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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조망하며, 대한민국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특히 위기가 닥쳐야 본성이 들어난다는 구절 속에, 코로나시대에 접어들면서 각국의 국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우리나라는 그래도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는 아직 기술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정치를 견제하는 많은 단체(모럴 이코노미)와 국민이 있었다는 것인데, 대한민국도 서서히 이런 다양한 목소리로 정치를 견제하는 듯하다. 잘 살고 있는 나라이지만, 그 안에 국민은 잘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일본과 그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대한민국, 더 좋은 나라와 그 나라에서 잘 사는 국민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정치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나라를 망치는 길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기억에 남는 구절. " 재앙의 원인은 천연에 반항한 인간의 세공이다." "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한다면, 사회의 희소자원, 재정, 서비스등을 어디에 투여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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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적으로 근대화가 강요된 비서구의 신흥국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국제 사회로 나아가자고 국민을 동원할 때 사용한 슬로건이 '유신'이라고 할 때,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한국의 10월 유신은 닮았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한국의 10월 유신은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내셔널리즘을 만들어내고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진시킨 서구의 선진국을 좇던 아시아 변방의 국가가 근대화를 위해 취한 방식이었다. 따라서 150년 전의 개국과 서구화, 80년 전의 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의 현대사를 살펴보는 것은, '유신'으로 만들어진 약한 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를 바탕으로 한 한국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메이지 이후 일본의 역사를 기민(棄民)의 역사라고 요약할 수 있다면, 취약한 사회와 더딘 민주화 하에서 불행과 고난을 감내해야 했던 개인들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동일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근대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역사가 국가에 가려 있던 주민과 시민, 민중이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역사라고 한다면, 광주민주화운동에서도 볼 수 있듯 한국 역시 비슷한 유신 이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이 드러내는 역사의 그늘이 단지 일본 근대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며, 이것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야만의 기록이라는 점과 더불어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착된, 국민 없이 국가주의만 팽창한 것이 강상중 선생이 분석한 일본이라면, 비슷한 전철을 밟은 한국은 어떠한지 비판적으로 살펴볼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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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란이다. 코로나19는 국가 개념이 확고해진 후로 인류가 겪고 있는 최대의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매일 들고 있다. 각국마다 초유의 바이러스와 다투느라 정신이 없다.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항변할 테지만, 겉모습만 보아도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연일 확진자수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몇몇 국가들의 경우 의외지 싶다. ‘선진국’이라는 평을 앞다투어 듣던 국가들의 대처가 왜 그리도 미흡한지. 그들에게 자본력이 부족하겠는가, 기술력이 부족하겠는가. 슬프지만 충분한 의지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의도적으로 놓아 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앞선다. 국가가 언제나 선하지는 않다. 국가는 때때로 국민을 버려왔다. 저자의 이력은 익히 알고 있다. 일본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그는 한국식 이름을 지녔다. 그는 재일 한국인 2세다. 지금은 ‘강상중’이라는 한국 이름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이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른바 ‘디아스포라’로서 오래도록 고민했고, 어쩌면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시선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왠지 애증의 감정이 묻어 있을 것만 같다. 노력한들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는 그의 처지가 혹 비판적인 시선의 발로는 아니었을지 묻고 싶기도 하다. 한 편으로는 우리보다 여러모로 앞섰다는 평을 받는 일본 사회의 부족한 면모를 들추는 일이 묘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땅을 구입한 사촌을 바라보는 심정이랄까. 그들을 따라잡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닮고픈 마음이 여과없이 반영된 듯 우리 역시 일본 못지 않게 고도 성장을 기록했다. 이 말은 일본 사회의 현 모습이 머지 않은 훗날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단 뜻이다. 과거가 유사하므로,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속도가 빠르면 많은 것들을 성취할 수 있다. 대신 그로 인해 놓치는 것들도 만만찮게 많다. 한 국가가 성장할 때 속도전을 펼칠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챙겨서는 원하는 만큼 빠르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가장 큰 효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소수를 타깃으로 한 정책을 구사하는 일이 잦다. 책에는 일본 사회의 ‘버림받은’ 사람들 이야기가 수록돼 있었다. 저자는 풍문으로 들은 바를 옮기지 않았다. 직접 해당 지역을 방문하고 당사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선택받지 못한 인생의 비루함은 제3 자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화두.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다. 우리가 지향했던 바가 ‘모래 위에 지은 집’일 수도 있다는 허망함도 들었다. 지진이 나고 환경이 오염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고. 아니, 발생한 모든 문제의 최대 피해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여름철이면 왕왕 우리나라 텔레비전에 등장하곤 했던 수해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고통받는 일본인들과 한국인들. 국적은 달랐지만 그 외의 것은 동일했다. 도처에서 도움의 손길이 펼쳐졌지만 피해가 선별적으로 그들을 덮쳤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들이 버림받았음을 의미하는 듯했다. 우리의 역사엔 ‘유신’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의미의 유신을 전(前) 정권은 남북 분단의 현실과 국제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일에 활용했다. 일본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같은 단어를 접할 수 있다. 난 메이지 유신을 일본이 근대화로 나아가기 직전 겪은 체제 변혁 즈음이라 배웠다. 허나 긍정적인 이미지로 포장을 한들 메이지 유신은 제국주의의 시점이었다. 지금은 물러난 아베 총리는 약 150년 전의 메이지 유신을 언급하며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 일본을 꿈꾼다는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저자는 낡은 것으로는 결코 새 것을 만들 수 없음을 강조했다. 메이지 유신 시절의 국가 중심적 사고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건 끊임없는 인간 소외의 비극이 전부다. 책이 쓰인 지 6개월가량이 지났을 뿐인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나름 견고해 보였던 아베의 갑작스러운 사임이 놀라웠는데, 이젠 검찰이 그를 조사한다는 소식이 뉴스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우리나라의 방역을 향한 자평 역시 요즘 같아서는 더 이상 유효치가 못하다. 일본도 위기요, 우리도 위기다. 과연 또 다시 우린 버림받을까. 거대한 국가에 비하면 한없이 미약하지만 그래도 일본의 풀뿌리 사회는 건강했다.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 희망을 품고 싶다. 야만에 굴복하는 것 외에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고수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