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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이야기라고들 한다.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전형은 이런 것이다. 우선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슨 일이 있었어? / 이런 일이 있었어." 그러고 나면, 굳이 이야기하는 까닭은 사람이 느끼기 때문이니까,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저러하게 느꼈구나. / 그렇지." <나는 거부한다>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토미와 시리와 두 쌍둥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지 2년 뒤, 폭력적인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 14살 토미는 아버지의 정강이를 야구방망이로 조각낸다. 동생과 단짝 짐의 집으로 가출했다 돌아오자, 아버지는 사라져 있었다. 토미와 시리와 두 쌍둥이는 복지당국의 조처에 따라 각각의 보호가정으로 찢어졌다. 토미와 짐은 정말 가까이 지냈으나, 결국 멀어졌다. 짐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자살을 기도했고, 토미는 짐의 정신병원 병문안을 간 이후로 더이상 그와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토미와 시리의 인연도 차차 멀어져갔다. 어렸던 두 쌍둥이는 토미와 시리의 자매라기 보다는 면식있는 사람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30년이 지나, 토미는 아버지 그리고 짐과 우연히 낚시터에서 조우했다 헤어진다. 다음 날부터 짐을 떠올리던 토미는, 짐과의 인연을 다시 붙잡으려고 낚시터에서 기다린다. 공황장애 증상으로 병가를 낸 뒤 1년이나 지난 짐은 해고 선고를 받는다. 죽음같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짐도 토미를 다시 만나러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봉사대원이 된 시리는, 싱가포르 기독교센터에서, 원양을 떠돌다 사망한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한다. 시리는 토미에게 연락을 걸어볼까 싶기도 하다. 시리는 기독교센터 주임목사에게 자신이 유족이라고 말하기는 거부한다. 시리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안고 길을 떠난다. 사건과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균열이 있다. 먼저 사건에 대해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꾸 물어볼 수가 있다. 우리는 듣는 이로서 호기심과 의심을 가지고서, 사건에 대해 거듭 묻는다. "또 어땠는데?, 진짜 그랬어?" 그리고 느낌에 대해서. "나라면 이렇게 느꼈을 거 같은데." 하고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느꼈으리라는 추정에 대해, "꼭 그렇지는 않았어." 하고 고백할 수 있다. 그 고백은 어쩌면 사람이 참 홀로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할 수도 있다. <나는 거부한다>는 이 균열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균열이 메워지리라 낙관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고독한 운명'이라는 식으로 꾸며주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타자의 이야기를 물으려하지도 않고, 타자가 추측하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서 해명을 덧붙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살기도에 실패한 짐에게 프레드릭은 '정신병원에 오게 된 이유'를 묻는다. 짐은 "목을 매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응답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저 제도적 절차의 문제일 뿐이다. 생각하는 유기체로서 짐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를 너무도 알려주지 않는 응답일 뿐이다. 당연히 프레드릭은 "왜 목을 매려 했는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며 집요하게 물었다." 짐은 그것이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 할 때마다 머릿속의 모든 것은 가루처럼 부서져버리곤 했다." 이야기를 왜 굳이 듣고 말하는가. 이야기를 계속 듣고 말하는 사이는 특별하다. 이른바 '정(情)'이 없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인정받고 해명받았으면' 하는 마음조차 없을 만큼 무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를 굳이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묵묵한 시간도 따뜻한 사이가 있다고 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그이는 숨쉬며 있는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정이라는 확증편향을 지탱하는 무수한 의미의 퇴적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침묵도 시끄러운 것일 수 있다. 진자들이 무수히 부딪히며 소리가 한없이 울리듯이 말이다. <나는 거부한다>에는 제대로 쌓이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고, 따라서 정 있는 사이도 하나도 없다. 나 자신이 이렇게저렇게 판단하고 행위해왔다는 또렷한 역사도 정립되지 않는다. 다른 이와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불끈하는 아랫도리와 키스와 섹스는 존재하지만, 사랑이니 책임이니 하는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토미는 자신을 지극히 아낀 양아버지의 유산을 그가 똑똑히 지켜보는 가운데 팔아버렸으며, 짐은 평생의 동반자인 홀어머니를 의심하는 이혼남이며, 시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봉사활동을 전 세계 현장에서 펼치지만 기독교와 자신의 활동 사이에 연관성을 거부하며, 가족도 애인도 없다. 토미가 수십년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아뿔사 연민의 한마디를 던지고서 크게 후회하는 모습은 볼만하다. 아버지는 토미의 고급 코트가 손상되지 않도록 추레한 소파 위에 주간지를 깔도록 권유한다. 토미의 고급 코트 때문에 아버지는 토미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세팅을 듣지도 않고 마쳤다. 아버지는 다리를 저는 까닭이 '30년 전 뺑소니 사고' 때문이며 그 이후로 자신의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교묘한 거짓말-호소처럼 보이는 말을 한다. 토미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확장하여 용서하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의미는 사이에 있으며, 사이에 귀기울이면 무한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이데거가 말한 적이 있었다. 하이데거는 초탈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심오한 뜻은 몰라도, <나는 거부한다>에 따르면 의미에 귀기울이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버팀이 요구된다. 그것이 초탈이라면 모르겠지만. 인생을 일관되고 소통가능한 것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언어적인 이야기들을 붙잡고 사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책 뒷표지에는 [나는 타협을 거부한다 / 나는 용서를 거부한다 / 나는 망각을 거부한다]는 경구가 쓰여있다. 마치 <나는 거부한다>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메시지가 '거부의 찬미'인 듯이.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는 거부야말로 자연인 것처럼 보인다. 타협하고, 용서하고, (적극적으로) 망각하여 정말 잊을 만하게 되는 초탈이야말로 어려운 인위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살아도 불행하고 저렇게 살아도 불행하다고 말하는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거부하지 않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가지고서 이 책에 대해 내 생각을 썼다. 누군가는 기억이 파편으로 깨지고 뜨거운 밤을 보내지만 이윽고 헤어지고 서로 패고 벽을 쌓고 지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차디찬 상대에게 "부디 집중해달라"고 말하듯이, 과연 그것이 삶의 본질인가? 짐과 토미가 만날 때에 이유가 없었듯이 다시 만나는 것도 좋겠다는 희망이 본질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거부한다>는 끊임없이 섣부르고 진부한 희망에 도전하고 거부한다. (비유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복지가 책의 곳곳에서 조롱받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야기가 부재중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나는 거부한다>를 읽으며, 솔직히 뭔가 감추는 이야기 같아, 과연 그런 일들만 일어났어?, 꼭 그렇게만 봐야해?, 나라면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하는 불편함을 느끼는 경험을 받았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일어나고 있다'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실인 것처럼 스스로를 가장하는 때가 많다. (사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기도 한다. 읽고 있으면 작가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짜증이 나기 때문에.) 오히려 페테르손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거부함으로써, 이야기 나누는 사이를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02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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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손 작가의 『나는 거부한다』는 인간의 무의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가 생각하고 추억하는 기억들, 그 호시절에 관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쓴다. 이 책은 작가의 개입이 적다. 시점 변화를 줄 때만 작가가 개입할 뿐, 책은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로만 진행된다. 그렇기에 독자는 책의 다성성에 주목하여 인물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작가는 우리가 의도치 않게 느끼는 온갖 감정을 글로 들춰내버린다. 애써 숨기려 했거나 그래서 나조차 속였던 지난 날을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책 속에 펼쳐진 세계에서라도, 독자가 감정의 속임수를 과감하게 떨쳐내기를 유도한다. 가족, 친구, 사랑하는 연인을 비롯한 많은 관계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선택들에 관한 책임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 '책임'이란 의무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실행해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책임을 가리키며,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도록 돕는다. 페테르손 작가는 이런 진실한 얘기를 전함으로써 독자들의 감정을 다듬어주고, 우리가 책 속 인물들을 따라 호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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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부한다'는 여러 등장인물의 어린 시절과 세월이 흐른 후의 시점을 오가며 쓴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보편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보편성을 깨뜨리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은 '나는 거부한다'라는 제목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은 완전히 거부하지 못한다. 토미는 어린 시절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몇 십년 만에 연락이 오자 출근 했지만 바로 아버지가 있는 교도소로 향한다. 진정으로 거부했다면 그 전화를 무시했어야 하고, 교도소에서 아버지를 꺼낸 후 아버지의 집에 잠시도 들려선 안됐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결국 거기에 가서야 다시한번 느끼는 것이다. '아, 나는 아버지와 뭔가를 나누고 싶지도, 화해하고 싶지도 않다.' 아마 다음에 다시한번 상황이 반복돼도 토미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완전한 거부를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짐은 호수에서 토미를 민 사건에 대해서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의 그런 행동을 거부한다. '나는 중심을 잃어서 잡으려다가 널 밀친거야. 넌 아무것도 몰라.' 라며 토미에게 오히려 잘못을 전가한다. 본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더라도 그건 분명히 자신이 한 행동이다. 그런데 짐은 본질을 가려둔 채 어정쩡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 인간은 사건과 사람에 대한 완전한 거부를 꿈꾸지만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자신의 속마음이 심연이더라도 정면으로 마주봐야 두 사람은 과거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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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나는 거부한다'(페르 페테르손, 손화수 역, 한길사, 2020) 리뷰
- 저자 페르 페테르손(Per Petterson, 1952~): 노르웨이 오슬로 출생. 막노동꾼으로 생활하다 나중에 도서관 사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87년 단편소설집 '내 입안에 재, 내 신발 속에 모래'(Ashes in My Mouth, Sand in My Shoes)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2003년 '말 도둑놀이'(Out Stealing Horses)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노르웨이의 대표작가가 되었다. '말 도둑놀이'는 현재 43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타임'지가 선정한 '2007년 최고의 소설 10편'으로 선정되는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 노르웨이 비평가상을 수상한 '나는 시간의 강을 저주한다'(I Curse the River of Time)를 포함해 지금까지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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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가족, 친구와의 관계는 인생의 전반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거부한다>는 상반된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짐과 토미가 등장한다.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이들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두 인물을 통해 결국 삶의 주체는 ‘나’임을 상기시켜준다. 앞길을 막고 나를 무너지게 하는 것들을 거부한다는 삶의 의지는 소설 전체를 통찰하는 주제가 된다. 타협, 용서, 망각은 거부의 대상이자 선택의 대상이다. 어떤 이는 순응한 채 살아갈 것이고 어떤 이는 거부한 채 살아간다. 역시나 선택의 주체는 ‘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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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소감에 쓴 내용 그대로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역행적인 전개방식이나, 작가의 표현력이 돋보이는 책이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개연성이 부족하고 전반적으로 횡설수설하다는 느낌을 준다. 등장인물간의 대화도 중구난방이고 작중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의 인과관계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성 등장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굉장히 별로다. 끊임없이 남성들에 의해 성적 대상으로서만 소비되고 여성 등장인물만의 서사같은게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와 그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 상처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들을 주제삼았다는게 흥미롭긴하지만 다른 소설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이 소설만의 강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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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인물들은 노르웨이의 뫼르크를 중심으로 가족, 친구로서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토미와 여동생 시리, 둘도 없는 친구인 토미와 짐, 어린 토미에게 집을 내어주고 일을 가르쳐준 이웃 주민 욘센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관계들은 영원하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소설은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생각했던 친구 사이도 한순간에 뒤틀릴 수 있고, 피를 나눈 가족일지라도 환멸을 느끼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여성 등장인물에 대한 서술이다. 토미는 아버지에게 발길질을 당할 때면 피멍이 든 세 여동생들의 엉덩이를 만져주며 위로해 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성욕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는 동생들과 자신을 한 방에 밀어 넣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다. 가정폭력범인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증오를 굳이 근친상간의 위험으로 표현해야 했는지, 그것을 반 페이지 넘도록 서술해야 했는지 나는 아직까지 잘 이해할 수 없다.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선박에 올라탄 토미의 어머니, 티아 베르그렌의 에피소드도 그렇다. 제목이 '베르그렌 씨 부인'이었음에도 그녀의 입장보다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바라보는 남자 선원의 시선이 내내 부각된다. 그녀가 도망가도록 도와준 이웃 주민 욘센과의 관계에서도, 선박 내 일등 승무원과의 관계에서도 티아 베르그렌은 욕구의 대상으로만 그려지고 끝내 그 내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을 '하얗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고, 이를 '여성스럽다'라는 말로 연결하는 것도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요인 중 하나였다. 이제껏 익숙하게 사용해온 단어라고 한들, 한 성별을 고정관념에 가두는 문제라면 출판사에서 좀 더 예민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총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