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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이야기 <개인적인 체험>을 읽고
한 남자가 서점에서 '수그린 남자의 두개골 모양'을 닮은 아프리카 대륙 지도를 사서 나온다. 그의 별명은 '버드(bird)'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의 작고 마른 몸매와 얼굴 생김새는 새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그가 직면한 현실은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그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날아가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곧 출산을 앞둔 아내와 학원 강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아프리카를 향한 버드의 로망(혹은 도망)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멀게만 느껴졌으리라.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 주세요. 아기에게 이상이 있어 의논해야 합니다.(31쪽)" 잠결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지난 밤 버드가 마주친 남창, 용무늬 점퍼를 입은 청년들, 꿈속에 아프리카 멧돼지와의 해프닝이 결코 우연이 아닌 불길한 징조였음을 상기시킨다.
버드의 아들이 두개골 이상으로 '뇌 헤르니아(腦 hernia)'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이다. 신생아를 '겐부츠(現物)'라 부르며 '물건' 취급을 하는 산부인과 원장(의 말이 가이부츠(怪物), 즉 '괴물'로 들리는 버드)부터 뇌 헤르니아인 신생아와의 만남을 행운으로 여길 뿐아니라 해부 참관을 기대하는 산부인과 의사, 아기의 분유량을 조절하거나 분유 대신 설탕물을 주어 쇠약사를 유도하려는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 딸에게 아기가 심장병으로 숨진 것으로 하자는 장모에 이르기까지, 눈앞에 벌어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한 버드에게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말은 위로는커녕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특히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태어나는 편이 좋은 건지 어떤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시대(63쪽)"라는 장인의 말을 통해 장애아 출산에 대하여 (소설이 쓰여진) 1960년대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부모가 자식(장애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만든다. 버드는 방황한다.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고 대학시절 여자친구를 만나 성적 욕망을 표출하며 (술기운을 빌어) 잠도 잔다. 처음에는 내 예상을 빗나간 전개에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독자이기에 앞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버드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고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자위하지만, 파도처럼 밀려드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안도감과 공포감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무기력의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버드를 보면서 다시금 '이것이 인간(인생)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작가는 극한의 상황에 처할수록 식욕, 성욕, 수면욕 등 기본 욕구가 더 절실해짐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그의 행위에 윤리적 잣대를 대자면 독자마다 공분과 공감이 엇갈릴 듯하다. 여기서 오해보다 이해를 위하여 버드의 여자친구이자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히미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개인적인 체험'을 겪는다. 결혼한지 1년만에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부터 낮에는 명상에 잠기고 밤이 오면 스포츠카로 거리를 질주한다. 버드와 히미코는 개인적인 체험과 (버드에게는 다소 왜곡된) 공통의 추억을 공유하며 몸과 정신의 대화를 나눈다. 그 중에서 히미코가 설파하는 이른바 '다원적 우주론'이 눈길을 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또 하나의 우주에선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버드의 아기를 둘러싼 세계가 있으며, 그곳에는 행복한 아빠(버드)로부터 경사로운 소식을 듣고 그(히미코)와 함께 축배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이미 요즘 유행하는 평행우주(멀티버스) 이론을 차용한 작가의 센스도 놀랍지만, 어쩌면 히미코가 힘든 나날들을 버티려고 만든 자기 체면(혹은 주문)과도 같은 소설적 장치로도 읽혀진다. 과연 버드는 계속 살아 남은 존재로 자기가 바라는 우주를 찾아갈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제목은 <개인적인 체험>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2023년 3월에 세상을 떠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버드의 아들은 (현재 음악가로 활동중인) 오에 히카리에서 '촉발'된 것이 맞지만, 버드와 작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소설에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문제라는 작가의 시선을 담아낸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후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이며, 오에 겐자부로의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어떠한 '개인적인 체험'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둘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같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하여 인식의 전환과 현재보다 나은 미래로의 길을 모색하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그에 응답하여 우리의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회복하는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기도 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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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꿈』은 한 편의 잔잔한 시(詩) 같기도 하고, 어두운 숲속을 걷는 듯한 신비로운 여정이다. 얼어붙은 겨울 새벽, 보몽 성당 아래에서 발견된 앙젤리크라는 고아 소녀의 이야기는, 차갑고 무자비한 현실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뿜어내는 작은 불꽃처럼 우리 마음에 스며든다. 어둠을 뚫고 자라나는 어린 싹처럼, 앙젤리크는 위베르 부부의 사랑 어린 손길 아래 거친 본성을 서서히 거둬 내며 순수한 영혼으로 피어난다. 그녀의 삶은 유전과 환경, 그리고 배움이 뒤엉켜 완성되는 한 인간 존재의 기적을 섬세한 붓질로 그려낸다. 졸라는 여기서 자연주의라는 거대한 과학적 탐구의 틀 위에 신비주의라는 미묘한 빛을 더한다. 현실과 꿈, 이성과 믿음 사이를 오가는 앙젤리크의 내면은 마치 두 세계가 공존하는 경계의 바람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녀가 몰입하는 ‘황금빛 전설’의 성인들은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내면의 상처와 갈망을 품고 있는 우리 모두의 거울을 비춘다. 그 거울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운명, 그리고 그 너머의 미지를 동시에 들여다보게 된다. 앙젤리크와 펠리시앵의 사랑은 마치 결빙된 호수 밑에서 요동치는 조용한 파동처럼, 겉으로는 평온해도 속은 끓고 있다. 두 사람을 가로막는 사회적 제약과 부정적인 시선은 차가운 벽이 되지만, 그 벽 끝에 드리운 그림자는 다시 꿈과 희망을 희미하게 환기시킨다. 결국 앙젤리크가 맞닥뜨린 죽음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그토록 꿈꾸던 이상과 현실이 만나는 순간의 아련한 울림이다. 이 울림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부서지기 쉬운 소망들을 깨우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새삼 사유하게 만든다. 졸라의 세밀한 묘사는 중세 성당의 고요하고 엄격한 공간을 거닐게 하고, 오래된 종교 의식과 그 안에 담긴 믿음의 무게를 만져보게 한다. 동시에 19세기 프랑스 소도시라는 배경에서 우리는 산업화와 사회 변화라는 거센 파도를 느끼며, 인간 내면과 사회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자연주의적 시선으로 관찰한다. 그 힘으로 이 소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시대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로 확장된다. 결국 『꿈』은 우리 내면의 무형의 힘?그 꿈과 믿음, 상처받은 영혼의 부름이 만나 빚어내는 기적과도 같다. 졸라가 말했듯, ‘세계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내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문장은, 눈부신 현실의 상처를 안고도 밤하늘 별빛처럼 반짝이는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 문학의 틀을 넘어선 이상, 영혼의 자유와 운명을 탐구하는 문학적 보물이다. 삶의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며 우리 내면 한 켠에서 부드럽게 피어나는 작은 빛깔을 발견하고 싶은 이들에게, ‘꿈’은 단단하고도 부서지기 쉬운 인간 존재의 심연을 세련되고 감성적으로 조명하는 기념비적인 창작이다. 졸라의 글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마음에 스며들어, 자신만의 삶과 꿈을 다시 쓰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
| 열흘이나 되는 황금 연휴 계획으로 세운 것은 고전이라 불리우는 책들을 읽는 것이었다. 그 중 내가 선택한 소설 중 하나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다. 토마스 만의 소설로는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로 출간된 토니오 크뢰거뿐이다. 독일 소설을 접해 본 것도 헤르만 헤세를 제외하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토마스 만의 소설로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의 산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에 마의 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이 요양원에 있는 나오코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양원에 대한 묘사가 마의 산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다. 김영하가 언젠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은 있는 소설을 다시 쓰는 데 있다고 말했던 게 이해가 된다. 마의 산을 완독하고 나면 다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보고 싶다. 을유문화사의 번역이 좋다고 해서 이 책으로 선택했고, 미리보기로 앞부분을 비교해보았다. 그렇게 선택한 것인 만큼 잘 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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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평범함 속에 특별함을 숨겨 놓는 재주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드라마를 즐기지 않게 된 이유가 바로 <워싱터 스퀘어> 와 같은 이야기들에 지쳤기때문인데,묘하게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신문에 이 소설이 연재되었다면,다음 회차를 기다렸을 거다. 너무 뻔하고 때로는 유치하기도 한... 어느 책 제목에 인용된 것처럼 여자 주인공만 모르는 상황에 속터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뭔가궁금해지는 신기함이라니...작가의 바람도 어쩌면 독자들 속을 터지게 하고 싶어서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우선 소설 제목이 '워싱턴 스퀘어' 인것이 궁금했다. 작가의 생각이었는지,훗날 평론가들의 분석이었는지는 모르겠다.무튼 제목에 대한 이유가 납득 되었다. 소설이 씌여지던 당시 여주인공을 내세운다면,당연히 주인공의 이름을 가져오는 것이 기본이나..이 소설은 여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지 않았다.소설에서 그녀의 존재가,주인공인 듯 주인공이 아닌 이유인 탓이다. 겉으로 드러난 얼개는 순정을 배반당한 여인의 이야기정도로 보아도 무방하지만,이 소설을 끌고 가는..아니 적어도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인물은 캐서린의 아버지 슬로퍼의사와 그녀의 약혼자를 자처했던 남자 모리스타운젠드였다. 아름답지 않은 그녀에게 모리스..가 접근할 이유는 너무 뻔했다. 그녀의 재산!! 문제는 그녀만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그런데 소설이 이렇게(?)만 흘러갔다면 나는 이 책을 읽다 덮었을텐데...그녀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있었다는 거다.-물론 자란 환경을 탓하며 스스로 성숙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잘난 의사아버지는 딸을 사랑을 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교만과 오만,냉소,자만의 전부였다.그런데 모리스는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이 남자가 아버지와 다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결핍은 나를 성숙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동시에 결핍은 개서린처럼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지극히 자신의 시점으로만 사람들을 보았다는 사실...그래서 나는 '워싱턴 스퀘어'에 대한 느낌을 역자와 다른 해석을 해 보게 되었다.비록 여자주인공임에도 이름을 건 제목으로 등장하지 못했지만..이 소설에서 최후(?)의 승자는 캐서린 처럼 느껴졌다.그녀가 더이상 사랑을 할 수 없는 여인이 되었다는 것은 슬프지만..그녀가 마치 워싱턴 스퀘어 아치 처럼 느껴지기도 했고,항상 그자리에 변함없이 있을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나보다. 사랑에 배신 당하고 난 후 자신의 고모와 다르게 사람들에게 연애 상담도 해주고..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도..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그녀가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스케치될때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순수했던 인물은 캐서린이 아니였을까... 자신은 잘났고,딸은 부족해서 항상 자신이 옳다고만 믿었던 의사는..딸에게 좀더 현명한 방법으로 딸의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주어도 좋았을텐데..그는 끝내 딸이 품었던 사랑의 순수를..보지 못했다. 모리스는...말할 필요도 없이 나쁜사람이였고...그러나 모리스때문에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고모의 욕심도 무서웠다.순수한 사람에게 누군가의 욕심이 들어오는 순간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모두가 지켜보았다...캐서린을 두둔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캐서린에 대한 마음은 이중적이었는데...그녀가 멋진 사랑을 다시 하게 된다거나,모리스와 해후를 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ㅡ는 식으로 결론을 맺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그녀는 워싱턴 스케워 같은 사람으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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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옮김)/ 을유문화사(펴냄)
〈마의 산〉 읽기는 넘지 못할 산을 오르는 일과 같았다. '목적'이 분명한 독서였다. 나를 '객관화' 하는 작업이었다. 내 안에 거하던 존재 하나를 들어내는 작업, 그리고 마침내 그것과 이별하고 소멸하는 과정이었다. 분명 아플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작한 독서였다. 책스타그램을 시작한지 3년!!!! 책리뷰만 올리던 계정이 최근 몇 달 전부터 인친들과 조금씩 소통을 시작했다. 글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다 보니 주고받는 댓글이나 디엠을 통해 발신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읽힌다. 예를 들면 인친이 '고마워'~~라고 단 세 줄을 찍어 보내지만, '고마워'의 밀도가 큰 지 작은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담겨있는지 이런 것을 생각, 또 생각하다가 결국 '나는 내 생각 속에 갇혀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를 가두었는지 모른다'...
어리석은 내게도 기회가 온 것인가! 마의 산을 함께 올라주신 분!!! 혼자서는 넘지 못할 산을 기꺼이 함께 올라주신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게 무척 특별한 분이다.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처럼 젠틀(젠틀? 이 단어보다 더 멋진데, 암튼 지금 이 단어 이상의 표현을 찾지 못하겠음....)하고, 나같이 '목적'있는 독서만 하는 '가짜' 아니라 순수한 참독서인, 문장 하나하나에 힘을 주지 않아도 '힘'이 실리는 분, 진중한 매력의 소유자. 가끔 허를 찌르는 유머감각까지 있으신 순. 수. 교. 양. 인이었다. 사람은 겪을수록 실망도 하게 되는 법인데, 오히려 마의 산을 오르면서 그 인품에 다시금 반하게 되는 분!!!! 감사의 말씀을 서두에 미리 전하고 리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집중력이 그리 길지 않아서 굵고 짧게 평소 전투적으로 빡독을 하는 나는, 이번 책 역시 평소하던대로 자꾸만 전쟁 치르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정독, 정독!!! 이번에 읽으면 다시는 안 읽어도 될만큼 꼼꼼히 읽자는 마음으로 상권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하권에 와서는 자꾸만 집중력이 떨어졌다.
〈베네치아의 죽음〉때문이다. 내가 토마스 만에게 미치게 된 것은..... 내가 사랑한 것은 다 죽어있었다..... 도스토옙스키, 다자이 오사무, 백신애..... 그리고 지금 토마스 만을 여기에 더한다. 그러나 나의 그이, 토마스 만을 사랑하는 마음은 기존에 세 지성인을 사랑하던 마음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아직 뭐라고 이름 붙이기 애매한 사랑이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읽던 9월에 나는 벽돌책을 병렬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벽돌책보다 더 읽기 힘들었다. 토마스 만 특유의 감정 하나도 없는 건조한 텍스트가 나를 울렸다.... 자꾸만 걸려 넘어졌다. 앞부분을 늘 하듯이 3독을 하고서야 토마스 만의 소설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노력없이 좀처럼 읽히지 않는 소설이다. 그 때 문득, 아하 마의 산!!!!이 떠올랐다. 마법의 산,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환자가 되거나 죽어서 나오는 요양원 다보스!!!! 토마스 만의 소설에는 늘 '죽음'이 있다. 나는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리뷰마다 단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죽음이었다. 다만, 밀어냈을 뿐 죽음은 늘 곁에 와 앉아있었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작품의 큰 줄거리 1430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 스물일곱의 건강한 엔지니어 청년이 스위스 다보스의 요양원에서 보내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7년의 이야기. 그게 전부인데 우리는 이 책을 20세기 인문 교양의 총서라 불러도 좋을 만큼 음악, 미술을 포함한 예술의 언급, 생리학 화학 공학 등 전반적인 과학의 향연. 그리고 의학, 병리학, 지리, 역사, 전쟁, 사회, 법학, 정치, 종교, 인종 갈등, 국가주의 등 주인공이 탐구하고 토론하고 연구하는 방향대로 독자도 함께 깊이 매몰되는 독서였다.
마의 산 읽기가 쉽지 않은 점? 첫째, 대다수의 책들은 읽으면서 가끔 어려운 '마의 구간'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 구간이 다 마의 구간으로 되어있다. 이런 책은 처음 만나본다. 수월한 텍스트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유일한 로맨스 장면도 실제 이들이 정사를 나누었는지 아닌지 아리송한.....) 둘째, 주인공의 독백이 일곱, 여덟 페이지 이상 지속되기도 하고, 분야 전공자나 알아들을법한 병리학적 지식이 무려 열 페이지 이상 언급되기도 한다. 셋째, 인물들이 끝도 없이 계속 등장한다는 점이다. 상권의 후반부까지는 인물에 대해 상세한 메모를 했는데, 하권에 가서는 두 손 두 발 들고 그냥 '아하 뉴페이스구나' 이 정도로만 간단히 메모하며 읽었다^^
책의 거의 유일무이한 유머 하권에서 고문관 베렌스(의사이자 이 요양원의 운영자)가 한스에게 젊은 남자들의 성욕에 대한 언급을 하는 부분이었다. 젊은 남자들이 이 산중의 적막한 요양원에서 성욕을 참기 어려워하는 부분을 걱정하며 수학 문제를 풀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인데 어찌나 진지하게 말하던지, 여기서 혼자 빵 터졌다. 수학 여신은 순결하다!!! 이 문장에도 빵 터졌다. 수학 공부를 하면 성욕 억제에 도움이 된다??? 이거 근거 있는 말인가?ㅋㅋㅋㅋ
상권이 끝나자 관련 논문 한 편을 꺼내 읽었는데, 덕성여대 윤순식 교수님 논문이었다. 이 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한국의 근대 문학과 비교하여 분석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결점을 찾아가는 독서를 좋아한다. 특히나, 무진기행과 마의산을 비교하신 점 정말 공감되고 인상 깊었다. 두 작품에서 죽음은 보편성이 아니라, 희비극성을 드러낸다. '무위'의 삶, 자유, 방문객이 정주민이 되어 버리는 마의 산, 자유의 최고조는 절정은 곧 파멸이라는!!!!! 죽음과 함께 있되 정신이 죽음에 지배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제의식이 뚜렷이 드러나는 작품.
그리고 책을 완독한 후, 게이 서브텍스트로서의 소설, 성 정체성의 고뇌의 관점에서 보는 논문을 한 편 더 읽었다. 만의 소설에는 병, 불구, 죽음, 예술성이 동성애가 등장한다. 세상과 운명에 대한 분노와 증오 체념이 죽음으로 귀결된다고 보는 관점에서 소설을 다시 읽으면 대사 하나하나, 등장인물의 행동 하나하나가 달리 보인다. 등장 인물중 한스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중 있는 인물 중 하나인 세템브리니. 이 이름에 담긴 의미는 몸을 팔러 오는 9월의 남자, 동성애적 의미, 베니스 방언이자 은어의 의미가 담겨있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작품 곳곳에 동성애 연인을 감추어 놓았다. 거룩한 그리스적 동성애를 20세기 초반 인문주의 교양소설로 승화시킨 토마스 만.
비중 있는 인물들이 꽤 많았다. 요양원이 배경이다 보니 대부분의 인물들이 다 환자들이다.
◆한스의 사촌 요아힘. 폐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 문병오는 한스, 딱 3주만 머무르기로 한 것이 7년이 되어버리는 신비한 마법의 산이다. 요아힘은 군인이 되고자 하지만, 그의 건강은 좀초롬 나아지지 않았다. 채 낫지도 않은 몸으로 전쟁에 참전한 그는 다시 돌아오지만 요양원에서 삶을 마치게 된다.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레오 나프타 VS 계몽주의자인 세템브리니의 대결~~~!!!! 이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언쟁, 토론이 아니었다. 보수와 진보의 싸움, 무정부주의자와 관료주의, 이상주의적 극단 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싸움, 곧 닥쳐올 나치즘, 파시즘의 암시. 빈부격차와 불평등, 자연 회귀와 이성의 갈등..... 이 부분은 표로 만들어도 될 분량인데 두 사람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 흑과 백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수 페이지에 걸쳐 계속되는데 마침내 나프타의 권총 자살로 끝나고 만다. 안타깝다. 그의 죽음 앞에서 세템브리니는 탄식한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프타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템브리니도 병석에 눕는다.
◆러시아 여인 쇼샤 부인, 이 요양원은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식사와 산책, 공연과 강연회 등 최상의 것을 대접받는다^^ 매 식사를 최대한 화려하게 식당에서 다 함께 하는데, 식당에 나타날 때마다 문을 쾅 닫고 나타나는 여자. 흰 피부에 창백하고 가슴이 풍만하고 몸매가 아름다운 이 여자는 한스를 이 요양원에 7년이나 머물게 하는 원인이다. 하룻밤을 함꼐 보낸후,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하 권에서 이 여자는 새로운 남자와 함께 다시 나타난다.
◆쇼샤부인의 새 연인이자 커피 재배 부농인 네덜란드 인 민헤어 페퍼코른. 그는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체격도 크고 성격도 밝아서 한눈에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는 처음부터 한스와 쇼샤부인과의 과거를 눈치채지만 끝내 모른척한다. 밝은 성격으로 잘 지내는가 싶더니, 요양원 생활 중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독극물을 이용한 자살.... 이에 충격을 받은 부인은 떠나버리고 한스는 더욱 요양원 생활에 집착하게 된다. 이후, 한스는 정신분석학 크로코프스키 박사가 이끄는 심령술, 최면술에 빠지게 된다. 죽은 혼 요아힘을 불러내기 위해 그들을 강령술까지 동원하는데....
소설의 공간적 배경, 다보스 요양원 지금도 숙박이 가능한 이곳은 실제 있는 요양원을 모델로 했다. 토마스 만의 아내가 병에 걸려 이곳에서 요양을 했고, 이때 만난 인물을 소재로 집필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이 7년간의 이야기를 쓰는데 총 1년이 걸린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것도 처음이다. 스위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마을 다보스에 꼭 한 번 가고 싶다.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요양원 아미료를 기억하실 것이다. 주인공 나오코가 기거하는 언덕 위의 아름다운 요양원은 토마스 만의 소설 다보스 요양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 세계대전 작품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건조하고 비관적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담고 있다. (이것도 내 주관적인 느낌) 당대 상황, 전쟁을 예감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있다. 유럽 사회의 고질적인 질병, 전쟁 징후, 내적 열병, 정신 상황의 문제점 + 사랑과 우정, 반복과 질시, 삶과 종교, 철학과 역사, 사회와 신화 + 동성애적 퇴폐적인 도식으로 그리는 큰 그림이다. 20세기 최대 걸작!!!!!!!!
토마스 만의 여성관 그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여성들은 풍만하고 육감적이되 머리가 빈, 생각이 없는, 아니면 똑똑하되 수다스러운, 교양이 없거나 늙은 여자, 젊거나 성적 매력 다분ㅎ하고 명랑한 여자, 아니면 간호사 알프레다처럼 건조하고 딱딱한 분위기의 여자들....
"여성의 조형성은 지방질에서 나온다"?라는 베렌스 의사의 말에 기겁했다. 여성을 폄하하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부분, 내지는 당대 시대상 수준이 이정도라 생각하면 그만인데.. 글쎄, 나는 아직 문장과 작가를 완전히 배제하는 수준 높은 독서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초보 독서인이라 이런 문장을 만날 때 많은 고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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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결말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7년이나 단잠을 잔 한스, 에로스의 세계, 몽상의 세계에 기거하던 한스, 오로지 정신만 있는 세계에서 한스는 마침내 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총알에 날아다니는 전쟁의 포화속에서 한스는 죽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소설은 한스의 운명을 알려 주지 않고 열린 결말로 끝난다. 그는 아마도 전쟁터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1430페이지의 독서는 이렇게 끝났다.
느낀점 목적성 있는 독서를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나!!!! 나를 객관화하지도 못하고 소설을 읽는 내내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병원에 갔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결국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한 세대를 뛰어넘는 연대감과 본질적인 유사성. 보편적인 진리, 이성에의 강요를 떠나 마음은 지금도 다보스 요양원에 있다. 누워지내다 간신히 일어나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죽을힘을 다해 산을 올랐으나 결국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
◆◇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
♠시간이란 다름 아닌 무한정 체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를 속이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눈금이라고는 전혀없는 수은주인 것이다. P179
♠계절이 서로 뒤죽박죽되어 달력대로는 아니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에만 이 궈력자들의 절대적인 숭배를 하는반면,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눈을 슬며시 감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P185
♠우둔하면서도 아프다는 게 이 두가지가 함께 존재하는 것은 세성에서 어쩌면 가장 비참하다고 생각된다 P188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장권
♠너는 관을 보는 게 좋지않아? 나는 관 보는걸 아주 좋아해. 나는 관이 텅 비어있을때는 아주 아름다운 가구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누가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아주 장엄하게 보이는 거야 P212
♠젊은이는 적응하지는 못해도 뿌리는 박는다 P463
♠생명이란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것은 앞질러 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시간과 현재를 '선물'로서가 아니라 '장애물'로서만 느끼고 그것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이를 마음속에서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P460
♠시간이란 이용하도록 인간에게 빌려준 신들의 선물
♠문학이란 사실 인문주의와 정치의 결합에 따라 다름아니며 인문주의가 어느덧 정치가 되고 정치가 인문주의가 될 때 문학이 한층 더 무리없이 완성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불가사의한것이다. 실체가 없으면서 전능한 것이다. 현상계의 하나의 조건으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와 그것의 운동과 결부되고 혼합된 하나의 운동이다.
♠생명이란 갈망이고 갈망이란 생명이다
♠병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12월~ 1월 15일까지 한 달 반 동안 진행된 마의 산 상, 하 권 읽기를 모두 마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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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한게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게 두 작품 (일단 두 작품이다. 다시 생각해보려니 자꾸 자꾸 더 작품들이 튀어나와서...)인데,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 The portrait of a lady]와 조지 엘리어트의 [플로스강의 물방앗간 The mill on the Floss 내 생애 가장 손꼽는 작품]이다. 전자는 존경하고 후자는 사랑한다. 영화 [The heiress]를 보려고 했다가 원작이 이 작품인지라 먼저 읽고 봐야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미뤄뒀다가 이제 읽기로 했다. 먼저 다른 번역서를 잡았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도서관에 반납하고 이 책을 샀다. 헨리 제임스의 작품은 하나하나 꼭꼭 씹어 삼켜야 하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부터 이야기해보자. 닥터 오스틴 슬로퍼 (이름이 오스틴이라는거 딱 한번 나온 것 같다. 그는 계속해서 의사로 칭해지며, 꽤 아이러니한 유머로 표현되지만 독자에게도 거리감을 주고 있다), 라비니아 페니먼부인 (그녀야말로 고딕소설에 나오는 핍박받는 여주인공을 연기하고 싶은듯하다. 하지만 계속 되는 묘사지만 자기도취에 빠져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모리스 타운센드 (그는 계속해서 뛰어난 미남자라고 묘사되지만, 그 이상의 자세한 묘사는 없다. 그의 눈동자는 어떤 색이며 어떻게 빛났는지 모른다. [오만과 편견]에서도 등장하는 다아시가 생각났다. 그의 묘사 가운데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프로포즈를 거부했던 엘리자베스 베넷이 결국 그에게 먼저 다가가 오해를 사과하고 그가 프로포즈한 것을 받아들이자 그의 눈이 기쁨에 빛났던 것. 다아시 중의 다아시, 콜린 퍼스의 작품에서도 그는 작품에 충실하게 기쁨을 억누르며 눈빛이 빛났다), 그리고 캐서린 (그녀에 대한 작가의 표현은 가끔 잔인한듯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가 스스로 깨달으면서 왜 결혼을 하지않았냐는 질문에 "얻을 것이 없어서요"라고 말할떄 나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않은 것인가! 그저 자신의 아내만큼 눈에 띄는 미모가 없어서? 다른 여타 여인들보다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 그런 밀땅의 용기와 뻔뻔함이 없어서?). 이들에 대한 작가의 표현력은 가끔 너무나 뛰어나서 암기해 써먹고 싶을 정도였다. ..."애가 튼튼하긴 하니.라고 말한 것은, 사실을 말하자면 - 하지만, 이 사실은 나중에 말하겠다 (그러면서 챕터끝. 와우, 아서 코난 도일같았어.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끄는게) ..가구가 없는 셋집을 찾다가...집의 붙박이가 되었다... ...엄마가 없는 불쌍한 아이곁을 똑똑한 여자가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안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을뿐...누니의 지적 광휘에 눈이 부셔 본 적 없는 로서는 암묵적인 동의... ..소설의 여주인공에 대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좀 불편하지만 식탐이 약간 있었따고 덧붙여야 하겠다.... ..그녀의 등판은 넓었고 상당히 많은 재산을 재산을 걸칠 수도 있었지만... 특이하게 시선을 끄는 옷을 좋아하는 취향이 이런 옷을 입을 때 그녀의 걱정은 자신보다는 옷이 좋아 보여야 할 텐데 하는 것이었다 명시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렇게 추정 해도 되리라고 본다..... 등등. 작가의 고향집인 워싱턴 스퀘어를 배경으로 19세기말 (1880년도 작품이다)의 뉴욕이 배경이다. 슬로퍼의사는 성실한 성격으로 학문적인 것과 환자들을 상대하는 사교적인 부분이 적당한, 아름답고 부유한 아내와 결혼한, 이모저모로 성공하고 또 호의적인 평판을 가진 사람이다. 아들이 어린나이에 죽고, 그의 자부심인 아내가 딸을 낳고 죽자, 그는 실망한다. 그게 그당시의 남녀에 대한 시선이기도 했지만, 엄마를 잃은 딸에 대해서 그는 하나의 인간으로보다는 자신을 따라야하는 식구로서 딸을 키운다. 물론, 그는 냉정하지않았고 딸을 사랑했지만. 남편을 잃은 여동생 라비니아가 들어와 딸 캐서린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지만, 그녀 또한 캐서린의 정신적인 부분을 신경쓰지는 않은듯 보인다. 보다 세속적으로 똑똑한 이모 엘리자베스가 있지만 그녀의 가족또한.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의 인정에 목마른 딸 캐서린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년1만달러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되는, 성공한 의사인 아버지의 유산이 빛나는 '상속녀'지만, 그당시 청년들은 20대 초반에 사랑에 뛰어들어 결혼을 하고 그 사랑에 가장 큰 요인은 여인의 미모였다. 그 미모보다 더 가치가 있을지 모를, 수줍음, 솔직함, 진실을 가진 캐서린은 그녀의 매력을 발굴하는데 도움을 줄 인물이 주변에 없었고 그렇게 노처녀로 늙어갈지 모르는 가운데, 미모가 뛰어난 청년 모리스 타운젠드가 그녀의 인생에 뛰어들어 흔든다. 일주일도 안돼 그는 그녀와의 결혼을 암시하고, 아버지 닥터 슬로퍼는 그의 의도가 사랑이 아닌, 딸의 재산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여기서부터 난 네이트판의 한 사연을 읽는듯 했다. 이 결혼 반댈세하는 아버지, 그리고 결혼을 앞둔 처처자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하는, 남자의 언니 등등. 100여년 작품인데, 제인 오스틴의 사랑과 결혼이 여전히 지금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듯, 이 작품 또한 [여인의 초상]처럼 실상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일지 모를 연애와 결혼이란 것을 통해 자아를 깨닫고 주변인물들을 제대로 바라보게 해주며 시대성을 초월하는듯하다. 헨리 제임스의 작품은 역시 꼭꼭 씹으며 요리조리 음미해야 재밌구나. 그냥 읽으면 잔인한 말도 다시 보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고.. p.s: 1) 아아, 이제 알았네. 지난번에 몇몇 내 리뷰들 (the house of mirth나 건지감자...등등) 이 어디갔나 했는데, 전에 리뷰 카테고리 정리할때 이동시킨줄 알고 카테고리 하나를 없앴구나. |
| 난해하고 장광설로 유명한 W.G.제발트의 대표적인 책. 이 책은 그의 인장이 깊게 묻혀 있다. 인물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형식이 그렇다. 어떤 문장은 몇줄에 걸쳐 이어지기도 한다. 그가 깊게 내쉬는 날숨이 그의 내면을 담배연기 가득한 방처럼 깊이 채운다. 중간 중간 설명을 부연하는 흑백 그림들이 전시된다. 마치 맥시멀리즘 소설가들의 기법 같다. 그의 지식은 정말 광범위하다. 특히 건축이 그렇다. 건축을 묘사하는 문체가 일품이다. 어둡고 비극적인 이야기 끝에 찾아오는 기묘한 감동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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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읽은 마지막 작품이 되겠다.
장애아를 둔 아버지의 고군분투가 눈물겹게 그려지지않나 했더니...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의 주체(버드)가 주인공이여서, 은근 짜증이 났다. 와이프가 장애아를 낳았는데, 그 곁에 있어주기는 커녕, 옛연인에게나 찾아가고..또 그 연인은 받아주고, 술먹고 강의실에서 토웩질을 한다던지...대책없이 허세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좀 밥맛떨어지는 인물.
졸라 힘들었으나 어쨌든 잘 살았대더라,는 내가 원하는 판타지였나.
도무지 예뻐할 수도 없고, 공감도 되지 않는 인물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요 근래 읽었던 일본 문학이 죄다 그저 그래서 그냥 폄하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마지막, '도망치기를 그만 둔' 부분에서 나는 조금 상쾌함을 느꼈던 것 같다.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아프리카에 가길 꿈꾸는' 부분은 나의 어떤 것과 닮아 있는듯 했고...그가 히미코에게로 도망갔듯이...나는 자연을 '벗'이라 생각하여 줄창 등산만 다녔고, 백화점에 쫓아다녔던 것은 아니였는지...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던 마지막 부분의 해피 엔딩 부분은...나 역시도 사족으로 생각된다. 우리의 해피엔딩은 그냥...희망사항일뿐. 진짜 현실은 살벌하지 않던가. 차라리 그가 히미코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다면...이 작품은 상상초월의 엽기 소설이 되었었을까?
위에 상쾌했다고는 썼으나... 지우개로 빡빡 지워버리고 싶은..혹은 이렇게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 항상 정면도전 해야하는 것,만이 정답인지에 대해서도 살짝 의문이 든다. 뭐,내년되면 한 살 더 먹을테니...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아니면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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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만엔원년의 풋볼과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로 먼저 접했다. 이번에 그의 자전적인 성격을 담은 소설이라는 개인적인 체험을 읽게 되었는데 역시 그의 문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어마어마했다. 줄거리는 생략하고 마지막 갑작스런 해피엔딩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실제로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을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야 대중적인 소설이 될거라는 일종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오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부분을 해피엔딩으로 생각해 두고 있었다며 태도를 고수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마지막에 갑작스런 해피엔딩으로 유턴 하는 것은 당황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비슷한 소설로는 요시야 노부코의 물망초가 생각나기도 했다. 95%까지 완성된 자기비판과 혐오의 꿉꿉함으로 가득 찬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페브리즈를 뿌린 느낌. 담백하고 맛있는 볶음밥을 먹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나는 과육이 씹힌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나름 이해는 간다. 아무래도 작품을 쓰는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과 희망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의 작품 중에 만엔 원년의 풋볼과 비슷한 느낌도 든다. (물론 만엔 원년의 풋볼이 더 완성도 있는 측면으로) 인간사회, 역사 비판과 그 치부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마지막으로는 약간의 인간찬가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그가 바라는 희망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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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져 나오는 소설들 가운데 경의를 표할 만한 작품이 있다면 내게는 아우스터리츠가 그러하다. ‘오늘날에도 위대한 문학이 여전히 가능한가? 고상한 문학 행위란 과연 어떻게 보일까? 독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을 W.C 제발트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수전 손택의 당시 평가는 여전히 지금도 그러하다고 나 역시 공감한다. 물론 그 근거는 다를 수 있겠는데, 내게는 그것이 인간의 고귀한 가치 가운데 하나인 자유를 작가만의 고유한 예술성으로 버무려 감동적으로 주조해 놓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체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무명의 화자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여행 중 중앙역 바로 옆에 있는 녹투라마 동물원에 들러 동물들을 구경하고, 중앙역 대합실에 들렀다가 아우스터리츠라는 인물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그가 건축에 대한 놀라운 전문지식을 소유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이후 그와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와 같은 만남은 20년 후 런던과 프랑스로 이어지면서까지 관계가 유지되는데, 그러는 동안 그가 런던의 미술사학과에 교직을 가지고 있으며, 어렸을 때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9년 가을에 영국의 구조단체가 벌인 유대 어린이 호송작전을 통해 프라하에서 영국의 웨일즈 지방의 선교사 집으로 입양 가면서 부모와 단절되었고, 이후 부모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유모 벨라를 만나 과거의 일부 정보를 알게 되고, 마리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느끼고, 하지만 자신의 실수로 그녀와 헤어지게 되고, 이후 어머니는 체코의 테레진 수용소에서 사망했으며, 아버지는 프랑스의 구르스 수용소에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아우스터리츠는 자신의 런던 집 열쇠를 화자에게 건넨 후 아버지와 마리를 찾으러가겠다며 작별인사를 하고, 화자는 안트베르펜의 녹투라마와 브렌동크 요새를 다시 방문하러 가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하지만 작품을 떠받치는 밑돌들은 방대하고, 내용의 연결 또한 현재와 과거를 뜀토끼처럼 왕래하고 있어, 옴니버스 방식의 리뷰를 남길 수밖에 없다.
작품 전체는 긴 묘사와 이중 설명으로 이루어진 문장들로 구축되어 있는데, 심지어는 한 문장이 8페이지(259-266)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현격히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런 문장들로 써나간 것이 내게는 작가의 의도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읽다가 보면 끊임없이 대상을 묘사하고 이중 설명하여 대상을 둘러싼 분량의 크기가 확대됨으로써, 지속적으로 둘러싸는 거미줄에 꽁꽁 묵이면서 외양은 점점 커지고 사로잡힌 곤충은 점점 왜소해지는 것처럼, 그 대상이 조그맣게 축소되는 현상이 야기되는데, 이는 아우스터리츠를 비롯한 당시의 유대인들을 삶의 대부분을 은폐된 덤불 속에서 살다가 짧은 생명을 마치는 미시세계의 생명체로 끌어내려 나방과 풍뎅이와 박쥐와 너구리 등과 동일시하고, 동시에 미시세계의 생명체들을 인간들이 사는 거시세계로 끌어올려 인간과 동일화함으로써, 미시세계 동물들의 죽음처럼 나치에게 죽어가는 인간의 가치를 왜소화하는 작용을 하게 되고, 이로써 우생학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나치의 잔인성을 부각시킨다. 그런가 하면 세밀한 묘사와 중층적 설명으로 인해 대상이 보다 구체화되고 정밀해짐으로써, 그 대상이 명확해지는 현상, 즉 나치에 의해 그 지위를 박탈당한 채 벌레처럼 축소된 존재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작용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전략은 가해자인 독일국민의 의식 역시 다중적인 인간의식으로부터 박탈하여 국가사회주의라는 관념만으로 단일화함으로써 역시 인간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려 나방화하는데, 나치가 세계인들에게 저지른 죄뿐만 아니라, 자국 국민들의 의식하락 또한 유발한 이중의 죄에 대해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이러한 효과는 비단 작품 내부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까지 확대된다. 문장을 읽다가 보면 얽히고설킨 문장자체의 전체내용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사라지고, 그래서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이 지점이 독자 또한 인간의 지위로부터 박탈되어 나방 같은 미시적 생명체로 변한 기분을 체감하게 하여 당시 나방이나 여타 동물처럼 변해 버린 유대인의 감정을 대리 체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는 8페이지에 달하는 문장을 읽다가 보면 글을 읽는 자기 자신이 먼지처럼 해체되어 사라져 버린 듯한 기분까지 느끼는데, 이를 통해 강제수용소의 화장로에서 한 줌 재로 변해 버린 유대인의 상태를 간접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소설은 녹투라마 동물원으로 시작해 녹투라마 동물원으로 끝나는 수미상관적 전형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그렇다면 제발트는 왜 작품의 도입부와 결말부를 녹투라마 동물원으로 설정했던 것일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으면, 녹투라마 동물원이 작게는 세계 곳곳으로부터 본연의 삶을 박탈당한 채 녹투라마로 옮겨져 온 동물들처럼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9년 가을에 영국의 구조단체가 벌인 유대 어린이 호송작전을 통해 프라하에서 영국의 웨일즈 지방의 선교사 집으로 입양 갔던 아우스터리츠가 어린 시절을 살았던 목사관 공간이자, 그렇게 뿌리 뽑힌 채 낯선 공간에서 살아야 했던 그가 그 공간의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음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크게는 당시 나치에 의해 게토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았던 유대인과 나아가 나치의 침략으로 자유를 잃었던 유럽인들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보다 크게는 약간의 추리력을 더해 볼 때 각종 전자기기의 그물망에 갇혀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채 의족에 기대어 살 듯 기계의 기억력에 의지한 채 사는 오늘날의 인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상징성을 띤 녹투라마 동물원 공간이 자유박탈로 인한 정체성 상실과 회복이라는 전체 주제에 기여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진다.
<내 눈이 인공적인 어스름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리고 판유리 뒤에서 창백한 달빛을 받으며 몽롱한 삶을 이어가는 여러 동물들 … 이집트나 고비 사막에서 데려온 박쥐와 날쥐들, 벨기에 산 고슴도치, 수리부엉이와 올빼미, 오스트레일리아 산 주머니 쥐, 담비, 산쥐, 그리고 원숭이들이었을 것이다.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북미산 너구리로, 나는 그 녀석이 작은 물가에 앉아서 진지한 표정으로 시종 똑같은 사과 조각을 씻는 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했는데, 분명히 녀석은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는 이런 행위를 통해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 같았다. 그밖에 녹투라마에 사는 동물들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유난히 큰 눈과 꼼짝하지 않는, 탐구하는 듯한 눈빛을 가진 몇몇 동물들로, … 8쪽>
위에 언급된 동물들은 모두 아우스터리츠로 대체해 읽어도 되는 동물들이고, 특히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동물원으로 빠져든 너구리가 그러한데, 너구리가 시종 똑같은 사과 조각을 씻는 행위를 잘못 빠져든 세상에서 빠져나오려는 것 같다고 보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프라하에서 영국으로 실려 온 아우스터리츠가 이후 자신의 흔적을 찾아 유랑하는 행위와 유비된다. 이어서 안트베르펜 중앙역 대합실이 나오는데, 이곳 역시 제2의 녹투라마와 같은 곳으로, 그곳의 여행객들이나 사물들이나, 그곳에서 화자가 만나게 되는 아우스터리츠는 모두 녹투라마 동물원의 동물들이나 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대상들이나 다를 바 없다.
<온통 푸른색 녹이 뒤덮인 흑인 소년상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이 소년은 아프리카 동물 세계와 원주민 세계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 지하세계 같은 어스름이 대합실을 채웠으며, 대합실 안은 몇 명의 여행객이 서로 멀리 떨어진 채 움직이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녹투라마 안에 거주하던 들여우, 뜀토끼, 햄스터 같은 눈에 띄게 작은 종의 동물들과 비슷하게, 이 여행객들은 특별히 높은 대합실 천장 때문인지, 아니면 점점 짙어 가는 어둠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작아 보였고,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이 사람들은 숫자가 감소했거나 자신의 고향에서 추방되거나 몰락한 종족의 마지막 후예로, 전체 가운데 그들만이 살아남았고, 그 때문에 동물원의 동물들과 똑같이 원한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10-11쪽>
여기서 온통 푸른색 녹이 뒤덮인 흑인 소년상은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온 아우스터리츠의 관념적 모습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고, 지하세계 같은 어스름은 아우스터리츠가 입양된 일라이어스 목사관의 이미지와 등치할 수 있으며, 고향에서 추방되거나 몰락한 종족의 마지막 후예와 같고, 원한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한 여행객들은 들여우, 뜀토끼, 햄스터 같은 녹투라마 안의 동물들과 유비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높은 대합실 천장 때문인지, 점점 짙어 가는 어둠 때문인지 어쩐지 작아 보이는 여행객들은, 미리 조금 말하자면, 나치의 만행으로 인간의 지위로부터 녹투라마의 작은 동물들이나 나중에 나오는 나방, 풍뎅이, 거미, 박쥐와도 같은 곤충의 지위로 의식이 축소화된, 당시의 아우스터리츠와 같이 수송열차로 옮겨진 유대인 아이들과 게토에 갇힌 유대인과 나치의 침략으로 자유를 빼앗긴 유럽인들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기이하게 곱슬거리는 금발을 한 청년 … 그 밖의 여행객들과 다른 점은 유독 그만이 무심하게 앞을 응시하지 않고, 도안과 스케치에 몰두해 있었다는 것으로, … 뭔가를 그리지 않을 때 그의 시선은 종종 창문들의 연결선으로, 홈이 팬 벽기둥과 다른 부분들, 공간 건축의 부분들과 세부적인 것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11쪽>
이 대목에서 스케치와 도안에 몰두해 있는 아우스터리츠는 녹투라마 동물원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시종 똑같은 사과 조각을 씻는 너구리와 비견되고, 종종 창문들의 연결선으로, 홈이 팬 벽기둥과 다른 부분들, 공간 건축의 부분들과 세부적인 것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아우스터리츠의 시선은 유난히 큰 눈과 꼼짝하지 않는, 탐구하는 듯한 눈빛을 가진 몇몇 동물의 시선과 동일시된다. 이와 같은 동일시는 이어지는 안트베르펜 중앙역 내의 레스토랑의 인물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전체 구조가 거울에 비친 상처럼 대합실과 닮은 뷔페 공간에서 고독하게 페르네트를 마시는 한 남자와, 카운터 뒤에 놓인 바의 높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완전히 몰입한 채 집중해서 줄로 손톱을 갈고 있는 마담. 12쪽>
여기서 고독하게 페르네트를 마시는 남자나 줄로 손톱을 갈고 있는 마담은 녹투라마의 너구리나 도안과 스케치에 몰두해 있는 아우스터리츠와 치환해도 수납이 되고, 녹투라마와 안트베르펜 중앙역 대합실과 뷔페가 거울에 비친 상에 의해 같은 공간이 되며, 나아가 모든 여행자의 움직임이 감시당하고 행동 방식을 맞추게 하는 중앙역 시계(15쪽)에 의해서도 유대인들이 갇혀 살았던 게토와도 같게 되고, 그렇게 같아진 녹투라마와도 같은 공간의 내부에서 살다가 이후 죽어간 동물들은 뷔페 거울의 제조과정에 의해, <그가 걸어가면서 다시 한 번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거울 표면을 올려다보며, 수은과 청산염의 증기를 흡입한 결과 해롭고 치명적인 직무를 요구하는 그러한 거울 제조시기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는지 아느냐고, …(17쪽)>, 나치의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들과 다시 동일시된다. 그런가 하면 소설의 도입부에 나온 이 거울은 녹투라마 동물들을 대합실 여행객들로, 피해자인 수송열차를 탔던 유대인 아이들과 전체 유대인들로, 가해자인 독일인들로, 그리고 그들을 역으로 녹투라마의 동물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장치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 거울에 의해 다시 한 번 이 소설이 녹투라마 동물원으로 시작해 녹투라마 동물원으로 끝나는 수미상관적 전형으로 구성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우스터리츠의 뿌리 뽑힌 삶은 입양되어간 목사관의 양아버지 일라이어스의 배경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물론 개인을 사회화하면 프라하에 진주한 독일군에 의해 가진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게토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전체 유대인으로 확대되므로, 그에 대한 장면으로도 읽힌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라이어스는 마차를 호수 가장자리에 세우고 제방 둑 한가운데까지 나를 데리고 간 뒤, 검은 물 아래 족히 100피트는 될 만큼 깊은 곳에 놓여 있을 자기 부모의 집에 대해, 그리고 부모의 집뿐만 아니라 적어도 40가구는 되는 다른 집들과 농장,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교회와 세 개의 예배당, 그리고 세 개의 맥주집이 댐이 완공된 1888년 가을 이후 기이하게도 모두 홍수에 잠겼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 설교자가 바이러니의 제방댐 위에서 의도적이었든 부주의에서든 간에 내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게 한 순간, 다른 사람들 모두, 그의 부모와 형제들, 일가친척들, 이웃집 사람들과 나머지 마을 주민들이 그 아래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눈을 크게 뜬 채 말은 할 수 없이 집 안에 앉아 있거나 골목을 돌아다니는 동안 의인인 그는 레인딘의 홍수 참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59-60쪽>
일라이어스 역시 고향을 상실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은 자처럼 보인다는 느낌에서 아우스터리츠의 분신으로도 읽힌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서 일라이어스가 살았던 레인딘 마을은 아우스터리츠가 살았던 프라하이고, 수몰된 가구들은 프라하의 유대인들이며, 홍수는 진주해온 독일군에 대한 상징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히는 건 그런 상징으로 쓴 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장면은 사실 독자가 알 필요도 없는 것이고, 딱히 다른 이유로는 굳이 이 장면을 삽입해 놓은 의미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 예에서처럼,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사적, 곤충학적, 건축학적, 식물학적, 어류학적, 원예학적인 지식들에 의해 나열되는 구체적 사물들은 모두 나치의 범죄로 희생된 무명의 인간들에 대한 이체된 존재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밖에도 안드로메다 별장의 거의 모든 공간에는 일종의 자연물 진열대와 부분적으로는 유리를 끼운 많은 서랍이 달린 상자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거의 공 모양의 앵무새 알들이 수백 개 진열되어 있었고, 조개 수집, 화석 수집, 풍뎅이와 나비 수집, 포르말린에 담긴 발 없는 도마뱀, 살무사와 도마뱀, 달팽이집, 불가사리, 가재와 게, 나뭇잎과 꽃잎과 풀 들이 들어 있는 커다란 식물 표본 상자들이 있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을 계속했다. 95쪽>
한편, 안트베르펜 중앙역과 이어서 나오는 브렌동크 요새를 비롯하여 이후 지속적으로 나오는 브뤼셀 법원건물, 그레이트 이스턴 호텔, 카르멜리츠카 문헌보관소, 테레진 수용소, 빌소노바 중앙역, 메종말포르 수의학 박물관, 살페트리에 병원, 프랑수아 모리아크역 국립도서관 등의 건축물에 관한 아우스터리츠의 전문적인 지식과 공간에 대한 뛰어난 지각능력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매개요소로 작용한다. 물론 그 건축물들 역시 부분적으로는 녹투라마 공간과 다를 바 없고, 그래서 그 안의 동물들처럼 아우스터리츠가 건축물을 방문할 때면 나치의 만행과 프라하로부터 이탈되고 분리되면서 황폐해진 현재의 의식상태가 주변상황의 풍경이나 분위기를 통해 조명되곤 한다.
작품에는 나방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나방은 작가가 이 작품의 착상에 이르게 한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먼저 가해자인 나치 당시 독일 국민의 상징으로 내게 읽힌 장면은 다음과 같다.
<어둠이 찾아들자마자 우리는 곧 안드로메다 별장에서 한참 떨어진 언덕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 뒤로는 더 높은 언덕들이, 그리고 앞으로는 거대한 어둠이 바다 위로 펼쳐져 있었고, 알폰소가 가장자리에 헤더관목이 자라난 평평한 웅덩이 속에 백열등을 세워 놓고 불을 붙이자, 올라오는 동안에는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한 밤나방들이 마치 무에서 나온 것처럼 무리를 지어 나와 수천 가지 궁형과 나선형과 줄무늬를 이루거나, 눈송이처럼 불빛 주변으로 소리 없는 흐름을 이루고, 다른 녀석들은 이미 날개를 파닥이며 램프 밑에 펼쳐 둔 아마포 위로 가거나 세찬 회전 운동으로 힘이 빠져 알폰소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궤짝에 넣어둔 잿빛 달걀 상자에 깊숙이 내려앉았어요. … 알폰소는 이 모든 이상야릇한 피조물들은 각자 자신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녀석들은 오리나무 밑에서만 살고, 다른 것들은 뜨거운 바위 언덕이나 좁은 가축 통로나 늪에 산다고 말해 주었지요. 그들의 생애에서 이미 지나간 유충 상태에서는 개밀 뿌리든, 갯버들 잎사귀든, 매자나무나 시든 나무딸기 잎이든 간에 모두가 오로지 한 가지 먹이만으로 영양을 공급받는데, 거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항상 선택한 먹이만 먹는 반면, 나방들은 살아 있는 동안 더 이상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생식이란 과업을 가능하면 빨리 완수하는 것만 생각한다고 알폰소가 말했지요. 나방들은 아주 이따금 갈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밤에 이슬이 내리지 않는 건기 동안에는 마치 한 덩어리의 구름처럼 함께 일어나서 가까운 강이나 냇가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흐르는 물에 내려앉으려고 애쓰는 동안 많은 수가 익사한다고 말했지요. 102-104쪽>
이 장면에서 나방의 유충들은 모두가 오로지 한 가지 먹이만으로 영양을 공급받고, 거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항상 선택한 먹이만 먹고, 부화한 나방들은 생식작용만 하다가 한 덩어리를 이루어 구름처럼 일어나서 냇가를 찾아가 익사하는데, 이는 오로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 이념 하나만을 주입받으면서 성장하는 나치 당시 독일의 어린이들과, 그 이념을 위해 오로지 생식과 유럽의 나치화라는 목적에 전투원으로 희생되는 용도로만 기능하는 독일성인들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려져 나방화된 독일국민들인 것이다. 이렇게 떼를 이룬 채 어둠 속에서 빛을 따라 날아다니는 나방의 이미지를 인간화하면 바로 다음 장면처럼 나치 당시의 독일국민이 된다.
<그들은 모두에게 공통되는 비극적 전사(前史)가 히틀러와 헤스와 히믈러에 사로잡혀 전 민족의 영혼을 내부 가장 깊숙한 곳까지 흔들어 놓는 장송곡의 울림에 맞춰 실처럼 구불거리는 좁은 통로를 지나 유동적이지 못한 독일적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종대와 중대로 된 새로운 국가 권력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사자(死者) 숭배의 예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거대하고 불가사의하게 흔들리는 깃발의 숲, 횃불의 불빛 속에서 조국을 위해 스스로를 죽음에 바친 전사들이 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위에서 조망하면 아침 여명에 지평선까지 펼쳐진 흰 천막의 도시를, 그 도시로부터 약간 밝아져, 몇 명씩 짝을 짓거나 작은 무리를 이룬 독일인들이 나와서 침묵하며 점점 더 좁게 연결되는 대열 속에서 마치 높은 분의 부름을 좇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광야에서의 오랜 세월 후에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것 같았다고 막시밀리안이 전했다고 베라는 말했어요. 187-188쪽>
다음은 피해자인 유대인의 상징으로 읽힌 장면이다.
<기온이 높은 몇 달 동안에는 우리 집 뒤에 있는 작은 정원에서부터 길을 잃고 나방들이 내 쪽으로 날아오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지요.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보면 그들이 벽 어딘가에 여전히 붙어 있는 것을 보지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밖으로 보내 주지 않는 이상 마지막 숨결이 끊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내 생각으로는 녀석들은 자기들이 잘못 날아왔음을 아는 것 같아요. 녀석들이 죽음의 경련으로 경직된 미세한 발톱으로 매달린 채 목숨이 끝날 때까지 불행의 장소에 달라붙어 있으면, 공기의 흐름이 그들을 떼어내어 먼지 쌓인 구석으로 날려 보내지요. 내 방에서 죽어 가는 그런 나방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종종 이 혼돈의 시간에 그들은 어떤 불안과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자문하곤 하지요. 106쪽>
여기서 자기들이 잘못 날아온 것을 아는 나방들은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잘못 빠져든 녹투라마의 동물들과 유비되고, 그렇다는 점에서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실려 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잘못 실려 왔음을 느끼는 바와 같으며, 죽음의 경련으로 경직된 미세한 발톱으로 매달린 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불행의 장소에 달라붙어 있으면, 공기의 흐름이 그들을 떼어내어 먼지 쌓인 구석으로 날려 보낸다는 점에서, 가스실에서 죽은 후 화장로에서 먼지로 변해 사라지는 유대인들과 같다. 한편, 내게는 여기서도 양모 그웬덜린의 삶이 느껴져서 몹시도 가슴이 아팠는데, 아마도 생각과는 달리 기계적인 일로 평생을 보내야 하는 목사부인으로서의 삶이 너무나 힘든 삶이었고, 자신의 삶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병으로 죽을 때까지 불행의 장소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그녀의 삶이 나방의 삶과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나치에 의해 분리되고, 이탈되고, 뿌리 뽑혀 정체성을 상실한 채 나방과 풍뎅이와 박쥐처럼 축소되어 몽롱하게 삶을 이어가는 나방화된 인간의 세계로부터 본연의 인간이 지니고 있던 그 자체의 조건을 그대로 향유하는 인간의 세계, 잃어버린 망각 저편의 세계를 찾아, 아우스터리츠는 시간의 강물을 역류하면서 요새와 수용소의 폐허, 그리고 사진 속에 침묵으로 응결된 유대인의 절규와 고통의 감각들을 하나씩 회수하면서, 집요하고,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시간의 강물이 적셔온 뒤안길을 더듬는다. 이러한 아우스터리츠의 행위가 내게는 작가가 독일인으로서 짊어진 선조들이 저지른 전쟁책임을 간접적으로 조금씩 풀어 내리는 사죄행위로 보였다.
<시계가 내게는 항상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근본적으로 뭔가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서 시간의 권위에 항상 저항하고,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고, 흘러가지 않아서 내가 그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서 모든 것이 과거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시간의 순간들이 동시에 나란히 존재하거나 혹은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옳지 않았으면, 일어난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른 순간에 비로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른바 시대적 사건에서 나를 배제시킨 때문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비참함과 결코 끝나지 않은 고통의 절망적인 미래를 열어 주기 때문이에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14-115쪽>
이 장면은 모든 여행자의 움직임이 감시당하고 행동 방식을 맞추게 하는 안트베르펜 중앙역의 시계를 다시 떠올려주는데, 그곳의 여행객들과 달리 아우스터리츠는 시계로 상징되는 나치의 지시와 행동을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작가가 전후에 영국으로 이민을 간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전쟁 중에 태어났더라도 여타 독일국민들과 달리 나치에 저항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전체 작품에서 아우스터리츠는 두 번의 사랑에 빠지는데, 첫 번째는 스토워 그레인지에서 만난 제럴드 피츠패트릭의 어머니 아델라에 대한 사랑으로, 마치 내게는 그녀가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아우스터리츠가 느끼고 있었던 보다 근접한 사랑의 성격은 어린 시절의 어머니 아가타에 대한 대리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거기서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저녁놀이 지고 있었는데, 가는 가랑비는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걸려 있는 것 같았고, 안개 낀 정원의 깊숙한 곳에서 아델라가 면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를 향해 다가왔는데, … 그녀는 자유로운 팔을 들어 내 이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는데, 이 동작에서 그녀는 자기가 다른 사람의 기억에 남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것 같았어요. 그래요. 나는 당시의 아름다운 아델라를 여전히 기억하고, 그녀는 내게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 우리는 종종 전쟁 이후 치워진 안드로메다 별장의 구기실에서 함께 배드민턴을 치곤 했지요. … 배드민턴 게임이 끝나면 우리는 대부분 한동안 홀에 머물면서 서양산사나무의 움직이는 가지들 사이로 수평으로 몰려오는 태양의 마지막 빛이 높은 뾰족 아치 창문과 마주하고 있는 벽에 던지는 형상들을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지요. … 한번은 우리가 함께 서서히 어두워지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델라가 내 쪽으로 몸을 굽히면서 저 야자나무의 꼭대기가 보이니, 저기 모래언덕을 지나오고 있는 대상들이 보이니 하고 물었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125-126쪽>
그리고 두 번째는 리슐리외 가에 있는 국립도서관 문서보관소에서 처음 만난 이후 이어지는 마리 드 베르뇌유와의 사랑으로, 이는 이성에게서 느끼는 사랑이었는데, 그녀가 노골적으로 깊은 사랑으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보헤미아로 가는 여행에 동행해 달라는 초대를 하고 아우스터리츠 역시 고립상태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시도해 볼 작정이었지만, 마리엔바트의 팔라스 호텔에서 며칠을 같은 방에서 자면서도 결국 거리를 둠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아마도 거리를 둔 것은 하필 팔라스 호텔 바로 뒤편의 여관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 아가타, 아버지 막시밀리안, 유모 베라와 함께 여행왔을 때 묵었던 곳이어서, 이번에는 마리가 어머니와 겹쳐지는 현상 때문에 실패하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 마리엔바트에서 뭔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뭔가 아주 중요한 것, 단순한 이름이나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없는 명칭 같은 것이 내 마음을 돌려놓았다고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고 생각해요. …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를 내게 말해 줄 수 없나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고 아우스터리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여기 온 후 왜 당신은 마치 얼어붙은 연못처럼 보이나요? … 왜 당신은 도착했을 때도 짐을 풀지 않고 항상 륙색으로만 지내나요?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몇 걸음 떨어져 서 있었지요. … 내가 정신병자처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은 사방에서 나를 둘러싼 비밀과 표시 들이며, 심지어 이 건물의 말없는 정면조차도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나는 혼자라고 항상 믿어온 것,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그녀에 대한 나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말이지요. 235-238쪽>
역시 전체 소설에서는 아우스터리츠가 딱 두 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는 양모 그웬던윌의 죽음을 맞았을 때의 장면인데, 다음과 같다.
<추위가 발라의 그 집을 지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침묵 또한 그 집을 지배하고 있었지요. 목사의 아내는 항상 집안일로 분주했는데, 먼지를 털 거나 타일을 닦고, 빨래를 삶고, 문에 붙은 놋쇠 손잡이를 닦거나, 우리가 대부분 말없이 받아들인 보잘것없는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어요. … 한번은 그녀가 위층의 반쯤 비어 있는 방 안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구겨지고 젖은 손수건을 쥔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지요. … 항상 자고 수프로 시작하는 점심 식사 동안 그는 요리를 하느라 힘이 다 빠진 아내에게 반쯤 농담 섞인 투로 몇 가지 교훈적인 지적을 하고는, 54-55쪽/ … 내가 두 번째로 오스웨스트리의 학교에서 집으로 온 것과 그웬덜린이 거의 목숨만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이 기억할 수 있게 된 이후 가장 추웠던 겨울이에요. … 그웬덜린은 더 이상 이 방문객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방문객들 편에서는 감히 그녀를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 그들이 다시 떠나고 나면 이전처럼 쥐죽은 듯 조용했고, 내 뒤에서 들려오는 얕은 숨소리에서 다음 번 숨소리까지는 매번 영원히 긴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크리스마스에 그웬덜린은 무척 힘들게 다시 한 번 일어났어요. 일라이어스는 설탕을 넣은 차 한 잔을 갖다주었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입술을 축일 뿐이었어요. 그런 다음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하게, 이 세상을 이렇게 어둡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하고 말했어요. 일라이어스가 그녀에게 대답했지요. 잘 모르겠소, 여보, 난 모르오. … 태양이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서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잠시 나왔을 때, 죽어가는 그웬덜린은 눈을 크게 뜨고는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약한 빛으로부터 더 이상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았어요. … 새벽이 희끄무레해질 무렵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멈추었어요. 그웬덜린은 위로 약간 솟아올랐다가 다시 자기 속으로 가라앉았어요. … 내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웬덜린은 이미 앞방의 네 개의 마호가니 의자에 올려진 관 속에 누워 있었어요.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위층의 한 궤짝에 간직되어 있던 결혼식 복장을 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은 진주 단추가 많이 달린 흰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설교자의 집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났어요. 72-74쪽>
내용으로 볼 때, 양모 그웬덜린의 삶은 녹투라마 동물원에 갇혀 본연의 삶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동물들과 같은 삶으로, 프라하라는 본연의 삶으로부터 뿌리 뽑혀 영국의 웨일즈에서 살아야 했던 아우스터리츠와 외양은 다르지만 속성은 같은 삶이다. 어쩌면 아우스터리츠가 양모의 죽음에서 눈물이 흐른 것은 인간 본연의 삶을 살지 못하고, 인간에 관한 보다 깊은 의식적 탐구를 해보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사 일에 매인 물리적 속박과 목사인 남편마저도 해명하지 못하는, 나치라는 세상을 어둡게 하는 존재를 풀어놓은 주체와 씨름했던 영적 구속 상태로 일생을 마쳤다고 생각되는, 또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 상 탈출하고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목사의 아내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되는 양모에 대한 연민의 슬픔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외롭고 힘들었던 삶이 아우스터리츠 자신의 삶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고 느끼는 데서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장면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나는 종종 나지막이 윙윙거리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와 잔기침 소리로 채워진 도서관 열람실에서 죽은 자들의 섬이나, 아니면 반대로 유배지에 와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그것은 내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날, 내가 2층 문서 보관실의 당시에 자주 앉던 자리에서 천장의 어두운 슬레이트 판들이 비치는 건너편 건물의 높은 창틀과 가느다란 벽돌색 굴뚝, 눈부신 얼음처럼 푸른 하늘과 거기서부터 위를 향해 푸르게 비상하는 제비의 모양을 오려낸 눈처럼 흰 양철 풍향 깃발을 한 시간 정도 올려다보던 날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이었어요. 낡은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들은 약간 구불거리거나 흔들렸고, 그것을 바라보자 이유 없이 눈물이 났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284쪽>
여기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난 것은 바로 아우스터리츠 자신이 죽은 자들의 섬이나, 아니면 반대로 유배지 같은 곳에서 살아온 듯이 느껴졌으며, 그런 감정은 자신이 살아온 삶이 눈부신 얼음처럼 푸른 하늘과 거기서부터 위를 향해 푸르게 비상하는 제비의 모양을 오려낸 눈처럼 흰 양철 풍향 깃발이라는 자유의 상징으로부터 유리된 삶, 즉 낡은 유리창에 비친 그것들의 그림자 같은 삶이라는 자각에서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전체 소설에서 딱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 거울에 비친 상 같은 이 눈물을 흘린 장면으로 인해 앞서 그웬덜린의 삶 역시 죽은 자들의 섬이나, 아니면 반대로 유배지에서 살았던 삶이었음이 추인된다고 느꼈다. 한편,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은 성격의 아우스터리츠의 눈물을 통해, 이 작품이 거시 생명체이면서도 미시 생명체처럼 삶을 강제로 압축당한 채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추도사로 읽히기도 한다.
작품에는 대상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나온 뒤 그 대상을 보여주는 흑백사진과 그림과 자료들이 나오는데, 이 장면들이 내게는 묘사와 설명으로 육화해낸 대상의 그림자처럼 여겨졌고, 대상이 단어와 단어들로 흩어져 있어 실체는 사라지고, 그림자만 그 대상을 흑백으로 조형된 상태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자는 프라하에서의 삶을 잃어버리고 그 삶이 까맣게 망각돼 버린 아우스터리츠의 심화상태를 보여주는 은유처럼 느껴졌으며, 사진이나 그림 등의 출처가 없다는 점에서 이 또한 뿌리 뽑힌 아우스리츠의 상황을 보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인 듯이 여겨졌고, 그렇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작품의 구도가 제발트의 치밀한 구성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위의 눈물이 난 이유에서 언급했듯이, 아우스터리츠가 2층 문서 보관실의 당시에 자주 앉던 자리에서 바라본 눈부신 얼음처럼 푸른 하늘과 거기서부터 위를 향해 푸르게 비상하는 제비의 모양을 오려낸 눈처럼 흰 양철 풍향 깃발은 아우스터리츠가 행복하게 자유롭게 살던 프라하의 상징이고, 낡은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들은 그 삶으로부터 뿌리 뽑힌 채 장년에 이른 현재의 삶에 대한 상징인데, 이 구도가 대상은 설명과 묘사를 하는 낱말과 낱말로 흩어져 있어 보이지 않고, 그 흩어진 대상에 대한 그림자는 설명과 묘사에 이어서 나오는 흑백사진들이라는 구도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작품은 한 문장 내에서 런던과 프랑스로 건너뛴다거나 화자와의 만남이 우연으로 지속된다거나 하는 드라마적 구성으로 엮여 있는데,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소설구성의 취약으로 평가받겠지만,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져 버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제발트가 선각자였다고도 생각되었다.
작품에서 내게 제일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아우스터리츠가 프라하의 카르멜리츠카 가의 문헌보관소에서 테레자 암브로소바 사무실에 들러 그녀가 찾아놓은 주소명부를 통해 어머니 아우스터리초바 아가타가 살았던 주소를 알아내고, 슈포르코바 12번지에 들렀을 때,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던 유모, 베라 리샤노바와 재회한 장면이다.
<내가 마침내 맨 위층에 있는 오른쪽 집의 초인종을 누르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흘러갔고, … 그녀는 노쇠했음에도 근본적으로는 전혀 변하지 않아서 내가 그녀를 즉각 알아보지 못한 것은 내 눈을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전날 힘들게 익힌 문장만을 더듬거렸어요. (저는 아마도 1938년에 이곳에 살았을 아가타 아우스터리초바라는 부인을 찾습니다). 베라는 놀란 몸짓으로 나를 살펴보더니 친숙한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펼쳐진 손가락 끝 너머로 나를 응시하고는 아주 나지막하게, 그러나 내게는 놀라울 정도로 분명한 프랑스어로 (자코야, 정말 네가 맞아)? 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았고, 떨어져 손을 잡았다가, 다시 껴안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고, 그런 다음 베라는 어두운 현관 통로를 지나 모든 것이 거의 60년 전 그대로인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어요. 169-170쪽>
이 대목이 내게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로 자유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던 과거의 시간을 기억 속에서나마 회복하였기 때문인데, 그것은 엄격한 성격으로 보이는 아우스터리츠가 전혀 상반된 모습으로, 유모와 서로를 얼싸안았고, 떨어져 손을 잡았다가, 다시 껴안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 정도로 아이처럼 좋아한 장면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의 끝에서 아우스터리츠는 아버지와 마리의 행적을 찾아가면서 화자와 헤어진다. 아우스터리츠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아이헨발트가 1942년 말 구르스 수용소에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그 전에 도스테를리츠 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려고 했을 때, 기이하게도 아버지 가까이 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는 점에서나, 독자 입장에서 구르스 수용소가 한나 아렌트가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곳이라는 점에서나 어쩌면 아버지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고, 마리 역시 아우스터리츠의 실수로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많은데, 화자와 헤어질 때 아우스터리츠는 어쨌든 아버지와 마리를 찾을 거라고 말하는 점에서 결말이 열린 소설이라는 생각이고, 그렇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우울했던 분위기에서 빛줄기를 만나는 기분을 느끼며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또 경의를 표할 만한 대상이 생겼는데, 바로 번역자다. 미로와도 같은 문장으로 인해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정신을 끝까지 붙잡고, ‘긴 문장을 여러 개로 나누라는 충고도 있었지만, 문장의 길이란 곧 그 글의 호흡이고 숨결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대로 이어가는 편을 택했다. 평소 같으면 독자들이 좀 더 편안히 읽을 수 있도록 얼마간의 윤문도 마다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 책의 경우는 작가의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다.’는 번역자의 말처럼, 원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고 쉬운 길을 버린 채 고난의 길을 걸은 노고는 가히 상찬할 만했고, 그 덕분에 인간과 나방의 상호교환 장치로서 문장을 길게 늘여 썼다고 생각되는 작가의 의도가 훼손되지 않은 채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