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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릴 때 이웃으로 만나 근 이십 년간 엄마와 친구로 지내는 분 중 한 분의 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부음 자체도 충격이지만 이유가 놀라웠다. 뇌에 고인 피가 원인인데, 오랜 시간 지속된 폭행의 흔적이라고 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곪을대로 곪아 터져버린 가정폭력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쉽게 말한다. 다른 삶을 선택할 용기나 기약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건 그 사람에게도 책임있어. 허망하게 가버린 분이 이제는 이모나 다름없는 엄마 친구 분의 둘 중 하나인 핏줄이라는 얘기에 더 가슴이 찡한 건 왜일까. 도망은 주체적 선택이 될 수 없었을까. 아무도 구하지 못한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는 일이 다른 날보다 더 허망하고 주제넘게 느껴진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생각났다. 양육과 간병, 그 어느 쪽에도 경험 없는 나는 주어진 임무를 회피하려는 이들을 보며 얼마나 몰인정하기에 핏줄에도 그토록 무심할 수 있느냐고 쉽게 말해왔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 아주머니는 치매로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방치하고, 요양사 자격증을 보유해 인근 병원에 일을 다니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남말 하듯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자신 역시 특별히 다른 선택을 하지는 못할 거란 걸. 영화 <사랑해, 파리>의 한 에피소드에서 미혼모가 아이를 유모에게 맡긴 채 유치원으로 출근한다. 더없이 명확하면서도 고질적인 아이러니 아닌가. 주부가 제 집에서 청소, 빨래, 설거지, 요리를 하면 봉급을 받지 못하지만 타인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 벌이가 생긴다. 어린이집 교사의 폭행과 학대로 신음하는 아이들과 속상한 부모들의 문제를 정서적인 차원이 아닌 기술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제 집에서 제 아이를 돌보며 제 가족을 위해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에게 국가에서 지원금을 지급하면 더이상 좋을 게 없다는 순진한 제도에 생각을 끼워맞추게 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부합하지 못한 채 서로의 선악을 주장하는 곳에서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주는 더없이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아랍문화와 종교, 이란이라는 국가 상황의 틀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영화지만 살면서 만나는 상황에 모조리 들어맞을 만큼 보편성을 자랑하기도 한다. 자녀교육과 이 나라가 닥친 인종과 종교문제는 부수적이다. 더 나은 곳으로의 환경변화를 꿈꾸며 이민을 주장하는 아내 씨민과 아픈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 없는 남편 나데르의 별거는 단순히 가족해체와 인간 대 인간의 불통 이상으로 읽힌다. 의도적으로 피해를 입히거나 고의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지만 상황은 톱니바퀴에 물려 점점 악화되기만 한다. 남편의 무능력으로 일터에 나왔다 뱃속의 아이를 잃은 라지에는 순결한 희생양으로만 보인다. 차도르를 쓰고 다니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임신한 줄 몰랐다던 나데르의 주장이 선뜻 이해될 만큼 제 몸과 얼굴을 철저히 감춘다. 이 나라를 떠나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별거를 택한 씨민은 사건해결에 몰두하지만 오랜 시간 이 모든 사건에 발단을 제공한 최초의 인물 즉 가해자로 여겨진다. 책임량의 절대치가 다른 고의와 실수를 한낱 기술적이고 비유동적인 법이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서로의 주장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나빠지기만 하는 상황 앞에 다른 해결법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어떤 문제의 책임을 태초에 잘못한 사람에게만 뒤집어 씌워 비난하기 시작할 때, 그 편견은 가히 혐오스러울 정도다. 사건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비난할 대상을 먼저 찾는 우리의 각성 어린 태도 때문에 우연적 산물의 파편 앞에 속수무책으로 내려지는 즉각적 가치판단의 현실이 덧없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안간힘을 써가며 아버지를 돌보는 나데르, 이유 없이 해고되어 우울증과 충동장애를 앓는 호얏,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녹록치 않은 씨민, 임신한 몸으로 간병인 일을 하다 아이를 잃은 라지에는 물론이고, 극단의 부모로부터 선택을 강요 당하는 씨민과 나데르의 딸 테르메도 엄마를 따라 남의 집을 오가야 하는 라지에와 호얏의 딸 소마예도 안쓰럽고 처연하긴 마찬가지다. 이 모든 차이는 결국 가까운 사이라면 그저 쉽게 넘어갈 수 있기도 했을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번져나왔다. 가족, 이웃, 친구의 실수와 잘못을 얼만큼 용서하고 덮어줄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보면 노인의 상처와 유산의 문제는 분노보다는 슬픔의 영역 안에 놓인다. 계급, 종교, 성적 갈등에 뻗친 촘촘한 그물이 어느 한 부분 삶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종교적 신념과 도덕적 신념 간의 역설적 선택, 핏줄로 얽힌 가족의 조직적 합리화를 엿보며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를 넘어선 보수적 이란사회를 감상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틈틈이 갈라지는 절대기준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를 파편들을 제대로 세우거나 치우기 위해 끊임없는 각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