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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2년 전. 신간을 둘러보며 마음을 달래던 중 제목에 온 마음을 빼앗겨 바로 읽었다. 도서관 희망 도서로 신청해서 읽고는 갖고 있고 싶어서 바로 구매했다. 그것이 2년이 지났다. 그때의 내용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프롤로그에 대한 강렬한 느낌만이 남았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네팔 셰르파와의 경험을 쓴 내용이 책의 주제처럼 남았다. 그 기억으로 독서모임 회원들과 함께 읽기 위해 추천했다. 이번에는 어떤 내 모습을 만나게 될지 두려움이 커진다.
저자 권석천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법전보다는 시집을 뒤적였다. 1990년 경향신문에 입사해 문화부 기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사회. 정치. 경제부 기자로 일했다. 2007년 중앙일보로 전직해 법조팀장, 사회 2부장, jtbc 보도국장,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2020년 다시 jtbc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혼자 있고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며 조용히 책 읽고 영화 보며 지내고 싶은 오랜 꿈이 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고, 자신 앞에 놓인 책임을 어정쩡하게, 대충 하고 싶지 않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느낌들이 책과 영화들을 소재로 다양한 형식으로 쓰여 있다. 영화처럼, 기사처럼, 선거의 공약처럼 실려 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들을 더 잘 전달하며 읽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 애쓴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 문장들로 인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문장도 예의를 지키는데, 내 말들은 왜 예의를 지키지 않는가?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기 시작하지.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할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 맘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네. 검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검게 보이는 거랄까.(p25) 어쩌면 나는 남편을 이런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 크고 높을수록 남편은 점점 더 악마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내 기대고, 내 욕심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를 연신 말하면서 남편을 나쁜 사람, 못난 사람으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만들어 놔야 내 맘이 편안해지며 비난과 허물들을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진다. 남편의 잘못을 말하는데 신이 나서 말하지 않고는 매길 수 없는 심정과 입술이 된다. 그러면서 그럴듯하게 내가 생각하기에는이라는 말을 포장처럼 붙이지만, 결국은 비난인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를 악마로 만드는 일. 사회에서 보기보다 늘 마주하고 부딪히는 가정에서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나는 참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닌가? 나라를 걱정하고, 정치를 걱정하는 것보다 나는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꾸려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에게 예의를 지키듯 상대에게도 예의를 지키며 사랑으로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늘 바램은 그러하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와 너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를 악마화할 정도로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내려놓기로 한다. 말처럼 쉽다면 정말 좋겠다.
세상을 지배하는 도덕률의 밑바닥엔 남성성이 도사리고 있다.(p183) 사회 전반을 저널리스트의 시선으로 매섭게 관통하는 저자의 말이 크게 와닿는다. 그것도 남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그렇다. 힘을 가진 자는 아직도 여전히 남자들이다. 여자들은 유리천장을 뚫고, 육아 휴직으로 몸도 마음도 힘든 육아를 감당하면서도 회사일까지 잘 해내야 한다. 남자들이 밖에서 그렇게 일만 할 수 있는 데는 여자들의 보이지 않는 감당함이 있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수많은 남자들에 의해 세상은 움직인다. 너무 오랫동안 굳어져서 보이지 않는 도덕률에까지 남성성이 도사리고 있으니 페미니즘은 멀고도 험난한 이야기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사람들을 향한 남성들의 시선이 또 다른 차별을 낳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속에도 오랫동안 잠재 되어 온 여성만의 일이라는 편견이 있다. 어느 에세이 작가의 말처럼 냉장고 속에 식재료가 없거나 수건이 세탁되어 있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미안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너무도 당연하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남편이 불편하지 않게 얼른 그 일들을 처리하는 나를 발견하곤 놀란다.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저자처럼 이렇게 생각하고 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딸들이 살게 되는 세상은 조금 더 달라질 것이라는 손톱만큼의 희망을 품어 본다. 결국엔 남성 여성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쪼니까 만만하고 쪼니까 하찮아지는 거다.(p203)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말하면서 드라마 대사를 인용한 부분이다. 자신의 기준을 갖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준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큰 차이가 난다고. 기준이 있는 사람은 그 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다시 돌아와 기준을 일으켜 세운다. 그 기준을 지키며 사는 것은 쉽지도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일수록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되 일단 결정하고 나면,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뒷일 걱정하지 말고 가볍게 갈 길 가라고 조언하다. 그러면서 쫄지말 라고. 쪼니까 만만하고 하찮아진다고. 많은 일들 앞에서 얼마나 쫄았고 하찮아졌던가?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서도 늘 쫄았다. 상사 앞에서, 남편 앞에서, 아이들 앞에서. 슬쩍 보면 당당함을 힘겹게 옷 입고 있었지만 늘 쫄았다. 그 쫄음은 만만함과 하찮음으로 나를 더 하찮고 만만하게 만들었다. 어깨 쫘악 펴고 당당하게 쫄지말자. 내가 믿는 것,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방법이 다름으로 인해 충돌이 생길 수 있으나 그 충돌과 갈등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하루아침에 짜잔 하고 되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으로 쫄 것 같은 상황에서 이 말을 외쳐보리라. 쫄지마! 쪼니까 만만하고 쪼니까 하찮아지는 거다!
이 책을 읽을 때 10.29참사가 발생했다. 그래서 더 책의 내용에 몰입하고 위로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이 책을 왜 독서모임에서 읽고 싶었고, 나는 이 책이 왜 좋았지?’ 책을 읽기 시작할 때 했던 고민은 마지막 장을 덮자 답을 찾았다. 아주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저자처럼 생각하고 살고 싶었다. 이 사람처럼 살고 싶은 거구나. 이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싶은 거구나 하고 깨달아졌다. 그렇게 살기로 다짐한다. 내 자리와 위치와 나이에서 나에게 예의를 지키듯 상대에게도 예의를 지키며 살고 싶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소하지만 내 기준을 쫄지 않고 지키며. 책에 나오는 영화와 책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해 아쉬움이 들었다. 또 읽어야 할 책들이 늘어나는 기분 좋은 부담감을 느낀다. 누가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스로가 예의를 지키며 성숙한 사회를 꿈꾼다. 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고민이 깊어진다. 그 고민의 끝에 이 책이 함께 할 것이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고, 좀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 온 마음으로 권한다. 우리는 모두 존중받아 마땅한 존엄한 존재들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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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기자에 대해서는 얼핏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허나 그건 그저 들어본 이름일 뿐, 그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리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자들 또한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하나로써 제 앞길을 위해서라면 취재윤리나 사회정의 같은 것은 내팽개치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생각일 뿐이다. 물론 그중에는 기자의 본분을 지키며 말 그대로 사회정의를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아 읽게 된 책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에 대한 예의라니.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대부분은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어서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온갖 종류의 권력과 금력을 따로 떼어놓고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사람과 사람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예의를 지킨다면 지금처럼 삭막하고 불평등한 세상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는 말은 아니다.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사람에 대해선 건너뛰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회는 조직에 대한 예의, 국가에 대한 예의는 차리라고 하면서 사람에 대해선 건너뛰기 일쑤였습니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사람은 고려의 대상에서 빠지곤 했지요.’라는 글을 읽으면서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는 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는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마음 한구석에선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갑질도 하지 않고, 그럭저럭 예의도 지키고,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편이고, 차별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하며 예의 없는 남들과는 다르다고 믿어왔다. 허나 그는 ‘소심한 성격을 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무책임함을 너그러움으로 포장하며, 무관심을 배려로, 간섭을 친절로 기만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있다. 우리 인간은 생활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같음’보다는 ‘다름’에 주목해 나누고 차별하려 든다고 한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물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자신을 주시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나도 별 수 없다’는 깨달음, 그렇게 낯선 나와 마주치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내마음속에 부는 서늘한 바람을 느꼈다.
4부로 된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 개인이자, 조직의 일원이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우리가 경험했거나 보아왔던 이야기들을 영화와 드라마, 소설 속 이야기를 빌어 살펴본다. 우리는 지금 잘못된 상식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침묵할 때 사람이 어떻게 고통 받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사고가 터지고 사건이 일어나면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체하면서도 그 직전에 어떤 선택을 한 사람들 탓으로 돌린다. 누가 당하든 당하게 돼있는데, 어찌됐든 당사자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는 거다.’(32쪽) 누군가 피해를 입었을 때 그 책임은 온전히 선택을 한 당사자 몫이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처리방법이다. 그는 성폭행이나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사건, 묻지마 살인 등을 예로 들면서 누가 고통을 받고, 어떤 사람이 책임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따지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것은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음모이자 사회적 구조의 문제점을 교묘하게 은폐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집단 따돌림과 마녀 사냥 같은 것은 동조자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그 동조자가 아닌지 반문한다. ‘침묵의 문화는 침묵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란, 굳건한 믿음 위에 서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 시간을 늦출 뿐이다. 침묵하는 자도 희생될 수밖에 없다.’(177쪽) 글을 읽으면서 문득 반나치 운동가이자 반전주의자인 마르틴 니묄러의 <그들이 처음 왔을 때>란 시가 생각났다. 침묵과 방관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도 희생자로 삼는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 아니었는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유태인원을 잡으러 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나를 위해/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혹은 놓치거나 소홀히 한 것들, 그리고 온갖 이유를 갖다 대며 자기 합리화 했던 것들은 없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싶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 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50쪽) 자신의 부끄러움과 위선의 민낯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그의 글을 읽어가면서, 나는 어떤 반칙을 하면서 살아왔고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생각해본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잔인하도록 무례하지 않았는지, 조직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성공의 노예가 되지 않았는지, 분노해야 될 때에도 침묵과 방관으로 나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는지.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가는 것과 동시에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도 돌아본다. 스스로도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정의는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라며 사람에 대한 예의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우리가 ‘해야 한다’라고 결론내리기 앞서 ‘필요한 것’이라고 스스로 체화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믿음이 ‘나도 별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낯선 나를 바라보며 새삼 사람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본다.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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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mate3416/222026843612 <책방 하고싶은 면서기>
우리 집 큰꼬마는 나와 스물일곱 해, 작은꼬마는 서른 해의 나이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녀석들이 까불 때가 있는데 내가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 ‘이 짜식이’ 선에서 귀엽게 봐준다. ‘이 짜식이’로 종료되지 않으면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근엄하게 상황을 마무리한다.
- 나 : 이 짜식이, 너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아? - 꼬마 : 못생긴 사람이겠지. - 나 : 야! 나 무서운 사람이야! 밖에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알아? - 꼬마 아빠 : 그렇지. 사람들이 안 좋아하지. ‘이(李)지랄’ 유명하지. 암, 암. - 나 : 거봐, 짜샤. 나 무서운 사람이야 너. - 꼬마 : 아구, 그래쩌요? 무서운 사람이에요? 아고 무서워라, 우쭈쭈 우쭈쭈~
식구들에게 인정받으며 상황종료. 흠….
나는 한 작은 지자체의 공무원이다. 종종 행사나 회의를 진행하는데 그런 날은 극도로 예민하다. 능력, 경력, 성격 등에 힘입어 느긋한 직원들도 있지만 나는 여직 그러지를 못한다. 예상 가능한 돌발상황들에 최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어야 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실수? 그런 거 하지 말자. 나, ‘이(李)지랄’이다. 행사 사진을 찍어두면 보도자료를 낼 때는 물론이고 다음 차례나 유사한 행사를 준비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몇 해 전,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무사히 마친 뒤 사진을 살펴보니 시장님께 증서를 건네 드리는 내가 등장했다. 맙소사….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아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내 이런 표정이었다니. 검은색 자켓을 입고 있어 더 그래보였다(이렇게라도 참담함을 덜고 싶다). 권위적, 사무적, 냉혈한. 그러니까 정말 재수없는 공무원의 모습이었다. 정말 너무나 별로였다, 내가. 많이 반성했다. 축하의 자리에서 학생, 학부모들의 눈에 얼마나 거슬렸을까. 내 딴에는 무사고 행사를 위해 집중하다보니 그리 되었던 것이었지만 그따위 고압적인 모습이었을 거라면 차라리 인상 좋은 누군가에게 맡기고 뒤로 빠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그 표정을 많이 반성했다.
아무래도 반성이 부족했나보다. 몇 년이 지나 사회복지협의체의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협의체는 복지정책으로부터 소외되었거나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들을 찾아 이발봉사, 목욕봉사, 반찬제공 등의 활동을 한다. 위원들은 50~60대 연령의 민간인들이었고 30대, 공무원은 나 혼자였다. 그 날 저녁 담당자가 회의사진을 보내줬다. 사진 구석에 젊은 공무원이 있었다. 오, 이건 제가 아니네요, 부정하고 싶었다. 몇 년 전 그 재수없는 얼굴이었다. 레벨이 더 높아진 것도 같았다. 회의 자료를 보고 있는 그 최연소자는 최고권력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초점 안경을 쓰고 있어 더 그래보였다(이렇게라도 참담함을 …). 반성의 의미로 가족에게 사진을 보이자 동생은 ‘뭐야 이게 정말’, 제부는 ‘채용면접 보는 거 같은데?’라고 평해줬다. 솔직한 의견을 구할 수 있으니 가족은 꼭 필요하다. 함께 둘러앉아 회의에 참석하셨던 어른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짐작해보는 것조차 속이 아프다. 호되게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려나 보다.
저널리스트 권석천이 『사람에 대한 예의』로 세 번째 책을 냈다. ‘중앙일보의 송곳’으로 불리는 그가 한 번 더 인간과 사회에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양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 믿던 그가 현지 가이드와 셰르파와 동행한 히말라야 취재에서 ‘권력의 야릇한 감칠맛’을 체험한다. ‘나 정도면 괜찮은’이었던 믿음은 ‘나도 별 수 없는’의 착각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정의와 연대를 지적해온 언론인으로서 감추고 싶었을 경험을 이야기의 시작으로 꺼내놓았으니 믿을만한 책이다. 글은 묻고 있다. 지금 당신, 어디에 서 있는가? 혹시 사람은 잊은 채 권력에 예를 다하고 돈에 최선을 다하는 곳에 서 있지는 않은가? 검은 자켓이나 다초점 안경을 핑계로 당신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옳게 살고 있느냐는 다소 부담스러운 물음을 기자생활의 경험과 영화, 책 이야기를 곁들여 무겁지 않게 풀어냈다.
소재의 많은 부분이 권력집단에 관한 것이다. 필자와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겨레>의 어느 기고글에서 권력을 ‘정의 실현을 위해 중요한 일을 조정, 실행할 수 있는 힘’이란 맥락으로 설명한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권력이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옳게 살 수 있도록 행사하는 힘이라는 식의 이해였다. 초록색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저자 역시 권력과 힘에 대해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이를 잘못 이해, 행사, 복종하는 자들을 고발하고, 그러했던 자신을 고해한다. 고발은 언짢은 마음으로, 고해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읽었다. 대표적인 권력집단으로 판?검사, 기업인, 공직자 들을 수차례 지목했기 때문이다. 맞다.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조금 억울한 건, 권력남용으로 사회에 악을 불러들이는 공직자들은 고위직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내가 일하는 시청과 면?동사무소의 공무원들은 민원인, 민간단체, 지역의원, 지역언론, 상급기관 등과의 관계에서 갑은커녕, 을도 무엇도 될 수 없는, 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공공의 적’뿐이라는 한탄을 종종 한다. 억지와 고성, 협박과 무시에 눈물 좀 쏟아봐야 8급 달고 7급을 달 수 있다. 내가 9급 2년차이던 시절, 억지를 부리던 노인이 시장실 문을 발로 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일이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과장님이 “무슨일이야?” 물으셨고, 7급 고참 직원이 동요 없는 얼굴과 “썅년이래요.” 한 마디로 보고를 끝냈다. 5급 과장님이 “응” 하고 자리에 앉으셨다. 벌벌 떨던 9급에게 그들의 내공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고위 아닌 공무원들은 죄가 없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민원인은 상식적이고 깔끔하며, 단체와 의원과 언론인은 선의로 역할을 다 한다. (오늘 아침 “늬들 때문에 이 나라가 통일이 안 되는 거야!” 소리 지르던 민원인은 잊기로 하자. 면서기를 하려면 남북통일 정도는 미리미리 해두어야 한다.) 공共을 향해 쌓아야 할 내공을 사私를 위해 축적하는 공무원이 여전히 있다. 내가 있는 곳에도 승진을 위해 잘못된 권력에, 잘못된 경로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공무원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에 공직자들이 공공의 적일 수밖에 없다. 행정, 사법기관이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규제, 감독, 처벌 등과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 힘을 행사하기 전에 늘 날카롭게 감각해야 한다. 어디로부터 온 힘인가. 기업은 눈앞에 놓인 여러 갈래 중 오래 걸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가려낼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소비자의 올바름과 연대와 똘똘함을 정확히 보아야 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어디로부터 얻는 생명인가. 언론은 본연의 역할을 끊임없이 아프게 자각해야 한다. 쉬지 말아야 한다. 착각을 경계하고 정의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디로부터 얻은 신뢰인가. 정치권은, 정치권은…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앞서 적어둔 모든 것들을 모두 다 뼈에 새기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국민의 고통을 몸으로 아는 것이 우선이다. 어디로부터 존재하는가.
이 집단들만이 잘 해서 될 일은 아니다. 당신과 내가 서로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 모두 각자의 모습을 살펴볼 일이다. 나처럼 정말 별로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믿을만한 사람에게 물어보자. “혹시 나, 재수없어?” (답은 각오하고 듣자) 저자는 이렇게 제안한다. ‘이것까지 내주게 되면 이 직업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마지노선을 만들어 두자고,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만의 기억으로 세상에 마주서자고, 지켜야 할 삶의 원칙들을 만들어 두자고.
지자체의 업무 중 행정기관이 직접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업들은 자격 있는 단체에 보조금을 주어 진행한다. 7급이 되고 얼마 지나 평생교육 업무를 맡았다. 각종 보조사업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단체들의 보조금 운용을 정산하다 화병을 얻었다. 처음 몇 번은 실수일 거라 생각했지만 눈에 보이는 고의(때로는 악의)를 도저히 덮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 교육 프로그램인데 밤 11시 29분 치킨집 결제? 단체 임원 차량 주유비 결제? 아무 증빙도 없는 강사비 지출? 관련자들을 차례로 만나 조목조목 설명을 요구했다. 검찰 유관단체와 지역에서 오래 활동한 단체, 관리자급 공무원들과 친분이 있는 단체의 대표들이 곧바로 그들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납득할 수 없는 건은 금액을 불문하고 환수조치 했다(2만 4천원도 있었다). 과장님이 ‘정도껏 해라’ 하셨지만 그 ‘정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존심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엄청난 권력자는 아니지만 상식은 조금 있는 사람이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까지 나를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덕분에 단체들 사이에 그 직원 지랄 같다는 소문이 돌았고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들어왔는데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3년간 고집스럽게 지랄맞음을 유지했더니 ‘그 팀 보조사업은 딴 생각 말아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잡았다. 사실 쉽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욕먹고 혼나고 오해 받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 그건 해놓고 나왔어’ 혼자서라도 뿌듯할 수 있어 조금 덜 부끄럽다. 변명 차 덧붙이자면 내가 모든 업무에 그런 태도인 것은 아니다. 요즘 우리 팀에서는 어르신들께 택시와 미용실 이용권을 나눠드리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휘어진 다리와 굽은 등으로 뜨거운 여름 해를 맞아가며 면사무소를 찾아오신다. “신분증 없으시면 못 드려요.” 창구 직원의 청천벽력 안내를 받는 어르신들이 가끔 계신다. 얼마나 당황하시는지. 여길 어떻게 왔는데…. 그럴 때 출동하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할머니 가방에서 신분증 역할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살펴본다. 아무것도 없으면 핸드폰으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대상자의 번호가 맞는지 확인한다. 무엇이든 확인이 되면 드려야 할 것들을 모두 모아 드리며 “다음엔 신분증 꼭 가지고 오셔야 되요.” 소용없는 당부로 굽은 등을 댁으로 보내드린다. 감사팀 지적을 받는대도 상관없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 줄 위험이 있거나 엄격히 판단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면 악의 없는 약자들에게는 느슨함을 고집할 것이다. 꽉 막힌 답답이 공무원(그거 정말 싫다)으로 보일까 싶어 구차하지만 몇 줄 보태봤다.
14년 전, 첫 출근을 해 직원들의 모니터마다 적혀있던 문구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 식상해서 여전히 생생하다. 친절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래서 이곳을 구태의연의 집단이라 하는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너무 싫어 ‘프로공무원이 되겠습니다’라는 당찬 다짐을 붙여두었다. 8급이 되고 7급이 되고 6급이 되어오는 동안 그 다짐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다. 어떨 때는 부끄러웠고 어느 때는 너무 먼 옛일 같았다. 당시에 크게 고민하고 정한 문구는 아니었지만 이제 내게 그 문장은 없었던 것으로 하거나 다른 것으로 덮어둘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이제 곧 15년차 공무원, 겁도 없이 단어 하나를 덧붙여 새겨두려 한다. ‘지랄맞은 프로공무원이 되겠습니다.’
권석천 기자가 거듭 언급한 것이 자기 기준과 삶의 원칙이다. 단순명료하게 정해두어야 급할 때 건너뛰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랄맞은 프로공무원이 되겠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정년까지 무사하다면 앞으로 27년 남았다. 그 세월을 분투하며 살 생각을 하면 고된 한숨부터 나오지만 정했으니 어쩔 수 없다. 지랄맞은 프로 공무원으로 사는 것, 이것이 사람에 대한 나의 예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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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서 유일하게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던게 권석천 칼럼이었다. 자본과 권력에 논리에 따라 신문사의 논조가 좌지우지 됨에도 권석천만은 사람이 우선이었다. 그런 그의 책은 나올때마다 꼭 읽어볼법한 책이었고 이번 사람에 대한 예의도 마찬가지다. 기자출신으로 날카로운 시선과 글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이 중심이되기에 그의 글은 따뜻하고 불편하지가 않다. 물론 툭툭 던지는 사안을 꿰뚫는 시선은 매우 날카롭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사람이 있기에 따뜻하고 읽을수록 곱씹을수있게 한다. 우리는 자본앞에서 너무 많을것을 잃는다. 최소한 사람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 사회가 고도화되고 부가 쌓일수록 사람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는 요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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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 건 수년전 교회에서 청년사역을 감당했을 때이다. 당시 "정의" 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 변두리에서 중심 언어로 부각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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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간다운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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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내 인생을 뒤돌아보게 된다. 젊은 시절엔 앞만 보고 열심히 살면 중년의 나이엔 뭔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로 사는 게 슬플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는 이유가? 뭔가가 되어 있지는 않아도 사람답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고 싶다.
텔레비전에서 어느 대학 전 총장의 갑질 보도가 있었다. 그것뿐일까?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들에게 행하는 갑질이나, 사장이나 회장이라는 사람들의 갑질을 보면 저들이 과연 사람일까? 의문이 든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서일까? ‘사람에 대한 예의’를 읽으며 나를 다시 뒤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고,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세상이 만들어 낸 악인들의 속사정까지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한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다른 이에게 폭언하지 않고, 감정대로 소리치지 않고, 고마운 일이 있을때에는 표현하지 않지만 고마운 마음은 갖고,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착한 갑질과 나쁜 갑질은 구분할 수 있는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혹 틀리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책을 보며 다양한 생각을 했다.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칫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질되기 쉽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집착과 학대로, 사랑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 의심하라,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중에서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내가 과연 좋은 사람인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좋은 사람의 정의가 뭔지 찾아가고 있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런 고민을 할 때 읽게 되어 고마웠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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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 읽어내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도대체 뭣이 문제일까? 매사 늘어지는 몸과 마음을 다 잡기가 힘든 요즘이다. 이 모든 건 코로나 때문이야(혼잣말...속마음) 사람들이 다 적대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코로나 때문일 거야 정말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사람관계가 힘들어 졌을까 우울하다. 책의 제목처럼 사람의 대한 예의가 사라져버린 시대를 살고 있어 그런 것 같다. 듣기 싫은 소리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옳은 이야기를 싸가지 없이 했나보다. 내가... 나 나름대로 최선의 예우를 했는데. 그건 내 생각이였을 뿐.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도 않다.
이 책에서 제일 와 닿는 부분은 “하찮아지느니 불편해지려고 한다“였다. 작가의 이야기 보다는 옹산의 동백이의 이야기이다. “나는 남이 불편할까 봐 나를 낮췄고 붙어보기도 전에 도망치는 게 편했다. 근데 이제 그냥 하찮아지느니 불편한 사람이 돼 보기로 했다”며 선전포고를 한다. 나도 지금은 잘 안 참지만 전에는 좀 참았다. 나를 낮췄다. 그러다보니 그게 권리인줄 아는 사람이 생겼다. 가족에서도 직장에서도 내 위치는 그렇게 자리를 굳혔다. 참으로 맹한 짓이였다. 혼자 번민하며 갈등했다. 자존감이 무진장 떨어지는 나락의 세월을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불편해지자. 어차피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만족하는 인간관계를 없을 것이다. 불편해지겠다는 각오. 그 각오로 헤쳐나가자. 결국 내가 이길 것이다. 동백이처럼
학연, 지연 다음에 뭐? 흡연 . 완전 공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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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당신이 결정할 몫입니다. 다만, 의미 있는 삶이 되려면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기억을 갖기 위해 세상과 마주 서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잊지 마세요. 당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고통받은 만큼만 진실입니다.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 p67 사회적으로 조로하면서도 정신 연령은 낮다. 조직 밖에 나가면 노숙한 척은 다 하면서 조직 안에만 들어오면 어린아이가 된다. 상사와 선배들 앞에선 스스로를 아직 모자라고 배워야 할 게 많은 존재로 여긴다. 자기 주장을 펴지 않고 늘 고개를 끄덕일 자세가 돼 있다. - p105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믿는 것들이 주변의 영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사무실에,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 공기처럼 떠다니는, 크고 작은 편견의 미세먼지들이 뭉치고 뭉쳐서 내 가치관이 되고, 신념이 된 것은 아닐까. 그 가치관과 신념이 얼마나 균형감각 있고, 상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p142 중요한 것은 분명한 자기 기준이다.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 있는 사람이 뭐라고 압박해도, 내 자신의 욕망이 뭐라고 유혹해도, 때로는 흔들리면서, 가야 할 길을 간다. 중간에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내비게이션이 다시 경로를 재설정하듯이, 자기 기준만 잃지 않으면 끝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 p201 자기를 안다는 건 또한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 나아가 자신이 속한 집단까지 객관화해서 볼 수 있어야 진짜 전문가다. 다시 기자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분야를 잘 알고, 그 분야 사람들과 친하다고 해서 전문 기자가 되는 건 아니다. 그 분야를 잘 알면서도 비판의식을 잃지 않아야 전문 기자가 될 수 있다. 착각하지 마라. 잘 아는 것과 유착하는 것은 다르다. 전문가는 몰입하되 매몰되지 않는다. - p217 언론과 정치에 둘러싸여 기자 생활을 한 저널리스트 권석천의 글들이 담겨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 세상을 향한 솔직하고 가식 없는 그의 글들이 통쾌했고 때로는 이런 글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알고 보면 참 좋은 이야기들이 많고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좋은' 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해질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차별, 혐오, 갑질, 부정, 비리, 인간성 상실 이런 키워드들이 만연해지는 것 같은 요즘이다. SNS가 발달해서 권석천의 글처럼 자고 일어나서 다시 잠에 들기까지 누군가에게 '반응'을 하고 누군가의 '반응'을 기다리는 일상 때문일까. 부정적인 키워드나 해시태그가 차오르는 것 같다. 요동치는 기사와 사건들 속에서 보다 사람다운 내가 되려면, 그리고 보다 사람답게 세상을 바라보려면 내 자신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권석천은 말한다. 동의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글들 속에서 휩쓸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하든, 책을 읽든, 무엇이라도 해서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뉴스나 기사도 여러 글을 읽으면서 교차 검증을 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활력도 메마르게 만드는 코로나 시대인데 일상이라도 부드럽게 흘러갈 수는 없을까. 내 바람은 텔레비전을 켜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순간 희미해진다. 아, 막막함을 일으키는 사건, 사고들과 도저히 이해불가능인 누군가들 그리고 자극적인 문장들.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가 감정만 실컷 낭비한다. 텔레비전을 끄거나 스마트폰을 끄는 그 순간까지. 이 책 제목인 '사람에 대한 예의'만 지켜도 이렇진 않을텐데. 서로 자기의 기준을 해치지 않으면서 남에게 올바름을 보이면 좀 더 활력 넘치는 일들이 일상을 채워나갈텐데. 우선 나 먼저 예의 있는 일상을 만들어봐야지. 뭐든 나 먼저 해보고 이야기해야 설득력이 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 좋은 해시태그들이 가득한 내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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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겨울서점의 추천으로 샀던 책이다. 읽어내려 가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다지 새롭게 와닿지는 않았다. 책의 감상은 개개인마다 다른 것이니까...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책유투버가 유료광고로 소개하는 책은 신중히 생각하고 구매해야 한다는 점?? 저자 권석천이 바라는 대로, 모든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사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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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으로 읽고 너무 좋아서 가족들도 모두 읽어봤음 해서 종이책으로 소장했다. 저자의 말을 읽으면서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마음에 새기고 싶은 문장들을 만났다. 작가의 자기반성에 공감하기도, 반성하게도 한다. 주제와 형식들이 다양하고 흥미로웠고, 영화 속 인물로 내세우는 화법은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형식보단 내용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원인들. 그 속에서 나는 진짜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