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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제목과 같이 1840년부터 1919년에 이르는 청나라 말기의 약 80여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비록 중국의 역사이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맹주로서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부분 때문인지 그리 낯선 대목은 아니다. 실제로 이 책의 차례를 들여다 본다면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양무운동', '무술유신', '의화단 운동', '5.4 운동'과 같이 굵직한 사건들이 차례로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청나라의 역사는 조선 후반부의 역사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아편 전쟁은 조선이 겪은 병인년과 신미년에 겪은 두 번의 양요와 비교할 수 있으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역시 청나라의 상황과 유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청의 후반부의 역사라고 한정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역사와도 큰 관련성이 있는 대목으로 접근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저자인 호승(胡繩)이 바라보는 이 시기의 사건들에 대한 관점이다. 역사는 과거에 벌어진 실제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든지 해석은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핵심 이론가라는 그의 명칭에 걸맞게 저자는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의 시기를 '半식민지, 半봉건'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이는 애초에 모택동이 중국의 공산화 혁명이 그러한 半식민지, 半봉건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잇닿아 있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이 시기의 중국 역사는 이 책에서 꽤 색다르게 다뤄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한 자세하면서도 새로운 접근을 통하여 역사적인 사실이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 아편전쟁이 1840년에 발생하였고, 실제 청나라는 선통제(부의)가 1912년에 퇴위하였으니 제국주의 열강과의 전쟁 이후로도 약 70여년간 존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저자는 '半식민지'라는 관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 무역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한 영국의 아편 수입을 흠차대신으로 파견된 임칙서가 강력히 차단하면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아편전쟁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좀더 깊이 파고들면서 저자의 의견을 뒷받침하게 된다. 그것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청 왕조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함포 공격에 청나라가 고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열강이 식민지가 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말그대로 대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지전에서는 패배를 거듭하고 있지만, 전면전에 돌입한다면 열강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례로 청의 주력 부대였지만, 부패와 타성에 젖어 있던 팔기군을 비롯한 관군은 연패를 거듭하였지만, 열강에 저항하는 민초들의 게릴라식의 항전은 꽤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 왕조에서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였다면 결코 쉽게 끝날 전쟁은 아니었던 것이다. 무능한 정부는 잇따라 전투에서 패배하자 왕조의 존속 자체를 걱정하였지만, 열강이 노리는 것은 청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역에 있어서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청 왕조는 결국 열강과 타협을 모색하게 된다. 실제 임칙서가 성공적으로 광둥 지방을 방어한 사실도 있었으며, 1841년 5월 영국군의 강간과 방화에 격분한 민중들이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공격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 왕조는 오히려 열강의 입장에서 민중들의 투쟁을 되려 막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즉, 청 왕조는 민중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열강이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준다면 체제 유지가 보장된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승(胡繩)은 아편전쟁을 이미 중국이 열강의 식민지가 된 것이라 지적하면서 이후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半식민지, 半봉건'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인지 홍수전을 중심으로 한 태평천국운동을 저자는 농민적 혁명이 분위기가 무르익은 계급적 투쟁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일어난 농민 혁명으로 저술하고 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그러한 종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부패한 청 왕조에 대한 반란으로 알고 있던 이 사건은 홍수전이 중국 농민혁명의 필요에 따라 기독교의 일부 형식을 이용한 것으로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아편전쟁에 이어 태평춘국운동 역시 호승(胡繩)은 철저히 그의 관점에 따라 해석하기에 우리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이 시기의 역사가 달리 보이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농민 혁명의 모습을 갖추고 있던 이러한 태평천국운동이 중국의 봉건 체제와 이미 중국에 들어온 열강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하여 결국 진압될 수 밖에 없었다는 해석 역시 저자의 관점이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열강에 저항하여 일어났지만, 그 저항 방식이 무모했다라고 평가되던 의화단 운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해석은 무술유신에 대한 한계와 비판으로 연결된다. 실패한 농민 혁명에 이어 지도층의 개혁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은 어쩌면 후일 중국의 공산당 혁명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변법자강운동으로 알려진 무술유신이 저자의 표현대로 양무운동의 또 다른 형태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실 무술유신은 양무운동이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홍장을 비롯한 양무파와 강유위를 중심으로 한 유신파의 대립이 알고 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라는 저자의 비판은 양무파가 추진한 개혁이 열강에 대한 우호적인 환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서양의 무기와 군사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주장하던 양무파와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유신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의 이익 수탈에 열을 올리고 있는 열강이 그들에게 우호적인 협력을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유위를 비롯한 유신파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변법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광서제의 지지로 인하여 유신파가 득세를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과정 역시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하나의 정쟁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 역사에서도 사실 서태후가 양무 운동을 주장한 이홍장을 비롯한 북양 군벌을 지지하고 있었으니, 서태후와 갈등을 빚고 있던 광서제이 입장에서는 양무파를 비판하는 유신파가 대항마가 될 수 있었기에 개혁의 일환이 아닌 정권 다툼의 세력화로 보는 것이 그리 무리가 되지 않으리라 느껴진다. 결국 호승(胡繩)은 이러한 서술을 통하여 1919년에 불붙기 시작한 5.4 운동을 모택동이 신민주주의혁명과정이라고 말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농민 혁명 또는 지식 계층에 의한 시도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면서 결국 5.4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1년에 일어난 신해 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청의 멸망과 더불어 위안스카이에 의한 군벌의 등장을 5.4 운동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기에 이 책은 결국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중국의 공산당 운동과 혁명에 대한 정당성을 되려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냉전이 계속되었다면 이 책은 우리나라에게 소개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뜻 본다면 중국 공산당의 이념과 업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해석은 분명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역사에 대한 왜곡없이 타당하게 설명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단순히 외세 침입, 민중 반란, 왕조의 무능으로 이어지는 청의 멸망 과정이 계급간의 투쟁이라든지 半식민지, 半봉건의 측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과 더불어 색다른 관점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함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 시기에 대한 이 책의 해석은 참신함과 더불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에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다라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018년 2월에 초판본에 대한 교정 및 재편집을 통하여 2쇄가 출간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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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양3국의 학계 내에서 근대의 시점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대영제국과 처음으로 맞붙은 1840년의 제1차 아편전쟁,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1853년의 흑선黑船 내항,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맺게 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근대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나 동아3국을 휩쓴 서구 열강의 충격에 시간적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 대략 역사적 흐름과 맞아떨어지고 있다.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 첫 머리에서- 한중일 아시아의 근대사는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시작된다.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은 거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열강‘의 침략에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이 세 나라의 공통점이라면 서구 열강의 침략에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폐쇄 된 사회성을 지닌 봉건주의 국가였다는 점이다. 아시아에서 근대는 침략의 소용돌이 앞에서 가장 굴곡진 역사를 쓰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미래 역사를 결정짓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시대라 할 수 있다. 똑같이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지만, 서로 다른 역사를 쓰게 되는 결정적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 봉건시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초입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요동치던 시대의 ’중국‘은 중국공산당 이념의 사상적 토대를 만들고 있던 시대라 명명할 수 있는 시기인 셈이다. 이 책 《중국 근대사》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중국공산당 이념의 원조격인 호승의 저서로 중국 공산당의 사상적 토대가 된 ’인민‘ 또는 ’서발턴‘인 아래로부터의 혁명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 근대사에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혁명’- 노동 혁명의 시기를 세 차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차 혁명 고조기 1854~1864년의 태평천국 농민혁명과 두 차례의 아편전쟁 19세기 이전, 중국인들은 서방 자본주의 각국이 세계 각처에서 벌이고 있는 행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인들은 모든 나라보다 우월한 ‘天朝(천조)’ 라는 자만에 빠져 있던 시기, 영국을 필두로 한 서구 열강의 침략에 차례로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인민대중들 사이에는 반침략 정서가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고 이런 정서는 아편전쟁 이후 대중적 반영투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 투쟁(태평천국 농민혁명)은 내외의 계급관계가 변화하고 발전하게 되며 빈농과 빈곤한 중농이 주도권을 장악한 혁명이었다. 이때의 혁명은 이상사회와 이상국가의 밑그림을 그려주는 역할을 해준다. 이들은 ‘최저 생활에 필요한 양 이외의 식량과 재산은 모두 ‘국고’ 에 귀속시킨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고 이것은 사실상 실행불가능한 사회의 이념이었지만, 봉건 사회의 낡은 이념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태평천국 농민 혁명은 외국 자본주의 침략자들에게 중국의 광대한 노동인민들이 품고 있던 헤아릴 수 없는 강대한 혁명역량을 보여주었고 중국의 식민지화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혁명적 농민대중은 봉건주의 착취제도와 통치제도를 무너뜨릴 수 없었지만 봉건주의 통치자들도 그들이 지배하던 옛 통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없었지만 봉건주의 통치자들도 그들이 지배하던 옛 통치 질서를 회복할 수 없었다. 농민혁명으로부터 심각한 타격을 받은 봉건주의의 기초 위에 자본주의적 요소는 불가항력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를 보인다. 2차 혁명 고조기 1864~1894 (중일전쟁 후의 몇 년이며, 무술유신운동과 의화단 운동)
서방 자본주의 침략세력과 연합하여 농민대중의 저항을 진압하는 정책이 시작된다. 대외 관계의 모든 일, 서양에서 들어온 사물과 관련된 모든 일을 ‘양무’라 하며 지배계급 사이에서 일어난 ‘양무운동’은 노동 혁명가들의 반감을 더욱 부추기면서 인민들의 반봉건 참여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봉건경제가 외국 자본주의 세력 때문에 나날이 파괴되어 가는 상황에서 인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되어 갔고 저항세력들은 대를 이어 투쟁하게 되었다. 이들에게 가한 청왕조의 가혹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점점 확대되어 반침략 투쟁에 참가하자 혁명 운동은 위세를 떨쳤고 이 시기의 투쟁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정치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시기의 혁명은 ‘지주계급이 이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드러난 부정적인 영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아울러 외국 침략자들에 적대적인 일체의 사회 역량을 어떻게 동원하고 조직할 것인지, 중화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투쟁과 중국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쟁취하려는 투쟁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였다. 중국의 봉건 통치자와 외국 제국주의자, 중국의 광대한 인민 사이에 팽팽한 각축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 등장하게 된 대중의 투쟁을 두려워하고 반대했던 자산계급 개량주의자들과 유민을 주요 구성분자로 하는 ’민족 자산 계급‘의 등장은 혁명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민족자산계급 제국주의보다는 봉건주의와 더 돈독한 관계이며 주요 구성원은 봉건 통치계급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문에 정치·경제·사상 면에서 짙은 봉건주의적 흔적을 지니고 있고 봉건경제 봉건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민족자본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관계로서 봉건적 생산관계, 봉건적 통치 질서와는 대립하면서 한편으로는 낡은 생산과계와 낡은 통치 질서의 힘을 빌려 자신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했다. 새로운 사회계급을 형성하면서 원래의 계급적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모택동은 ‘민족자산계급은 지주계급처럼 봉건성이 강하지 않고 매판계급처럼 매판성이 강하지도 않다. 민족자산계급 내부에는 외국 자본주의와 본국 토지와 비교적 관계가 많은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민족자산계급의 우익이다.’
3차 혁명 고조기 (1905년의 동맹회 설립에서 1911~1912년의 신해혁명까지의 시기) 3차 혁명의 특징은 ‘중국 민족이 강한 뿌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국민독립의 씨앗을 부린 공적’을 확인하는 과정의 혁명이다. 장기간의 봉건 시대에서 수많은 농민혁명을 경험해 온 자산계급 입헌파는 대다수가 지주계급에서 변신한 인물들로 지주계급의 정치경험을 계승하는 동시에 서방 자산계급에게 배워 온 몇몇 수법과 결합하여 혁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들은 신해혁명 중에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기존의 풋내기 같았던 자산계급이 아닌, 구시대 사회세력과 함께 신해혁명과 5.4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5·4 운동이 남겨주는 혁명의 특징은 기존 자산계급 개인주의의 관점을 견지하던 사람들이 운동이 고조되어감에 따라 투쟁의 대열에서 물러갔고 마르크스주의 사상이념을 추앙하던 사람들이 강인하게 투쟁을 주도해 나간 점이다. 5·4 운동이전에는 ‘신문화운동’이 내건 깃발은 자산계급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였으나, 5·4 운동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소개, 연구, 선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아 가게 되어 가면서 신문화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만들어진 단체는 사회주의,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2년 후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된다.
5·4 운동은 자산계급이 영도라는 구 민주주의 혁명의 종결과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이때부터 중국 근대사는 새로운 장을 열어가게 된다. 사실 이렇게 중국근대사를 다룬 책중에서도 '인민'에 관한, '계급역량의 배치와 관계'순으로 서술된 역사서는 처음 읽는다. 서술방법도 독특하였지만, 아래로부터의 혁명사라라는 점이 역사서로는 대단한 시도가 아닐까 한다. 책의 중간중간에 기존의 역사서와 다른 평이 실려 있어, 중국내 사학자들과의 평가가 엇갈리는 점들은 짧은 식견으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부분이었고 (이후 다른 관점의 중국근대사를 읽어보아야 겠다.) 중국 공산당의 창립이 있기까지의 인민의 역사흐름이라는 그림을 그리기에는 무척 탁월한 책이었다. 허나, 중간중간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인용문구를 통해서 저자의 역사 시각이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과 중국공산당의 사상적이념자라는 점은 책을 읽으면서 참고해야 할 부분이라 여겨진다. 서양속담에 커피는 누구나 쏟을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치우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서구 열강의 침략은 그야말로 '쏟아진 커피'와 같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치우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는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역사이다. 같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으나 중국은 현재 세계를 제패하느냐 마느냐의 여유로운 승자로서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승자의 역사를 쓰고 있는 동력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인민'이라는 사실은 자본이 주인이 된 작금의 다른 나라와는 많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역사의 근원적인 힘은 아래로부터 태동한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쳐 수많은 세기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이미 커피는 쏟아졌다. 그것을 어떻게 치우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사《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우리에게 쏟아진 커피를 현명하게 치우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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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전을 읽다 보면, 근현대의 중국도 고전에 나와있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중국이 현대로 넘어오기 전까지 중국을 지배했던 것은 청 왕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전통시대 및 근대가 봉건왕조 그 자체였으리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근대에 대해 의외로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는 반증이거니와, 최근 들어 중국의 현대사를 다루는 책들이 많아졌지만, 근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책을 나 자신이 접하지 못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는 나에게 중국의 근대사를 체계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해준다. 1840년 영국이 도발한 아편전쟁에서부터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기까지 80년 동안 중국대륙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태평천국, 중일전쟁, 무술유신과 의화단 운동, 그리고 신해혁명과 5.4운동이, 이 기간 중에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물론 과거 학교 다닐 때 세계사시간이나 혹은 국사시간에 이들 사건이 어떤 일들인지 그 개요를 배운 적은 있다. 그래서 이들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는 아니지만, 우리들이 배웠거나 혹은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들은 단지 한두 줄로 사건의 개요만을 전달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애매하였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책을 썼느냐에 따라서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관을 이론적 배경으로 하여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계급간의 갈등이나 계급의 진화과정이 혁명의 시기에 어떻게 작용하였고, 그것들이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이해하기가 쉽게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800여 페이지가 넘는 많은 분량이었지만,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고, 또한 우리의 근대사와 대비되면서 가슴을 아프게 만들기도 했다. 1840년 발생한 아편전쟁은 2400년을 이어오며 봉건사회였던 중국을 반(半)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로 변모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시 중국을 지배했던 청 왕조는 봉건지주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전제주의 정권이었고, 농민계급과 지주계급 사이의 모순이 사회의 주요모순으로 부각되던 때 이었다. 내부 위기가 날로 높아져 가고 있던 봉건 중국과, 이미 3백여 년의 식민사업 경험을 가진 서방 제국주의 국가가 부딪히는 상황에서, 중국은 근대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 근대사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다. 하나는 19세기 중반 제국주의 팽창시대 그들의 실체를 보다 확실히 이해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세력의 무능과 탐욕이 인민들을 얼마나 빈곤과 수탈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근대사를 읽으면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외세에 저항하는 것은 결국 기층민중들뿐이고, 그들의 희생과 역량이 혁명을 완결시킬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의 근대사와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생각에 당시 우리 민중들의 삶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1840년 일어난 아편전쟁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수탈방법이었다. 이미 부분적인 개방을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하고 있던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중국 경제의 자급자족 구조와 대외무역을 통제하는 청 왕조의 정책에 따라, 교역역차 발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편 밀수출이었다. 18세기 후반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아편 전매제도를 실시하였고, 이때부터 아편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로 늘어나는 아편밀수에 따른 은의 유출로 은이 귀해지자, 사회경제와 국가재정에 악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이에 청 왕조는 아편밀수를 금지시켰다. 이를 핑계로 영국의 동방원정군이 중국을 침략하였고, 부패한 관리들은 싸울 의지도, 힘도 없었기에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42년 서구 자본주의 각국과 체결한 남경조약은 철저한 불평등계약일 수밖에 없었고, 중국은 이때부터 반(半)식민지 상태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태평천국 혁명이 한창이던 무렵, 제국주의는 청 왕조를 도와 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시작하는 한편, 중국의 변방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는 기회로 삼았다. 러시아가 동북변경 및 서북변경을 넘보았고, 영국은 미얀마를 침략하면서 서부 운남, 티베트, 신강지역을, 그리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기반으로 중국의 서남지역을 노렸다. 그들이 청 왕조를 지원한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훼손당하지 않으려는 속셈이었고, 이미 청 왕조가 무력해진 틈을 타서 자신들의 식민지를 보다 많이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1894년 갑오전쟁(중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거인의 모습이었다. 서방 각국은 앞다투어 차관을 제공하며 그 대가로 세관을 장악하여 정치적 예속을 강화시켰고, 철도건설을 빌미로 철로가 지나가는 지역을 자국영토화 하기에 이른다. 1899년 산동에서 의화단이라고 하는 자발적 농민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빈농과 노동자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던 의화단 운동은 수도권에서 거세게 불타오르며 천진과 북경을 점령하였다. 농민들의 혁명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훼손을 두려워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군사적 진압작전으로 천진과 북경을 탈환하면서 약탈과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 제국주의 군대가 지나가는 곳은 시체와 폐허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후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에서 각기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청 정부와 무수한 조약들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상상할 수도 없는 불평등조약은 시시때때로 개정되었고, 그때마다 중국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제국주의에 필요한 것은 중국대륙의 정복이 아니라 반식민지적 중국이었다. 역사는 오래된 현재라고 하였던가? 지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총칼대신 자본과 금융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침략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때, 청왕조 봉건지배세력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한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농민들에게 더 많이 수탈하여 개인의 욕심을 채우고, 어떻게 하면 혁명의 불길이 비켜가게 할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이권의 대가를 받을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을 뿐이다.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부패한 관리들은 싸울 의지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인민들의 역량을 동원할 줄도 몰랐다. 중국의 봉건통치자들이 외국세력과 기층민중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갈팡질팡할 때, 국내의 계급모순은 더욱 심화될 뿐이었다. 1851년 빈농과 소작농이 주가 된 태평천국 혁명운동이 일어나자, 봉건통치자들은 외국의 침략자와 합심하여 중국인민의 혁명을 진압하는 국면을 초래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의 봉건통치자들은 서방 열강의 하수인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침략자들보다 태평천국 군을 진압하기에 더 급급했고, 더 나아가 서양세력과 손잡고 태평천국을 토벌하고자 했던 것이다. 1861년 함풍제가 죽고 동치제가 등극하자 황태후인 자희태후가 섭정을 시작하였다. 1908년까지 47년간을 섭정했던 자희태후 역시 서방 자본주의 침략세력과 연합하여 농민대중의 저항을 진압하는 정책으로 일관 하였다. 그 기간중, 군사공업이나 그와 관련된 기업의 진흥, 신식무기와 장비를 갖춘 육해군을 설치하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났지만, 이홍장으로 대표되는 봉건관료들의 양무운동은 자강을 달성하기 보다는 서구세력과의 타협이나 투항으로 일관하였다. 갑오전쟁 이후, 정치적으로 예속된 청정부는 철도부설권 등 이권을 팔아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주권을 팔아 제국주의의 지지를 얻고, 스스로가 제국주의의 하수인이자 공모자로 변하여 중국인민을 통치하고자 했다. 이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죽어나는 것은 중국인민들뿐이었다. 20세기 들어 민족자산계급이 중심이 된 애국운동이 일어나고, 무장투쟁을 통한 청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중국동맹회 등이 창립되자, 1905년 청정부는 혁명의 위기를 피하고 대지주, 대매판계급이 통치하는 정체유지를 위해 입헌군주제를 검토한다. 1909년 입헌군주국으로 가기 전, 예비단계로써 자정원과 자의원을 설치하여 선거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였지만, 농민, 노동자, 수공업자, 소상인 등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입헌군주제 역시 자신들의 통치를 연장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스스로 들어내었다. 결국 1912년 신해혁명의 결과로 청왕조는 붕괴되고 중화민국이 선포되었으나, 북양군벌이던 원세개가 1913년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하는 것으로 신해혁명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원세개 역시 봉건지배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1915년 중화민국을 군주제인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사실상의 황제로 등극하였고, 각 군벌들은 근거지를 차지하고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후 반원세개 운동이 격화되고 서남지역 몇 개성들이 독립을 선언하자, 1916년 군주제는 취소되고, 원세개를 받치고 있던 북양군 내부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 세력은 여전히 중국대륙을 반식민지화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권을 향해 그들은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의 근대사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왕조 말기와 대한제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봉건지배세력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 모두에게서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중국 기층민중들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아편전쟁 이후 계급모순의 심화는 수많은 농민반란의 대오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바로 1851년 태평천국 혁명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남경을 점령한 후, 그곳을 수도로 삼아 태평천국을 건설하였으나, 혁명을 주도했던 지도부는 모두 빈농출신으로 제대로 된 통치와 정책들을 실시할 수가 없었고, 결국 자신들마저 봉건주의에 휩쓸려 들어갔다. 청 왕조는 이들을 토벌하고자 중국번으로 하여금 상군을 조직하여 농민을 제외한 국내외 반혁명 세력을 결집시켰다. 이들에게 1864년 남경이 함락되고, 이후 4년이 지난 1868년 태평천국은 완전히 소탕되고 말았지만, 이는 중국이 반식민지, 반봉건 근대로 진입하면서 경험한 첫번째 혁명의 물결로 봉건사회 질서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의 근대 역시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894년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내걸고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은 그 전개과정이나 진압과정이 너무나도 태평천국 혁명운동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만,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피압박 인민대중의 혁명역량 표출로 이후 중국은 완전한 식민지 지배체제에 들어가지 않고 반식민지 상태를 유지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식민지 지배체제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태평천국의 격랑 속에서 중국 인민투쟁의 주된 대상은 국내봉건 지주계급의 통치이었다. 그러나 점차 그 대상이 외국침략자들에게 옮겨가기 시작한다. 태평천국 이후 1894년 갑오전쟁(중일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전국적인 물결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회계급과 계층이 참여하면서 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갑오전쟁 후, 전국각지에서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의 자발적 투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강유위가 이끄는 유신파의 변법운동은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양 자산계급의 문명과 그 사회의 정치제도를 지고지선의 존재로 파악하였으며, 이것은 중국과 제국주의간 모순이 주요모순이 된 조건하에서, 중국인민이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투쟁의 반영이었다. 1898년 청 황제는 이들 유신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중용하자, 자희태후는 정변을 일으켜(무술유신) 유신파를 몰아내고 황제를 유폐시킨다. 유신파의 실세인 강유위와 양계초는 외국으로 피신하면서 무술유신은 100일 유신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유신운동 역시 반동이었다. 황제는 태후에게서 권력을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겉으로만 유신파의 의견을 들었을 뿐이고, 유신파 또한 하층인민의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투쟁에는 반대하고, 자본주의적 개혁을 통해 농민혁명을 피해가는 것이 목표였다. 이 대목에서 어김없이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이다.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이 정변은 비록 3일 천하로 끝이 났지만, 청나라의 유신운동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단절하고 조선 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강보다는 일본에 의지하려는 정책과 기층인민들의 지지부족으로 실패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19세기가 저물어가는 이 무렵, 중국의 봉건통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은 하층인민대중들이 역사의 전면에 멀지 않아 등장하리란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899년 산동에서 시작된 의화단 운동은 수도권에서 거세게 불타오르면서 천진과 북경이 의화단 천하가 되었으며, 이들은 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주요 투쟁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북경을 점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국주의 군대들과 청 정부군의 탄압으로 와해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거치면서 손중산으로 대표되는 자산계급 혁명파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1905년 미국내 중국인 차별이 발화점이 되어 민족자산 계급이 중심이 된 애국운동으로 미국제품 사용 및 구매중지 운동이 일어났다. 더불어 입헌파 민족자산계급이 주도한 철도부설권 회수운동은 청 왕조로 하여금 철도의 국유화를 선포하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인민들의 반발은 무장봉기로 이어져, 청 왕조 멸망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손중산은 1905년 일본에서 중국동맹회를 창립하였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통한 청왕조의 전복과 제국주의에 대한 타격을 목표로 하였다. 이듬해부터 동맹회는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07년부터 청 왕조의 실정에 대한 농민들의 자발적인 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납세거부, 식량약탈투쟁 등으로 나타났고, 1910년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산계급 혁명파는 이러한 농민들의 역량을 주도적으로 조직화하고 동원해내지 못하였으며, 이것이 1911년 신해혁명에서 일거에 청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민주혁명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인민들의 자발적인 투쟁을 보면서 우리의 근대사를 또 한번 생각해 본다. 1907년 일본의 차관을 갚기 위해 벌어진 국채보상운동과 1920년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기 위하여 벌였던 물산장려운동이 그것이다. 두 운동 모두 일제의 분열공작과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기층민중들의 많은 호응을 얻으며 민족적 경제운동으로 반외세 운동이 한 형태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1911년 무창에서 일어난 무장봉기로 호북성이 청 정부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고, 이어서 각 성들도 무장봉기를 통하여 독립을 선포한다. 각 성들의 무장봉기에서 자산계급 혁명파는 무장봉기 후 정권을 잡았으나, 곧 자산계급 입헌파에 권력을 빼앗긴다. 국부적으로는 혁명파가 권력을 가졌지만 전체적으로는 입헌파가 장악한 꼴이 되어버렸다. 입헌파의 뒤에는 봉건지주계급이 버티고 있었으며, 일부 성에서는 혁명의 외피를 두른 군벌들이, 또 일부에서는 청정부의 지방군정장관이 지주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정권의 수장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이후, 각 성 대표들이 모여 도독부대표연합회를 구성하였으니, 이는 청 정부의 실력파인 원세개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다. 각성의 대표들이 이미 입헌파로 바뀌었고, 그들 뒤에는 봉건지주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외양은 혁명세력이었으나, 내피는 기층인민의 요구에 반하는 봉건통치계급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12월, 손중산의 귀국으로 인민들은 열광하였고, 각성 대표들은 어쩔 수없이 남경에서 임시대총통 선거를 실시하고 손중산을 총통으로 선출하였다. 손중산은 1912년 중화민국성립을 선포하고 임시총통에 취임했다. 이렇게 성립된 남경정부는 자산계급 혁명파와 입헌파의 연합정권 형태를 띄었으나, 우위를 차지한 것은 입헌파였다. 그 결과 당면한 수많은 난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한편 원세개는 입으로 남경정부와의 화의를 외치면서 남경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해 제국주의 각국의 지원을 받아 혁명진영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공작을 강화한다. 원세개의 생각은 청 왕조와 남경정부를 모두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갖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12년 2월 마침내 청 황제가 퇴위를 선포하자, 원세개는 북경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자신이 대총통이 되었다. 원세개의 동조자들은 손중산을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손중산은 원세개와의 화의 때 한 약속대로 남경정부의 총통직을 사임하였다. 1913년 10월 마침내 원세개는 중화민국 정식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이는 곧 신해혁명의 종말을 의미했다. 남경임시정부의 실패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안정시키려 하지 않고 열강의 승인에만 기대려 한 것이었다. 원세개와 타협하고, 청 왕조가 체결한 일체의 불평등조약을 무조건 인정하면 서구 열강이 자신들을 지지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이미 원세개를 조종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혁명정부는 오히려 눈에 가시였던 것이다. 혁명파들은 중국의 광범위한 하층대중, 주로 농민인 이들의 혁명역량을 정확하고도 일관되게 동원하여 충분히 발휘하도록 이끌 수 없었기에, 어쩌면 신해혁명의 실패는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대했던 독립과 민주는 오지 않았지만, 군주제는 무너지고 민주공화국의 깃발은 세워지게 되었다. 이 후, 원세개는 한걸음씩 독재통치로 나아가고 있었고, 1912년말 국회의원 선거에서 손중산이 속한 국민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자 국민당 대표 송교인을 암살한다. 이에 손중산은 원세개 토벌을 주장하지만 국민당 지도부는 반대한다. 1913년 강서성과 남경이 반원세개 투쟁의 중심에 서자 원세개는 토벌대를 보내 진압하고, 손중산은 외국으로 망명한다. 1915년 원세개는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사실상의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이에 손중산은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16년 반원세개 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고, 서남지역 일부 성들이 독립선언을 한다. 원세개의 황제 등극은 거행되지 못하게 되고, 3월 원세개는 군주제의 취소를 선포한다. 6월 원세개가 죽자 북양군벌에 의한 정권이 들어선다. 이 시기, 선진적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봉건군벌이 인민의 사상을 속박하고, 민족의 생기를 억압하는 사상에 대응하기 위하여 문화사상운동이 전개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알게 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대중운동과 결합시키는 실천투쟁에 뛰어들었다. 1918년 제1차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담에 중국은 대표단을 파견하여 세계무대에서 중국의 지위를 확보코자 하였으나 열강에 의해 좌절되었다. 1919년 5월4일, 북경의 각급학교 학생들이 반제국주의 그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와 북경의 친일파 정부에 대한 분노를 행동으로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곧 전국으로 퍼져가고,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동조하였다. 이것은 자산계급이 영도하는 구민주주의 혁명의 종결이자,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함성이었다. 중국의 근대를 가로지르는 80여년의 역사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가슴의 먹먹함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은 기층인민들의 울분이었고, 봉건통치자들과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중국의 근대를 읽으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생각나는 우리의 근대는, 차라리 분노를 넘어 허탈함마저 느끼게 하였다. 또한 지금은 어떠한지, 근대와 비교하여 과연 다른 것이 있는지, 지배계급은 바뀌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만들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가 하면 저자의 계급관에 기초한 역사의 서술은 흔히 역사를 읽으면서 자칫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결점들을 보완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느끼는 감정은, 우리의 근대사는 언제쯤 이렇게 민중의 관점에서 일관성 있는 서술로 집필되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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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역사를 암기과목이라고 하면서 수많은 연대와 사건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그 원인이 존재하고, 해당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역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해당 사건의 명칭이 달라지게 된다. 가장 좋은 예가 국정교과서에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라고 서술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동학(東學)’이라는 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대한 시각에 따라 그 명칭에 ‘동학(東學)’이 들어가거나 빠진다. 먼저 ‘동학(東學)’이라는 종교가 주도적 혹은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동학난(東學亂)’, ‘동비(東匪)의 난(亂)’, ‘동학혁명(東學革命)’,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등의 표현을 쓴다. 그 중에서도 왕조질서에 대한 반기(叛旗) 혹은 기존 체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비적(匪賊)들의 소요 정도로 인식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동학난(東學亂)’ 혹은 ‘동비(東匪)의 난(亂)’으로 규정하는데, 이러한 시각은 사건이 발생한1892년부터 1960년대까지 영향을 끼쳤다.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동학농민봉기를 ‘평민혁명’으로 적극적으로 평가1)”하였지만 ‘동학난(東學亂)’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도 4·19혁명을 계기로 한 시민의식의 분출,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학계의 부담, 5.16 쿠데타 주체세력들의 정치적 의도2) 등이 결부되어 1970년대부터 ‘동학혁명(東學革命)’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그나마도 유신체제의 붕괴 후, ‘동학농민운동 (東學農民運動)’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로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는 학문적 성과의 축적, 역사를 보는 시각의 변화(지배층 중심에서 민중 중심으로) 등으로 인해 ‘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다. 해당 사건에서 사건에서의 ‘동학(東學)’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주로 ‘갑오(甲午)’라는 사건이 발생한 해의 간지(干支)를 사용하는데, 북한에서 1947년 전석담(全錫淡; 1916~)에 의해 ‘농민전쟁(農民戰爭)’이라고 규정한 이후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 공식용어로 채택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 역사에서 앞에서 언급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에 가장 가까운 사건이 바로 ‘태평천국(太平天國) 운동’이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태평천국 농민혁명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이 대혁명은 중국이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근대로 진입하면서 경험한 첫 번째 혁명의 물결이었다. 위대한 태평천국 농민혁명 운동은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봉건사회의 낡은 질서를 뿌리까지 흔들어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진했다. 태평천국 농민혁명은 외국 자본주의 침략자들에게 중국의 광대한 노동인민들이 품고 있던 헤아릴 없는 강대한 혁명역량을 보여주었고 중국의 식민지화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3)”고 본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의 역사인식에는 인류역사가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발전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이 깔려있다. 다만 이러한 유물론적 역사관이 유럽의 역사를 설명할 경우에는 유용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부적합한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때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할마저 했다는 점에서 문제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 역사관이 유용한 것은 기존의 지배층 중심의 정치사에서 피지배층까지 포함하는 경제사 혹은 사회사로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태평천국 운동’을 다시 살펴보면, 지배층에 의해 그 명칭과 역사적 의의가 계속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태평천국운동은 청조체제에 제기했던 충격이 심각하였던 것만큼 반체제반란으로서 장발적(長髮賊)이라 매도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망각되어야 했다. 손문(孫文) 등 신해혁명(辛亥革命)과 국민혁명(國民革命)의 지도자들에 의해 재평가됨으로써 20세기 들어 역사의 무대에 부활하였다. 더욱이 반(反)제 반(反)봉건운동이라고 자임할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농민혁명운동이라고도 칭할 수 있는 중공정권하에서 그것은 전근대 중국농민혁명의 최고형태를 띠면서 반제 반봉건을 지향한, 현대중국 탄생의 원류라고 높이 평가되면서 단순히 왕조말기의 반란이 아니라 아편전쟁과 함께 중국근대사의 기점으로 제시4)”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탓인지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한 태평천국사 연구의 선구자이면서, 태평천국운동의 핵심구성원이었던 객가(客家)출신의 간우문(簡又文)과 나이강(羅爾綱) 가운데 본토에 잔류한 나이강(羅爾綱)은 저자와 동일하게 농민혁명운동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반면, 홍콩으로 이주한 간우문(簡又文)은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의한 태평천국사 연구를 강력하게 비판해 온 입장을 견지하여 태평천국운동을 민족/종교/정치적 혁명5)”이라 평가 하였다. 이처럼 ‘동학(東學)’ 또는 ‘상제교(上帝敎)’를 농민전쟁의 외피(外皮)로 간주하는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독일농민전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태평천국 운동’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1954년 <역사연구(歷史硏究)> 창간호에 발표한 ‘중국 근대 역사의 분기 문제[中國近代歷史的分岐問題]’에서 계급투쟁론에 입각해서 중국 근대사의 분기를 태평천국 운동 – 무술변법과 의화단 운동 – 신해혁명의 ‘3차 혁명고조’의 개념으로 설명6)한 것에서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입장도 1980년대를 전후로 도전을 받는데, 그 결과 중국의 초급중학 교과서에 저자의 주장과 달리7)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중국 민족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에 촉진 작용을 하고, 외국 경제세력의 확장에 일정한 저지 작용을 했다는 평가8)”가 실리게 된다. 어쩌면, 이 책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이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한 중국 근대사 서술의 고전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명칭과 역사적 의의가 다르게 평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중국의 ‘근대’와 ‘현대’를 오사운동 시기를 전후하여 구분(하는 것이) 다소 무리가 있음(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9)”된 것처럼.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1) 김기승, “박은식”, 조동걸/한영우/박찬승 엮음,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 (창비, 1994), p. 105 2) 1963.10.07.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갑오동학혁명 기념탐’ 준공식에 참여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혁명인 ‘동학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5.16 혁명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3) 호승(胡繩),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 박종일 옮김, (인간사랑, 2013), p. 251 4) 김성찬, “太平天國과 捻軍”, 서울대 동양사학연구실 編, <강좌 중국사>Ⅴ, (지식산업사, 1989), pp. 76~77 5) 김성찬, 앞의 글, p. 78 6) 이은자, “아편전쟁과 중국의 ‘문호개방’에 대한 역사교육과 역사인식”, <중국근현대사연구> 19집, (2003), pp. 49~50 7) 호승(胡繩), 앞의 책, p. 18에서 “양무운동-무술유신-신해혁명이란 줄거리로 이 시기 역사의 진보적 흐름을 논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고 언급했다. 8) 이은자 앞의 글, p. 70 9) 이은자 앞의 글, p.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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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사는 흥미롭다. 중국 인민들의 나라가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을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청 왕조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민중들의 힘이 알게 모르게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지금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그 바탕이 되는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민중의 입장에서 조명해 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저자의 시각은 분명하다. 민중 세력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었는가 가 이 책을 통해 모색된다. 중국 근대사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민중 중심의 시각에서 해석되는 것이다. 아편전쟁은 영국의 중국 침략의 야욕으로 일어난다. 중국의 막대한 영토와 국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국에 굴복하여 불리한 조약을 맺는 전쟁이다. 전쟁의 양상도 이상하게 흘러간다. 다량의 아편이 중국으로 유입됨으로 중국의 은이 타 지역으로 유출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아편의 중독성 때문에 중국 사회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래서 흠차대신 임칙서가 광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아편금지령을 내리게 되고, 이것은 무역을 방해한다는 영국의 생각에 의해 전쟁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전쟁이 광대한 중국을 상대로 영국 병력 수천 명이 하는 싸움이기에 애초에 온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국지전은 몰라도 전반적인 판세에서는 영국이 제대로 된 전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쟁은 묘하게 흘러간다. 해적처럼 찔렀다가 빠지고, 약탈하고 돌아가는 그러한 전쟁을 하는 동안에 중국은 안에서 스스로 곪아 터지고 있다. 나라에서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삼원리 전투>는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국이 허약한 중국 정부의 약점을 파고들어 인민의 정부에 대한 적대적 정서를 파고드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가령 나라의 관리들이 영국인을 학대하여 공격한 것이지 민중들에게는 아무런 전쟁할 뜻이 없다는 성명서 발표든지, 중국 인민들과 화목하면서 통상의 길을 여는 것이 목적이라든지 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삼원리 전투다. 중국의 민중을 자신들이 의도한 바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 앞에 외세 침략에 반발한 민중들이 군사를 조직해 대항한 전투로, 영국군들이 혼이 났던 전투다. 이 전투는 중국 인민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출발점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 후 남경조약, 망하조약, 황포조약 등으로 서구의 뜻이 그대로 중국에서 펼쳐지는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고, 중국도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변화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임란 후에 조선 민중들의 의식이 변화했듯이 중국 인민들의 의식이 상승하고, 그들의 힘이 커지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가진 자들의 착취와 계급주의에 반발하여 그들의 힘을 떨쳐낼 수 있는 기회를 잉태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태평천국의 난이다. 태평천국은 홍수전을 중심으로 종교적인 색채를 띠며 민중들의 규합에 나섰던 조직이다. 이들은 간음, 탐욕, 음주, 살인 등을 금지했으며, 그것으로 이념을 삼아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지방 지주들의 많은 배척을 받았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더욱 많은 민중들이 참여하는 상황이 되었다. 또 이를 중심으로 무장봉기를 하게 되고, 큰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의도한 바대로 그들 조직이 움직이지 않았고, 세력이 커지는 만큼 그들 내부가 썩어가게 되었다. 또 그들 중에서 지배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의 폭력과 부패는 민중들의 분노를 자아낼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분열이 일어나고 자멸이 길을 걷게 된 것이 태평천국이다. 결국 태평천국은 천상의 말을 빌려 인간의 혁명의지를 나타냈으나 후기에 가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궁중에 파묻혀 비현실적인 말만 내어놓아 민중을 이끌어나갈 힘을 상실했다. 비리와 부정이 판을 치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공동투쟁의 원대한 정치목표를 잃어버린 집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민심이 천심이듯이 결국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민중들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봉건사회의 낡은 질서를 붕괴하는 큰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은 서구 자본주의자들에게 인민들이 품고 있는 강대한 혁명 역량을 보여주었고, 식민화를 저지시키는 일까지 담당했다. 봉건주의 통치계급의 극단적인 부패를 폭로했고, 인민의 역량은 계승되어 거대한 인민공화국을 만들어가는 초석이 되었다. 중국 역사에 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공화정을 열어가는 기반이 된 사건이 이들이다. 많은 목숨이 사라져 갔지만 그들이 흘린 피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으로 부활할 수 있는 단초가 된 역사, 수천 년의 역사를 지녀온 중국의 힘이 분출되는 사건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갑오전쟁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굴복한 청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 다투어 달려들어 그들의 이권을 챙겨 갔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러시아가 세력을 확대해 여순 대련 등으로 세력을 뻗쳐 왔고, 그것이 결국은 일본과의 세력 다툼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오히려 외국으로부터 빌린 외채는 정치적 예속화가 되어 나라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청 왕조 정부가 외국에 대해 대응한 방식이 이이제이 방식이다. 이 방식은 능동적인 외교가 될 수 없었고 열강의 가속화된 중국침탈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가운데 강유위를 중심으로 한 유신운동이 일어난다. 반자본주의, 반봉건주의자인 강유위는 서양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찾으려고 했던 인물이다. 이 운동은 서구를 배우면 국제공법에 의해 독립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전인수격으로 중국을 개량하려 있던 운동으로 볼 수가 있을 듯하다. 이들의 자산계급 개량주의 정치운동은 백일유신으로 몰락해 갔다. 그러한 가운데 외국도 중국에서 새로운 힘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 힘은 폭풍이 되어 중국 천지를 흔드는 힘으로 나타났다. 의화단이란 자발적인 농민운동이 짧은 기간 안에 대단한 기세로 일어났다. 그들은 외국교회와 그들을 보호하는 지방토호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해 연계하면서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게 되었다. 이들은 세력이 커지자 반외세, 반제국주의 기치를 내걸고 외세와 그들을 비호하는 조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당시 통치자인 자희 태후가 외세와 전쟁을 선포함으로 미묘한 싸움이 펼쳐지게 되었다. 실질적으론 의화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을 이용하여 교회와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과의 전쟁을 의화단에서 감당하게 한 것이다. 전쟁은 의화단의 거대한 세력으로 쉽게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은 욱일승천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큰 약점이 있었다. 북경에 진입하는 힘이 있었지만 그들에겐 정권을 쟁취하겠다는 의도가 없었다. 그러기에 정부에서 보청멸양이란 모호한 구호에 제시했을 때, 미혹되어 혁명의 근본 문제에서부터 혼란에 빠졌다. 조정에서 교묘하게 그 세력들을 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호적인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고 상급을 지급함으로 황제의 뜻을 받드는 의화단이란 깃발을 거는 이상한 조직이 되어 버린다. 농민혁명의 본질은 반봉건, 반외세인데 그것이 퇴색되고 반외세로 치닫게 됨으로 나중에 외세와 정부의 이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어 안으로부터 실패하는 혁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화단 운동에 대해 후세에 상반된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손문 등의 자산 계급이 주도한 모임들이 만들어 지고 정치색을 띠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애국운동을 부르짖었다. 하여 그들을 통해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가 높아지기도 했다. 그들은 청 왕조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숱하게 무장봉기도 일으키며 자신들을 세력화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에 의해 1911년에 일어난 청 왕조에 대한 우창봉기를 신해혁명이라 한다. 이 봉기를 통해 청을 배격하고 남경에 남경 정부를 세우고 손문을 총통에 취임케 한다. 하지만 청을 완전히 붕괴시킨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과 타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청과 공존해 나가는 상태를 일정 기간 가진다. 그러나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중국에서 청이란 나라가 존재 가치가 엷어지는 상황이 된다. 그 후 중국은 혼란한 상황을 전개된다. 그럼으로 불구하고 외세에 저항해 나가고 스스로를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나간다. 그런 중 1912년 원세개에 의해 청 황제의 퇴위선포가 있고, 그 자리에 원세개의 북경정부가 들어선다. 그리고 남경정부와 대통합에 의해 원세개의 정부로 하나가 되면서 신해혁명은 끝이 난다. 이 신해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자산계급 지도자들이 지닌 한계 때문이었다 한다. 농민의 혁명역량을 일관되게 동원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다. 원세개로 대변되는 대지주 계급의 정권 침탈은 그들의 자만을 가져왔다. 원세개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기도 하는 무리수를 두고, 안으로는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손문 중심의 자산 계급 혁명파들은 재기를 노렸다. 중화혁명단을 결성하고 반 원세개 혁명을 준비했다. 그러는 와중에 파벌 투쟁의 울분을 참지 못한 원세개가 쓰러졌다. 이후 북양군벌, 남양군벌의 파벌투쟁이 전개되고 세력다툼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19년을 기점으로 신문화 운동이 벌어지고, 애국운동이 넓게 빠르게 전개되어 나갔다. 그러면서 사상계의 거대한 격랑이 일었다. 그 사상은 두 갈래로 나가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행동으로도 나타나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두 갈래의 이념이 성장하게 된 것이다. 책은 여기까지 적혀 있다. 책을 읽으면서 방대한 분량에 마음이 빼앗겼다. 오래 읽을 수 있다는 행복감에서다. 물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내용이 참으로 알차게 다루어져 있어 매우 흥미 있게 읽혔다. 중국의 근대사를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저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과는 매우 다르게 읽혀진다. 자생적으로 일어난 민중들의 권력이 어떻게 시대에 영향을 주고, 어디로 이끌어나가는가를 살피는 일은 매우 즐거웠다. 중국의 근대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준 인간사랑에 감사를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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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드디어 중국 근대사 여행이 끝났다. 1850년 부터 1930년대 까지의 중국의 역사....이는 치욕의 역사이고 내분의 역사였다. 1930년 이후 공산당이 들어서기까지의 역사다.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게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삼국지나, 사기등의 역사서를 접할때면 전쟁이 많았던 나라였고, 많은 인재들이 태어났다가 죽어간 역사이고 많은 농민과 군인들이 죽어간 한많은 역사이다. 삼국지에서 보면 많은 전쟁을 통해 한번에 몇만명의 군사들이 죽어갔던 시기가 근대 중국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가 살았기에 가능했던 역사이고 이러하기에 외세의 침략에서도 살아남았던 중국이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최근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바람이 일고 있는 나라, 왕권과 황권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중국의 역사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의 근대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것 같다. 또한 중국은 우리나라의 역사와는 많은 관계를 맺어왔던 나라이기에 관심이 많았을것인데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고 나라의 내정에 관섭했던 그렇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게 되는 나라이면서 현대에 와서는 넓은 영토와 자원 그리고 많은 인구로 인해 우리나라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나라로 변했다. 그런데 역사책을 읽어면서 이렇게 흥미롭고 관심을 가지게하는 책은 드물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책의 분량도 만만치않고 역사적 사실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읽기에는 그렇게 녹녹치않은것이 역사책인데 이 책은 흥미롭기도 하면서 감정까지도 대입하게 만든다. 많은 역사적 사실속에서 정권을 가진자. 재물을 가진자. 권력을 가진자, 농사를 짓는자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주인공들의 마음을 생각하게 하고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어 마치 삼국지를 읽는것 같은 기분으로 읽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사에서도 한 부분을 차지하는 강국인데도 불구하고 근대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정권을 유지하려는 자들과 이를 따르는 무리들의 부정부패와 그 부정부패에서 시름하는 하층계급의 생활은 강대국 중국이 아니라 한편의 치욕적인 드라마와 같다고도 할 수 있을것 같다. 무참히 짓밟히는 속에서도 나라를 위한 생각을 하지 않는 권력자와 관원들....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면서도 왜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런 성과없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우리나라의 근대역사에도 이런 치욕적인 사실들이 있어서 역사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하지만 아무런 대책없이 싸우지는 않았던것 같다. 명백한 명분과 치밀한 계획하에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중국은 워낙 많은 인구와 영토 때문에 일치된 단결심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되고 정권에 매수된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 혁명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인민의 입장에서는 고통이 배가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도 역사는 앞으로의 나라의 발전의 국민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서는 아픈 역사일수록 가슴에 새기고 새겨할 교훈임을 잊지 말아햐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패망하고 청나라가 탄생하고 그후 1800년대부터 중국의 근대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청나라는 조선시대가 되면서 청나라와도 많은 교류가 활발하였고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근대기에 접어든 중국이 오히려 국내외적으로도 세력이 약화되고 내부 정치또한 문란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중국과 유럽은 지리상, 교통상의 문제는 있었지만 유럽국가들과 교류가 많았던것으로 기억하는데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를 읽어보면 청나라 시대에는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과는 많은 교류가 없었던 듯하다. 이러한 시기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나라에서는 증기기관을 비롯한 과학적 발전과 해외로의 영토확장을 꾀하는 나라들에 의해 많은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자원을 이용하여 막강한 힘을 아프리카, 인도등을 비롯한 해외 식민지를 확장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그들의 영토확장과 자원을 위한 식민지 확보 대상에서 중국을 놓치지 않았다. 한 나라의 과도기가 될 수 있는 근대기 중국에는 권력자와 피권력자간의 다툼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분쟁이 잦다. 또한 지주계급과 농민계층의 다툼은 특히나 어려운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특히 왕권이든 황권이든 쵝고위의 권력자의 신중하지 못하고 정세를 읽지 못하며 민심을 읽지 못할 경우 사회 분란이 발생한다. 근대 중국에서도 명왕조에서 청왕조를 거치면서 이러한 국가적 사회적 모순이 발생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외국세력이 중국을 식민지화 또는 그들의 물품을 수출하기 위한 거대 시작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지켜려는 국가와 침탈하려는 자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중국을 쉽게도 생각해던 이면에는 중국의 악화되는 상황이 잘 조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청조 말기에는 이전에 비해 더욱 황권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군대와 관리,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많은 부정이 야기되고 이로 인해 국민의 고통이 더욱 커진 시대임을 알 수 있었다. 농민과 정부군의 전쟁에서 정부군이 패했다는 사실은 군대가 부패했다는것을 의미하며 국권또한 부패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아편전쟁을 일으킨것이 중국을 식민지하려는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중국 관리들의 부패, 황제의 신중하지 못한 국정 운영과 더불어 외세에 대한 대비책이 없는 등 국내적으로도 전쟁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은 불평등 조약을 비롯한 개항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내정간섭에 이르는 등 중국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아편전쟁의 발발 원인이 중국에 개항을 요구한 영국과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당시 중국의 대 유럽 수출품이 차와 견직물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현재의 홍콩을 비롯한 중국의 영토에서 시작된 아편의 수출을 요구하는 영국에 의해 유발된 아편전쟁은 2차례에 걸쳐 일어났으며, 태평천국과 같은 농민 혁명과 더불어 중국의 내부사정은 겉잡을 수 없이 어려워져만 갔다. 이러한 농민혁명은 중국을 지켜내려는 세력과 현 정권을 유지하려는 봉건세력, 그리고 이틈을 이용하여 중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세우려는 외부세력간의 삼국지에서의 위, 오, 촉의 세력 다툼으로도 비유해도 무방할것 같다. 한편 새로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일것인가, 아니면 이를 배척하고 외세의 침략을 어떻게 방어할것인가가 근대에 접어든 중국의 가장 큰 문제였던것 같다. 개화파와 반 개화파의 갈등은 황제의 결정으로도 결정되지 않았고 정사를 보는 관리들 조차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반개화파의 영향이 강했던것 같고 태평천국과 2차에 걸친 아편전쟁에서 외부 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서서히 개화파의 입장이 강해지는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개화는 이후에서야 이루어진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외국의 신문물과 무기, 학문을 받아들이는것이 중국에 있어 이익이 되는 측면이 강했을것으로 판단되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의 속국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머저 느낄수 있는 상황이기에 황권과 지배력이 약해진 중국으로서는 쉽사리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었고, 정부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기에 외국세력을 배척하고자 하였으나 태평천국과 같은 반란을 진압하는데 외국 군대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사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태평천국과 아편전쟁을 거치는 동안의 중국의 역사와 개국 당시의 우리나라의 정세와는 많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 시절의 쇄국정책으로 인한 많은 군사적 손실과 희생이 따랐고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일찍 개화하였더라면 좀더 오늘날의 현실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외국세력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행되지 않았을까하는 두려움 또한 느낄수 있는 상황을 중국 근대사를 통해 느끼고 있다. 중국의 청조시대는 우리의 조선말기의 역사와 맡물려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도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등의 외국 세력이 우리나라의 개항을 요구하며 제물포에 군함을 정박시키고 무력시위를 했던 당시의 역사가 기억에 남는다. 외국세력에 의해 침탈되어가는 국가 권력에 대항하여 일어난것이 민중운동으로, 태펑천국의 난? 난이라고 해야할지 농민에 의한 혁명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농민과 서민이 살기힘들면 나라는 위험에 처하게된다. 이는 나라를 떠받치는 힘이 국민이자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세세력이 이러한 농민과 국민을 붕괴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도입하고자 했던것이 종교을 이용한 방법인것 같다. 중국의 경우는 유고와 불교가 전통종교이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어렴움이 있었을것이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사랑인데 반해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했던 외세의 목적은 종교를 이용하여 민심을 흐트리고자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외세세력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로 종교를 이용한 민심의 회유 였을것이다. 지끔까지 전통으로 지켜지던 종교적 신념이 한꺼번에 무너질 경우 사회는 심각한 문제에 휩싸이게되고 혼한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외세에 의한 종교의 전파를 사회혼란 야기라는 목적으로 이용했다는점에서 오히려 무력보다도 더 야비한 문제를 야기시킨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나나에서도 이러한 시도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한 역사는 동학혁명으로 중국에서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는것을 이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엇다. 한편으로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이 끝나가는 시기에 벌어진 외국세력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은 참으로 무시무시하다. 군사력과 무기 판매를 두고 벌어지는 현실은 날강도와 다름없었고 이를 허용과하는 청정부의 행태는 오로지 그들만의 배를 채우려는 매국노의 행태와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민들은 그러지 않아도 많은 희생으로 인구가 줄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과연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이고 통치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평천국과 같은 대규모의 시위는 아니지만 소수민족들이 일으킨 정부에 대한 반항은 오늘날에도 가끔 들려오는 티베트 독립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청 정부에 대항할만한 인재가 또한 없었다는것에 대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고 그속에서도 자신의 배만 채우려는 관료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수준이다. 그속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다른 외세와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청일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데 1800년대 후반은 거의 중국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시대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180년 중반 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략과 국내의 혁명으로 인해 청 정부의 내부는 이러한 상황들을 계기로 새로운 환경으로 바꾸고자하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는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외세의 침략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였고 많은 외세와의 조약과 협상에서 항상 굽신대는 형태로 자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극한적인 비굴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의 역사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된 사실이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황제의 명령과 외부세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자들이 활개를 치고 다닐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근대 중국에서 이런 치욕적인 역사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도 농민을 비롯한 하층계급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 워낙 어려운 상황을 겪었기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저항조차 없었다면 공산주의로 전화되기 전까지의 중국은 더욱 어려웠을것이다. 서서히 자본주의에 물들어가는 중국내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쟁탈은 오히려 외세세력에게는 더욱 중국의 경제권마저 찬탈하려는 의도에 기름을 붓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요구되는 시점이면서 중국내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높이려는 시도의 기초가 되는 움직임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대립이 점차 심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발생된 사건이 의화단 사건과 신해혁명이다. 의화단 사건이 농민과 하류계층에 의해 발생되었다면 신해혁명은 그 당시 외국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으킨 혁명으로 외세로 부터 청을 지키자는 명분과 외세의 국토 및 경제침탈로 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발생되었다. 의화단사건은 하층민들의 억압과 빈곤으로 인해 하층민들에 의해 발생되었기에 조직과 활동을 리더할 리더가 없었고 리더가 있다하더라도 외세의 특징과 관부, 군사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많은 인력을 앞세워 발기되었기에 희생 또한 컸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에 반해 신해혁명은 손문을 비롯한 많은 공부와 해외정세, 과학에 대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그 효과는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청 정부의 무능력함이 이들 활동의 발목을 잡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봉기 및 사건을 외세에 의존하여 진압하고자 했다는것에서 더 큰 근본적이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세력의 국토 및 경제 침탈의 수법은 더욱 교묘하게 발전되었고 거대한 중국 영토의 외세 세력에 의한 분활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철도 부설권, 탄광운영권, 공장운영권 등등을 둘러싼 외세간의 야욕도 더욱 심해져만 갔으며 이러한 외세에 대한 야심에 치명타를 입힌것이 신해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해혁명 또한 외세와 권력자의 손길에 의해 완성되지 못하고 지식인들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일어난것이 5.4운동으로 정권의 타도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입각한 나라의 운영에 지식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청의 마지막 황제를 끝으로 원세개가 정권을 잡게되지만 그 또한 청왕조와 별반 다름으로 정치로 원망을 사게 되면서 저물어갔다. 손문에 의해 새로운 정치 형태와 공화정과 입헌군주제로의 발전을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되었으나 모든 국민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면서 결국은 마르크스주의 공산당으로의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오탈자 87페이지 1:투고->주고 124페이지 3: 명가량-> 명 가량 187페이지 11: 함->한 250페이지 12: 군사적전->군사작전 면 또는 군사적 면에서도 366페이지 5: 간명조관이이->간명조관이 438 페이지 6: 투요한->주요한 441페이지 11: 어는 곳으로->어느 곳으로 442페이지 14: 주용->주요 510페이지 2: 낳은->나은, 13: 일직->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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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 가장 좋은 길은 그 나라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역사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경험을 겪었으며 그 와중에 어떤 것이 형성되었고 또한 무엇을 지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까지. 역사란 단적으로 그 나라의 심층을 속속들이 살필 수 있는 나이테와도 같다. 그렇게 한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인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으로, 전혀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그들의 파워는 경제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미 앞으로의 세계 정세 판도가 중국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도 거세게 나오고 있는 참이다. 이러한 부상과 더불어 중국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늘고 있는 중국 관련 서적의 출판 현황만 봐도 증명된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너무 많은 책의 존재는 오히려 우리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책을 보아야 할 지 선뜻 가늠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히 제안하건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역사를 한 번 들여다 보는 건 어떨까? 물론 그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다 들여다보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굳이 그 전부를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지금의 중국을 낳은 것은 어디까지나 청 이후의 근대이므로 그 근대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했었던 현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중국학자 조너선 스펜서는 중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그 시작을 청나라에서 찾고 있다. 청대 들어와서 형성되었고 정비된 모든 것이 그대로 지금 중국을 다지는 데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우리는 흔히 '사관(史觀)'이라는 말을 듣는다. 독일의 해석학자 딜타이 이후로 역사도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이라는 게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사관이란 그 해석에 있어 기준이 되는 일종의 틀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사실을 놓고서도 역사학자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표방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사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이 청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조너선 스펜서와 전혀 다른 사관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현재 중국을 낳게 한 근원을 어디로 볼까? 난 그런 의문에서 전혀 다른 중국 역사를 말해줄 책을 찾고 있었고 이왕이면 조너선 스펜서와 같은 외부인의 눈이 아니라 그 내부의 눈으로 바라 본 중국을 들려주는 책을 보고 싶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게 바로 이번에 나온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라는 책이었다.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호승(1918~2000)이란 사람의 책이다. 호승은 중국공산당의 핵심이론가이지만 중국사학자로 더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핵심이론가라는 그의 약력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사관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조너선 스펜서와 같이 현대 중국의 시작을 청대에서 잡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소련의 일부 중국사 연구자들은 중국근대사의 기점을 17세기 중엽 청왕조의 건립 시까지 늘려잡고 있다. 이런 시대구분은 한편으론 서구 역사의 시대구분을 중국 역사에 무리하게 대입하는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중국 근대사의 주제를 중국 국내의 민족 모순에 국한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구분 방식은 비과학적이며 따라서 중국역사학계는 단연코 부정해왔다. (p.15)
당시의 소련 중국사 연구자들 역시 호승처럼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적 입장에서 역사를 보아왔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호승의 말에서 보듯 중국역사학과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눈으로 중국 역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호승의 말은 중국 역사는 어디까지나 그 내부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그대로 내가 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나를 말해준다. 내부의 눈으로 본 중국의 역사란 또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보았을 때 중국의 역사는 어떤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는가? 일단 그것은 시작점이 다르다. 호승을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 내부의 시선들은 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아편 전쟁에서 찾는다.
왜일까? 이건 마르크스 역사 유물론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에서 근대란 어디까지나 봉건이 아닌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어떤 생산 방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구분해왔고 거기서 봉건이란 쉽게 말하면 생산 방식이 소수의 손에 독점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거기서는 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중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것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생산도구와 다를바 없는 존재가 되는데 그게 바로 봉건제도의 핵심이다. 봉건이냐 근대냐의 구분은 민중이 자기 노동을 통해 생산한 것을 전유할 수 있느냐로 구분된다. 청대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청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편전쟁인가? 그건 아편전쟁으로 서구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탈해 들어오면서 청대가 와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통적으로 군림하던 계급들이 와해되기 시작하면 항상 그것을 대체하는 계급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에도 신흥계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서구 열강이 가져온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생겨난 자본가계급이었다. 이는 생산의 주요 형태가 소작에서 임금으로 바뀌는 것을 뜻했고 그렇게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계급이 태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출현 때문에 호승은 아편전쟁을 중국근대사의 시작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에서 중국 근대사를 세가지 중요한 기점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그 스스로는 그것을 '혁명 고조기'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에게 중국 근대사란 그렇게 나타난 중요한 세 차례의 혁명 고조기를 통한 무산계급과 농민 계급의 역량이 점차 강화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그렇게 세 차례의 혁명 고조기를 거쳐 무럭무럭 자라난 민중들의 역량으로 결국은 지금과 같은 사회주의를 이루게 되기까지의 과도기. 그것이 바로 호승이 바라보는 중국의 근대사다. 호승에게 있어 아직 사회주의가 도래하지 못한 중국의 근대사란 반(半)봉건, 반(半)식민의 시대다. 아직 무산계급이 여전히 자신이 생산한 것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봉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수많은 서구 열강에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으니 겉은 나라가 있으나 알맹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식민지의 상태라는 것이다. 진정한 중국의 현대는 오로지 그 반봉건과 반식민을 벗어난 상태에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모택봉에 의해 이룩하게 되는 중국 사회주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입장에서 그 현대로 나아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의 내용대로 하자면 민중의 역량이 강화되었던 기점들인 세 차례의 혁명고조기는 중요한데 그렇다면 그 세 번의 혁명고조기는 과연 무엇일까?
그걸 말해 본다면 이렇다. 제1차 혁명고조기는 1851년에 일어나 무려 15년간 계속된 태평천국의 난이며 제2차 혁명 고조기는 1898년 일어난 무술유신운동과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운동 그리고 마지막 제3차 혁명고조기는 1905년의 동맹회 설립과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이다. 책은 이 세 차례의 혁명고조기에 무엇이 일어났던가를 보다 세밀하게 밝혀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래서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이 책은 주로 네 개의 시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중 1부에 해당하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까지의 부분은 아편전쟁이 일어난 당시의 중국 정치와 경제 상황과 그 전쟁으로 중국 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밝혀 점차 혁명의 주요 주체가 되는 무산계급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 역량을 강화해나가는가를 보여주는데 이 시기엔 무엇보다 태평천국을 일으킨 핵심 계층이기도 했던 농민들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당시의 무산계급은 아직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해 그 빈자리를 전통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농민 계급이 떠맡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러한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봉건의 성격이 강했던 청 왕조는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하고 내부적으로는 점점 성장하는 민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회유책으로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이권을 노리고 달려드는 열강의 강요로 체제 변화에 나서게 되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태평천국의 난으로 발아되었던 씨앗은 더 크게 성장하여 결국은 또 한 번의 농민들이 주축이 된 혁명운동인 '의화단' 흥기를 낳게 만든다. 의화단 흥기는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의 동학과 닮은 점이 눈에 띄는데 동학이 동학이란 종교가 그 바탕이 되었듯이 의화단 역시 '백련교'라는 종교가 바탕이 되었고 또한 동학혁명운동이 당시 농민에 대한 수탈과 학정으로 대변되는 봉건제도에 대한 반발과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 운동 모두가 합쳐진 것이었듯이 '의화단' 흥기 역시 두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화단이 이토록 커다랗게 흥기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격심해지고 있는 서구 열강에 대한 반발이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많은 식민지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그 상황상 민족 해방 운동과 겹쳐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중국도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학이 결국은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듯이 의화단 흥기 역시 이미 들어와있던 열강의 연합군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동학과 의화단 모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혁명 운동이었고 거의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으나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져버리고 말았는데 이로써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농민혁명의 한계를 보게된다. 물론 여기의 실패에는 열강의 막강한 군사력이 단단히 한몫하긴 했지만 동학의 우금치 전투에서 보듯 전략과 전술에 따른 일사분란한 대응이 없었던 것도 분명 그 대패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혁명의 역량을 결집하고 나아갈 방향을 일사분란하게 정해주는, 머리와 같은 하나의 선도적 존재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호승은 제2차 혁명 고조기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그들을 제대로 이끌어줄 선도적 조직, 즉 중국 공산당의 필요성이었다고 말한다. 제3차 혁명고조기는 바로 그와 같은 중국공산당의 형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이다. 선도적 조직의 중요성은 상황 탓이다. 이제 중국 민중이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청 왕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들인 것이다. 강한 적을 상대할수록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건 적은 역량이나마 제대로 쓰여야 할 곳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관리와 결집이다. 그래서 선도적 조직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 시기 중국도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자각에서 중국 지식인들이 중심이된 동맹회가 1905년 결성된다. 말하자면 종국에는 중국공산당에 이르고말 그 일보라 할 수 있는 조직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것이 나중에 가서는 결정적으로 청왕조를 무너뜨릴 신해혁명으로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탈봉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중요한 내용만 발췌하여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주로 이 책이 어떤 내용의 책인지 알려주는데 중점을 두고 설명해 봤는데 얼마나 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호승의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이런 사관 위에서 중국 근대사를 집대성하여 보여주고 있다. 방대한 분량만큼 내용은 정치와 경제를 막론하고 아주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논지가 확고한만큼 중언부언없이 말하고자 하는 맥락을 끝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호승이 이 책을 통하여 처음으로 주장한 세차례 혁명 고조기를 기준으로 중국 근대사를 보는 방법은 이 덕분에 중국 역사학계의 정설로 자리잡았다고 하니 그것만봐도 여기에 투영한 그의 논지가 얼마나 선명한가 하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르크스 역사 유물론적 입장이라 거기에서 비롯되는 호불호가 있을지 몰라도 중국근대사를 헤아리게 해주는데 있어 이만한 안내서는 또 없다고 생각된다. 중국근대사는 오늘날의 중국을 근본적으로 형성한만큼 중국을 알기위해서는 보아두지 않으면 안되는 영역인데 그를 위해서라면 이 책 역시도 그만큼 필독서가 아닐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적 역사관은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도록 중국 역사를 바라보는 지배적 창구가 되어왔고 그만큼 다져진 내실과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보다 깊이 이해함에 있어서는 보다 다양한 관점들을 두루 보는 것만큼 더 좋은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런 관점의 역사도 한번쯤 보아두면 어떨까 싶다. 더구나 이 책은 굳이 그런 관점을 배제하더라도 중국 근대사에 대한 아주 상세하고도 충실한 설명을 담고 있으니 중국 근대사를 비행하는데 있어 더없이 좋은 항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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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된 호승(胡繩)의<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인간사랑, 2013)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 80년 동안의 중국근대사를 체계적으로 조명한 중국 근대사의 고전이다. 호승은 범문란(范文瀾)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기반해 중국근대사를 연구한 첫세대다. 이 책은 태평천국(1850-1864), 무술변법(1898)과 의화단 운동(1900), 신해혁명(1911-1912)이라는 세 차례의 혁명 고조기의 전후맥락을 상술한 '혁명사 서술'의 전범이 되는 중국학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21세기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자의 강직한 마르크스주의 사관이 다소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저자는 아편전쟁과 공산당혁명을 분기로 한 1840년부터 1949년까지의 중국을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한다. 옆나라가 그렇다면,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도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라는 얘기가 된다. 우리의 슬픈 근대사를 꺼내 비춰보니 호승의 사관이 틀린 것도 아니다. 생경할 수 있지만 올바른 평가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혁명은 농민혁명이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근대 중국의 혁명사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제1차 혁명고조기는 1851년에 일어나 무려 15년간 계속된 태평천국의 난이며, 제2차 혁명 고조기는 1898년 일어난 무술유신운동과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운동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3차 혁명고조기는 1905년의 동맹회 설립과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이다. 결국 혁명의 최종 완성은 마오쩌둥의 홍군이 찍게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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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의 핵심 이론가인 호승(胡繩: 1918 - 2000)이 쓴‘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관이 여실히 드러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규정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가 어떤 연유로 원시 사회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 인간 사회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등을 사적 유물론 즉 유물론적 역사관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호승의 책은 중국근대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자본주의, 문명 공산주의 등 익히 알려진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5 단계 가운데 근대사 즉 봉건제와 그에 근거한 모순을 밝히는 데 집중되었다. 이 부분에서 참고할 내용은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중국에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공산당을 선물했다는 진소명(陳少明), 단세련(單世聯), 장영의(張永義) 등의‘근대 중국사상사 약론’내용이다. 호승이 봉건적 중국의 전제 정치와 경제적 빈곤을 상당히 자세하게 밝혔거니와 이 둘은 공산주의의 빠른 성립과 성공을 추동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호승의 책에서는 모순이라는 말이 제 1장부터 등장하거니와 저자에 의하면 19세기 40년대 이전 3, 4백 년 동안의 모순은 농민 계급과 지주 계급간의 모순이었다. 한 철학자가 중국 역사의 한 자락을 형성했던‘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담들을 논하며 그 수많은 영웅담들은 피라미드 구조 꼭대기에서 발생한 거품들일 뿐이라는 말을 한 것은 유명하다.(‘인간의 얼굴’279 페이지) 우리는 그 철학자가 말한 예의 그 거품을 소수민족인 만주족 귀족이 한족 지배계급과 연합해 농민 혁명 세력을 진압함으로써 명 왕조를 넘어뜨리고 청 왕조를 세운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거품을 시발로 중화민국 성립에 이르기까지 본질은 그대로인 채 외형을 달리 해 이어지는데 그에 대한 비판은 호승의 책 전편에 걸쳐 유지된다. 저자가 말했듯 청은 고도의 중앙집중적 봉건 전제주의 정권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가 다룬 시기는 1) 아편전쟁에서 태평천국의 실패까지, 2) 태평천국의 실패에서 의화단 운동까지, 3) 의화단 운동의 실패에서 신해혁명까지, 4) 신해혁명의 실패에서 5.4 운동까지이다. 저자에 의하면 a) 아편전쟁은 봉건 중국이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진입한 전환점이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농민 봉기군에 대해서와 달리 대외 침략자들에 대해서는 승리하면 좋고 패배해도 작은 좌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봉건 통치자들의 계급적 입장이다. 저자에 의하면 b) 태평천국 운동은 중국 혁명의 복잡한 문제가 포함하고 있는 각종 모순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운동이며 중국에서 무산 계급이 형성되기 이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농민혁명이자 봉건 사회의 붕괴를 촉진한 실패한 혁명이다. 저자의 마르크스주의적 계급관은 중국에 전파된 기독교에 대한 정의(定義)에서 잘 드러난다. 저자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중국의 기독교는 중국 인민의 정신을 마비시키기 위해 서방 자산 계급이 전파시킨 것이다. 이는 종교와 미신이란 봉건통치 계급이 피압박 대중을 정신적으로 속박할 때 사용하는 무기(525 페이지)라는 저자의 다른 말과 상응한다. 교안(敎案: 외국 선교사와 교회에 의해 야기된 분쟁)이란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외국 교회와 선교사들은 자본 제국주의의 첨병(尖兵)이었다.(32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근대 중국의 무산 계급은 19세기 40년대와 50년대에 외국 자본주의 세력이 중국을 침입했을 때 빈곤한 노동인민이 외국자본으로부터 직접적인 수탈을 받아 고용노동자가 됨으로써 민족 자산 계급보다 먼저 생겨났다. 갑오전쟁(일명 청일전쟁: 1894 - 1895) 이후 중국에 가장 먼저 마수(魔手)를 뻗친 나라는 러시아였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혁명 이전의 러시아이다. 이 시기의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먹이감이었다. 갑오전쟁 이후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노골화했다. 일본을 적극적인 저항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영국, 러시아 등에 의존해 제압하려한 견제 대상으로 삼은 이홍장이 이이제이 정책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노신(魯迅)은 중국이 택한 이이제이는 이이제화(以夷制華)였고 결국 이화제화(以華制華)였다는 말을 했다.(419 페이지) 민족 자본과 매판 자본의 대립은 주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이런 말을 했다.“민족자산계급은 지주계급처럼 봉건성이 강하지 않고 매판계급처럼 매판성이 강하지도 않다. 민족자산계급 내부에는 외국 자본주의와 본국 토지와 비교적 관계가 많은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민족자산계급의 우익이다.”(443 페이지) 저자는 갑오전쟁의 실패는 사실상 양무파에 대한 파산선고였고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양무파를 넘어뜨린 것은 유신파의 공적이었다. 유신파는 혁명 세력이 아니라 개량주의자였다.(458 페이지) 개량주의자의 대표는 강유위(康有爲: 1858 - 1927)이다.‘대동서(大同書)’의 저자인 그는 변법(變法)의 시조였고 공자를 들고 나온 개량주의 노선의 사상가였다. 저자는 강유위가 주도한 자산계급의 개량주의 정치운동은 인민대중의 반제국주의 및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의 물결이 일어나려고 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운동이라 말한다.(504 페이지) 인민대중의 반제국주의 및 반봉건주의 혁명의 형세가 촉발한 운동이었다는 의미이다. 민간 회당인 백련교에서 시작된 c) 의화단 운동은 무술(戊戌) 유신(維新) 운동 실패 후 일어난, 중국 근대사 전기의 두 번째 혁명 고조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508 페이지) 태평천국 운동이 과학적인 정치 언어를 갖지 못해 종교 언어의 도움에 의존(122 페이지)한 것처럼 의화단 운동 역시 종교 미신적 색채가 강했다.(509 페이지) 백련교 중심의 세력이 의화회(義和會)가 아닌 의화단(義和團)이란 명칭을 부여받은 것은 관부(官府)의 유화책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는 운동이 제한적인 성과를 낳을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역대 농민전쟁 세력과 달리 부패하고 반민족적인 왕조(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의화단은 보청멸양(保淸滅洋)의 구호에 안주하는 데 그쳤다. 의화단은 반(半) 식민지, 반(半) 봉건적 중국에서 반(反) 봉건과 반(反) 제국주의의 역량을 제대로 융합해내지 못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지만 제국주의 열강으로 하여금 저항 역량을 공포의 눈길로 바라보게 했다. 하지만 태평천국 운동이 그렇듯 의화단 운동도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낡은 방식의 운동일 뿐이었다. d) 신해혁명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건립한 혁명(1911~12)이다. 신해혁명의 시발점은 1911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湖北)省 무창에서 일어난 무창봉기이다. 1900년에 청나라는 현대군인 신군(新軍)을 창설하고 현대식 장비로 무장하고 훈련을 시키는데 현대식 군사산업이 발달한 우창에 주둔하던 신군 사이에서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을 창시자가 된 손문(孫文: 1866년 - 1925)의 혁명이념이 널리 퍼진 것이 무창봉기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제1차 혁명인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지만 원세개의 개입을 초래한다. 원세개 타도를 위한 봉기(제 2차 혁명)가 이어지지만 진압되고 만다. 원세개의 독재정치에 반발한 민중의 봉기가 제 3차 혁명이다. 1912년 2월 12일, 청 황제가 퇴위를 선포함으로써 청 왕조 260여년의 통치가 종결되었다. 저자는 이를 자산계급 민주혁명이 거둔 위대한 승리하고 규정한다.(775 페이지) 남경의 임시 정부가 해산하고 손문이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원세개에 내줌으로써 신해혁명은 종말을 고한다. 제국 중국은 민국 중국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으나 자산계급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목표에 비추어 보면 혁명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780 페이지) 원세개의 배후에는 제국주의가 있었다. 황제가 대총통으로 바뀌었을 뿐 중국은 여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는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국가였다.(783 페이지) 1919년 5월 4일에 발생한 한 북경 학생애국운동에서 이름이 비롯된 e) 5.4 운동은 반일(反日) 애국운동의 성격을 띤 신문화사상 운동이다. 5.4 운동은 신해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공교국교화운동(孔敎國敎化運動) 및 원세개의 제제운동(帝制運動) 등 보수반동적인 운동이 일어나는 데 대한 반성으로 출발한 운동이다. 전기(前記)한‘근대 중국사상사 약론’의 필자들은“전통 예교에 대한 반항과 결별에 대해 말하자면 5.4 신문화운동을 일으킨 자들은 ’대동서‘보다 더 나가지 못했다. 카를 만하임의 논리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보수이고 유토피아는 급진이다. 후자는 전자의 대립물로서 출현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불합리하기만 하면 유토피아는 비판이라는 현실적인 의의를 획득한다. 당연히 유토피아 이상을 실현에 옮기면 아마도 훨씬 불합리한 이데올로기가 출현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호승은 5.4 이전에는 자산계급 민주주의와 개인주의가 기치로 내걸렸지만 그 운동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소개, 연구, 선전 등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고 말한다.(831 페이지) 5.4 운동은 자산계급이 영도(領導)하는 구 민주주의 혁명의 종결과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신 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833 페이지) 나는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를 읽으며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트로츠키주의자인 토니 클리프(Tony Cliff: 1917 - 2000)의’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를 떠올렸다. 토니 클리프는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라 주장하며 소련 노동계급이 아래로부터 투쟁으로 체제를 전복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복원하는 길임을 역설했다. 토니 클리프처럼 호승의 관심사가 사회주의의 정체성 해명에 있었다면 두 사상가가 사회구성체론에서 어떤 양상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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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이유는, 과거라는 거울에 현재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동시에, 바르게 비춰진 현재의 모습을 바탕으로, 백설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매직 미러처럼 미래를 통찰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누가 혹시, 이 시점에서 중국의 근대사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오늘자 경제뉴스에도 요란하게 보도된 것처럼 글로벌 증시에 미국을 밀어 내고 제 일의 비중을 굳혀 가는 중국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현대의 모습으로 빚어졌으며, 어떤 궤도를 통해 어느 지점으로 향진할지 귀추가 주목되어서이기 때문이겠습니다. 혹여라도, 그 많고 많은 중국 근대사 개론서 중, 이 책을 애써 골라 자신의 이해 증진에 길잡이로 삼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현대 중국인들, 현대 중국의 공권력을 담지하는 권위 있는 당국, 현대 중국에서 가장 높은 학적 권위를 지닌 입장에서, 주체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서술된 역사, 중국사, 중국근대사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은 열망에 가득한 독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중국인 권위자 호승(胡繩, 후셩) 선생이 저술한, 중국 역사학계와 공산당 이론가 집단의 사적 이해를 총집결하고 대변하는 결정판격 정사서입니다. 본디 중국은 지난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민간의 자의적 저술과 편찬에 제한울 가해 왔고, 당대 최고의 정제되고 박학하며 균형 잡힌 두뇌와 학덕의 힘을 빌려 공식 관사를 제작해 왔습니다. 중국 근대사를 공부함에 있어 그 교재로 쓰일 만한 책이 이 작품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쁜 일상에 쫓기는 우리 한국인이, 이제 세계를 향해 웅비하는 저들 대륙인이 내재적 관점으로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시간적, 자원적 제약 탓에 단 한 권만을 골라야 한다면, 이 책을 선택함에 있어 후회가 없을 것이라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중국 최고 권위자의 압축적이고 집약적이며 정제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2) 평면적 사실 나열이 아닌, 각 사건과 인물들의 경과, 행적에 관해 입체적이고 유기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 이 점에 대해 부언하자면, 예컨대 아편 전쟁은 1840~42년에 벌어졌고, 사건의 수습이 채 이뤄지기도 전에 애로우 호 전쟁 등이 터지며, 연합군의 북경 점령이 1860년에 벌어집니다. 이런 외침을 일괄하여 시계열로 배열한 후,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게 보통 사서의 구성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장의 편제가 정연하면서도, 교묘한 서술 운용의 묘로 태평천국 운동과 향용의 부상, 서양인의 침탈이 서로 밀접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음을 그대로 드러내듯, 서술의 입체화를 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묘한 구성은 양무운동의좌절과 중일 갑오 전쟁, 무술 변법의 실패,의화단 운동 시기를 서술할 때에도 다시 한 번 그 탁월함이 입증됩니다. 형식의 정제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내용의 서사적 이해에 최상의 효율을 기하는 패턴입니다) 3) 오늘의 중국을 이끌어 가는 집권 엘리트들, 최고 교양 지식층의 세계관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4) 맑스주의 사관에 바탕한 뚜렷한 맥락이 전 분량을 관통하므로, 마치 대하소설을 읽듯 주제의식과 메시지 전달이 분명해 읽는 재미를 준다. 이런 특징을 모두 갖춘 책이라면 다소 지루하지 않을까, 획일화된 사관만을 강조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분들은, 이 책 저자의 빼어난 문장력과 건전한 도덕 감정이 곳곳에 스민 내용을 탐독하는 사이 그 같은 선입견이 말끔히 걷혀지는 걸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혁명을 사랑하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다.(p632)", "봉건 통치자들의 절대 숙명은 계급 이해 관계의 보존이었기에,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에는 길들여진 가축처럼 무능, 양순하다가도,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요구하는 민중의 몸부림을 진압하는 데에는 기계처럼 무서운 효율을 보인다." 이런 주장, 명제, 재인용들은 문, 사, 철 텍스르를 읽는 보람이 어디 있는지를 재삼 확인해 줄 만큼, 읽는 이에게 뿌듯함을 안겨 줍니다. 번역도 명쾌합니다. 예를 들어 주중 참사관을 지낸 엘긴 공작의 이름 표기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 현대의 관행에 따라 '엘진'으로 적고 마는 것을, 다소 관습에 어긋난 당시 해당 가문의 용례를 정확히 따라 "엘긴"으로 적은 것은 역자의 박학함을 드러냅니다. 방대한 분량이나 한 손에 들기 가벼운 반양자이며, 인괘가 미려하고 노출된 한자가 다른 글꼴로 설정되어 있어 가독성이 매우 좋습니다. 제 블로그의 아래 링크를 누르셔서 각 장의 상론을 읽어 주시면 이해에 작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