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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신작이 출간되면 망설이지 않고 찾아 읽는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그의 글에 반한 이후 신간은 물론 예전에 나왔던 책까지 꼬박꼬박 찾아 읽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김훈의 글은 간결하지만 단단하고 냉정하다고 말들 한다. 난 김훈의 문장들을 읽으며 거기에 더하여 거칠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어쩌면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고 예리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거칠기에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러웠기에 나도 모르게 중독되었다는 것이 김훈의 글을 읽는 내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읽으면서 문득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기, 굳이 역사 속에서 찾을 필요가 없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역사너머 신화시대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초승달이 뜰 때마다 달을 향해 달려가는 말들, 마침내 동이 트고 달이 사라지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신월마들과, 해가지기 시작하면 해를 향해 달리다가 해안에 도착하여 바다를 보고 운 다음 초원으로 돌아오는 말들, 달릴 때 목에서 핏줄이 터져 피보라를 일으킨다는 비혈마들의 이야기가 서사의 한축을 차지하고 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맨 처음 말의 잔등에 올라탔던 시기, 대륙을 가로지르는 나하 북쪽엔 초(草)가 남쪽에 단(旦)이란 나라가 일어섰다. <시원기>와 <단사>는 이들의 역사를 전하지만 파편뿐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들이 그 파편들의 조각조각을 이어주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초는 땅에 금을 긋지 않고, 땅을 사사로이 차지하지 않는, 가축을 끌고 옮겨 다니는 유목민이란 사실이었고, 단은 땅위에 돌을 쌓고, 땅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농경 정주민이란 사실이었다. 유목민은 육체의 힘에 기대어 살기 때문에 성이나 신전이나 무덤이 없으며, 문자를 거부한다. 반면에 농경정주민은 거대한 성곽과 전각들을 구축하고 문자를 숭상한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문자라면 초는 야만이고 단은 문명이다. 그러기에 초와 단 사이는 결코 화합할 수 없었고 전쟁은 곧 일상이었다.
단과 초의 전쟁에 말(馬)이 끼어든다. 신월마인 토하는 초 목왕의 큰아들 표가 타는 말이었고, 비혈마인 야백은 단의 칭왕이 초의 침공을 감지하고 총지휘를 맡긴 늙은 군독 황에게 내린 말이었다. 말들은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였지만 인간의 말(言)을 알지 못하고 단지 입에 물린 재갈을 통해 자신의 등에 탄 사람의 뜻을 알뿐이다. 그러기에 말(言)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은 문명이고 말(馬)은 야만인 셈이다. 전쟁은 누가 이겼고 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갔을 뿐이다.
표의 초군이 단의 왕궁인 상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직전에 이르자 단의 군독 황은 성벽으로 올라가 투석기 장석대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발사하라고 한다. 늙은 황의 몸뚱이가 성 밖으로 날아가 초군의 진지에 떨어져 갈기갈기 찢긴다. 그 모습을 본 야백은 죽은 인간은 말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본래 말의 주인이 아니었다. 재갈이 이빨 사이에서 거기가 제자리인 듯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백은 성벽 여장 윗돌에 입을 부딪쳐 어금니를 빼고 재갈을 벗겨냈다. ‘재갈에서 풀려날 때, 야백은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이 걸어주는 장신구를 붙이고, 사람을 태우고 달린 생애의 시간이 몸속에서 소멸하는 것을 느꼈다.’(146쪽) 그리고 상양성 밖으로 빠져나와 초군의 진영을 피해 해가 비치는 쪽을 향해 초원을 걸어간다.
토하는 자주 꿈을 꾸었다. 불타는 상양성을 보기도 하고, 야백을 만나기도 하고, 물소리를 따라 걷기도 했다. 토하가 수태를 한 사실을 안 마관들은 배가 부르기 전에 낙태를 시키기로 하고 표가 다른 말을 타고 변방으로 갔을 때 낙태시킨다. 토하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핏덩이를 보면서 자신의 몸 한쪽이 허전해짐을 느낀다. 표와 함께 나하 건너 불길을 보고 돌아온 새벽, 토하는 꿈속에서 나하 저편에 있는 야백을 보았다.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간 핏덩이가 야백의 생명이라는 것을 느꼈다. 꿈에서 깨었을 때 토하의 입속 양쪽에서 재갈을 걸리던 이가 빠져나왔다. 토하는 군마에서 역마로 강등되었다.
나하의 물가에서 토하와 홀레를 했던 야백은 물가를 따라 상류로 향한다. 그리고 백산근처 갈나무 숲 언저리에 있는 월지역의 폐마들이 모이는 말터로 들어간다. 우기가 끝나고 초가을 표가 나하를 건너서 출정할 때 토하는 수송마로 수레를 끌었다. 그러나 나하를 건넌 직후부터 자주 주저앉자 군병은 토하를 수레에서 떼어내 버린다. 토하는 이틀 밤을 보채었지만 죽지 않고 일어섰고, 월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어갔다. 숲에 말들이 보이자 그리로 간다. 그곳은 월의 말터였다. 표의 초군이 월지역으로 오자 월의 백성들은 폐마들을 끌어내 짐을 싣고 달아난다. 야백과 토하도 끌려가다 비탈길을 오를 때 토하가 쓰러졌고, 쓰러진 토하의 몸에 걸려 야백도 쓰러졌다. 말 두 마리는 일어서지 못했다.
초와 단의 싸움은 야만과 문명의 충돌이었고,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또 스러진다. 거기에 인간의 뜻에 따라 초원을 누비는 말들이 등장한다. 재갈은 인간이 자신의 뜻을 말에게 전하는 수단이었지만 말들에게는 억압이다. 야백은 스스로 그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인간에게 쫓기는 말이 되었고, 토하는 병들어 억압에서 벗어났지만 하찮은 역마로 전락한다. 김훈은 야백과 토하라는 두 마리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문명과 야만의 충돌이라는 것도 결국은 억압 속에서 이루어지고 뒤엉키지만 생명의 힘은 끊임없이 이에 저항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백성들은 후미에서 말 두 마리가 쓰러진 줄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백성들의 대열은 긴 띠를 이루었다. 저녁에는 초원에 초승달이 뜨고 졸린 아이들이 칭얼거렸다. 대열이 지나간 자리에 풀들이 누워서 희미한 길의 자취가 드러났고, 바람에 지워졌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책 역시 김훈의 문장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가 없다. 힘이 있으면서도 간결하고 거칠게 느껴지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을 읽으며, 노작가는 다음에 또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가져다줄지 기대를 품게 만든다. 역시 김훈이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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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나라, 시원(始原)에 대해서는 글자로 만들어진 것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문학에 의하여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연적으로 생긴 나라 중에 초와 단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초는 한 곳에 거주지를 두지 않고 떠도는 유목민의 생활이다. 그렇듯 그들에게는 글자가 없었다. 글자를 가르치지도, 글로 남기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여 단은 성곽을 쌓고 건물을 지어 땅에 터전을 두고 살았다. 한 곳에서 생활하는 나라 단에서는 글자로 역사와 노래를 남겼다.
초(草)의 왕 목은 돌무더기를 걷어내라는 유훈을 남기고 돈몰 하였다. 돈몰이라 함은 나이 든 노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배를 띄워 나하 강으로 흘러 들어가 한 줌의 부스러기로 스러지는 것을 말한다. 노인들이 사라져도 젊은 사람들은 노인들을 찾지 아니하였다. 초의 왕 목의 아들 표는 왕의 유훈을 받들어 단(旦)을 치고자 하였다. 배를 띄워 단을 향하고 단에서는 배가 가까이에 왔을 때에야 적군 임을 알게 되었다. 투석기를 이용해 배를 공격하지만, 배에 사람은 없었다. 초의 표는 허수아비를 태워 그들의 눈을 가렸다.
소설에서는 사람 보다는 말의 이야기가 더 강렬하다. 사람은 말의 이야기를 거들 뿐이다. 초승달을 향해 달려가는 신월마와 달리면서 목덜미에서 피를 흩뿌리며 달리는 비혈마가 그들이다. 본래 이름이 없으나 사람들에 의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말의 내면을 말하는 부분에서 판타지 섞인 역사를 보는 듯하다. 부족장들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쳤던 추와 추의 딸 무당 요가 신월마 총총과 눈이 맞았다. 결국 추에게 칼을 맞고 죽어 요가 백산으로 들어가 무당이 되어 동물들의 언어로 그들을 보살폈다.
초의 왕 표를 태웠던 신월마 암말 토하와 단의 군독 황의 말이었던 비혈마 수말인 야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초와 단이 전쟁을 할 때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단의 군독 황은 투석기에 자신의 몸을 매달아 튀어 나가 죽었다. 그 장면을 본 야백은 스스로 재갈을 빼 그 장소를 떠났다. 나하 강가에서 토하의 냄새를 맡고 토하에게 향했다. 사람과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말들끼리는 서로를 알아 보았다.
말[言]이 늘어나서 세상에 넘쳐나자 사람들은 이 땅 저 땅의 이름을 부르면서 칼과 활을 들고 싸웠다. (11~12페이지)
말[言]에 홀려서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며 바람에 밀려다니는 마음들을 목왕은 크게 걱정했다. (18페이지)
현재의 우리는 기록된 자료를 바탕으로 인류의 시원기를 유추할 수 있었다. 말이 없었던 때, 자유롭게 초승달을 향하여 달리는 말들이 인간과 함께 살아왔으며 인간보다 오히려 그들의 언어로 살아왔던 것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유목민과 땅에 터전을 잡고 사는 사람들은 생각 자체가 다르다. 마음껏 초원을 내달리는 말들과 습성이 같다고 할까. 단나라의 왕 칭이 바람을 이용하여 불태우고자 했을 때 쉽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성을 나와 자기를 닮은 가짜 왕을 내세웠던 칭은 자기가 진짜 왕인지 가짜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의 상상으로 빚어진 인물들이지만 어쩐지 익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신월마와 비혈마의 후손들은 스스로 어금니를 빼고 재갈을 풀어내었다. 초원의 자유로움 속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이었다. 초승달을 향해 바람처럼 달렸던 그들의 선조들이 품은 땅에서 그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말들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는 다를진대 이럴 때는 말들의 언어를 아는 것만 같다.
초(草)와 단(旦)은 커다란 나하 강을 사이에 두고 태어난 나라다.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초(草)와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글자로 기록을 남겼던 단(旦)은 여러모로 다른 특성을 가진 나라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나라와 자연과 함께 살아온 나라. 인위의 세계에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한 바람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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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馬)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어 놀이삼아 타보는 말등에도 올라본 적이 없는데, 승마도 경마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말을 알고 말을 느끼고 말의 마음을 본다. 신기하고 대단하고 측은하다. 야백과 토하는 달 너머로 달려 갔을까? 제발 그랬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근원을 생각해 보는 일-처음에는 어땠을지,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다가 어떻게 모였다가 어떻게 싸웠다가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 추측해 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았다. 소설로도 만화로도 영화로도 이미 본 듯하여(구체적으로는 들지 못하겠지만) 이런 배경만으로는 낯선 느낌이 전혀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낯설지 않고도 생생한 새로움을 맛보았다. 도리어 너무 생생해서 좀 많이 무서웠다. 무서웠으나 피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오로지 작가에게 있었다.
문장들은 근원만큼 짧고 맵고 단단했다. 얼마나 자주 찔리고 베이고 박혔던지 다 읽을 즈음이 되자 내 정신이 한결 단단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읽어 낼 수가 없었을 테니까. 나하를 사이에 둔 초와 단, 두 나라의 왕과 군사들과 백성들과 말들의 말(言)이 귀에 맴도는 듯하다. 그토록 짧으면서도 인상적인 말들이 작가가 한 말인지 등장인물들이 한 말인지 이제 나는 구별을 못하겠다. 무슨 상관이랴. 초는 초대로 단은 단대로 애틋하기만 한 목숨들이었던 것을. 하나하나 가볍게 사라져간 듯했으나 결코 사라진 적 없는 낱낱의 생명으로 이어져 온 것을. 나 또한 그들 중의 하나일 것이니.
작가가 뒤에 남긴 말이 나를 붙잡는다. 나도 이제 우리집 마당에서조차 이 땅의 근원을 짐작하는 버릇을 갖게 될 듯하다. 여기에 무엇이 혹은 누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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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이후 3년 만에 만나는 작가의 소설이다. 너무너무 좋아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후 너무나 맘에 쏙 드는 첫 문장을 만났다.
이 세상은 저절로 펼쳐져서 처음부터 이러하고, 시간은 땅 위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고 초(草)나라 『시원기始原記)』의 첫머리에 적혀있다. 소설은 첫 문장 처럼 시간은 땅 위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자취는 없으나 흔적만 남은 이야기들을 얼기설기 엮어, 그 사이를 빼곡하게 채우는 잘 벼려져 날이 선 소설가의 문장은 나를 시간속에 흩어졌으나 소설가의 문장으로 재창조 된 공간으로 곧장 데려갔다. 그 공간 속에서 태초의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살았고, 말과 늑대를 길들여 삶을 이어갔다. 초원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의 무리가 생겨 났고, 강 하구에 무리지어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둘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말들이 있었고, 사람에게 길들여져 전장에 나서거나 부역을 하게 되었고, 사람의 삶에 녹아 들어 살고 죽고를 반복한다. 그들에게 사람들의 충돌은 이해할 수도 가 닿을 수도 없는 어떤 것이었다. 사람과 말이 죽고 태초에 백산에 들어간 무당 요는 바람이 되어 꽃이 되어 죽은 영혼들을 데려가 위로하고... 그저 이야기는 너무나 환상적이었고, 살아있는 존재들의 삶을 이어가는 모양들을 바라보는 소설가의 시선은 처절하고 아프고 가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소설가의 시선이 아득하고 멀었다. 페이지가 끝이 나고 시간 속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정말 아득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난 야백이고 토하였고, 사람들의 분노가, 증오가 무었인지 알지 못하여 다만 가여웠다. 오래 보아온 일상의 풍경 앞에서 저기가 대체 어디인가, 저기는 왜 저렇게 생겼나, 사람들은 왜 저기에 모여 있는가, 이런 의문들이 나를 분해한다. 이 의문은 몽매하고 절박하다. 나는 과거에서 아무것도 전수 받지 못한 미물로서 외계에 내던져져 있다. -작가의 말 중.
사는게 어찌 이리 피곤하고 피곤한가. 나는 언제까지 이리 피곤함을 달고 살아야 하나, 나는 어찌 이게 뭐라고 죽을 수도 있다는 선고들 앞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이리 무겁고 힘겹게 느끼며 사는가. 이 삶은 언제 끝이 나는가라는 알 수 없는 도달할 수도 없는 질문들에 식은땀을 흘리다 깨기를 반복하는 나날을 보내는 중에 책을 만나 시간을 쪼개어 가며 다 읽었다.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아까웠고 책을 다 덮고 나니 나의 이 시간 속에 없어질 고민 들의 덧 없음에 허허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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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의 오랜 팬이다. 펜으로 꾹꾹 눌러 쓰면서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그의 건조한 단문을 사랑한다. 조사 하나에 전체 문장의 느낌이나 의미가 완전히 바뀌는 우리말의 특성 때문에 늘 조사의 사용을 고민한다는 그의 치열함도 존경한다. 「칼의 노래」속 영웅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통과 고뇌 속에 작가 김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도 이어지는 전쟁 속에 처참한 상황을 맞이하는 민중들에게 보내는 그의 따뜻한 시선도 느껴졌다. 그런 김훈이 고대 우리 조상을 연상시키는 기마민족과 농경민족 사이의 투쟁을 그린 역사 판타지로 찾아왔다니, 기다릴수 없이 바로 읽고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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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님 저의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이 책은 제가 읽으려고 산 책은 아니고요. 엄마께서 읽고 싶다고 하셔서 구매했습니다. 김훈 작가님 책은 신간 나오면 꼭 읽고 싶어하셔서 신간 나오는거 알려드리고 구매했어요. 저는 아직 안 읽었고 엄마 말씀으론 말이 주인공이라고 하시네요. ㅎㅎ 재밌게 읽었는지 어쨌는지 다른 말은 없으신데 그 전 작품들은 굉장히 재밌다고 하셨는데 별 말씀 없으신거 보면 전작들 보다 재미가 덜한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 지금까지 굵직한 역사를 배경으로한 김훈 작품과는 다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표현된다. 사실을 기반으로한 칼의노래, 남한산성, 흑산, 현의노래가 작가를 가두고 있었다면 이번 작품은 가상 속에서 폭발적인 속도감을 보여준다. 말과 사람은 쓰임이 다르나 정점에 선자들에게 지배 받고 사용된다는 점은 일맥상통한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먹고 교접하는 모든것이 자연스럽다. 전쟁을 표현한것이 아니라 글과 문장이 전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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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소설을 읽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그의 에세이를 몇번이고 곱씹다보니 그의 글쓰기의 매력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새로운 소설을 통해서 그의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표현력이야 그를 따라올 자가 많지 않겠지만 그 표현을 가지고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지 내용적인 면에서 늘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이번 소설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소설들이야 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결국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각각의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흐름속에는 그 작가가 그의 글쟁이의 삶을 통해 전할 수 밖에 없는 공통의 주제가 있지 않겠나? 김훈은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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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코로나가 일상이 되자 인간의 욕망은 다시 꿈틀거리고 그 욕망은 코로나를 뛰어넘어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고 이미 가진 자들의 그것과 아직 갖지 못한 자들의 그것이 뒤엉키고 그로 인한 현 정권의 위태를 보며 현재의 야당이 죽은 듯 숨죽여 치열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자신들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때 그 숨죽임에 코웃음 치며 거짓 선지자와 거짓에 목마른 중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옴으로써 우리는 코로나의 또 다른 형국 그 초입에서 아비규환과 도탄으로 아스트랄한 세상의 한 복판에 서있게 되었다.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다. 세상을 지우면 빈자리가 드러날 테지만, 지우개로 뭉갤 수는 없어서 나는 갈팡질팡하였다.” (p.271) 작가 김훈이 바라보는 세상이라고 ? 그것이 지금이든 이전이든 ? 무어 크게 다를 리가 없을 테니, 책의 뒤에 붙인 위와 같은 작가의 말이 크게 새삼스럽지 않다. 세월호의 비극에 말을 보탰던 작가가 최근 천착하였던 밥벌이를 향한 노동자의 죽음, 그러나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그 현상에 절망한 작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속의 세상으로 귀의하는 것을 이해할만 하다. “물건과 물건 사이에 물건이 아닌 것이 끼어드는 더러움을 초의 선왕들은 경계했고, 돈몰한 목왕도 그 가르침을 받들었다. 금붙이로 곡식이나 땅을 사고팔게 되면 곡식도 땅도 아닌 헛것이 인간 세상에서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사람들이 헛것에 홀려 발바닥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서 흘러가게 되고, 헛것이 실물이 되고 실물이 헛것이 되어서 세상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입으로 맛볼 수 없는 빈 껍데기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선왕들은 근심했다.” (pp.193~194) 그 세상은 사람과 말이 관계를 맺고 산으로 떠나는 신화의 세계와 같고, 말과 말이 관계를 맺고 달을 향해 해를 향해 뛰어다니는 야만의 세계이기도 하고,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후세에 전해지는 초나라의 『시원기』나 단나라의 『단사』가 등장하는 문명의 세계이다. 성을 쌓고 그 안에 웅크리는 단나라가 문명인 것도 아니고 강을 건너 모든 축조물을 허물어뜨리는 초나라가 야만인 것도 아니며 백산으로 들어간 초나라의 둘째 아들 연과 무녀는 또 다른 신화일 수도 있다. 신화와 문명과 야만은 그렇게 넘나든다. “초원에서 비혈마의 무리들이 지는 해를 향해 일제히 달려간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나하 북쪽, 초의 신월마들이 초승달을 향해 달리던 까닭도 알 수 없다. 저무는 해와 떠오르는 달이 말들의 넋을 잡아당겼다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의 게으른 소리다. 그것은 말들만이 안다.” (p.72) 현재와 과거의 어느 한 역사를 오가던 김훈의 소설은 한바탕 지랄 같은 세상에 환멸을 느낀 것인지 좀더 뒤로 물러섰다. 김훈의 문장을 통해 신화와 야만과 문명이 공존하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에서 싸우고 살고 죽는 사람과 말은 생명을 얻고 빼앗긴다. 그곳은 어디에 기댈 것이 없는 철저히 허구여서, 그저 작가의 문장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문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을 베지 못하면 내가 죽을 차례다. 칼이 적 앞에서 헛돌았을 때 나의 전 방위는 적의 공세 앞에 노출된다. 이때 수세를 회복하지 못하면 적의 창이 내 몸에 꽂힌다. 나의 공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고 적의 수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다. 적 또한 이와 같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생사는 명멸한다. 휘두름은 돌이킬 수 없고 물러줄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 모든 휘두름은 닥쳐오는 휘두름 앞에서 덧없다. 수와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수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어긋난다. 모든 공과 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 그러므로 공에서 수로, 수에서 공으로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 엎어지고 뒤집히는 틈새를 사람의 말로는 삶이라고 부른다고 『시원기』에 적혀 있는데, 수네 공이네 죽음이네 삶이네 하는 언설들은 훨씬 게을러진 후세에 기록된 것이다...” (pp.22~23) 그렇대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 책 앞에 붙어 있는 지도를 보며 소설을 읽는데, 소설 속 인물들의 이동 거리와 시간이 자꾸 지도에서 확인되는 거리와 부딪친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이 년이 걸렸다면 여기서 여기까지 이 개월이 걸린 것이 맞나 의심스러워진다. 오래전 움베르트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등장인물인 수사의 대화를 적으며, 수사의 걸음 속도와 대화의 지속 시간과 회랑의 전체 길이를 계산하였다고 하던데... 김훈 / 달 너머로 달리는 말 / 파람북 / 271쪽 / 2020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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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김훈의 소설을 처음 접해봅니다. 「칼의 노래」 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문장력이 대단한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의 소개글에서 "문명과 야만의 뒤엉킴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 이라는 카피문구를 보고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마련인데, 이분은 이 책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현실과 아득히 동떨어진 '시원'이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만큼 더 오늘의 현실에 대해 편히 말하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궁금한 마음에 책을 들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은 무엇보다 몰입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등장 인물들은 기대보다 활력이 부족하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몹시 기대했던 '표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떠오르는 달빛을 풋풋한 냄새로 표현한다든지, 말과 사람이 달리면서 들이쉬는 호흡이 몸을 통과해서 뒤로 빠져나가는 묘사 등이 처음에는 신선했지만, 지나친 반복은 그런 신선함을 금새 시들하게 만듭니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얼 말하고자 하는걸까? 고민하며 읽었는데, 메시지가 선명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아 당혹스럽습니다. 책 말미에 붙어있는 한 페이지짜리 에필로그(뒤에)를 보면, 작가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부터 3호선 전철을 타고 서울을 오갈 때 창밖의 생소한 풍경에 놀라며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하였는데, 그리고 이 책이 세상을 지우고 싶으나 지우개로 지우듯 지울 수 없는 '그 답답함의 소산'이라고 써놓았는데, 작가는 과연 달리는 전철의 창밖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또 그 본것을 왜 지우고 싶어하는지? 소설 종반에 단의 상양성주변과 나하 이남 일대가 불 타 잿더미가 된 것처럼, 그것들을 그렇게 지우고 싶다는 의미인지? 책을 읽고 나서 궁금증이 더 커져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이 그런건지, 나 자신이 이상한건지, 아니면 김훈이라는 작가가 원래 그런 것인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워 작가의 다른 책을 손에 들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