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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 데드>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좀비가 나타나 미국의 전역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나타내고 있다. 신랑이 퇴근하고 오면 TV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보고 있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굉장히 오랫동안 보고 있는 거다. 도대체 무슨 드라마를 보길래 그렇게 깊이 빠져있는지 궁금해 책을 읽다 말고 몇 편을 함께 보았다. 좀비물로 무척 유명한 드라마라고 했다. 시즌 1부터 시작해서 현재 시즌 10까지 나와있는 드라마로 신랑은 현재 시즌 8을 보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 좀비로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드라마였다. 인종 문제, 성 문제, 공동체 생활에 대하여 온갖 문제를 거론한다. 우리의 미래를 나타내기 위해 아이를 태어나게 하여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있었다.
<워킹 데드>를 보면 좀비가 판치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기란 버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함께 머물던 사람들과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세계의 끝은 과연 있는지,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출간 35주년 기념판을 읽으며 어쩐지 <워킹 데드>의 장면들과 비교하게 되었다. <워킹 데드>의 인간들은 모두 이름이 있는 반면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인물들은 모두 이름이 없다. '나' 아니면 '노인', '도서관 여자', '통통한 소녀', '문지기', '꿈 읽기', '대령' 등이다. 부재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한 과정에서 모두 무명의 이름으로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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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두 개의 제목으로 출발한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세 가지의 단어로 시작하고, 세계의 끝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진행된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합해지는데,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언제 맞닿을지 몹시 기대하게 된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는 국가의 공권력 기관인 곳에서 계산사로 일하고 있다. 생리학자인 노인의 호출을 받고 연구실로 갔다가 셔플링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보수도 넉넉하여 그리스어를 배우고 외국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한 '나'는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그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노인이 주었던 일각수 두개골과 자신의 상관관계를 알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기호사의 일원으로 보이는 꼬마와 덩치가 나타나 그의 집을 폐허로 만든다.
세계의 끝의 '나'는 자신의 그림자와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 짐승들과 그림자들을 지키는 문지기는 그에게 도서관에 가서 일각수의 두개골로 오래된 꿈을 읽으라고 한다. 문지기는 '나'에게서 그림자를 떼어 놓으며 서로 다른 곳에서 지내라고 한다. 그림자가 없어진 '나'는 자꾸 기억들을 잃는다. 그림자는 자기의 마음을 가리켰다. 해가 비칠 때 우리에게 달라붙은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다. 여기에서 그림자는 우리들의 마음을 가리키고,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우리의 상념이 깊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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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보호사들이 지하에 사는 야미쿠로와 짜고 노인의 연구소를 헤집었다. 노인은 사라지고 통통한 손녀와 함께 지하의 세계로 노인을 찾으러 간다. 야미쿠로가 있는 지하의 세계를 건너 노인이 자신과 연관된 연구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박사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있어 이 세계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세계의 끝은 완전한 곳이다. 싸움도, 고통도 없다. 필요한 것, 알아야 할 것이 다 있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곳이다. 세계의 끝에는 짐승으로 분류되는 일각수들이 살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 되면 짐승들은 죽어 나간다. 누구 하나 슬픔을 느끼지도 않고 문지기는 짐승이 죽으면 머리를 잘라 두개골을 도서관에 보관할 뿐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끝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도 없고 그 마음을 알지도 못한다. 이런 세상이 우리의 이상향이 될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원한 삶을 사는 불사의 삶을 바라지만, 희노애락이 있고 언젠가는 죽고마는 세상에 마음 붙이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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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는 '나'가 바라보는 세상은 허무의 세계와도 닮았다. 바깥 세상으로 나가자는 그림자에게 주려고 마을의 지도를 그렸음에도 그가 선택한 것과 세계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나'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세계가 어떤 것이어도 자신이 머무는 곳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반면 너무 쉽게 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삶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고 살기 때문일까.
두 가지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합해졌다. 원더랜드를 향한 세계의 끝에서 마주하는 우리의 민낯을 보는 것만 같았다. 미래는 대부분 우울하게 그려진다. 지금 코로나-19의 상황도 미덥지 못하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차있다. 어떠한 세계는 좀비로 가득차 집밖에 나갈 수도 없고 집안도 안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사는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남은 오늘을 평범하게 장식하려는 '나'에게서 오늘의 우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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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에서 문자가 날라왔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정판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출간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예전에 출간된 책인데 아주 이쁘게 하드커버박스로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무리카미 하루키 작품의 스타일은 나와 맞지 않지만 그의 작품이 너무 유명하기에 히가시노 게이고 형님의 작품 다음으로 많이 읽어보고 있다. 이번에 나온 개정판 또한 아직 읽어보지 않았기에 출간되자마자 바로 집으로 들여오게 되었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점이 문장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다시한번 느끼고 또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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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작품 중 제일 좋아하는 소설인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양장버전이 나왔다고해서 바로 구매했어요. 받아보니 깔끔하고 책장에 두니 너무 예쁩니다. 대신 너무 두껍고 무거워서 들고 읽기에는 부담스러워 함께 산 이북버전으로 읽고 있습니다. 작가가 고친 부분도 있다고 들었는데 번역가님도 바뀌셔서 읽을 때 느낌이 예전 책과 많이 다르네요. 오랜만에 예전 책도 꺼내서 번역가님별 두 책 다 읽었어요. 이 소설을 좋아해서 몇년마다 다시 읽는 편인데 이번에 완전판이 나와서 너무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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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걸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이 긴장 관계 속에서 병행적으로 진행된다.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계산사라는 소재를 통해 근미래적 분위기를 풍기며 이야기를 열지만 독자들은 다음 챕터에 나오는 숲과 초원이 펼쳐진 세계의 끝의 묘사를 읽고 큰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괴리감에 적응을 못해 몇 차례 책을 읽었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는 과학기술과 신비, 미래와 과거, 현실과 비현실과 같이 양극단에서 대치되는 류의 그것이다.
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걸작이라고 표현했냐면 그 이유는 첫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또한 ‘그 무언가’를 가득 내포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책의 남은 페이지가 적어질수록 아쉬움이 깊어진다. 그 무언가를 나는 오리지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처음 보는 오리지널의 신선함은 늘 그 끝이 아쉽다.
두 번째 이유는 매력적인 등장인물을 들 수 있겠다. 오래된 영화와 음악, 문학을 좋아하고 이혼 경력이 있으며, 셔플링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계산사인 나 (생각해보니 나의 이름은 소설에 나오지 않은 것 같다.) 통통하고, 멜론향수를 뿌리고, 핑크색 옷을 선호하며, 사격, 승마, 주식 등 영재교육을 받은 박사의 손녀딸, 위가 거대해서 많은 음식을 먹는 도서관 사서, 세계의 끝에서 문지기에 끌려간 나의 그림자 등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쿨하고 생기있다. 이런 매력 있는 캐릭터들이 상호작용 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정말 재미있다. 한 치 앞이 상상이 안가는 것이 하루키 작가 작품의 특징인 것 같다.
세 번째 이유는 소설에 등장하는 영화와 문학, 음악, 요리 등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은 대니 보이, 밥 딜런의 음악, 로저 윌리엄스의 고엽 등을 듣고 위스키를 마신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서 오르되브르로 딸기 소스 잔새우 샐러드와 이탈리안 리버 무스, 탈리아텔레 카살린가 파스타를 먹고 디저트로는 포도 셔벗과 레몬 수플레를 먹는다. 빌자크와 이방인을 읽는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영화와 문학, 음악, 요리 등의 리스트를 적어 하나둘 그것들을 경험한다면 나의 삶이 한 단계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점은 소설이 하나의 창문(window)으로 기능하며 그 속안에 있는 사건(현상)들을 보며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기회를 준 것이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24시간이라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에게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세계의 끝에 남을 것인가? 아닌가? 등의 질문을 하며 책을 읽었는데 소설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어서 너무 재미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은 예상을 뛰어넘어서 재미있다.) 내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하루키 작가의 걸작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위의 3가지 이유이다. 당분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대한 리뷰와 비평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숨겨진 의미와 내가 알지 못했던 메타포들을 찾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 웰메이드 콘텐츠의 장점은 처음 볼 때 여운이 길어서 좋고 그 후에 다시 찬찬히 해석을 하며 봐서 좋다. 하루키 작가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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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보이, 페이퍼클립, 웅덩이 이쪽과 저쪽의 메시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고.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가? 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결론적으로 실험 내용은 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뇌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는 우리가 결정하기 전에, 예를 들어 이것을 해야지 결정했다가도 바로 취소하고 다른 것을 선택할 때도, 뇌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려고 마음먹었음에도 다시 바뀐, 내가 눈치채지 못한 내 마음을 뇌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걸 두고 우리의 행동은 사실 모두 결정되었다는 말도 있고 무의식이 실은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도 있다.
나는 그 실험 결과를 보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생각났다. 대니보이, 페이퍼클럽, 웅덩이. 그것은 무의식의 신호일까? 아니면 의식이 무의식에 보내는 메시지일까
이야기의 첫 시작은 ‘계산사’인 나는 노인의 연락을 받고 노인의 연구소에 간다. 기묘한 엘리베이터. 손녀딸. 페이퍼클립 소설에 몰입하기 전부터 나는 잊고 있던 사진을 보듯 추억에 잠겼다. 기묘한 엘리베이터는 초창기 하루키 소설에 종종 소재이며 손녀딸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손녀딸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요리연구가가 있다.
페이퍼클립.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쓰지도 않을 클립을 얼마나 샀던가. 오이햄치즈샌드위치, 그리고 오이. 노르웨이 숲에서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에게 오이를 김에 말아 간장에 찍어 먹는 법을 알려준다. 생명의 향기가 나는 오이. 그 후 나는 오이를 보면 생명의 향기가 생각났고 오이 덕분에 오이햄치즈샌드위치는 현실감 있는 샌드위치로 느껴졌다. 소설 속 노인은 샌드위치는 한 조각 먹고 나중엔 오이만 소금에 뿌려 먹는다. 예의 바른 귀뚜라미처럼.
세계의 끝에선 이런 생명이 있는 요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와있는지 모르는 나. 나는 기억을 잃은 채 세계의 끝에 왔고 그림자와 분리된다. 그리고 ‘꿈읽기’라는, 꿈이 담긴 일각수의 두개골을 읽는 직업을 받게 된다.
정반대의 세계 같지만 몇 가지 키워드로 이 세계는 하나임을 알게 된다. 맨 처음 등장하는 장면으로 나는 기묘한 엘리베이터에서 대니보이를 휘파람으로 부는데 세계의 끝에서 잊고 있던 노래가 대니보이였다. 유튜브로 찾아 들으니 생각보다 슬픈 노래였고 가사의 내용은 세계의 끝 분위기와 비슷했다. 하지만 현실의 나에게 대니보이는 정말 중요한 메시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을 가장했던 걸까. 페이퍼 클립, 웅덩이도 마찬가지.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는 <세계의 끝>. 자신을 노리는 기호사와 야미쿠로가 존재하는 <하드보일드한 원더랜드>. 재미있는 건 이 소설에서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단 며칠이지만 세계의 끝은 매우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불사의 세계. 조직과 불사라는 단어 때문에 명탐정 코난의 검은 조직이 생각나 웃음이 났지만, 박사가 설명한 시간의 개념은 요즘 내 생각을 정리해주는 말이었다.
사유는 시간을 분해한다.
나는 요즘 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 동네 할머니는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종종 나에게 들려준다. 그러면 눈빛은 정말 그 나이로 돌아간다. 아마 머릿속은 12살 그때이고 마음도 그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없고 그때의 나이다. 마치 7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는 그것이 참 신기하고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박사의 말, 사유는 시간을 분해한다. 사유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영원이 된다.(전 번역에서는 사념이라고 했는데 사념보다는 사유라는 단어가 훨씬 와닿았다)
이런 저런 모험 끝에(매우 성의 없는 요약이지만)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는 박사로부터 나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서관 사서를 만난다. 세계의 끝에서 나는 그림자와 탈출하려고 하지만 나는 도서관 사서가 마음에 걸린다.
나는 하루키의 다정한 말을 좋아한다. 한밤중의 기적 소리, 봄날의 곰, 나는 언제가 반드시 당신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거야.(합본 749p) 그 밖에도 간간이 보이는 하루키식 농담이 재밌었다.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그리고 브래지어 후크를 풀려고 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러나 후크는 없었다, “앞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세계는 확실하게 진화하고 있다. (715p)
소설과 별개로 소설 속 키워드는 잊고 있었던 하루키 세계를 일깨웠다. 코끼리공장, 나는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코끼리공장이나 코끼리 이야기를 좋아한다. 양 사나이만큼 코끼리공장 이야기를 더 써주면 좋을 텐데, 하이힐에 나오는 코끼리 아가씨도 매우 좋아한다. 어쩌지 손녀딸은 야무진 코끼리 아가씨가 생각난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접한 건, 2004년이었다. 열림원 번역으로 처음 읽었고 다음엔 김난주님이 번역한 한양출판사, 모음출판사로 번역한 『일각수의 꿈』이었다. 그래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번역도 많이 순화되었다. 샤프링에서 셔플링, 생물학자에서 생리학자. 일본식 영어에서 한국식 영어로 바뀌었고 특히 손녀딸 묘사도 사랑스럽게 순화되었다. 뚱뚱한에서 토실토실이라든지 오동통한이라든지. 이 손녀딸처럼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살기 좋을까. 그녀의 단단한 용기가 부럽다.
하지만 역자의 말이나 작가의 말이 없어서 아쉬웠다. 열림원판에서는 <내 작품을 말하다>, 라는 챕터가 있는데 이 부분은 합의가 안 된 건지, 독자로서 안타깝고 아쉬웠다. 역자의 말도 마찬가지. 90년대 이 소설을 번역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일본 문학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때라 역자들이 하나같이 미지의, 척박한 일본 문학을 소개해서 기쁘다는 표현 하는데 거의 30년만 에 같은 작품을 재번역한 역자의 소감이 있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비가 왔고 앞으로도 계속 내릴 예정이다. 소설에서 비 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 읽기에 딱 좋을 때라는 생각을 했다.(10월도 괜찮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을 때 문장에 비 내리는 장면이 있으면 괜히 낭만적인 기분이 들고, 내가 그 소설 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소설 속 나는 서머싯 몸의 『면도날』을 3번 읽었다고 하는데, 다음 소설은 면도날 읽어야 할까 고민된다. 실은 『잠』이란 소설을 일고 『안나 카레니나』가 너무나 읽고 싶어져 초콜릿을 잔뜩 산 후 『안나 카레니나』를 샀지만 초콜릿만 잔뜩 먹고 몇 줄 읽다 말았다. 집에 면도날이 있는 것도 아마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사기만 했던 책 같다. 하루키 소설을 읽고 나면 읽고 싶은 소설이 많아진다. 발자크, 트루게네프, 스탈당 등.
그런 걸 절망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투르게네프라면 환멸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고, 토스토옙스키라면 지옥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서머싯 몸이라면 현실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그것은 나 자신이다.(667p)
이런 비유를 하는데 어찌 책을 안 찾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험을 끝내고 손녀딸은 다시 발자크의 농민. 읽어야 할 책이 늘어난다. 어쩌면 페이퍼 클립을 사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그림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나는 저쪽의 그림자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곳의 나에게 무의식의 힌트를 주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내가 그 힌트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코끼리공장 에피소드가 너무 읽고 싶어 『코끼리공장의 해피엔드』(문학동네, A DAY in THE LIFE 코끼리 공장에 관련된 엽편이 있다,)를 다시 읽어보았다. <모두 함께 지도를 그리자> 라는 에세이가 있는데 가상의 마을을 그린 지도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이 소설이 아닐까? 하루키 스스로 이 소설은 자신의 실력보다 한 단계 위로 썼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런 작은 즐거움이 있어 한편으로는 그래도 즐거운 작업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동안에 잊고 있었던 하루키 소설들이 생각났다. 『해변의 카프카』, 『1Q84』, 가장 최근에 출판된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어쩌면 조금 난해했던 소설들은 박사의 이론과 관통하는 세계가 아닐까 .
젊은 하루키를 다시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추억을 복기해보고 잊고 있던 사유를 떠올렸다. 덕분에 숙제도 많이 얻었지만 오랜만에 충만함을 느낀다. |
| 친필사인본 받으려고 예약구매 했던 터라 실망이 너무 크네요. 책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는지 모릅니다. 후기 남기려고 들어와보니 저만 못 받은 것 같네요ㅜㅜ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서 아쉬움도 더 크네요. 실망한 마음이 진정되면 오랜만에 다시금 첫 페이지를 읽어야겠어요. 꼼꼼하게 포장해서 배송이 된 터라 책 상태는 좋습니다. 집에 이 소설이 있는 터라 이 책이나 그 전 책 중 하나는 바이백으로 처리해야 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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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고 복잡한 이야기지만, 결국 에고를 가지는 주체로서 존재가 선택하는 지향은 무엇인가? 즉, 존재의 유일성을 증명 가능한 '성질', 인간의 류적 특수성은 주체성, 의지, 그에 비롯된 결과의 향유와 책임 프로그래밍된 메커니즘에 대한 회의와 독립에 있다는 것 아닐까.
물론 그러한 독립성과 주체성 또한 의심하는 세계관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메트릭스에서는 정해진 알고리즘에 부합되도록 기능하는 소재로서 인간성을 회피하고 주체성과 혁신을 견인하는 리더십을 서사화했고,
인터스텔라에서는 우주적 공간의 차이에 따라 혹은 사건 발생의 원인 방식의 상이함으로 인하여 후과로 나타나는 시간의 상대적 차이로 세계의 병존을 가정하기도 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기계적 세상이나 우리가 생활하는 지구적 범위를 초월하는 형태의 병존 보다는 보다 고전적인 접근을 한다. 가령 이데아나 과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고의 깊숙한 곳에 다른 차원의 세계를 구축한다.
피씨의 rom과 같은 느낌의 영역에 구축한 세계를 인위적으로 비틀어 본다는 가정은 소설 속 절대자인 작가의 상상을 통해 구현된다. 이런 설정의 혁신성이나 클래식함이 얼마나 독자들에게 보편적 설득력을 갖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깊숙한 집요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포괄적 공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와 노력이 느껴져 감탄하게 되고 만다.
자신이 구축한 인식의 심연속 세계에 대한 책임, 개별 구성원에 대한 연민은 사실상 '마음'(감정)이라는 것에서 비롯됨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에 대한 탈락이나 결핍을 인지하면서도 그 결핍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결과론은 모순적이지만, 궁극적으로 '마음'으로 귀결시키는 인과성을 갖춘다.
마치 0과 1의 관계 안에서 1은 한 눈금 건너가 아닌 무한대로 확장된 거리만큼 괴리되어 있는 것으로 정의되는 것과 같은 강조라고 할 수 있다.
항상 무언가에 대해서 영향을 받을 때 마다 계몽적인 요소와 교훈에 대해서 강박적으로 쫓아가는 것이 예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 계몽적 요소도 작가가 아닌 내가 발견하고 '인식'한 것이니 '강박'에서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편하고, 불가해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상처와 고난이 곳곳에 숨어있겠지만 그런 불가항력적인 전제 속의 현실, 그리고 삶이 '상대적' 만족, '상대적' 희망과 동기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상당히 심플한 메세지를 품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밥을 먹는 행위와 같이 보편적(객관적)으로 예측불가능하고 일부 통제가능하면서 불가능한 특성이 상대적(주관적)으로 개인마다 느끼기 나름, 받아들이고 용인하기 나름이라는 전제는 오히려 문학적 기능 보다는 인간의 삶이 잘 짜여진(무작위로 셔플링되어 절대 중복이라는 것은 발생할 수 없고 정해진 결과 값을 도출하지 않는) 프로그램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문학은 그 나름(?) 무책임하고 절대적인 상상에 기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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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년 가까운 이전에 민음사 첫 버전의 책으로 읽었었고 영어본으로 읽은게 한 10년 전쯤인 것 같다. 그리고 거부하기 힘든 양장판이 나왔다. 이뻐보여서 사놓기만 할까 하다가, 머 당연하겠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이렇게 꾸준하게 이전 책이라도 손이 가게 되는 작가가 몇 명 더 있으면 삶이 많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루키 본인이 어느정도 고쳤다고 하는데, 몇몇 문장만 바뀐건지, 아니면 추가된건지 약간 다른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번역때문인지도. 이전만큼 하루키에 몰두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자못 거리감을 두고 읽었다고 할까. 막상 약간의 거리를 두니 소설 내용의 재미가 좀 더 눈에 들어온다. 35년전의 소설임에도 그 SF적인 설정은 낡아보이지 않고 읽어버린 자아라는 이제는 진부한 하루키의 인장도 작가의 그 당시의 나이를 생각하니, 그리고 내 나이를 생각하니, 책속의 일각수 두개골처럼 오히려 빛이 난다고 할까. 주인공이 12시간동안 발광하는 오래된 꿈들을 읽듯이 나도 이 책을 따라 읽었다. 처음 읽었던 그 오래전 날들과 아직도 공명을 일으키는 상실의 노래들을 카세트 테이프로 밥딜런을 듣듯이, 다음날 아침에 그 빛이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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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발표된 소설이지만 다시 정비하여 합본판으로 게다가 친필싸인이라는 멋진 이벤트로 돌아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진짜 혹시나 기대하는 마음이 컸던지 다들 리뷰쓰신분들은 친필사인본을 받았다는데 나는 떨어졌다... 뽑기 운이 참 없다는 생각밖에 하루키는 많은 소설을 발표했지만 그만의 세계관이 뚜렷한 사람이라.... 에세이가 역시 최고였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