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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 강사들이 TV나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것을 볼 때 마다, 저런 사람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활발하게 활동했을까 생각을 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유튜브 때문인가. 워낙 많으니 가끔은 제대로 알 지 못하게 전달하는 경우도 있고 지나치게 흥미위주로 전달하는 경우도 많다.
나에게 최고의 역사 선생님은 이이화 선생님이다. 두 가지 때문이다. 1차 자료를 직접 다루고, 그 내용을 정말 재미있게 전달해 준다. 강연을 직접 듣지는 못 하는 책으로만 접했지만, 아직도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를 읽을 때 느꼈던 흥분을 지울 수 없다.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글을 쓰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재미가 약간의 과장이나 각색도 없이 1차 자료를 정확하게 다루면서 일반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었기 때문에 그 감동은 두 배가 됐다. 지금은 돌아가셨으니 그 아쉬움이 더하다.
이 책은 3권으로 되어있다. 이 책을 든 이유는 '동학'도 이제 지나 간 역사의 한 페이지 혹은 전라도라는 지역의 사건이 되어간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그렇게 깊게 '동학'을 다루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라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읽기 시작했다.
1권은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이유가 서술됐다. '집강소'를 통한 민주주의 실천이 기억에 남는다. 비록 불완전했지만. 또, 남접과 북접의 대립도 기억에 남는다. '동학'은 종교활동임과 동시에 사회적 '혁명'이라는 말을 다시 실감했다. 비록 과정도 곳곳에서 삐걱됐고, 결과도 미완성이긴 하지만, 누구의 말대로 결국 혁명이란 더 낫게 실패하는 것 아닌가.
이이화 선생님이 적확하게 전달해주는 당대를 살아 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왜 여전히 동학농민군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되는 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책이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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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첫 횃불이 시작된 곳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대한 항거입니다. 1894년 1월 10일 밤, 예동의 공터에 농민군과 고을민 수천 명이 모여들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죽창을 꼬나들며 임시 깃발인 석기를 들고 고부관아로 진격!! 군중심리는 계기가 생기면 한순간에 흥분해 발동하기에 이들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하나로 뭉쳐 11일 새벽 고부관아 동헌을 장악합니다. 잽싸게 도망간 조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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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1860년 몰락 지식인인 최제우가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가치를 내걸고 창도한 종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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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임술년 2월 18일 진주성을 시작으로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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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억해야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서문-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무엇일까? 정조의 죽음일까, 귀족들의 횡포일까 아니면 그때 있었던 일들의 역사적 나열들일까? 아마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민'이 왜 봉기를 일으켰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처음 영남에서 일어나 호남에서 더욱 심해지고 호서 지방으로 번지고 있다." (P.52)
관리들이 농업 집산지를 선호했던 이유는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인맥과 뇌물을 통해 발령받은 이후 그들은 자신들이 쓴 만큼의 배로 걷어들이기 위해 수탈을 일삼는다. 그렇게 해서 농민들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직적이지 못한 농민들의 불길은 꺼지는 듯하다. 이후, 농민들의 불길은 활활 타오를 수 있을까?
"동학은 천주교마저 공인을 받아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현실에서도 공인받지 못해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다." (p.85)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관직을 파는 행위들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쩌면 그들은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1893년 보은과 원평에서 집회가 열린다. 그 중심에는 '척양척왜'의 정신이 있었으나, 두 집회는 하나가 되지 못한다. 각자의 요구 사항만 전한 채, 그렇게 해산한다. 이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등장한다. 북접과 남접,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동학은 왜 하나로 뭉치지 못했을까?
1894년 1월 첫 횃불을 든 고부 봉기 드디어 동학과 난민이 결합한 첫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고부 봉기를 시작으로 무장봉기 그리고 황토현 전투의 승리와 전주성의 점령까지. 그런 과정을 주시하고 정확히 파악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인이었다. 첩자들을 통한 일본의 동학에 대한 주시는 우리나라의 지도층보다 훨씬 정확했다. 부정부패와 비리들 그리고 지도층들의 무능함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제의 침탈 야욕은 어쩌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그리고 집강소! 그렇게 농민들의 봉기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계획은 서서히 동학 농민군은 물론 조선을 압박해오고 있다. 지나온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때 우리는 어떠한 것에 근거하여 평가를 내려야 할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료를 가지고 평가할 때 어느 한쪽의 의견만을 고집해서는 안 됨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료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필요할 것이다.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는 사료에만 치중하지 않고, 동학 농민군들의 집회 장소와 전투가 벌어졌던 사진들과 현재의 사진들 그리고 그때 기록된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교과서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알려준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첩자들에 의해 기록된 일본이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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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그리고 집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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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이에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어요.” 2015년 경향신문 인터뷰 中
이이화 (대구, 1937~2020, 84세) 역사문제연구소 소장과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이기도 했다. 2015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노교수의 삶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동학혁명을 단순히 질서에 반하는 무력시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실천의 동력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은 헛소리예요. 인류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6·25 동란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 났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쟁은 더 하지 말자고 하는 거예요.” 노교수의 이 말을 들으면서, 아나톨 프랑스가 생각이 났다. 노벨문학상 100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책이 있었는데, 세계 1차대전을 겪은 아나톨 프랑스가 평화를 외치며 고뇌하는 글이었다.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지켜본 노교수와 백 년 전의 작가와 수천 년 전의 철학가는 인간의 행복을 보는 시선이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에피쿠로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300권이 넘는 저술 활동을 했는데, 전해지는 것은 몇 권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 대부분은 후대 추종자들의 해설에 유래한다고 한다. 학파의 철학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 데 있었다. 평정, 평화, 자유, 무통 등의 행복의 조건에 들어간다고 한다. 쾌락과 고통은 선과 악의 척도가 되며,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신은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않으며,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말했다. 그의 철학 중에 세상의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빈 곳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기원전의 철학자가 세상을 미시적으로 해석한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따름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1895년 동안 농민들이 무력봉기한 일을 말한다. 반란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역사가들의 시선에서도 옳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반란은 정부체계나 지도자에 반대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혁명은 사회체제를 폐기하고 한층 고도의 사회체제를 세움으로써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반란은 특정 집단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혁명은 자연적으로 인간사회 본연의 생물학적 특성이다. 인류는 유인원보다 물리적 힘이 약하다. 또한, 같이 진화한 네안데르탈인보다 뇌도 작았으며 약했다. 일부의 역사학자나 심리학자는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 인류가 살아남은 이유는 협력과 소통에 있었다고 말이다. 인류는 서로와의 소통을 넘어 개들과도 소통하여 협력하여 사냥했다고 한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에게 협력과 소통하지 않는 지배층들은 진화를 방해하는 암과 같은 것이다.
『이이화의 동학동민혁명사』는 총 3권에 걸쳐 동학혁명에 대해서 사료를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다. 1권의 주요 내용은 굶주린 민중들이 농기구 대신 무기를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이야기한다. 가장 큰 요인으로 우선 세도정치라는 당파싸움을 들고 있고, 관직을 매관매직하고, 지방관리들은 잃어버린 재물을 충당하기 위해 농민들을 더욱 핍박하였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은 썩을 대로 고이기 마련이다.
유학이라는 지배계급의 논리가 아닌, 실학의 발전과 나라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정부를 보며 민중의 삶은 더욱 불안해졌다. 굶주림과 침략이라는 두려움 속에 민중들은 스스로 뭉치기 시작했고, 집강소를 통해 마치 프랑스 시민혁명과도 같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질서와 도구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민주주의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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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 첫 횃불을 든 고부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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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보은과 원평에서 집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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