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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자기 정체성과 한국 사회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가지질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참 많은 것들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하면 된다’라는 구호 속에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내면에 성취지향적 몰이성성을 부추기며 전혀 예상치 못한 병폐와 도덕적 위기도 함께 불러”(p. 302) 왔다고 작가 장석주는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하면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정직하게 분명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우리 삶의 실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사회와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차가운 이성으로 들여다보도록 도전합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후레자식들의 막돼먹음’이 판치는 사회, 그 속에서 아버지는 니체가 말한 ‘낙타’나 ‘노새’에 불과합니다. “짐깨나 지는 정신”(p. 63)은 악마의 짐을 져야할 때조차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낙타처럼 그저 무력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성실히 살았지만,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회는 행복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전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거침과 난폭함, 조급증, 빨리빨리 문화, 떼거리 근성을 이제는 버려야 하는데, 전쟁과 역경은 우리의 내면의 형질과 유전자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짐깨나 지는” 낙타에서 “‘아니오’라는 부정 정신”인 사자로 도약해야 합니다(pp. 88~96). 저자는 이런 식으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동물들을 한국사회의 모습에 병치시켜 은유적으로 말합니다. 학벌주의에 병든 사회와 허영꾼 ‘원숭이’를, 불안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회와 현명한 동물 ‘뱀’을,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와 타조를 연결시킵니다. 타조는 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그저 생명 보존과 종 번식만을 생각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pp. 177~186)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니체의 철학에 비추어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내면을 냉혹하리만큼 이성적으로 들추어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무릎을 치고 동감하고 때로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우리 마음의 무늬가 계속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억눌린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한(恨)”이라는 독특한 마음의 무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면서 ‘한’이라는 마음의 무늬는 ‘흥(興)’으로 바뀌어 한국 사회를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흥’이 피상성, 허세, 들뜸, 몰염치 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탐욕이 판치는 ‘동물원 사회’는 분명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며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자, 혹은 높은 곳에서 심연을 응시하는 독수리처럼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고 타인을 위한 삶, 즉 이타주의적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와 그 안의 우리 자신을 차가운 이성으로 들여다보게 할뿐 아니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훌륭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저자가 참고한 도서들에 눈길이 갑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책들이군요.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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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철학의 프레임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과 욕망들, 그리고 한국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본다는 발상이 신선하게 느껴진 책. 장석주 시인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었을 때 ‘삶의 바른 궤도에서 벗어나 음악 감상실이나 들락거리는 보잘것없는’ 19세 청년이었으나, ‘그때 뼈가 휘는 듯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보고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27쪽)고 회고한다. 지금도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다는 그는,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니체의 동물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와 엮어 이야기한다. 책의 제목처럼, 탐욕이 판치는 ‘동물원 사회’와 멀어져 간 ‘유토피아’에 대한 성찰이다.
그의 말대로, ‘니체만큼 다양한 동물 은유를 써서 삶과 세계의 본질을 통찰한 철학자는 드물다’(37쪽)는 생각에 동의한다. 나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을 때(제대로 다 읽진 못했지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 이런 구절들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니체가 사람과 사회에 대하여 은유했던 여러 동물들의 특징들을 한국인의 마음과 욕망에 연결해서 분석하는데, 참 어떻게 이렇게 동물 이미지들을 연결할 생각을 했을까 싶다. 사라져가는 아버지들의 자리에는 ‘무거움의 정신’ 낙타를, 행복강박증이 불러오는 불행들에는 ‘부정 정신’의 사자를, 학벌주의에 병든 사회에는 ‘식물과 유령의 혼혈아’라는 원숭이를, 가족 이기주의의 병폐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타조를 대입한다.
물론 저자가 한국사회에 대입한 동물들은 실제의 동물들이 아닌, ‘니체의 동물들은 존재론적 위계 안에서 발견되고 새롭게 해석되는 존재들의 기호’(36쪽)다. 그 창의적인 발상은 높이 사지만, 동물들을 이렇게 인간의 눈에 맞추어 대상화하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솔직히 영 불편하다. 니체를 좋아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을 때 무수한 동물들의 등장이 거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인간의 우월성과 이성의 유일성이라는 관념의 틀 안에서 동물들을 바라본다는 것, 그런 생각의 프레임을 대하는 것이 나는 참 힘들다. 그래서 이 책의 사유와는 별개로, 책을 읽는 내내 동물의 입장(?)에 선 변호사의 심정이 되어 끊임없이 구시렁거렸다. 며칠씩이나 물 없이도 견딜 수 있는 낙타는, 피하지방이 없어 체온이 40도 이상이 되지 않으면 땀을 흘리지 않는 동물이다. 무덥고 혹독한 사막을 그렇게 견디는 낙타같이 보송하고 가벼운 생명체가, 단지 등에 혹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무거움의 정신’이 되어야 하다니!
얘기가 꽤 옆길로 샜으니(동물 하나하나 변론하다가는 날이 샐지도^^;) 다시 책의 중심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니체 철학의 은유로서의 동물들과 배치해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저자의 어조는 시종일관 꼿꼿하고 강직하다. ‘하면 된다’의 구호 아래 한강의 기적, 경제의 눈부신 성장, 원조 수혜국가 최초 OECD 진입등 자랑스러운 성취만 애써 기억하려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그 구호에 함몰된 채 일직선으로 달려가던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예상치 못한 병폐와 도덕적 위기들을 함께 불러왔음을 인식하라고 말이다. ‘이제는 하면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들을 정직하게 분별하고, 우리 삶의 실체적 진실을 차가운 이성으로 돌아보아야 할 때’(302쪽)라는 그의 목소리에 우리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책의 도입부에서 한국인을 이야기하는데 왜 니체철학인가에 대해, 저자는 지금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니체 철학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와 ‘우리’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었던 시간은 때론 아프지만 유익했다. 거울 속에 비춰진 우리의 맨얼굴이 때론 감추고 싶고 부끄럽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들여다보기를 계속하는 것... 그것이 아마도 멀어져 간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길일 것이다.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는, 그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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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철학에서 한국 사회를 발견하다
며칠 전 동물원에 다녀왔다. 호랑이, 사자부터 코끼리, 기린, 하마, 원숭이, 뱀, 곰, 늑대, 사슴, 타조 등 동화책에서나 봐왔던 동물들을 눈으로 직접 보니 재미도 있었거니와 그들과 눈으로 교감하는 행동들이 나에게 왠지 모를 기쁨을 줬던 거 같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모두들 축 늘어진 모습으로 잠만 자는 모습에서 약간의 실망감(배신감마저)도 들었고 ,우리 안에 갇힌 모습으로 관람객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짠한 마음도 들더라.
과연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동물원에 구경하러 온 인간들을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로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소위 요즘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는 갑을의 관계처럼 갑의 입장에서 인간을 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인간을 자신들과 함께 공생하면서 살아가는 친구로 생각하는 건지?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거기에 저 동물원의 우리가 망가져서 만약 동물원의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동물의 세계처럼 혼란과 무질서로 동물원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 버릴 게 안 봐도 뻔한데......
정글 사회가 바로 동물원 사회이고, 동물원 사회는 타락한 사회이며, 문명에서 야만으로 퇴행하는 사회라고 말하면서 이 야만의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장석주 시인, 그의 한국 사회 엿보기는 바로 동물원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 동물원에서 니체의 철학을 곱씹으며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과 한국 사회를 교차해가면서 그만의 생각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니체의 책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등장시켜 지금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병病들을 현미경을 통해 자세히 해부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를 명의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거 같다.
하지만, 다 좋은데 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지 못했다. 니체의 다른 책들도 많은데 유독 이 책에 나오는 동물들에게만 빗대서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약간 의아했다. 이 책의 제목이 『동물원과 유토피아』가 아닌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바라본 한국 사회>라고 책제목을 붙였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란 생각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읽기 전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정독한 후, 이 책을 읽는다면 금상첨화란 말이다.
이 책에서 많은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동물은 타조를 설명한 부분이었다. 타조 부분을 읽는데 나랑 많이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마음이 많이 무거워지면서 동물원에 갔을 때 우리 안에서 큰 키를 앞세우고 그 좁은 공간에서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타조를 생각하니 자신이 날 수 없음을 저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상쇄시킬까?란 생각에 마음이 좋지만은 않더라.
니체는 타조를 가리켜 “머리를 무거운 대지 속에 무겁게 쳐박고” 있는 새라고 말한다(...중략)
타조는 가장 빠른 말보다도 더 빨리 달린다. 그런 그도 아직은 머리를 무거운 대지 속에 무겁게 쳐박고 있으니,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날지 못하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본문 180쪽, 181쪽 中)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 같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일 게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동물원의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면 그건 너무도 잔인하고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살기 위해 자신의 종족까지 먹어치우는 동물의 야만적인 세계, 그리고 우리네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학벌주의, 가족(개인)이기주의, 냄비근성, 빈부격차, 지역갈등, 이념의 양극화 등은 동물원 우리 속 하이에나에게 줘버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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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고병권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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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인연이 있다면, 분명 이 책은 미라클님과의 인연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그러고보면 모든 만남은 미라클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미라클님의 리뷰 한 자락을 인용해본다.
아마도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그저 니체의힐난을 그저 힐난으로만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동물원 속 동물의 모습으로 전락하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해야 할지, 현재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면서도 뜨끔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다. 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추악한 면모를 보인 한국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던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도 멈춰야 하지 않을까.
[출처] : http://blog.yes24.com/document/7320168 /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동물원과 유토피아 /
이 책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보거나 적어도 니체를 잘 이해해야 저자의 의도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책을 읽다가 말았기에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차라투스트라..>를 읽어보지 못하였으나 이 책에는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낙타, 사자, 원숭이, 뱀, 독파리, 거머리 등의 동물들.. 그 동물들은 우리가 흔히 오락적으로 보는 동물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은 마치 인간의 부조리하고 부끄러운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하고도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장석주는 한국 사회가 동물원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내부에 위험과 불안이 비등점을 향해 치솟고, 도덕과 정의, 원칙과 규범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힘이 으르렁거리며 맞서는 정글'과도 같은 사회가 바로 그가 말하는 동물원 사회다. (장석주 작가 이외에도 인간의 동물에의 비유는 니체와 라작에 의해서도 이야기되어 왔다.)
[출처]: http://blog.yes24.com/document/7312974 / 장석주의 크로스 인문학 [동물원과 유토피아 - 장석주] / 리니Rinny
동물원과 유토피아, 이 책을 읽기시작하면서 전에 읽던 니체의 책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 오늘 책을 찾았다. 책은 성창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 시리즈인데, 책 속에는 간단하나마 기록까지 남겨져 있었다.
밤이 깊다. 한여름의 더위도 깊은 밤 저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어느덧 길을 양보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도 시원한데, 나는 이 깊은 밤 니이체와 벗으로서 대화를 나눈다.
가로등 불빛이 홀로 빛나고 있다. 여기 이만치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가. 나는 오늘 그대의 벗이 되어 그대의 무언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늘도 낮이라면 무척 밝았을 터. 하지만 이밤 하늘은 지식의 보고라도 되는 양 우아하게 가로등, 니이체 그리고 나를 지켜보는 듯 하다. 형연할 수 없는 미묘한 색으로 장식을 하고는...
이렇게 세상이 고요 속에서 잠들어 있는 밤. 나는 한 마리 야수가 되어 정신을 윤택하게 할 지혜와 지식을 찾아서 홀로 사냥길에 나선다.
굳게 닫친 저 철대문 너머의 저집에 삶에 지친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 있듯 인류는 그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잠속에서 잠속에서 깨어나지 않고 잠들어 있는 것인가?
니이체는 왜 차라투스트라를 깨워 세상에 대고 외쳐야만 했으며 프롬은 왜 그의 정신을 책으로 표출하지 않았으면 안 되었을까?
그들은 미혹한 세상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세상 사랑들은 진리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추구해 오지 않았던가!
내가 이밤 가로등을 벗하며 니이체를 만나고자 함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내 실존적 삶을 즐기기 위함인가?
한여름의 시원함에 한없이 기뻐하면서... 2003. 8. 10. 01:10(?) 김선욱 서
다른 출판사의 책에 소개된 니체의 이야기를 좀 읽어보았다. 재미있게도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하게 된 과정을 소개해주고 있다. 한편 <루살로메의 사랑과 생애>라는 책 표지 안쪽에 씌여 있는 니체를 너무나 사랑했던 여인의 고백을 보면 참 재미있다.
내가 이 여인의 일생을 알아야 할 필요는 오로지 Nietzsche 때문이다. Nietzsche를 넘지 않으면 넘지 못할 수많은 책들. 그 책들을 뒤로 한 채 여기서부터 Nietzsche를 찾아야겠다.
살아생전 Nietzsche가 누이와 어머니를 제외하고 경멸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女人. 루 살로메
"저기 하나의 지서이 걸어온다." - Nietzsche -
(다 읽고난 후 뒷 표지 안쪽 여백에 적힌 또다른 글)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 없이 생 속으로 섞여 들어만 가는 자기 기만으로 가득 찬 소극적인 내 얼마 살지 않은 인생과 그녀 인생(일생) 그녀는 확실히 자기자시느이 인생을 살았다. 부분적으로 언어를 구사할 줄 아니 人의 언어도당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자유인이었다. 그 누구로부터 말미암아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그 속에 내재한 "바람" 또한 스스로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Nietzsche의 거절당함과 릴케의 한동안의 거절당하지 않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이 이 똑똑한 바람둥이의 바람기를 가장 잘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위 책에 소개된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살펴보자. 참고로 니체와 레 그리고 루 셋은 실험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루가 두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니체가 라이프찌히 정거장에서 친구들을 떠나보낸 날은 11월의 우울한 첫 일요일이었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하지 못한 말들이 많았다. 니체는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괴로워했다. 니체의 예감은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루는 여전히 쾌활하고 즐거워 보였고, 레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희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법이어서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니체는 루에게 그의 시 <새로운 콜롬부스>를 써서 주었다. (116p)
니체는 루를 결코 있을 수 없었고,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 니체는 점차 루가 전혀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만큼 니체는 배신감으로 동요했으며, 거의 광란 직전의 지경에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니체는 마치 병든 동물처럼 반응하곤 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참아내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기려고만 했다. (117p)
절망에 빠진 니체는 급기야는 자살을 들먹거리기 시작했고 자기는 마친 사람이라고 말하며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기도 했다. (120p)
니체의 심각한 정신적 동요를 알지 못한 채로 루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하여 1883년을 시작했다. (122p)
이 당시에 니체의 생의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커다란 희망에 차 있던 그 성스러운 삼위일체가 깨어진 후 일 년만에 그의 기력은 모두 말라 버렸다. 그는 엄청난 창조적 작업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루의 배반은 그를 엄청난 감정의 심연 속으로 내몰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는 1883년 2월의 며칠동안 완전히 집중된 상태에서 쓴 것이었다. 그것은 절망에 빠졌던 니체의 재기를 뜻한다. (123p)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면서 또한 그 누구도 위하지 않은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를 끔찍히도 실망시킨 세계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짜라투스트라라는 니체의 대변자는 그리스도 탄생 거의 팔백 년 전에서 천 년에 걸쳐 살았던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배화교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이다. (123p) 초인에 대한 웅대한 비전을 병들고 고독과 기만에 반쯤 미쳐버린 니체 자신의 삶과 비교해 보면 그 초인의 이상이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한 니체의 빛나는 정신의 힘찬 투영이며, 또한 운명에 대한 반항적 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4p)
[루 살로메의 사랑과 생애 / H. F. 페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관음출판사]
큰 정신적 위기 속에서 철학에 관한 명저를 썼다니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다. 아무튼 위대한 <짜라투스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탄생을 하였단다.
니체 철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19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자주 읽어 니체를 너무나 잘 안다는 장석주 시인의 니체는 어떨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를 너무나 잘 아는 작가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보는 한국사회는 어떻게 보일까?
장석주의 크로스인문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책 <동물원과 유토피아>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막장 한국사회를 진단하는데 있어 타인의 시선 혹은 오래 전의 철학 사상을 통해 비춰본다. 우리의 진짜 얼굴을 비춰보는 거울로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를 선택했다. 시인 장석주가 어려서부터 반했던 책과 저자이다. 책과의 만남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잠깐 인용해 본다.
1부에 왜 니체 철학과 짜라투스트라를 동원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동물과 빚대어 살펴보는 인간 존재의 위치를 확인해 본다.
2부에서 본격적으로 타락한 한국사회상을 살펴본다. 막돼먹은 후레자식들에서부터 행복강박증, 학벌주의, 금서 지정, 가족 이기주의, 막장 사회, 악화일로의 소음 상태, 과잉 경쟁 등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마도 어떤 누가 이런 미친 상태를 고발한다면 우리 사회는 저항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지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다. 저자가 아무리 훌륭한 인간 존재라고 해도 "네까짓게 뭔데, 우리를 욕하는 거냐?" 며 따지고 대들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꼬집어 비판하고 있다.
가족 이기주의를 한번 살펴보자. 제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나쁘다 욕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인 이상 제 가족을 부양하고 보살피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의미이기도 한데, 가족 이기주의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저자는 하지만 이 지나친 가족 이기주의가 탈법.불법을 일삼은 가장을 양산해냈다며 제가족만 챙기기에 급급한 가장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성공했다고, 혹은 출세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탈법.불법의 범죄를 앞장 서서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저쪽 한나라당 출신의 고위 관직자들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보면 모두가 살면서 불법을 일삼은 범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만의 영달을 위하거나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가 가진 동물적인 혹은 동물보다도 못한 특성에서 대해 0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채찍을 휘둘러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3부에서는 이렇듯 미쳐가는 한국 사회의 한국인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고유한 마음의 세계를 탐험해 본다.
이런 책을 읽기는 상당히 끕끕하고 찝찝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비판에 아나리고 부정하거나 반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읽고 있으면 어느새 속물 혹은 타락한 동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비판은 냉철하며, 판단은 정확하다. 따라서 오로지 참회와 반성만 있을 뿐이다.
눈먼 자가 어딘지 모르고 열심히 뛰어간다면 위험천만하다. 낭떠러지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도 사회전체가 어딘지 모르고 열심히 향해가고 있는 형국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혹시 위험은 없는지 묻지도 않고 그저 열심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금 당장 멈춰서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이대로 계속 가도 좋은지,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아야 한다. 모두가 미쳐 있다면 누군가 제정신 가진 사람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짜라투스트라의 외침을 들어보아야할 것이다.
가족 이기주의를 없애는 방법으로, 오래된 미래에서 읽었던 한 대목이 생각난다. 티베트인들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하는데, 누구 자식인지 모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제도는 바로 이기주의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인 것이리라.
제 자식만 잘 키우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2013. 8. 23. 18:47 20:37
독서 전도사 고서 김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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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은 좋지만, 가끔 서평의 의무가 있는 책을 읽고 난 후 서평을 써야하는 시간은 참말로 괴로울때가 있다. 그래서 서평,이라고 말하기도 참 그렇지만 책에 대한 내 느낌이 안에서 글이 되어 나올때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쓰게 되는데 이 책은 내가 뭘 느꼈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그 느낌을 글로 써내야해서 어렵다. 그저 막연하게 책을 읽은 후, 우리사회의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모습을 니체 철학의 동물에 비유를 했다,라고만 쓴다는 것은 이 책에 대한 느낌을 너무 작게 표현한 것이 될 것이다. 분명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처음엔 나와 상관없다는 듯, 동물원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곳이며 그러니 구경하듯 방관자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점차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정글의 맹수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야수성만을 가진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물원 사회를 넘어서서 유토피아로 향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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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크로스 인문학 <동물원과 유토피아 - 장석주>
After Reading
작가 장석주는 독서광이라 불릴만한 풍부한 지식과 시인이라 불릴만한 멋진 문장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마흔의 서재>를 통해 그의 몇십년 묵은 책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역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글들을 보고 감탄했다. 그렇다면 니체는, 수없이 많이 불리우는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이며 역시 수없이 많이 인용되고 재탄생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장석주 작가는 40여년동안 되풀이하며 읽어온 니체의 책들 속에서 그의 사유를 발견하고, 비록 같은 시대가 아닐지라도 현재에도 통용되는 그의 철학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이면들을 관찰해보고자 했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차라투스트라..>를 읽어보지 못하였으나 이 책에는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낙타, 사자, 원숭이, 뱀, 독파리, 거머리 등의 동물들.. 그 동물들은 우리가 흔히 오락적으로 보는 동물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은 마치 인간의 부조리하고 부끄러운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하고도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장석주는 한국 사회가 동물원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내부에 위험과 불안이 비등점을 향해 치솟고, 도덕과 정의, 원칙과 규범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힘이 으르렁거리며 맞서는 정글'과도 같은 사회가 바로 그가 말하는 동물원 사회다. (장석주 작가 이외에도 인간의 동물에의 비유는 니체와 라작에 의해서도 이야기되어 왔다.)
작가는 책 속에서 니체에 의한 동물의 상징성에 대응되는 우리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파악해나간다. 이를테면 반값등록금은 학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학벌주의 타파 운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약해진 아버지의 권위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없이 자란 아이들이 남성성에서 부성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중간쯤에 나오는 '이타주의'에 관한 단상은 우리가 동물보다 더 발달된 본성을 확인시켜줌으로서 보다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 힌트를 주기도 한다.
다소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 끝에 '한국인의 정서(진정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국인의 '한'과 고통, 가난, 전쟁, 빠른 성장과 같은 역경 속에서 견뎌낼 수 있었던 우리 고유의 힘은 문학 속에서, 노래 속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월드컵의 붉은 함성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삭막한 사회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한국인에게 내재되있다. 그 힘이 과잉되어 부정적으로 작용하느냐, 긍정적으로 작용하느냐의 길은 똑똑한 사유와 깨끗한 얼굴을 가진 미래의 우리 모습에 달려있다. 많은 것에 대한 불안과 부조리함, 시시각각 행해지는 부도덕적인 일들. 이런 동물원 사회에서 벗어나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로 나아가기 위해서.
Underline
- 사람은 모든 동물들을 다 합해놓은 것보다 더 동물적이다. 아울러 그 동물성을 도약대 삼아 더 높은 존재의 위상을 획득하는 게 사람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어떤 다른 동물보다 더 병들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불완전하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틀림없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이 합쳐진 것보다 더 대담하고, 더 새로운 것들을 행하고, 더 과감하고, 더 운명에 도전해왔다. 그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실험기구인 인간은 최후의 지배권을 위해서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하는 자, 불만을 터뜨리는 자,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자이다.(니체, 선악의 저편)" 자기 자신을 실험 기구로 쓴다는 점에서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람은 예속이 아니라 자유를,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주인의 도덕을,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 대한 최후의 지배권을 찾기 위해 동물, 자연, 신들과 투쟁한다. 그 투쟁의 동력은 기꺼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즉 제 운명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40p)
- 왜 우리가 불안한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파도들은 더욱 난폭해지고 그에 따라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타이타닉'호에 함께 타고 있다. 자크 아탈리는 '타이타닉'이 '우리 사회'라고 말한다. 그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예측되지만, 예측의 수단만큼은 예측되지 않는 사회"다. 한국인들이 승선한 '한국호'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한다. 미래는 불확실한데, 그것은 우리 삶이 예측불가능한 위험들 속에 있다는 반증이다. 그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이 우리의 삶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 마음에 불안을 키운다. (124p)
- 목구멍을 물어뜯는 무거운 뱀을 물리친 젊은 양치기도 웃고, 차라투스트라도 웃는다. 웃는 자가 되려면 먼저 마음에 있는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려야 한다. 젊은 양치기는 그의 목구멍을 물고 몸에 매달렸던 묵직한 뱀의 대가리를 끊고 멀리 내던졌다. 그리고 웃었다. 웃음은 하나의 출구다. 웃는 자는 억압과 불행에서 단숨에 벗어난다. 무거운 것 모두가 가볍게 되고, 신체 모두가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게 알파이자 오메가라면. 진정,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알파이자 오메가렷다! (니체, 일곱개의 봉인) 웃는 자는 더 바라지 않는다. 웃음이 바로 궁극의 그것이기에. (137p)
- 말 속에도 침묵이 깃든다. 말들은 그 내부에 긴 침묵과 짧은 침묵을 갖고 있다.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은 소리만 듣지만, 깊이 경청하는 사람들은 말 속에 숨은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책은 타인의 말과 세계를, 저 멀리서부터 오는 의미들을 겸허하게 경청하려는 자의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집중하면 할수록 주변 소음을 잠재우는 힘은 강력해진다. 소음이 잦아들고 침묵의 오의에 더 가깝게 다가간다. "생략법의 글쓰기, 불명확한 재현, 단속적인 대화체, 그리고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말없음표(마르크 드 세메트, 침묵예찬)"등은 가장 흔한 침묵의 양태들이다. 말줄임표는 통사적 망설임, 판단유보의 기화다.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는 그 침묵들은 독자를 책 속으로 끌어들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읽히는 침묵. 그것은 음향적 현실에 겹쳐지는 하나의 부주제, 자아에 대한 성찰과 세계 인식의 장소다." (250p)
Add...
차라투스트라 책은 당분간 읽어볼 엄두가 안난다. 아마 뭔 소린지 이해하지 못할듯. 그러고 보면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끌어주고, 또 그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끌어주는 게, 참 독서의 묘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참 어려웠어 니체철학 ㅠㅠㅠㅠㅠㅠ 나중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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