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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을 따져본다면, 아마도 '희노애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喜)과 노여움(怒)과 슬픔(哀) 그리고 즐거움(樂)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은 분명 긍정적인 감정이지만, 오래 지속되기는 쉽지 않다. 즐거움이나 기쁨의 감정은 또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쉽게 잊혀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노여움은 오래 간직할수록 그 자신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고, 때로는 황폐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노여운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가급적 빨리 잊는 것이 좋다.
하지만 다른 감정과 달리 슬픔은 오래 간직될 뿐만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떠올라 사람을 감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애도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인간의 감정들에 어떤 것이 있고, 또 그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작가인 저자 역시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고민한 결과, 우리의 삶에서 슬픔이 오래 지속되고 때로는 그것을 견디는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체득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저자는 '슬픔은 피동적 감정이 아'니며, '고통과 절망을 껴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능동적 감정'이라고 규정한다.
'문학과 예술의 운명'이라는 제1부에서는 저자가 알고 있는 다양한 인물과 작가들,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 등에 등장하는 상황을 '슬픔'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고 있다. 전혜린의 친구이자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이덕희, 소설가 최영주 등 저자가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슬픔이라는 주제로 엮어내고 있다. 이밖에도 프랑스의 시인인 랭보와 젊은 나이로 요절한 시인 기형도 등 다양한 인물들과 문학 작품, 그리고 영화와 음악 등에 관한 예술적 일화들이 저자의 관심에 포착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주제에 걸맞은 소재의 선택과 설득력이 있는 글의 내용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었다.
모두 4개의 글이 수록된 제2부에서는 '슬픔의 힘을 믿는다'라는 제목으로, 대학로의 '학림다방'의 폐업과 복원 과정과 앞서 언급한 이덕희와의 추억, 그리고 소설과 음악 등에 얽힌 간단한 에피소드들이 '슬픔'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엮여지고 있다. '학림다방'은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기에, 내가 서울에서 생활할 때 대학로에 가면 종종 들렀던 장소이기도 하다. 아마도 저자에게는 그곳이 특별한 장소였기에, 거듭해서 학림다방과 그곳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들에 관한 사연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폭력의 기억, 슬픔의 공동체'라는 제목의 제3부에서는 역사 속의 비극적 사건들이 만들어낸 슬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동안 우리 사회의 주요한 화두로 거쳐갔던 '박정희 유령'에 과한 논의는 물론, 공권력의 힘으로 세입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용산참사', 그리고 1980년의 '5월 광주'는 물론 여전히 진실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문제 의식은 넓게 포진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건들, 그로 인해 죄없이 쓰러져간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저자의 글들에 묻어나고 있다. 그것을 잊지않고 기억하면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감싸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제4부에서는 '고통과 희망 사이'라는 제목으로, 슬픔의 감정을 넘어 그것이 희망으로 바뀌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다양한 주제의 글로서 풀어내고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약 1년 동안 지속되어온 '코로나19'라는 질병을 극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설사 코로나19의 유행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고 해도, 그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암울한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빚어진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앞으로 우리의 삶은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슬픔의 힘을 믿는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충분히 공감되면서, 지금부터라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도 다양한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우리 주변의 상황들을 보건대, 여전히 많은 이들이 욕망을 부추기는 움직임에 동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이 '슬픔'의 상황이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되고, 조만간 많은 이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저자의 글을 처음 읽지만, 저자가 풀어내는 글의 내용과 의미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차니)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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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문학과 예술의 운명 이십 대 시절 이덕희는 세코날을 상습적으로 복용했다.여섯 알 이상 먹으면 생명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에도 열 알까지 먹은 적이 있었다.심지어 어떤 날은 몸 안에서 작용하는 세코날의 양에 따라 의식이 어떤 상태로 변하는지 너무 궁금해 일기장을 펼쳐놓고 직접 실험까지 했다. 16p * 아득하고 아찔할 정도로 죽음을 근접한 렌즈로 투영해냈다.수면제 과다복용과 과대망상증을 치명적으로 드러내며 아픔을 극도로 선명하게 그려낸다. 소설가 채영주의 죽음은 여느 죽음과 달랐다.사인은 위 무력증이었다.의사는 채영주에게 나타난 증상이 병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다.17p * 정신병이라는 놈은 현실세계와 소통을 거부하고 무의식 스르륵 빠져나와 의식을 잠식시킨다.저항해봐도 이성으로 묶어두려 애쓸 수록 퍼져나가 들어오지않는다.채영주는 문학에 열렬한 사랑을 보냈으나 대중성을 빗나간 작품세계로 인해 더욱 더 가열차게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연민의 시선으로 자꾸만 흘러내린다.심연의 고통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기형도가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은 1989년 3월 7일 새벽이었다."나는 그의 시들의 모아,그의 시들의 방향으로 불을 지핀다.향이 타는 냄새가 난다.죽은 자를 진혼하는 향내 속에서 새로운 그의 육체가 나타난다." 33p * 홀로 죽어간 영혼은 육체를 타고 흐른다.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며 저승이라는 낮선 세상과 만난다.그렇게 세상과 진한 결별에 이른다. 마시마유키오 "지금 자위대만이 일본의 혼을 유지하고 있다.그럼에도 일본 헌법은 자위대의 존재 근거를 부정한다."며 "헌법 개정을 위해 자위대가 궐기하라."고 호소한 후 할복 자살했다. 53p * 개인의 강한 신념이 낳은 호소력 짙은 외침은 결국 스스로를 던진 만큼 큰 위력을 가지고 있나보다.스스로를 끊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병들거나 사고사가 아닌 자살의 고통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이 폐부로 침투한다. 콜비츠의 예술이 '희생자'라는 존재의 본질을 더욱 심층적으로 파고든 것은 1914년 둘째 아들 페터를 전쟁에서 잃고 나서였다. 74p * 고통의 원천을 선명하게 마주보기하는 케테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시공간을 초월한 원혼의 아픔이 짙게 그려진다.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심연의 고리에 새겨진다.회복될 수 없는 아들의 죽음을 감뇌하며 먹먹하게 다가오는 멈춰버린 시간들과 마주한다. 2.슬픔의 힘을 믿는다 <학림다방 30년>에 이덕희의 사진이 실려있다.창가 테이블에 앉아 밤의 불빛이 비치는 창을 등진 자세로 왼쪽 손을 턱에 살짝 괴고 학림 내부에 있는 무언다릉 혹은 누군가를 보고 있다.멍해 보이는 표정에 슬픔이 느껴진다. 93p * 학림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이덕희에게 젊음의 성소이며 전혜린과의 추억,상실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아픔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하게 날이 선다.지울수도 품을수도 없는 고독한 죽음으로 향한다. 1980년의 광주를 들여다 보면 아우슈비츠와 광주는 역사라는 생명체 속에서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나의 소설 <슬픔의 노래>는 구레스키의 <슬픔의 노래>가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8p *아우슈비츠를 통해 권력,폭력,죄,구원의 문제로 이끈다.광주역사와 맞닿아 죽음과 고통의 통로로 절규를 통렬하게 간직하고있다. 3.폭력의 기억,슬픔의 공동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21p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의 네트워크로 자리 잡은 반공 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권력의 언어들을 끊임없이 생산해왔다. 122p '박정희 신화'의 핵심은 경제 성장이다.하지만 압축성장과정에서 재벌의 비대화,적대적 노사관계,관치 금융,정경 유착,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등 구조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는데, 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계에 이르렀다. 127p * 전쟁 전후 사회의 변화로 경제적으로는 놀랍도록 성장했으나 많은 제도들이 서로 상반되며 개개인의 개성과 삶을 억압한 것은 시대적 폐해의 상처로 남겨졌다.평등을 이유로 존재감이 사라진 자리는 허탈과 회안들이 새겨진다. 4.고통과 희망사이 정부는 경주 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양산 단층과 고리 원전단지와 인접한 일광단층이 활성 단층이라는 연구 결과를 알고도 숨겼다. 192p * 생명의 절박함과 직결된 지진 사건의 고통을 왜 은폐하려했을까? 남용되어버린 권력에 무너진 생명이다.외면을 넘어 죽음의 공포감이 드리운다.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존중되어야만 한다. # 삶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비춰진 죽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무엇이 죽음에 맞닿도록 이끄는가? 죽음의 파편들로 번진 상처와 굴욕은 아프지만 폐부에 틀어박혀 좀처럼 사라지지않는다. 겪어보지않은 시대적 배경과 많은 죽음들을 그대로 직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챕터별로 여러번 읽으면서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직설적으로 선명하게 그려진 죽음의 묘사를 내 안에 들이는 일은 두렵기도 하고, 왠지 한발 물러나게하는 공포를 느끼도록 이끌었다.자의와 타의가 섞여진 죽음의 표상들이 내린다.작가와 예술가들은 온몸으로 체화된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다. " YES 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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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운명적으로 불행한 존재인 것은 기쁨에는 한계가 있지만 고통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73) "
슬픔이란 무엇일까. 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때로 맞닿은 타인과 공명한다. 갈수록 슬픔이 힘을 잃어간다고 생각되는 요즘, 저자 정찬이 '슬픔의 힘'에 대한 첫 산문집을 냈다. 등단 37년만이다. 그가 믿는 슬픔들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요즘은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글 안의 상황이라도 답답하거나 우울한 과정이 이어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이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 성향이 더 강해진다고 한다. 웹소설, 라이트노벨, 웹툰 등 비교적 향유하기 편한 콘텐츠들의 전개까지도 인물에게 주어지는 갈등이나 압박 등 무거운 부분은 불호가 크고 '사이다 전개'를 선호한다고 한다.
물론 슬픔, 우울같은 무거운 감정에의 매몰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기쁘고 행복한 것만이 좋은 감정이고 슬픔이나 우울 같은 감정은 나쁜 감정으로 치부되는 이분법적인 사고나 오직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맹목 또한 균형적이지 못하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다섯 감정이 각자 또 서로 섞여 조화를 이루어 구슬이 되어 간직되듯이, 모든 감정이 조화를 이루어야 우리를 일깨우고 성숙하게 만드는 작용을 할 것이다. 때문에 '슬픔의 힘을 믿는다'의 돌아봄이 인상적이었다. 결코 원치 않지만 필수적인, 부정 안에서도 긍정을 낳을 수 있는 세계를 저자가 보여줄 것 같았다.
'슬픔의 힘을 믿는다'는 어찌보면 독특한 묶임으로 엮어졌고 어찌보면 누구에 대한 글이라고 해도 결국은 같은 결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결말로 완성되었을 책이다. 예술가들의 삶과 죽음으로 시작한 짧은 글들은 자연스럽게 독자를 물들인다. 수면제 41알을 모았다는 전혜린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현이씨'라는 작가의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이라는 웹툰을 떠올렸다. 파랑새로 그려진 친구와의 일화를 그린 만화를 본 적 있는데 (33화 무의미했다) 친구가 담담히 '난 이제 충분히 산 거 같아'하고 말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이덕희도 친구의 이야기가 여상히 들렸겠지, 언젠가 겨울날 비엔나 커피를 마시러 들렀던 학림다방을 기억하며 막막한 시작을 했다.
흐린 하늘 같은 옅은 물색의 표지에서 깊어지는 밤처럼 어두운 남빛까지 책장을 넘기며 천천히 생애를 관통하는 갖가지 푸른 일렁임을 본다. 천경자 화백의 이야기(25)에서는 불꽃처럼 일렁이고, 위로할 수 없는 슬픔(76)들을 볼때면 안개처럼 축축했다. 전혜린의 마지막으로 시작한 학림의 공간에서 이덕희의 부고를 전해듣는(89) 이어짐이 되었다. 이는 곧 그 눈을 세상으로 옮긴다. 2009년의 용산, 2016년부터 이어지는 탄핵정국, 광주와 민주화운동, 세월호... 그리고 올 초 예민한 갈등이 시작되었던 베트남과의 과거사로 확장되었다. 수많은 슬픔을 그러모아 이 한권을 내기까지 품고 있던 저자의 시간이 길다.
읽기 전에는 저자가 직면한 슬픔이 어떤 것들인지, 그 안에서 어떤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막연히 궁금했는데, 4장에 이르러서 그가 포용한 희망이 어떤 것인지 읽어보고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 희생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이 참혹한 순환의 고리(252) " 를 말하는 분명하고 날카로운 어조에 어딘가 베어나간 느낌이었다. 타인의 슬픔에서 언제고 타자의 자리에 머물렀던 증거가 그 안에 있었다. 세상의 슬픔들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거리감을 재고 있는 와중에, 어쩌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흑인인권운동에 대해서도 저자는 계속해서 공명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누어 이해할수록 가까워지는 것이란 듯이.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그 힘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감성의 성숙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뿌리가 그 안에 있었다. 문득 그랬구나, 싶어진다. 가벼운 것을 찾는 이유도 슬픔에 거리를 두게 되는 이유도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시대를 반명한다. '슬픔의 힘을 믿는다'를 읽으며 내가 무엇을 잃었는가 떠올려보았다. 잃었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고 간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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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너무 직접적이다. '슬픔의 힘을 믿는다'는 이 제목으로 인해 내가 그렇듯 다른 독자들도 책의 내용이 이러이러하지 않을까라며 의례히 어떤 방향으로 짐작해 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소재들 혹은 주변인들이 겪는 일들에서 작가가 느끼는 다양한 슬픔의 감정들이 어떻게 승화되고 극복되어 지는지를 잘 미화하여 쓰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았다.
저자인 소설가 정찬에 대한 어떤 사전지식이나 경험없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만났고 책을 읽기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겨 작가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었다. 젊은 소설가들이 활발한 문단에서 1980년대부터 활동한 비교적 연륜있는 작가로서 무게감있는 소설들을 많이 썼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이책은 경험많고 연륜있는 작가의 첫 산문집이라고 해서 조금 의아했다. 요새는 왠만한 신참 소설가들도 산문집 한권씩은 내는 추세인지라 무언가 시대의 흐름대로 가는 작가는 아닌건가 생각도 들었다. 이 책 '슬픔은..' 은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칼럼들과 문학, 사진, 음악에 대한 산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칼럼들은 우리시대를 관통하는 사건들과 사연들에 대한 날선 비판과 작가의 사유가 들어가 있는 짧은 글들이었다. 그러니까 책은 내가 상상했던것과 조금은 결이 다른 책이었던 셈이다.
1부 문학과 예술의 운명에서는 다양한 예술인들의 삶과 죽음을 조망하고 있다. 전혜린과 이덕희, 소설가 채영주, 랭보와 시인 기형도, 음악가 윤이상, 시인 허수경, 문학평론가 김윤식, 카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들에게 삶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에 그토록 고통스러워 했으며 예술의 영감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것이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윤이상은 독일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고향 통영을 그리워하며 그 끝없는 그리움을 음악으로 남겼고, 독일에 살았던 시인 허수경은 우리말인 모국어 대한 그리움과 어릴적 고향인 진주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시와 글로 표현했다.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워서 문맹이었던 카뮈의 어머니의 고독과 그 어머니의 고독이 낳은 아들의 고독. 아버지없이 자란 알제리 이민3세대 카뮈의 고독함은 그의 문학의 원천이었다.
2부 슬픔의 힘을 믿는다 에서는 슬픔의 노래를 작곡한 구레츠키와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 그리고 그와 나눈 대담을 바탕으로 저자는 '슬픔의 노래'라는 소설을 썼고 후에 두번째로 구레츠키를 조우하게 되었을때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구레츠키는 정말 놀라며 자신의 무엇이 영감을 주어 소설을 쓰게 했는지 궁금하고 당신의 소설을 읽으려면 한국어를 얼마나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슬픔의 노래'라는 소설의 심연에 흐르는 아우슈비츠의 비극과 슬픔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1부, 2부,3부를 거치며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슬픔이 있다. 우리시대 권력의 부조리와 자본주의의 시스템속에서 희생된 것들에 대한 숙고가 있다.
인간의 존재가 목적이 아닌 권력과 자본주의의 수단으로 전락되어질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를 역사를 통해 그리고 과거가 아닌 현재를 지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뼈아프게 잊지말고 기억하고 의식해야 함을 작가는 책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결코 두껍지 않은 이 책을 후루룩 읽어버리고 덮을 수 없는 까닥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기 떄문이다. 책의 말미에 문학박사 정희진의 글에서 깊은 공감을 하게된다.
정찬의 글은 독자에게 '줄거리의 소비'가 아니라 '생각하는 노동'을 요구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문장과 문장사이가 무간도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독자는 작가의 깊은 숨결에 어지러움을 느낀다. (p.258 나는 왜 정찬을 읽는가 中)
작가를 포함한 예술인에대한 정찬의 생각을 그의 저서 '슬픔의 노래'에 등장하는 연극배우 박운형과 소설가이자 기자인 나와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예술가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빛은 슬픔의 강 너머에 있다"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너는가?"라는 질문에 박운형은 대답한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하고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작가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작가 자신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그가 살아온 우리의 근현대사의 아픔과 그 시절 아픔을 겪었던 동료와 친구들을 바라보는 그의 인생의 무게가, 슬픔의 무게가 이 대목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설가가 쓴 산문집은 김애란의 '잊기좋은 이름'이후 거의 1년만이었는데 새삼 소설가는 달리 소설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최근 읽은 수필, 에세이들이 주로 사회 각층의 자신의 분야에서 알려진 이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글이었는데 글쓰는 일이 직업인 예술가가 남긴 산문은- 그게 비록 허구의 미학적 통로를 거치지 않은 평면적이고 직접적인 글이라고 해도- 그 글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잘 정제되고 다듬어진 언어들을 맞딱드린 독자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며 그 사유의 바다에 기꺼이 침잠해간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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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픔의 모음, 슬픔의 역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부터 이 책을 다 읽고서 덮기까지, 가슴이 묵직하고 먹먹해짐을 느꼈다. 언뜻보기엔 슬픈 사연들의 나열인 듯 하지만, 그 속에 전하고자 하는 깊은 이야기가 있어 마음을 울리는 책이다.
2. 시인 박노해 그가 전쟁터로 간 것은 "이라크의 죽어 가는 저 죄 없는 아이 곁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그는 이라크 전쟁이라는 인류의 불행에 깊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느끼는 것은 그 사건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행위다. 책임감이 불러일으킨 슬픔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 선포로 극도의 무력감에 빠진 그를 일으켜 세워 전쟁의 비극에 휩쓸린 아이들 곁으로 이끈 것이었다. 그가 세계의 분쟁 현장과 빈곤 지역, 지도에도 없는 마을을 찾아 그들의 절망과 희망을 사진과 언어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유는 '깊은 슬픔' 때문일 것이다.(63쪽) 어떤 사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느끼는 것이 그 사건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행위라는 말이 인상깊었다. 지구 반대편의 한 인생에 깊은 책임을 느낀다는 것. 누군가에게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고, 반대로 깊은 책임감을 느끼기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 역설적이면서도 납득이 되었다. 3. 애도의 깊이가 공동체의 깊이 인간이 운명적으로 불행한 존재인 것은 기쁨에는 한계가 있지만 고통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희생자를 진정으로 애도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 애도의 깊이가 공동체의 깊이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애도 행위를 못마땅해 하고, 혐오하고, 더 나아가 공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진실에 대한 불편함과 두려움이 있다. '애도의 깊이가 공동체의 깊이'라는 말은 가슴에 새겨진 듯 하다.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그 슬픔에서 성급하게 헤어나오고자 애써 묻어두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직면하고, 진정으로 깊이 애도하고, 그 슬픔의 한복판에서 공동체의 힘을 발견할 때 임을 느낀다.
4. 우리가 다 같은 죄인이다. 소설가 조세희는 2009년 11월에 펴낸 '작가선언 6.9'의 용산참사 헌정 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발문에서 "동시대인으로서 이러한 비극과 슬픔, 불행한 폭력을 용인한 우리가 다 같은 죄인이다."라고 썼다. 나와는 상관없는 듯이 느껴지는 참사, 비극이 발생했을 때, 인간으로서 때로는 비인간적인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참사앞에서 그 누구도 나와 상관이 없다거나 나에겐 잘못이 없다고 쉬이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외면함으로써 지금 고통받는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가 암묵적으로 불행을 용인함으로써 고통받는 약자는 누구인지. 고통이 만연한 현실 앞에서 그 누가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 이 책은 슬픔에 대해 본질적으로 마주하게 하고,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 거대한 힘을 발견하게 한다.
YES24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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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신기한 책이다. 슬픔의 힘, 그리고 믿음. 슬픔과 힘.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단어에 의문을 가지고, 그러나 슬픔이 힘이 있길 바라며.. 책을 만났다.
책장을 넘기며 가슴에 막혀서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사건과, 예술과, 기억을 마주한다. 각자의 내용들은 서로 다른 슬픔을 이야기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든다. 이 안에는 평소에 말하고 싶던 이야기들이 모두 들어 있다. 책의 뒤편에 독자의 글에서 작품의 양과 질에 비해 유명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유명하지 않은 작가라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작가의 시선이 깊고 넓다. 모두가 보는 것을 보지만 편협하지 않고 모두가 입 밖으로 정리하기 힘들어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남겨 준다. 이야기들은 슬프다, 그러나 읽다보면 슬픔이 정화되어 스며든다. 슬픔을 딛고 슬픔으로 말미암아 힘이 되어 계속해서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손에 쥐어주고 그것을 가지고 지속력으로 삼을 수 있게 도와준다. 예술을 사랑하고, 역사를 기억하고, 정치를 곱씹으며 생과 그 모든 것들이 함꼐 감을 알아야 하는...생을 틔우는 모든 것들이 그것을 자양분 삼아 그 위에 차곡차곡 자리함을 함께 이야기 한다.
이 책을. 함께 나누고 싶다.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슬픔의 축적이 아님을, 생은 본질적으로 슬픔을 껴안고 가야 함을, 우리가 불행이라고 느낀 것들의 희생과 가치를 잊지 말고 되새기고 싶다.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창자가 녹는 슬픔을 토해내도 그 슬픔을 조롱하고 애도하지 않는 군중들의 모습에서 깊은 절망을 느낀다. 그들은..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절망이 아닐지라도 생을 영위하는 인간의 차원에서 공감은 아니라도 최소한 조롱하지 말고 지나가야 했다. 작가는 말한다. 슬픔이 쌓여 산이 되더라도 끊임없이 꺼내서 육신화 해야 한다고,
책에 담긴 슬픔의 형상들이 서글프고 심장이 아릿아릿..아프다. 하지만 글을 따라 그 길을 따라가면 어느새 슬픔이 단단해져 견고해지고, 이겨 낼 수 있다는 정서적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게 된다.
슬픔이 왜 힘이 있어? 슬픔은 힘을 거두어 가는 게 아냐 슬픔만큼 힘을 꺾는 게 있어
라던 나의 생각이 바뀐다.
슬픔은 힘이 있다. 나아갈 힘을 내민다. 슬픔을 손으로 붙잡고, 마주하고 나아가면. 마침내는 슬픔과 동행하며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각기 다른 모습의 피에타라도 좋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아내고. 타인의 슬픔을 애도하고 나의 슬픔을 담아내자..
나의 피에타를 세워, 바라보며 잊지 않겠다. 슬픔의 힘을.
온전히 믿는다.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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