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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험난한 역경이 기다리는 여행이라도 제자리에 안착한다면 믿고 떠나볼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 월드로의 여행은 언제든 대환영이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마치 항해하는 배의 갑판에서 밤바다 속으로 갑자기 혼자만 떠밀려 빠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어."(342쪽)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고등학교시절 속했던 친구 그룹에서 거절당했을 때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다자키 쓰쿠루는 죽음에 직면할 때까지 자신을 놓아버리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을 때는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다자키 쓰쿠루가 아는 한 자신이 특별히 잘못한 일은 없는데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들으며 강력히 거부당한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뒤 새로 생긴, 잘해보고 싶은 여자친구의 조언으로 진실을 찾아 순례를 떠난다. 여자친구인 사라가 조언을 하게 된 것은 다자키 쓰쿠루와 함께 있어도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라는 그 원인이 친구 그룹에서 추방당한 일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상처 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만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라는 인생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여인이고 미래를 계획하고 싶은 여인이기에 다자키 쓰쿠루는 16년 전의 진실을 찾아 순례를 떠난다.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색채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개성이 없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런 존재로 자신을 생각했다. 그런 다자키 쓰쿠루에게 연하의 친구인 하이다가 들려준 설화 혹은 괴담 같은 이야기(사실 강도는 낮은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는 색채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다자키 쓰쿠루가 언젠가는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들려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함부로 예측하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상상 그 이상의 진실이 놓여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 예측대로 전개되는 일이 삶에 얼마나 되던가. 다자키 쓰쿠루는 그룹 4명의 친 구 중 살아있는 세 명을 한 명씩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다자키 쓰쿠루는 만나기를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시에 찾아가고 모두 하나같이 다자키 쓰쿠루를 반긴다. 이야기는 다자키 쓰쿠루가 그룹의 일원 중 한 명의 여자친구를 강간했기 때문에 추방했으며 사실 그런 말을 믿은 건 아니라는 아이러니한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런 말로 다자키 쓰쿠루를 추방해야 한다는 당사자인 여자친구는 몇 년 전 교살을 당했다. 강간이라니! 그건 오해라해도 청천벽력같은 말이다. 그런데 아닌 줄 알면서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또 뭔가. 그들은 스무 살이면 성인이 막 되었다고 해도 어렸고, 죽은 여자아이는 그 당시 죽음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 후 살리려던 보람도 없이 타살되었고 범인은 잡지도 못했다. 그 일로 다자키 쓰쿠루만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 친구들도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며 앞으로 더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자키 쓰쿠루는 생각하지만 마지막 친구를 핀란드까지 찾아갔을 때 계속 친구들과 연락하고 지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중년의 애인을 두고도 다자키 쓰쿠루와 만나온 것인지 모르는 사라씨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다자키 쓰쿠루는 사라를 꼭 붙들 것 같다. 그런 느낌을 주며 열린 결말을 맺는다.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는 어두운 터널의 끝을 빠져나와 사람과 관계 맺기에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된다. 다자키 쓰쿠루와 함께 순례를 떠나는 독자도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리며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혹은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었구나 하며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를 읽으며 드는 생각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영원을 사는 것은 신뿐이다.
"난 잘 모르겠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건 도대체 얼마만 한 가치가 있을까?"(86쪽)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230쪽) "... 마치 항해하는 배의 갑판에서 갑자기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이다."(244쪽)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340쪽)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363~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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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인간관계에서 크게 데인 적 있는 사람, 자신만의 개성이 없어 고민인 사람에게 추천. 그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손꼽히는 수작이 되지 못한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으므로 뚜렷한 이유 없이 사지는 말 것. 1 어딘지 "노르웨이의 숲"과 비슷한 느낌이 강하다. 모티프, 전개, 비현실적인 신비로움, 삼 박자가 딱 맞아 떨어진다. 그렇지만 "노르웨이의 숲"에서 보여준 몽환성은 온데간데 없고 어쩐지 현실적인 찝집한 뒷맛이 남는 책이다. 이른바 "떡밥회수"가 되지 않은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2 어쨌거나 책이 주는 메시지는 좋다. 색채가 없는, 다시 말해 자기만의 개성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관계에 확신을 갖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쓰쿠루를 포함한 많은 개성이 옅은 사람들은 종종 강렬한 색채 속에서 주눅 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색채가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3 이 책을 덮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어떤 색채를 띠고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시작해서 나를 스쳐지나간, 혹은 나를 배제시킨 과거의 인간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어렸을 땐 그것이 마냥 내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더이상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탓도, 내 탓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게 가장 합당한 것이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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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책 중 판타지적인 요소가 적은 책이라고 해서 읽어보게 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제목이 곧 내용과도 같았다. 빨강,파랑, 검은색, 흰색을 이름에 가진 네 친구들과 이름에 아무런 색이 없어 소외감을 느끼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친구들에게 절교선언을 당하게 되고 절망하며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만나던 여자의 권유로 절교를 당한 이유를 알기 위해 친구들을 다시 찾아나서게 되면서 뜻밖의 사실들을 알게된다. 하루키의 책은 초 중반부에서 흡입력이 강한 경향이 있는데, 이 소설은 결말부에 마음이 갔다. 환상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현실적인 내용을 담아내고 있고,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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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오사카 여행에 가져가 책 두권중 하나였다. 교토를 지나 오사카로 향하는 JR안에서 하루키가 교토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뭔가 찡한 느낌이 들었다. 동경하는 작가의 고향을 무심결에 방문했다는 우연과 이미 떠나온 공간의 의미가 새로운 이미지로 덧 씌워지는 효과가 마음속에서 일었다. "하루키씨 나 당신 책을 가지고 당신의 고향을 방문했어요!" 이 책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5명으로 구성된 스쿨그룹의 멤버였던 쓰크루가 알 수 없는 이유때문에 일방적으로 그룹에서 배제되므로써 얻게되는 박탈과 상실감, 그리고 그 상처를 애써 모른척하고 잊고 살아가던 중 만난 여인을 통해 내제된 결함을 인식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멤버들을 찾아 떠나는 순례기를 담고 있다. 아무런 이유없이 배제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아무렇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라 세칭 소울메이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뜻이 통하고 서로를 의지하고 신경쓰는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끈한 보호막으로 싸여져있는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쓰쿠루가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허탈하게 현실을 받아드리게 되는 과정이 상당히 유사하게 내게도 닥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척,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단절의 통보. 나는 쓰쿠루와 달리 이유를 물었다. 알 수 있을 것도 같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시로가 쓰쿠루에게 강간당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과 달랐지만, 쓰쿠루는 꿈 속에서 시로 그리고 구로와 관계를 맺곤 했다. 프로이트가 얘기하는 리비도와 '꿈'의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기능적 의미를 고려해 볼때 억지로 쓰쿠루에게 심리적 혹은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현실에는 너무도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시로에게만 배출하는 쓰쿠루, 입으로 쓰쿠루의 체액을 받아낸 후배가 사라지는 흐름은 쓰쿠루에게 죄의식을 심게한다. 배제된 자가 가지는 상실감과 억울함 그리고 심리적 부담과 죄의식의 융합은 쓰쿠루의 내면을 공허하게 만든다. 그리고 '관계'의 농밀함을 앗아 갔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함과 끊임없이 비워내고 감추려하는 쓰쿠루의 내면을 감지한 여인이 제시하는 순례는 쓰쿠루가 '색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억울함을 해소하는 과정이기 보다는 '색채'를 가진 친구들이 나름의 색채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그 색채를 고수하거나, 새로운 색채로 덧칠하는 역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서 쓰쿠루는 자신은 가지고 있지 못하고 느꼈던 색채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짙게 만드는 시간을 갖게된다. 쓰쿠루의 배제라는 사건은 변혁을 꿈꾸고 행동했던 세대의 중심세력(주체)이 '관망자' 혹은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욕망 실현을 꿈꾸었던 자(타자, 대상화된 객체)들에 대한 구분(선 긋기)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 중 시로는 운동의 순수성과 패쇄성(혹은 교조적 성질)을 은유할 것이다. 그러한 시로는 스스로 운동안에 갖혀 버리고 만다. 변혁운동에 동조하지 않는 관망자들은 언제가 자신을 밀고할지 모르는 위험한 분자들이고, 이러한 화신들이 시로의 정치적생명을 훼손시키는 행위가 '강간'으로 표출된 것이다. 변하는(개량된) 동지들로부터 배신 당했다는 느낌에 피해의식이 깊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운동과 반동의 상호작용으로 일부 변화한 세계로 인하여 자신이 꿈꾸고 지키고자 한 신념의 무의미함에 한계를 느끼고 쓰러지고 만것이다. 시로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과 좌절감은 범인을 알 수 없는 교살로 귀결된다. 아카는 전형적인 운동권 세력의 세속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변혁운동에 가담한 경험을 훈장삼아 이를 혁명적이지 아니한 방식으로 활용했다. 오히려 반동적인 방식의 이용으로까지 말이다. 이상적인 선동이 아닌 현실적 문제에 대해 고려하고 변혁 운동의 경험과 가치를 세속적인 것으로 환원 시켰다. 그러면서도 신념에 대한 변절은 마음속으로 불편해 하기 때문에 기부하거나 활동가를 지원하는 형태의 모습으로 자위한다. 아오는 운동의 기반이 단순히 동지애, 동료애에 근거하였으며, 변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부족했다. 변혁의 흐름에 따라 일부 행동에 가담했지만, 중심적이지 않았다. 그러한 캐릭터는 누굴 배신하지도 않지만, 운동의 흐름에서 벗어나도 현실세계에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 구로는 변혁운동에도 순수하게 가담했고, 실패와 변절의 과정을 목격하면서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순수한 동지의 무너짐을 가슴아파하고 그 책임에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것에서 부터 도망치고 만다. 문화 예술로 분야로 스며든 운동가들의 모습들은 흔히(?) 찾을 수 있듯이 말이다. 쓰쿠루의 시로, 구로와의 쓰리섬은 관망자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죄의식을 의미할런지 모르겠다. 관망자라고 무책임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분위기가 그렇다고 하여 관망자들이 모두 배척이라는 형벌을 달게 받아야한 중죄를 지었다고 할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선가 관망자들의 역할로 세상을 유지되고 변화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변혁의 시기, 쓰쿠루와 같은 사람들은 사회나 공동체 혹은 미래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힐 만한 분위기가 팽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변혁의 흐름으로 대중을 등쳐먹는 운동가들이 있고, 그러한 변절로 운동의 순수성을 강간당한 활동가들도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비난 받던 아무 행동도 하지 않던 색채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하나씩 건설하고 만들어 가고 있었다.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 비약이라면, 대부분의 현실은 그들로 인해 구성되고 운영되고 있었다. 운동가들이 우왕좌왕할 때 말이다. 클럽에서의 쓰쿠루의 배척과 쓰쿠루의 순례를 통한 운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의 68.69년 우리의 80년을 지나온 사람들의 모습 떠올리게 된다. 전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룹이 '중심'이나 '대중'을 잊곤 한다. 대중은 무책임하기도 하지만, 가장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동력이기도 하다.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던 쓰쿠루는 사정을 알아가며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슬같이 단단하게 엮여 있던 관계에 붙잡혀 있는 것은 배제당한 쓰쿠루 자신이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정의 근원이었던 그 사슬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쓰쿠루의 '색채'가 완연해 졌을 것이다. 쓰쿠루가 역을 만들어 내 듯이, 색채를 갖춘 쓰쿠루가 변혁을 가져올지 모른다. |
| 정확히 4년전 스페인의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해 여름동안 800km를 걸으며 얻었던 교훈과 책 표지 및 이름이 겹쳐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무리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또 한 번의 순례를 마음으로나마 겪어보려 구입했습니다. 탁월한 묘사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마음의 순례를 떠나온 다자키 쓰쿠루씨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에게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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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부분은 다자키 쓰쿠루의 고통에서 시작한다. 충격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을 하면서 신체적으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눈빛이나 느낌은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 하이다를 만나고 새로운 이성 친구인 사라를 만난다. 사라는 다자키 쓰쿠루를 좋아하지만 무언가 둘 사이에 벽이 있음을 체감한다.
사라는 다자키 쓰쿠루에게 상처를 주었던 예전 친구들을 직접 만나보고 오해를 풀기를 권장한다.
4명의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쓰쿠루가 피해자인줄 알았다. 하지만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들 역시 저마다 상처를 받았고 5명의 공동체 4명의 조화롭고 행복한 공동체는 이미 해체되었다.
마지막 구로를 만나면서는 구로가 쓰쿠루를 좋아했고 단순히 시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위해서 쓰쿠루를 공동체에서 잘라냈다는 것에서 반전이 있었던 것 같다. 2틀에 걸쳐서 읽었는데 읽고나니 뭐랄까 머릿속이 온통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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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은 흑백이라고 스스로 조소하며 살아온 다자키 하지만 친구들은 그를 늘 동경하며 찬란한 빛을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린 늘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스스로를 갉아먹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린 늘 찬란한 빛을 내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평가와 작은 일 하나에 자신의 삶의 색깔을 맡기지 말자 |
| 첫 입문책으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습니다. 추천 받아 구매하여 읽어보았는데 잔잔하면서도 사람의 심리와 내면의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마치 실존하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로워지기에 속도감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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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다 읽어버린 책이 얼마만인가 정말 재밌다. 번역이 뛰어난 것인지, 저자의 실력이 뛰어난 것인지. 혹은 둘 다 일수도? 너무나도 재밌다. 응당 거장이라면 표현해야할 아름답고 생체가 짙은 문장이 없으면 어떠랴.. 그 어떤 교훈이 없든 어떠랴.. 소설이 이리도 재밌는데 말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같은 많은 사람이 지금 이 곳에도 많이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의 정거장이 되어보자. 너무나도 재밌게 잘 읽었다. |
| 등장인물들에 색을 부여해서, 이 색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는 재미가 있었다. 추리소설처럼 명확하게 인과관계가 드러나는 걸 좋아해 사건이 일어난 구체적 이유가 드러나지않은 게 아쉽긴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문체때문일까,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