 고통을 더는 길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운명처럼 몽테뷰가 다가왔다. 그런데 [에세]에서 몽테뉴는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갑자기 뜨끔해진 작가는 정신을 가다듬고 몽테뉴를 영접한다. 하나씩 짚어나가며 자신의 삶에 대입해보다 결국은 가뿐하게 일어서게 된다. 이 책은 그런 경험과 사유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에세]를 인용하고 거기에 작가의 상념을 덧붙였다. 스승에게 바치는 나름의 주석서인 것이다. 처음 작가의 심경은 이랬다. 내 귀에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어지기 일쑤인 틀에 박힌 위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힘내'라는 말이 당시 나에겐 일종의 폭력 같았다. 도저히, 어떻게 해도 힘이 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나마 죽을힘을 다해 힘을 내는 게 그 정도인데 사람들은 왜 모르지? 대체 여기서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거지? 힘내라는 말을 했는데도 내가 끝까지 힘을 못 내면 나는 그들에게 잘못하는 건가? '힘내'라는 말 대신 정말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걸까? 나는 그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닌데. 나라고 힘내고 싶지 않은 게 아닌데. 가끔은 침묵이 그 어떤 말보다 강할 때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로써 위로의 방법을 찾는 듯하다. 내가 위로를 간청한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내가 살아야 할 당위'가 나에겐 참으로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 당위는 내 심장에 뿌리박히지 못하고 작은 실바람에도 뽑히고 흔들리기 일쑤였다. 나도 엄마를 따라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자주 나를 지배해버렸다. (54~55) [에세]에서 몽테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행동하며, 인생의 사업을 길게 연장시키고, 죽음은 내가 양배추를 심는 동안에 와주되, 죽음이 왔다고 거리낄 것 없고, 정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은 더욱 염두에도 두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이 시각에 인생에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며, 죽는다는 것이 쓰라리기는 하지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좋으실 때, 아무 때 불러 가셔도 아무 아까울 것 없는 사정에 있다. 나는 아무데도 매인 곳이 없다.' [에세] 인용 (36쪽) 이 대목이 어떻게 자신을 일으켰는지 작가는 말한다. 주변의 지인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들었던 모든 무의미하고 무력했던 말들과는 무게감부터 달랐다. 진정성이 배어 있었다. 흔들리던 심경이 서서히 정리되는 것을 느끼며 작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자연이 순리대로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몽테뉴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안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그의 진심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설정된 운명이 언제 어떻게 닥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그냥 오늘을 살면 된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제대로 움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얼마나 걱정으로 인생을 탕진했는가. (38쪽) 살기 싫은 순간 우연히 읽었던 몽테뉴를, 살고 싶어 다시 찾아 읽게 되는 극적인 변화가 이제 나타난 것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삶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집중의 속도를 올릴 수밖에 없다. 순간의 경험과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몽테뉴는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아냈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오로지 집중의 속도를 높여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보았다는 만족이 내 삶의 원천이 되도록 하는 것! '삶은 아름다운 거짓말, 죽음은 고통스러운 진실'이라고 했지만 삶도 죽음도 아름다운 진실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39~40쪽) [에세]를 받아들인 작가는 몽테뉴가 제시한 해법이 자신을 향한 맞춤형 제언이라 여기며 하나 하나 음미하게 된다. 몽테뉴의 첫 번째 권고는 슬플 땐 울어버리라는 것이었다. 비참한 일을 당했을 때 슬픔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정신은 뒤집히고,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대단히 언짢은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 몸이 얼어붙듯 하다가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얽매였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게 된다.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준다.(베르길리우스) (50쪽) 몽테뉴의 처방은 결이 달랐다. 감성적이면서도 실제적이었다. 두 번째 제언은 계산적이기까지 했다. [에세]에서는 몽테뉴 자신의 사적인 연애담까지 곁들이며 더욱 사실감을 더한다. 어떤 괴로운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것을 억제하기보다는 바꾸는 편이 간단하다고 본다. 다른 어떤 것을 괴로운 생각 대신 넣는 것이다. 변화는 언제든 괴로움을 덜어주고 풀어주고 흩어준다. 싸워서 괴로움을 이길 수 없다면, 나는 빠져나가며 그것을 피하려고 비켜선다. 나는 계략을 쓴다. 장소와 일과 친구를 바꾸고, 다른 일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달아난다. 그러면 그 속에 휩쓸려서 나는 내 자취를 잃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57~58쪽) [에세]에 기대어 고통을 이긴, 고통에서 벗어난 작가는 뒤늦게 그 고통마저 다르게 느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몽테뉴를 사숙한 작가의 진일보가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고통의 방'을 마련해 놓았다니. 가끔 생각해본다. 나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우리가 건강을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을 볼 때, 극도의 탐락은 가벼운 고통만큼도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다."는 몽테뉴의 말은 진실이다. 즉 행복은 불행 없이 그 자체로 느끼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죽음 없이 삶을 들여다볼 수 없듯 불행 없이 행복을 논할 수 없는 것은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게 닥친 고통의 덕이다. (중략) 나는 내 삶 곳곳에 지뢰처럼 박아놓은 크고 작은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 '나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신을 향해 따져 물으며 살 것이다. 오만함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지는 않으련다.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내 마음을 죄다 할퀴고 망가뜨리는 대신 마음 한 곳에 '고통의 방'을 마련해놓은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기특하니까. 죽을 때까지 그 공간의 이름은 계속해서 '고통의 방'이겠지만 그 방이 언제나 어둡지만은 않게 불을 켰다 껐다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다. (65~66쪽) 작가는 마지막으로 몽테뉴 사상의 핵심을 정리하고 그에게서 비롯된 에세이라는 장르의 특성에 대한 소회도 밝힌다. 몽테뉴는 은퇴 2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에세]를 쓰기 시작했다. 집필의 목적이 한가함을 극복하고, 자신의 몽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아 나중에 그것으로 자신을 탓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엉뚱하고 우습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작의 의도와는 달리 몽테뉴는 집필 과정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힘을 키우게 된다. 자기 생각, 느낌, 모든 자연현상, 사람들의 행동과 말, 숨겨진 심리 등 몽테뉴의 눈에 가볍거나 무의미한 것들은 없었다. 주의를 집중해 살펴볼수록 세상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여기면서도 그 안에 담긴 진리는 단순하다고 깨닫게 되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05~106쪽) 복잡다단한 사물과 현상을 관통하는 진리의 핵심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된 몽테뉴. 그가 바라본 진리는 단순했다. 너스레 떨지 않아도,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고요히 그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몽테뉴 사상의 거대 맥락이라 하겠다. "여러 가지 반대되는 사상들도 부드럽게 보아주며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에 쉽사리 귀를 기울여 준다."는 몽테뉴의 태도가 나에게 큰 의미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아가 말과 글이 넘쳐나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 모두가 갖춰야 할 자세가 아닐까 싶다. (177쪽) 몽테뉴 사상의 또 다른 흐름은 관용과 상대주의였다. 30년 전쟁 전후에 벌어진 신구교도 간 피비린내 나는 살육,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이런 견해를 일관되게 지니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더구나 이는 오늘 여기, 우리 현실에 적용해도 될 살아 있는 원리라 하겠다. 몽테뉴의 사상은 반짝 하다 사라진 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우리를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에세]에서 에세이 장르가 비롯되었다. 그런 만큼 에세이의 기본 원칙이 [에세]에 담겨 있다 하겠다. 작가는 몽테뉴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했다고 밝힌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되 자기 평가는 신중하게, 표현은 양심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몽테뉴가 에세이를 쓰는 원칙이었다. 그는 겸손이 반드시 미덕이라 할 수 없으며, 나르시시즘과 교만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악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도 일갈한다. (184쪽) 몽테뉴의 원칙에 비추어 혹 자신의 글이 본령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작가는 늘 돌아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 게 부끄럽기도 한듯 하다. 한편 더 진솔하게 고백할 걸 하는 아쉬운 마음도 내비친다. 몽테뉴와 [에세]를 준거로 삼아 자기 삶과 글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에세이는 자신을 깊이 관찰한 뒤 자기표현은 양심적으로 하고,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래서 에세이는 그 어떤 글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솔직히 무모하게 도전한 것은 아닌지 겁이 날 때도 많았다. 그런데도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글의 품격은 진실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에 의지해 더 진솔하지 못한 부분은 없는지만 돌아보려 한다. (281~282쪽) 하여 작가는 인간 몽테뉴와, 대 저작 [에세]와의 운명적 만남과 끈끈한 인연이 자신을 살리고 더 좋은 글을 쓰도록 추동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슬몃 자신을 몽테뉴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스승에 대한 외람된 도전이 아니라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듯 말이다. 그러니 스승의 대 저작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주석을 덧붙일 수 있었던 것일 테다. 솔직하고 짧게 쓰려고 노력했다. 구구절절 말할 수도 없었다. '운명'과 '인연'이라는 두 단어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운명처럼 [에세]를 만났고 [에세]를 통해 몽테뉴와 인연을 맺었다. 혹시 내 전생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은 만큼 그에게서 나를 찾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떻게 그가 16세기 사람일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아니면 내가 21세기 사람이 아닌 걸까. (183쪽)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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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개인적,주관적 서평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살고 싶어서 몽테뉴를 읽은 것이 맞다고 본다.왜냐하면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은 죽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죽는다. 내가 지금까지 본 죽음들은 그렇게 말을 남기지 않았다. 몽테뉴를 읽은 저자는 어떤 힘을 얻어 살아 갈 힘을 얻은 것인가?이 험난한 삶에서...그걸 보는 것이 책의 핵심일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몽테뉴의 삶은 시대와 자신의 경험과 죽음,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해가며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실천적인 삶으로 보인다.죽음을 명상하는 그의 말에서 삶의 존재의 의미를 보게 된다. 그러니 존재만 하지 말고 제발 살아라라고 일갈한다. 존재만 하지 말고 살으라고 말한다.거기다 제발 살으란다.제발이라는 말은 내가 느끼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존재만 하지 사는 가치를 모르고 산다는 그의 일갈이라고 보인다. 이 말에 저자는 어떤 힘을 얻었을까?궁금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간을 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안의 인식을 통하여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나를 느끼고 사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 톨레의"지금 이 순간의 나"라는 책을 읽어 보면 알게 된다.그 과정의 힘듬을... 작가는 살기 싫어서,또한 살고 싶어 읽었다고 한다.한번은 자기 방어의 죽음인 과실치사이며,한번은 자기가 자신을 죽인 계획범행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이 부분은 에세이 작가로써 그 용기에 마음을 전한다. 최근 나오는 책들에서 보지 못한 작가의 용기가 보인다.난 이런 용기 있는 작가가 좋다.그래서 아니에르노에 빠져 있다.에르노만큼의 용기는 아니지만 지금의 텍스트의 쓰레기 중에서 옥석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작가가 칼을 든 정치라는 큰 오물통에서 빠져 나오기까지의 고뇌가 보인다.몽테뉴의 정치적인 중립성과 그 중립성을 인식하고 지켜 온 인간에게서 저자는 사적자아가 없이 쌓아 올린 공적자아의 허무함과 변질과 속성에 오염되기 싫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가장 존경하지 않는 자에게 가장 존대하며,나의 마음이 향하는 자에게 나를 말한다는 이치를 아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은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의지가 품격이며,신념은 신의를 불러온다. 이런 것들을 가진 사람은 자기 사람을 귀하게 본다.그리고 아낀다.그리고...쓰러져도 무릎으로 서서 전투하며,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경멸하는 확고한 눈초리를 가진다. ★의지가 품격이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평상시 행동을 점검해야 한다. 위대한 행동,고매한 일들을 판단하려면 그 만큼 위대한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마음과 강인한 귀 그리고 비판해 주는 친구가 있다면 저자의 삶과 우리의 삶은 섬이라는 혼자인 삶에서 다리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책을 만났다. 저자는 몽테뉴른 절대적인 책으로 보지 않고 있다.자기가 위안을 받은 고전의 하나로 알아 달라고 부탁한다.그리고 자신의 해석이 틀릴수도 있슴을 받아 드리는 자세로 쓴 책이다. 난 틀렸다,맞다 라고 감히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 다만 저자가 살기 위해 본 책에서 내가 살기 위해 본 일자샌드의 따스함과 아들러의 용기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느낀다라고 독서노트에 적으며 마무리한다. ★에세이의 힘은 양심적인 표현과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몽테뉴를 닮은 당신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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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두 여인의 푸른 옷 그리고 나선형 동그라미 무엇을 뜻할까? 표지가 강렬해서 책을 받고 한 참 보게 되었다. 책을 다 읽으면 이 표지도 이해하게 될까?
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나도 살고 싶어서 몽테뉴를 이해하고 싶어서 제대로
존재만 하지 말고 살아라 이건 분명 글인데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내 마음에 울렸다. 그만큼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존재만하고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라고 생각했고 모르고 있다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이 글귀 하나가 날 깨닫게 하고 아프게 했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고 생각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먼저 이해해야 하나보다 책의 다음장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나열한다
-내 바로 옆에 있는 죽음 사실 우리가 죽음에서 주로 두려워 하는 것은 습관적으로 죽음에 앞서 오는 고통이다. p20 사람들은 죽음을 말하기만 해도 악마의 이름을 들은 듯 성호를 긋는다 p23 출발선으로부터의 긴 여정 동안 무시하고 외면했던 진짜가 왜 삶의 종착지 앞에 서야만 제대로 보이는 걸까 p25 -삶의 시작이 된 죽음 많은 사람이 사실보다 공상 때문에 죽음을 더 크게 본다. 우리는 죽음의 근심으로 삶을 방해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을 방해한다. 하나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고 또하나는 공포를 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죽음의 준비를 준비한다. p29 죽음 그 자체는 지극히 찰나의 순간이라 아무런 고통이 없을지도 모르겠다.p32 저자는 이야기한다 죽음 그자체는 죽음 앞에 겪게 될지 모르는 고통과 죽음 후의 알수 없음의 공포로 대부분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한다 라고 한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을 직접 겪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은 죽음을 어떻게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 책을 따라 읽다보면 몽테뉴가 자신의 주변사람들 심지어 자식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나중엔 자신이 죽을 뻔 한 계기로 죽음을 이해하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책의 저자도 몽테뉴와는 다른 경우지만 죽음에 대해 늘 가까이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저자의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깊은 절망에 빠지지만 그것 또한 인식하지 못하다가 울음을 통해 막혀있던 숨길을 트면서 아 나는 이렇게 살아야 겠구나 p34 삶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다라고 한다 나도 저자를 따라가면서 삶의 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따라 읽었다. -죽은 삶이 아닌 살아 있는 삶 삶의 효용은 공간에 있지 않고 사용에 있다. 적게 살고도 오래 산 자가 있다. 그대의 의지에 달려있다. p35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터무니 없는 기적없이 평범한 사람의 본보기로 질서있게 사는 인생이다. 존재만 하지 말고 제발 살아라!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저자는 어떻게 살까 몽테뉴는 뭐라고 이야기 했을까 나도 그 생각을 받아 들 일 수 있을까 나의 삶에도 그 생각이 어떤 답이 될 수 있을까
고통에 맞서지 말아라 막혀버린 숨길 끝도 없고 겹쳐서 오는 시련 2장에서는 저자의 경험을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쓴 것처럼 진실되지만 나는 이렇게 내 이야기를 다 풀어 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담담하지 않는 이야기를 최대한 담담하게 말한다. 저자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힘내라는 말이 당시 나에겐 일종의 폭력 같았다라고 한다.p54 나는 이 책이 일종의 인문학 같은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2장에서는 수필같은 글 에세이 성격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찾아오는 때 언젠가 찾아오는 때가 있다고 한다. 자연의 이치는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가장 좋은 치료법으로 우리에게 세월을 주었다.p58 세월이 흘렀는데도 상처가 낫지 않으면 그때는 비겁하거나 무기력해 보여도 때로는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더라 그런데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적절히 다스릴 수 있는 때가 오긴 오더라는 것이다.p63 혹 극복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면 아마도 그런 시점을 말하는게 아닐까 싶다라고 한다. 맥시코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말은 피할 수 없는 것은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맞서지 말고 애써서 극복하려고 하지말고 받아들이고 참아 낼 줄 알아야 하고 순응하게 되면 그 때가 있다고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순응하고 받아들이고 그저 참기만 해야 하는 시간도 있다. 그러다 보면 괜찮아 지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내 길만을 똑바로 걸어라 모든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 모든 일에서 자신을 무장할 줄 안다면 그것만이 확실하고 강력한 것 가장 좋은 직무는 자기 힘에 맞게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한다.p88 인생을 즐기는 데는 그 법이 있다. 시간을 아끼자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고 쓰고 다이어리에 기록하고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매일 매일 읽고 생각하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책의 구성은 몽테뉴의 글 그리고 저자의 경험을 에세이식으로 풀어 놓은 글이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서 혹은 인문학 글보다 쉽게 더 잘 읽힌다. 그러면서 작가가 몽테뉴를 읽고 답을 찾고 독자에게 자신이 느낀 것을 같이 느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해답을 찾았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글에서 내가 느낀걸 느껴보세요 하는 글 같았다. 그러면서 작가의 성장 소설 같은 느낌도 들었고 작가의 일기장을 읽는 느낌도 들었다. 진실한 글이었다 여기까지 글의 3분의 1이다. 이 책은 결국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법에 대해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알려준다.
목차만 읽어내려 가도 울림이 다르다. 여기에 저자가 모든걸 내려놓고 자신을 찾는 일을 영화를 보면서 어느정도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함께 보면 좋은 영화로 영화 소개서도 실었다 그리고 책표지 끝부분에는 보통 다른 책 소개글이 많은데 몽테뉴의 소개글을 올린점도 마음에 든다. 오베라는 남자는 나도 본 영화라 적극 추천한다. 나머지 7가지 목차를 통해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직접 책을 통해서 꼭 확인했으면 한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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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음을 아쉬워말고 잘 늙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 앞지리가 바뀔즈음엔 유난히 더 나이먹음에 슬퍼지기 마련이지만 앞자리가 바뀌며 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의 넓이와 깊이에 더 기대가 된다. 그리고, 떠오르는 사람들이 고맙다. 나를 환대해 주는 사람들이. 저자가 40대를 앞두었을 때, 은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새해 아침에 수저부터 바꾸게" 마음이야 여전히 20대 못지 않겠지만 몸은 점점 그렇지 않을테니 매 끼니 식사할 때마다 바뀐 수저를 보며 '아,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상기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잘 늙어간다는 건 내가 늙어감을 인정하며 늙어감을 잘 준비하는 것 건강의 변화도 준비하며 맞이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부터 다시 살게 된다면 나는 전에 살아본대로 살아보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늙은 나를 기억해야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 그런 나는 가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하고싶은 일이 맞는지 상황이 하게 하는 일은 아닌지 야심은 아닌지. 한 원을 그리되 원주일 것 돌고 돌아 결국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는 원의 형태 원심력이 커지지 않을 것 그 의미는 원은 각도가 없기에 각도가 생기지 않으려면 지속해서 방향을 틀어야 하기에 매 순간 자신을 경계할 것. 초심을 잃지 말 것. 끝도 없이 커져서 야심으로 변하지 않게. 야심이 위험한 건 야심의 아래에 있는 비굴함과 노예근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야심이 큰 사람들은 강한자에게 비굴함과 노예근성을 내보이며 약한자에게는 갑질을 일삼는다고. 그 이중성이 성공의 처세라며 착각속에 산다고. 야심에 빠지지 않기 위한 이 책의 솔루션 적당한 내려놓음 사실 쉽지않은 일이다. 내려놓음이 어려운 건 내면에서의 갈등이랄까? 나를 바로잡지 않으면 내려놓음이 자기합리화, 자기위안이 되지 않을까 혼란에 빠지기 일쑤이다. 몽테뉴는 말한다. 뭐? 당신을 살아보지 않았단 말이오? 그것은 당신의 일 중에 기본적일 뿐 아니라 가장 훌륭한 일이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생각해서 조종할 줄을 알았던 것 아니오. 그러니 당신은 모든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을 수행한 것이오. 토닥토닥 영화를 글로 소개하는 사람인 저자는 이 책의 각 꼭지로부터 함께 보면 좋을 영화를 부록으로 소개하는데, 나를 사랑하는 열가지 꼭지들과 연결된 영화들과 더불어 내 삶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재미를 책을 덮으며 기대한다. 무언가로부터 상처받고 아파한다면, 삶의 방향성에 의문이 던져진다면 몽테뉴의 에세, 몽테뉴의 에세와 만난 저자의 살고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와의 만남을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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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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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수상록을 들어는 봤지만 처음 접하는 책이다. 몽테뉴는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이자 문학가이다. 1533년에 태어나 1592년에 사망한 그는 종교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절대왕정 시대를 살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삶과 죽음, 나이듦과 품격,돈과명성, 존재와 관계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인생에 고민이 있을때 몽테뉴가 자기를 들여다보며 쓴 기록 수상록의 원제 ‘에세(Les Essais)’로 ‘에세이의 가르침으로 엉킹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보려고 합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 그러나 모두가 아는 책!지금 여기, 몽테뉴 『수상록』을 만나다!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탈락을 가장 높이 평가한 어떤 학파의 철학자는 이 행복이라는 것을 다만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세워놓았다. 엔니우스가 말하듯, 불행을 갖지 않음은 많은 행복을 가짐이다.---p59 <2장. 고통에 맞서지 말아라 중에서>
인생을 즐기는 데는 그 법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갑절의 인생을 즐긴다. 내 남은 인생이 그리 길게 남지 않은 지금, 나는 생명을 정력 있게 사용함으로써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충하며, 인생을 더 심오하고 충만하게 만들어야 하겠다. 시간을 아끼자. 우리에는 아직도 한가롭고 잘못 사용되는 시간이 너무 많다.---p89 <3장 내 길만을 똑바로 걸어가라 중에서> ‘처지 處地’ 라는 말은 그 사람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곳을 말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한 사람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두루뭉실하게 엉기고 어울려서 인생을 살다 가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권위의식에 빠져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는 몽테뉴의 삶. 웃을 일 없는 시대에 살지만 행복한 뉴스 소식 하나에 미소 짓는 하루가 모여 나의 <에세>가 되어 일생이 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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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몽테뉴라는 르네상스 시기의 프랑스 철학자를 이번 서평도서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가 쓴 <에세>라는 고전은 알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완독해본 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에세>라는 작품은 몽테뉴가 20여 년간 덧붙여 계속 집필한 것이라 매우 방대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저자는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시대를 초월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충분한 귀감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저자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글쓰기로 귀결되었다.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글쓰기 말이다. 몽테뉴가 밝힌 <에세>의 집필 원칙은 이것이었다. 진정한 에세이는 자신을 깊이 관찰한 뒤 자기표현은 양심적으로 하고,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글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어떤 글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일기나 수필, 에세이같은 형식의 자유로운 글은 내가 가장 쉽게(또는 가볍게) 생각한 글이어서 내가 쓰는 것이나 남이 쓴 것을 읽는 것을 부담 없이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몽테뉴의 의지에 따르면, 글의 품격은 진실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목차를 보니 10가지 삶의 주제가 집약되어 있었다. 저자의 방식으로 쓴 <에세>는 무엇이었는지 함께 읽어보자.
저자는 각 주제의 말머리에 몽테뉴의 글을 실어놓았다. 그런 뒤 자신의 에피소드를 삽입했다. 2번째 삶의 주제인 <고통에 맞서지 말아라>에서 그녀는 끝도 없고 겹쳐서도 오는 시련을 이야기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그 여인은 슬픔에 젖어 돌이 되었다.”는 문구를 인용하며, 슬픔이 극에 달하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경험을 해보았다고 한다. 시한부인 엄마는 저자의 구삭둥이 둘째가 6개월이 되던 달에 돌아가셨다. 신의 짓궂은 장난이었는지, 엄마가 돌아가시곤 얼마 뒤 가족의 실수로 길거리에 나앉을 뻔한 상황까지 몰렸다고 했다. 우울증으로 진단한 의사는 그녀에게 약을 처방해주었고, 자신이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건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는 한건지 무감해졌다.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장의 감정을 직면할 수 있을 때까지 무감각한 채로 시간을 버는 게 필요했다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저자는 몽테뉴가 보여준 품격을 통해 <의지로 품격을 만들어라>, <존재만 하지 말고 살아라> 등의 묵직한 화두를 던지며, 그와 같이 신중하고 양심적으로 자신에게 집중했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국 ‘인생의 의미’라는 것은 행복이며 특별한 비결이 아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담담함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나만의 <에세>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담긴 인생수업을 통해 내 모습을 온전히 직면하여 바라보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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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수상록=에세(Les essais)
몽테뉴는 수상록으로 유명하다. 수상록이란 그때그때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적은 글이다. 수상록의 원제는 Les Essais로 essais는 시험, 시도, 경험이라는 뜻이고, 에세이라는 말의 원조이다. 5세기 전 사람인 몽테뉴는 자신을 들여다 보는 과정을 시도했고, 그것을 3권 107장에 풀어냈다. 그리고 작가는 이 글을 세번이나 읽었다. 책은 에세 원전을 시작으로 작가의 이야기와 경험, 해석이 뒷받침된다. 작가에게 몽테뉴는 하나의 좌표가 되었다고 한다. 몽테뉴가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정치판에서 일했던 작가의 삶과 통하는 면이 있었던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좋았다. 작가는 에세를 '오랫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에 압도당하고 실제로 죽음에 가까이 가 보았으며 이후로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삶을 정면으로 마주 한 사람의 정성스럽고도 지극한 비망록'이라고 평한다. 몽테뉴는 (P.35 인생은 그 자체의 목표이며 의도라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터무니없는 기적없이 평범한 사람의 본보기로 질서있게 사는 인생이다)라고 썼다. 나의 인생도 기적없이(있으면 좋고) 평범하게 질서있게, 그런 삶에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P.S 좀더 밝은 표지를 썼으면 어땠을까. 몽테뉴가 어려운데 표지마저 어두운 색감이니 부담스럽네.
#살고싶어몽테뉴를또읽었습니다 #이승연 #초록비책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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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몽테뉴의 수상록이 여러 권 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사지만, 끝까지 읽지 못하고 다시 도전하느라, 여러 권을 가지고 있다. 또다시 나에게 몽테뉴의 수상록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몽테뉴의 원문 수상록이 아니라, 이승연이라는 작가를 통해 몽테뉴를 다시 읽는다. 저자는 몽테뉴와의 만남은 '운명'이라고 표현한다. 몽테뉴를 향한 저자의 이해와 공감은 시공간의 의미를 소멸시켰고, 저자는 종종 몽테뉴와 함께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저자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고통스러웠을 때 그에게 힘을 준 몽테뉴를 나도 만나고 싶다. [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를 통해 몽테뉴의 에세가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온다. 몽테뉴의 말들이 다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다독을 통해 몽테뉴를 더더 가깝게 느끼고 싶다. 아무튼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다. 생각해보고 싶지 않았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몽테뉴의 수상록이 어려운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몽테뉴를 좀 더 가까이 만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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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을 읽고 쓰는 에세이는 대략 그 에세이를 통해 현대인들이 가지는 심리적 불안에 대한 설명과 위로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책 제목앞에 다음의 글이 쓰여있었다. '살기 싫어 몽테뉴를 읽었습니다'라고. 제목과 붙여서 읽으면 결국 어쨌거나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를 두 번 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자의 약력을 떠나서라도 누군가 만만찮은 고전을 두번이나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들어봄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나 자신을 얼마나 드러냈느냐보다 얼마나 솔직했느냐 하는 점.184쪽 얼마전에 읽었던 이하루 작가의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를 읽으면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이 다름아닌 '솔직'이었다. 솔직할 자신이 없으면 에세이는 쓸 수 없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의 이승연 작가도 이전에 집필했던 책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드러낸 것이고, 그렇게 쓰고 난 후에는 스스로 얼마나 솔직했느냐를 생각했다는 말에 SNS에서 만난 친구들도 친구가 된다는 그녀의 말처럼 이렇게 한 번 만날 수 없더라도 독자와 작가사이에도 '친분'이 생겼지 않았을까. 사실 이 책의 초반 부분은 그녀가 왜 에세를 읽게 되었고 어떤 부분이 그렇게 와닿았으면 무엇때문에 책으로까지 쓸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독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여과없이'토해내주었다. 덕분에 그녀가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는 부분에서는 독자인 나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리며 속이 후련해지는 뜻하지 않은 '행우'도 누릴 수 있었다. 초반을 지나 그녀가 잘 알고 잘 하는 '영화'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면서 사실 책은 밤낮으로 읽으려는 시도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고 꾸준히 읽어왔다. 그런데 영화만큼은 아이를 남편이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그것도 긴 시간을 비울 수 없어 영화시작과 동시에 입장,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나와서인지 어떤 영화를 봐도 크게 감동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전에는 보고 싶던 영화를 찾아 예매를 하고, 기다리는 동안 어떤 내용일까? 혹은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 어떻게 각색하고 영상으로 재연되었을지를 기대했다면 출산 이후 시간이 정해져있다보니 극장에 도착해서 바로 볼 수 있는 영화가 내가 보게 될 영화였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육아에 몰입하다보니 감동을 곱씹을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임신 전이었다면 엄청난 감동과 공감으로 박수를 쳤을 영화들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이야기를 했던 저자의 책을 더 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프롤로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간단히 밝혔다. 어쩌면 나에게는 본문보다 프롤로그가 중요할 수도 있는데, 일부러 솔직하게 짧게 쓰려고 노력했다. 구구절절 말할 수도 없었다. '운명'과 '인연'이라는 두 단어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183쪽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말한다. 고전이 특정한 사람들만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 역시 타깃을 정해두고 쓴 것은 아니라고. 다만 저자처럼 어떤 이유로든 헤매고 방황하며 고통에 무너지고 있다면 몽테뉴의 글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해주고 싶다고 말이다. 비유로 든 영화 [줄리&줄리아]가 다른 시대를 살면서도 요리라는 공통된 주제로, 비슷한 삶의 형태로 공감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몽테뉴와 저자는 무려 3세기나 차이가 났지만 공감하며 위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에게는 몽테의 에세가 그랬지만 이 책을 읽고 아마 저마다의 그런 책들이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었던, 어릴 때는 억지로 숙제나 부모의 강요에 의해 읽었어도 기억나는 문장이나 대사가 있어 다시 펼쳐봐야지 싶었던 그런 책들. 내게는 성서의 구절과 헤세의 데미안이 그랬었다. 사실 몽테의 에세는 이 책 덕분에 이전보다는 가깝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저자만큼 힘들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펼쳐보고픈 마음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에세보다 저자의 이런 노력,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자체에 더 큰 공감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에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마중물이 되거나 바로 열리는 열쇠가 될 수 있기에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