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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중 하나. 보통 죄와벌 과 카라마조프가의형제들이 유명한데 독자들 중 상당수가 이 악령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사람들도 많다. 반면 비평가들 중에 자신만의궤변에빠져있다거나, 작가 자신의 난해함으로 등장인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하는 이도 있는 정도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작품이다. |
악령을 드디어 모두 완독하였다. 하권은 앞에 권에 비해 읽기는 수월하였다. 이름과 지명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뒤에 뭐랄까 느낌을 표현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소설 전개도 1인칭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각가 시점이 교차되는 것 같다. 도스도예프스끼의 <악령>이라는 소설은 인간이 악령에 들리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성선설이 맞냐 성악설이 맞냐 논란이 많지만 이 책은 철저히 성악설이다. 등장인물들을 보면 제대로 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주인공 스타브로긴은 아주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굉장히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인데 모두들 그를 추종하고 따르고 싶어 한다. 특히 여자들도 그와 사귀기를 원한다. 겉으로는 멋져 보이지만 그의 마음 깊은 속에는 악령이 조종하고 있는 무서운 인물이다. 사실 난 소심하고 예민하고 감성적이어서 이런 유의 책을 잘 읽지 못했었다. 책 속의 내용에 너무 공감해서 빠져들다 보니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동화를 많이 읽었고(성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림책을 좋아하였다. 소설도 해피엔딩만 골라 읽곤 했었다. 영화도 아름다운 판타지나 애니메이션, 가족영화를 즐겨 본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하지만 이제 인생을 살다 보니 고통과 슬픔에 둔감해져 버린 것 같다. 추리소설도 못 읽던 내가 이제는 비극적인 소설도 무서울 것 같은 범죄소설도 읽는다. 10대 시절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고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했던 경험이 있었다. 작가는 왜 모두 죽여버렸을까? 그래서 그때는 마음이 편지 않았다. 그런 불편한 감정이 싫어서 비극적이고 자극적인 글들은 잘 잘 읽지 않았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문학작품을 읽었는데, 문학작품에서도 비극적인 삶이 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비극적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인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동심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감각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이것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악령은 인간의 악한 본성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거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3부의 핵심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뾰뜨르 스쩨바노비치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각 장별로 이 내용과 인상 깊은 문장을 살펴보면
제1장 축제 1부
율리야가 가정교사를 위한 축제를 여는데 여기서 시 낭송 사건이 벌어진다. 축제에서도 여러 진상 인간들이 나타난다. 거만한 사람, 눈치 없는 사람, 인정욕구에 매달리는 사람, 자기 말만 길게 하는 사람, 음식에만 관심 있는 사람 등이 나와 축제 분위기를 망친다.
제2장 축제의 종말 뾰뜨르가 율리아를 이용하기 위해 아첨하며 사로잡는 내용. 스따브로긴과 라샤의 소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무도회 중 화재사건이 터진다. 결국 엉망과 조롱거리가 된 무도회, 모두들 상대방을 모욕 주는데 즐거워한다. 남의 불행을 즐긴다.
“모든 것이 방화다. 이것은 허무주의다. 만약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다. ”
화재 사건도 중 레밧낀과 그의 동생 마리아가 죽임을 당한다.
제3장 끝나 버린 사건 스따브로긴과 리자. 뾰또르와 스타브로긴의 만남. 리자를 향한 군중의 폭행. 제4장 스따브로긴이 사라짐. 5인조 모여서 샤또쁘 살해 계획을 세움. 살해당한 페찌까. 제5장 나그네 여인 샤또프의 아내 마리야의 방문 . 마리야가 스따브로긴의 아이를 낳음. 제6장분주한 밤 샤또프 5인조에게 총살당한 후 시신을 연못으로 던짐. 뾰뜨르가 끼릴로프를 찾아가 자살하도록 종용함. 뾰뜨르는 기차를 타고 떠나버림. 제7장 스쩨판의 최후의 방랑 스쩨판이 방랑길에 농부에 아낙을 만남. 아낙의 집에서 옛 지인을 만남. 스쩨판의 여인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 성경을 읽어 주는 소피야. 스쩨판은 병으로 죽는다. 제8장 결말 사라진 스따브로긴은 다리야에게 함께 하자고 해놓고서는 자살해 버린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은 뾰뜨르이다. 같은 5인조 동료들도 그의 거만함 때문에 그를 매우 증오한다. 마지막까지도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고 자신은 죄책감도 없이 도망가 버린다. 우리는 사회에서 이런 뾰뜨르같은 인물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래서 악이 되는 인물은 아예 가까이하지 않는 게 상책인 것이다.
<악령>은 상당히 문제적 작품이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도 한다. 나도 처음에는 읽을까 말까 고민했었다. 난해 하기도 하고 허무주의 소설 같기도 해서이다. 하지만 도스도예프스키의 작품을 너무 사랑하여서 이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론은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와 사상,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고전문학에서 인간 악의 본성을 다루는 소설들이 꽤 있다. <이방인> <폭풍의 언덕>등이 그 예이다. 이런 소설들을 읽다 보면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 이 작품은 정말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예술가들은 미학이론 한권을 통째로 외우는 것보다 이 작품이 예술창작에 더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제자 칼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와 벌>은 예술성으로 말하자면 <악령>에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고합니다! |
| 몇년전부터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전부 구매하고 있었습니다.제작년쯤 구매하려던중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이 많기도 하고 편하게 읽고자 전자책으로만 구매하고자 했으나 악령작품만 품절 되버린것을 확인하고 많이 아쉬웠습니다. 번역자와의 계약때문인지 번역자가 바뀌어 재 출간된것을보고 바로 구매하였습니다. 기존 번역자의 작품을 보지는 않았지만 더 잘 되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도스또예프스끼작품은 인간의 깊은 내면들을 알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가볍지 않은 깊은 성찰. 읽고 있으면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깊은 여운을 줍니다. 이 맛에 고전을 찾는 것이죠. 러시아 작품이라 이름이 너무 길고 헷갈리지만 노력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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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악령을 샀습니다. 죄와벌도 읽지 않았는데 참 걱정이네요. 저는 악령부터 읽고 싶습니다. 재밌어보이지 않나요? 그런데 혹시 번역오류가 있나요? 서칭으로 찾아보면 그런 소리가 있더라구요. 음. 일단 상 중 하로 나누어져있ㅇ습니다. 재밌어보여요. 모두들 감기조심하세요. 행복하시고요. 곧있음 연말입니다. 저는 연말을 악령으로 마무리하려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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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고른 것은 사람들의 입소문 덕택이기도하다.그만큼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성은 익히 널리 퍼져있다.네이버 책에서도 추천으로 올라왔기도하고.언제한번 꼭 한번 읽어보고싶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읽었다.하지만 무작정 읽은 것이 역시 화근이었던가. 약간 난해하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잡고있었다.나는 책을 잡으면 길든 짧든 하루에 한권은 꼭 읽었지만.덕택에 한달정도의 갭이 생겼다.이해 안되는 부분은 다시 읽고 반복해서 읽다보니 시간이 오래지나가게 되어버렸다.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만큼 가치있는 것을 읽을때는 그만큼 시간을 할애해야하니까.우선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예술작품에 어울리는 예술이랄까.러시아식 이름이 익숙치 않을 뿐 만 아니라, 길기까지한 도입 부분에서 도무지 내가 원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아 이 책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고, 아직 한번 읽었을 뿐이라 깊은 느낌의 감상평은 남기지 못하겠지만, 여러번 읽고 그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 해볼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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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이북으로 도전했다가 1부에서 집어던진 작품이다. 그때는 왜인지 바르바라 빼뜨로브나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우정 이야기 읽다가 넌더리나서 더 못 읽었다. 당시 번역을 좀 어렵게 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미뤄두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았다. 그런데 역자가 바뀌고 새로 출간되었길래 책까지 사서 읽었다.(권당 2천원이나 더 받는..ㅜ) 결론적으로 최고이다... 5부작 중 가장 강렬한 작품이다. <미성년>은 빼고 이야기하자면 <카라마조프~>가 생의 찬미로 가장 희망적이고 밝다고 느꼈다. <죄와 벌>은 문학적 완성도가 가장 높다고, <백치>는 작가가 내놓은 문제의식을 해결하지 못했으며(사실상 다른 작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작중 인물을 통제하지 못하다가 파국을 맞았다고 느꼈다. <악령>은 <백치>보다 문제의식이 하나의 사건으로 모이면서 뚜렷한 편이고, 작중 인물을 잘 통제하여 비극적이나마 나름대로의 결론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이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인물의 특징과 사상이 매우 뚜렷하며, 그 인물들이 엮어져서 만들어지는 일련의 장면과 사건이 엄청나다.. 그리고 작가가 내놓은 돌파구와 해결의 실마리가 잘 잡혀 있어서 좋았다. 역시 이 작품에서도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메세지가 있다. 작가는 네차예프 사건을 기반으로 이 작품을 구성했다. 당시 러시아는 세상을 전복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혹은 허무를 말하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들끓던 때이다. 스따브로긴, 뾰뜨르, 키릴로프, 샤또프 등은 그것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허무주의 등등... 이런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 아래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적용될 때 이것은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독자적인 생명성을 갖고 인간 위에 군림하며 삶을 구속하는 것이다. 마치 자유를 위한 여러 법과 제도가 모이고 나면 부자유의 시스템만 남듯이.. 이는 근본적으로 이성과 논리로는 사랑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념을 위한 이념만이 남게 된다. 이념이 아닌 다른 것을 택해야 우리는 비로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작 중 도선생이 샤또프가 아내가 출산하고 아이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기적과 숭고함. 이것이야말로 모든 철학과 사상의 토대여야 한다. 최근 코로나로 지구가 난리다. 그런데 그것을 보며 흥미로운(사실은 슬픈..) 것을 보았다. 자유주의의 대표주자인 미국과 사회주의의 대표주자인 중국에서이다. 미국은 40만의 확진자가 나왔으나 방치되어 있다. 중국은 후안무치 그 자체로 국민을 기만하고 은폐와 날조를 일삼는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나 막상 코로나로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인간을 위해 태어난 이념이 권력자의 정치 시스템을 지키는 성벽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이념은 성벽이다. 그렇지만 성벽 밖의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느꼈다. 박시백 작가의 만화 중 유명한 대목인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진 민중들이 화답하여 일어나 싸웠다. 한국인에게는 정말 이런 유전자가 있나 보다. 의료진과 국민들의 희생을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가능성이 남아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슬픈 기쁨을 느꼈다. 이념이 삶을 가로막는 것은 언론에도 느낄 수 있다. 내가 초등교사인지라 더 밀접하게 느껴지는 온라인 수업.. 이낙연은 6.25때도 수업은 했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당시엔 지금처럼 제도와 이익집단이 촘촘하지 않아 무엇을 하든 삶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양탄자와 같이 틈이라고는 없어 무엇을 하든 법에 저촉되거나 누군가가 반대하고 나선다. 황교안이나 각종 이익집단이 교육부에서 무슨 대책을 내놓든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며 너무 화가 났다. 비판을 위한 비판.. 그러다 보니 정부는 실질적 대책을 마련할 수가 없다. 무엇을 내놓든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니 그저 모면하기에만 급급해진다. 이는 늙은 권력이 제자리를 비키지 않아서 그러하다. 교육은 학생이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하지만 늙은 권력은 학생을 위하는 척 대변하는 척하며 그들의 자리를 빼앗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야 할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집스럽게 앉아있어서 생기는 병폐이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현대사회는 실로 새로운 야만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키릴로프는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정말 튀는 인물이다. 자유 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허무와 죽음 그 자체인.. 도선생은 그런 자유는 우스꽝스럽기까지한 파국을 맞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압권은 키릴로프의 자살을 기다리는 뾰뜨르 대목이다. 기괴하고 무섭고 우습기까지 하다. 마지막에 '인신' 키릴로프는 삶을 조롱하는 이상한 서명을 써내려가다 뽀뜨르의 새끼 손가락을 물고 - 바보로 죽는다. 어떻게 그게 자유의 모습인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자유는 한 개인의 자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개인이 서로 연대하며 소통하는 것이 자유이다. 키릴로프의 자살 장면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라 오로지 그 대목만을 위해 긴 책을 참고 읽을만 하다. 스따브로긴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와 비슷하다. <악령>과 <죄와 벌>의 인물구도를 찌혼 신부는 뽀르삐리 예심판사, 소냐는 다리야, 마뜨료샤는 살해된 노파의 여동생 - 이렇게 연결할 수 있겠다. 마지막 부록같이 붙여진 찌혼의 암자에서는 필히 본문에 하나의 장으로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 장 없이는 스따브로긴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 본문만 보아서 스따브로긴은 허무와 진공 그 자체이다. 본질적으로 그런 인간이라면 자살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면 자살할 수밖에 없다. 스따브로긴도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장면이 앞서서는 없었기 때문에 이 장은 큰 도움이 되었다. 스쩨빤은 가출해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도 무식한 러시아 민중을 보면서.. 그렇다 진보는 독방의 책상, 개인의 논리와 사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에 나가서, 사람과 지지고 볶으면서 하는 것이다. 스쩨빤이 만난 서적행상인 소피야 마뜨베예브나가 선량함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선이라는 것은 의식하고 실천하는 모습이 아니다. 제 자신도 모르고 그저 실천되는 모습이다. 소피야는 아픈 스쩨빤을 위해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그를 보살펴 준다. 이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연대가 아니었을까.. 악령은 돼지로 변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작중 이념이 씌여 그것에 지배된 인간은 모두 죽거나 감옥으로 향한다. 뾰뜨르를 제외하고. 뾰뜨르가 잡혀가지 않았다는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아직도 악령은 우리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도선생이 살던 때의 사람들이 이 작품이 주는 경고를 더 귀기울여 들었더라면 20세기 2번의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념에 깔려 죽어간.. 이름도 없이 번호로 무더기로 죽어간 육체들... 교훈을 무시한 대가는 참혹했다.. 앞서 말했듯 이데올로기는 생성과 동시에 그 자체로 생명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상정하는 인간의 기본값은 시갈료프가 주장한 노예인이다. 하물며 사랑을 말하는 종교도 이데올로기가 되면 폭력으로 변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는 피를 마시지 않고는 제 몸집을 불릴 수 없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과정 속에 전쟁은 당연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외치며 몸을 불사지른 사람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시갈료프가 말하는 비천한 노예에 불과하다. 정말로 자유를 인식하는 사람은 스스로에서 그치지 않는다.(즉 에고에 빠져버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 자유가 있음을 안다. 스따브로긴이 어떤 모욕에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며 죄책감 없이 죄를 저지르지만, 마뜨료나의 주먹질에는 고통스러워한다. 라스꼴리니꼬프 역시 꿈에서 불쌍하게 죽은 말을 보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맹자가 인간이라면 사단이 있고 그중 측은지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옆 사람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랑의 시작이고, 그것은 인간을 자유케 한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세상종말전쟁>에서 갈 이라는 영국인 학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사랑의 이념을 주장하면서 막상 옆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이성으로 우리가 갈 수 있는 영역은 끝이 있다. 그러나 감정으로 우리는 죽음 넘어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앞서 말한 측은지심으로 우리는 타인과 세상과 연결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남 덕분에 살아왔다. 뭐 하나 내 힘으로 살아온 게 없다.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스쩨빤 역시 살롱과 바르바라의 저택에서는 걱정거리가 태산이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농가에서 깨닫는다. 밀실 속 인간은 질식하는 줄도 모르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지만, 광장으로 나서면 눈부신 햇살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자유와 연대, 사랑을 가로막는 최후의 복병이 있다. 죽음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든다. 파스칼이 말하는 우주의 거대한 침묵이니 진공이니.. 피조물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비참함.. 이건 도대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순조로운 해결을 위해 신을 창조했다. 도선생 역시 러시아 정교회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난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선생이 일부로 편애하면서 정교회의 손을 들어주며 이야기를 끝마쳐서 그렇지 난 도선생 역시 자기가 내놓은 물음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특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과 조시마 신부의 대결구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반의 대심문관을 읽어보면 솔직히 이반이 승리했다. 근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일직선상의 시간관을 갖고 있다. 이 시간관을 타파할 때 죽음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벤야민이 메시아를 도입해 모든 죽은 사람이 깨어나게 만든 것처럼.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지고 <악령>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는 죽음을 사랑과 육체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죽음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랑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몰골이 추하고 힘겨워 보인다. 사랑의 화신인 예수는 사랑을 위해 여윈 몸에 고통스러운 얼굴, 가시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리며 손에 못이 박힌채 죽는다. 어떻게 그게 아름답고 행복한가. 그러나 예수가 그렇게 죽음을 불사하면서 지켜진 것이 있다. 사랑이다. 정말 사랑한다면 죽음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것 - 비록 그녀는 돌이 되었지만 사랑은 지켜졌다. 교황은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말했던가. 그게 바로 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에게 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코로나 관련하여 사랑제일교회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어떻게 그게 신을 위한 것인가. 그건 오로지 제 자신만 돌보는 이기심의 끝이다. 예수가 그걸 보면 도대체 뭐라고 말할것 같은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희생정신이 아닐까. 도덕적 인간은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이다. 그 사랑이 제것을 내어주는 모습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희생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 희생으로 느끼는 행복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인식하는 순간 에고의 덫에 걸려 도구화된다고 본다) 도덕, 사랑은 나를 잊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도록 느끼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술이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훌륭한 작품을 보았을 때, 세이렌의 노래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적 경험을 통해 느낀다. 인간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열렬한 찬미를 담아낸 글, 그림, 시, 음악의 형식. 내용과 형식은 사실 완전히 서로에게 꼭 들어맞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호간의 부조화마저도 어떤 인상을 주고, 그것은 미적감각이 되어 우리가 무언가를 깨닫게 한다. 난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소설로서의 결함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대의 추상화는 정확히 말하자면 추상이 아니라, 구성을 넘어선 구상이다. 도선생의 글 역시 난잡하고 두서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의 글이 담고 있는 정신과 꼭 들어맞는 그릇이라고 본다. 만약 작품이 사람 손이 닿지도 않은 것처럼 빼어나고 유려하며 말끔한 전개였다면 난 지금처럼 감동을 받았을 것 같지 않다. 도선생의 정신 없는 빽빽한 형식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미적경험을 준다. 그럼에도 악령 1부에서 바르바라와 스쩨빤의 우정은 지나치게 길지 않았나.. 소심하게 적어본다.ㅋ (딴얘기 적자면 교훈은 내치고 미적 경험만 취하는 사람이 있다. 즉 속물인데.. 나는 내가 그런 부류같아 부끄럽다. 솔직히 이렇게 책 많이 읽은 게 쪽팔릴 정도이다...) 죽음을 극복하는 두 번째는 육체이다. 난 사실 육체와 관련해서는 정말로 무지한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지나치게 합리적이라 이런 파국을 맞이한 게 아닌가 이거다. 육체는 외면한 채 이성만 독자적으로 앞서나가다보니 인간을 짓누르는 이념이 탄생하고, 타인에게 공감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등장하며,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허약한 정신이 들어선 것이다. 원시인에게 삶은 육체이다. 우리는 육체의 삶을 살지 않는다. 직업구조만 보더라도 서비스직이 90퍼센트 이상이다. 역할만을 수행하다보니 우리의 정신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주체라고 말할 수 없는 대체품,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진짜' 노동을 한다면..(육체노동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노동이더라도 진정성을 확보한 것이라면 진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성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양 사상이 그렇게 안빈낙도를 노래한 것이 아닐까. 자연을 대결구도로 바라보며 지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하나가 되어 육체와 정신이 합일된 삶을 살아가는.. 이번 문단은 삶과 죽음 이야기하면서 딴 얘기 하는거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너무 거대한 무엇이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그런데 작가마다 스타일이 달라 그것을 다루는 태도가 천차만별이다. 크게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부류와 포기하는 부류가 있다. 끝~~까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로는 도스토옙스키, 페소아, 카뮈, 카프가, 발자크가 떠오른다. 작품으로는 황석영의 <객지>, 박경리의 <토지>가 떠오른다. 이런 글들을 읽어보면 작가에게 글쓰기란 정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생존 그 자체의, 절박한 글쓰기이다. 그런 글은 진짜로 고민한다. 그런데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다가, 그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반해버리면서 허영심이 들어선다. 존재론적인 질문에 응하는 스스로에게 반한달까.. 그런 작가로는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작품으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떠오른다.(사실 <전쟁과 평화>는 역사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할튼 너무 거대한 무엇이며 독자적이라 사례로 적절치 않아보긴 하다. 그러나 내 인상이 그렇다는 거다.) 물론 이 작가들도 삶에 의문을 갖고 진지하게 성찰했다. 다만 내가 느끼기엔 그런 의문이 목적이 아니라 어쩐지 도구가 되어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견해이다. 한편 삶과 예술을 동시에 잡은 경우도 있다. 삶을 성찰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성도 목표로 하며 잡아낸. 그런 작가로는 쿳시가 떠오른다. 작품으로는 <모비 딕>과 <돈키호테>. 앞에서 말한 작가와 작품이 예술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삶만을 목표로 하면 달려간 도선생에게 예술성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또다른 목표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위고나 졸라 같이 허영이 들어간 경우도 예술성이 뛰어나지만, 지금 말한 것들은 허영이 없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한편 존재론적 질문에 지쳐서 포기해버린 부류가 있다. 포기에도 2가지가 있는데 냉소와 예술로서의 타협이다. 원래 우리는 죽음이 예정된 피조물이야. 그걸 이제 알았어? 그 까짓 질문 내가 아무리 대답하려고 애써봤는데 안돼 안돼. - 이렇게 냉소하는 작가가 있다. 필립 로스와 쿤데라가 그러하다고 느꼈다. 이들은 앞문단에서 삶에 응답하려는 작가와는 달리 사랑의 정신이 없다. 앞문단의 작가는 비판을 하며 참혹한 모습을 그리더라도 그것은 삶에 대한 사랑을 음화로 보여준다.(도선생의 작품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놀라울만큼 삶을 찬미하듯) 그러나 이 작가들은 비판하며 보여주는 음화에 허무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내가 했는데 안되더라, 나도 안되는데 니들이 될거 같아?라는 오만과 자기방어가 보이는 듯 하다. 한편 예술적으로 포기한 작가이다. 존재론적 질문에 응답하다가 나이들면서 다 귀찮은지 그냥 예술적으로 적당히 형상화하는 작가가 있다. 사실상 문학을 돈벌이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작가이다. 황석영과 파묵이 그러하다고 느낀다. 한편 요사의 경우 돈벌이 작가는 아닌데 <염소의 축제>나 <세상 종말 전쟁>을 읽어보면 삶보다 본인의 문학적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게 느낀 것 같다. 요사는 이쪽과 다음에 말할 부류 양쪽에 있다. 그리고 앞선 두 부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작가가 있다. 예술 그 자체를 찬미하는 부류와 응답할 기회가 없었던 부류이다. 먼저 죽음을 외면하고 예술로 돌아선 부류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은 꿈을 꾼다. 당장 목숨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 옆에 있는 꿀을 먹던가 하는 장면이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외면하게 해주는 이 꿀을 가정과 예술이라고 말한다. 바로 예술이라는 꿀을 먹는 작가들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나 <새엄마 찬양> 등등)가 떠오른다. 작품으로는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늦여름>. 이들에게 존재론적 질문은 중요치 않다. 그저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도선생은 자타공인 미남인 스따브로긴을 자살로 귀결시키며 이런 아름다움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작가들이 좋다. 이들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있어야 우리가 좀 숨통 트이고 살 수 있다. 가끔씩 술 마셔줘야 하는 것처럼!ㅋㅋ 응답할 기회가 없었던 작가는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가 떠오른다. 둘다 존재론적 질문에 응답할 역량은 차고 넘친다. 다만 오스틴은 당시 편협한 사회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브론테의 경우 단명해서 쓰기도 전에 죽었다..
처음 읽는거라 내러티브 따라가기도 급급해 글이 형편 없고 몇 개 안되는 주제에만 치중되어있다. 이런 작품은 최소 세 번은 읽어야지 말할 수 있는데.. 내 글은 한 번 읽은 아마추어도 멋도 아닌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것을 감안해달라.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하며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작가는 놀라우리만치 그 돌파구가 비슷하다. 희생정신, 사랑, 연대, 믿음, 삶에 대한 열렬한 예찬.. 도선생은 개인사가 본인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아서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모든 작가 중의 최고봉이다. 그의 소설이 어둡고 비극적이어 보이지만 그것은 음화라 그렇지 뒤집어 보면 삶에 대한 찬미 그 자체이다.. 그것에 나는 항상 감동하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근데 무인도에 책 들고가면 뭐 들고갈래 할 때 도선생 작품 언급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건 잘못 고른 거 같다. 왜냐, 도선생은 인간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무인도에서는 도저히 무용지물이고 오히려 그런 메세지 들었다가는 무인도라는 현실에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도선생이 빚어낸 에고의 감옥이 공간으로 형상화된다면 무인도 아니겠는가.ㅎㅎ) 무인도에 갈 거면 14년간 침대에서 글을 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적격이 아닐까. 비록 난 안 읽어봤는데 엄마랑 이 작품으로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걍 써본거다.ㅋㅋ 나중에 그 작품도 읽어야지. 너무 무거운 주제라 읽는 동안 존재의 무거움에 눌려 고통스럽기도 했으나..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강추 중 강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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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잃어버린 사회의 끔찍한 미래를 예시하는 소설이라는 글에 끌려 구입하게 됐어요. 도스토예프스끼의 5대 장편소설인가 그렇던데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소설이에요 그런데 옛날 러시아 문화와 사회, 역사에 대해서 미리 좀 알아두고 읽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잘 모르면 읽는데 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거든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끼답게 표현이 굉장히 디테일해요. 예술적인 부분도 있고요 |
| 하권은 모든 사건이 휘몰아치며 일어나서 속도감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샤또프의 죽음, 끼릴로프와 스따브로긴의 자살, 스쩨판 뜨로피모비치의 죽음, 방화사건 및 레밧낀 남매의 죽음 등 엄청 많은 등장인물들이 죽는다. 악령을 대변(?)하는 자들을 다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작가는 러시아의 정화(?)를 기원했던 것일까? 인신 사상이 나오는 책으로 굉장히 난해한 작품이긴 했지만 각각의 등장인물이 굉장히 생동감있고 사상도 충격적일 만큼 신선해서 독서의 보람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