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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넘기며 그릇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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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그런 것처럼 “원주, 하면” 장일순과 박경리 선생님이 떠오른다. 마음 속 깊은 스승인 장일순 선생님과 작가들한테 창작의 공간을 내 주었던 박경리 선생님이 거의 동시에 생각난다. 덧붙여 ‘녹색평론’을 통해 만난 후배가 찾아간 원주의료생협, 그리고 그림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이상희 시인을 생각한다. 최근에 읽은 이인휘 소설가의 장편소설은 목록에 ‘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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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그런 것처럼 “원주, 하면” 장일순과 박경리 선생님이 떠오른다. 마음 속 깊은 스승인 장일순 선생님과 작가들한테 창작의 공간을 내 주었던 박경리 선생님이 거의 동시에 생각난다. 덧붙여 ‘녹색평론’을 통해 만난 후배가 찾아간 원주의료생협, 그리고 그림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이상희 시인을 생각한다. 최근에 읽은 이인휘 소설가의 장편소설은 목록에 ‘부론강’을 추가시켰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또 추가시켰다. 원재길 작가와 단강.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선생은 40여년간 원주를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에 뿌리내린 사회 운동가로 살아오셨다. 원주대성학원을 설립하고, 밝음신용협동조합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한살림운동을 주창하여 많은 젊은이에게 ‘정신적 선배’‘사상적 큰 스승’으로 존경받아 왔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천주교 원주교구의 선구적 저항, 가톨릭 농민회의 민중 운동, 김지하 시인의 투쟁, 1980년대에 한살림운동 등이 원주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모두 선생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1960년대에 선생은 답답하고 우울한 날들을 서화로 달래기도 했다. 선생의 서화는 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나누어 받거나 사회 단체의 기금 마련전에 출품되었으며, 이따금 작품 발표전도 했는데, 지금까지 다섯 번의 개인전을 원주, 춘천, 서울에서 개최했다. 선생은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이현주 목사가 선생님과 나눈 ‘노자 이야기’에 실린 소개 글이다. 선생님은 답답하고 우울한 날들을 서화로 달랬다. 고마운 사람들한테 나눠주기도 하고 시민 사회 단체의 기금 마련에 보태기도 했던 서화를 보면 당신의 생각을 잘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一草之中 聖父在矣(일초지중 성부재의, 한 포기 풀 속에 하느님이 계시느니라), 無作戱(무작희, 꾸밈이 없다), 當風猶淸(당풍유청, 바람을 맞으니 오히려 맑아지더라), 無爲活仙(무위활선, 억지로 무언가 하지 않지만 그러나 꿋꿋이 살아 있는 신선과 같은 존재), 行檀居首(핸단거수, 베푸는 것을 첫째로 삼아라) 같은 서화를 보면 당신의 서화가 얼마나 삶과 밀착되어 있는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소설은 선생님의 ‘생애’를 다루지 않고 ‘생각’을 담았다고 한다. 실제로 소설은 소매치기를 당한 정옥이 장 선생을 찾아간 추석 즈음의 일주일 정도를 다루고 있다. 특정 시기의 한 단면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 전개는 성공한 듯하다. 소매치기를 당한 정옥을 돕는 방식이 선생이 원주역에서 나가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것이고, 그런 틈틈이 원주역 둘레 사람들에게 정옥의 사연을 알리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늘 함께한 당신의 삶을 집약해서 보여주기 좋은 방법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생님의 삶은 마침내 소매치기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선생님은 소매치기한테 “정말 미안하게 되었어요. 영업을 방해했으니 말이에요. 오늘 고기와 술은 내가 사과하는 뜻에서 사는 것이에요. 부디 나를 용서하시고, 집에 잘 돌아가세요.” 말하는 데 이르러서는 선생님의 생각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식구를 함부로 하면 높게 볼 수 없다. 어쩌면 가장 가깝고 만만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을 보는 진짜 척도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도 당신은 높고 깊다. 이를테면 더위를 많이 타는 아내를 위해 한여름 밤 하염없이 부채질을 하고, 아내가 잠든 뒤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야기. 선생은 언젠가 아내에게 편지와 함께 목기를 선물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면 나무를 파서 만든 그릇에 자신을 빗댄 남편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는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평생 고단하게 사시는 당신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표현은 잘 안 되네요. 오늘 보니까 피나무로 만든 목기가 있기에 얻어 왔어요. 마음에 드실는지요. 겉에 수없이 많은 비늘이 파리며 목기가 만들어지듯, 당신 또한 수많은 고통을 넘기며 그릇을 이루어 가는 것 같아요. (152쪽)

 

YES마니아 : 로얄 g*******g 2020.12.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