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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부터 1986년까지, 53살(교직 생활 35년째)부터 6살세(교직 생활 42년째) 명예퇴직을 할 때까지의 일기이다. 교장으로 지냈지만 이 시기에도 당신은 직업에 회의를 한다. 그 만큼 진실한 교육을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끝내 쫓겨나다시피 퇴직할 때까지 참된 교육의 길을 꿋꿋하게 간다. 어린이문학 활동도 활발히 한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참 많다. 지역에서 만나는 권정생, 전우익, 정호경, 이현주, 김종상, 권종대 같은 분들, 백낙청, 양성우, 고은, 신경림, 채광석 같은 실천 문학가들, 김윤수, 윤석금, 김경희, 김영현, 이시영, 김용항 같은 출판인들, 노미화, 이주영, 주순중, 김종만, 주중식, 이상석, 이성인, 서정오, 이호철, 이우영 같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선생님들 등 폭이 넒고 깊다. 이원수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을 만난 사연이 많이 나온다. 1981년 당시 이원수 선생님한테 받은 편지가 백 통이 넘고 권정생 선생님한테 받은 편지가 백 통쯤(264쪽, 1981년 5월 27일) 된다고 하니 어지간히 마음을 깊이 주고받은 관계이다. 이원수 선생님은 1979년에 치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암이라는 진단이 내리기만 해도 보통 사람들은 실신하거나 살아갈 힘을 잃고 그만 누워 있기가 예사인데 선생님은 암이란 진단을 받고도 술 먹지 못하는 걸 섭섭하게 여길 뿐 죽음을 태연히 맞이하려고 한다. 실제로 이원수 선생님은 암세포가 뇌까지 번져 들어가 격렬한 통증을 참기 위해 계속 진통제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을 때까지 죽음을 시로 승화시켰다. 병상에서 쓴 시에는 이원수 선생님이 죽음을 시로 해결하려 한 위대한 문학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238쪽, 1981년 1월 24일). 그리하여 이원수 선생님이 1981년 1월 24일에 돌아가셨을 때 선생님은 울음이 북받쳐 엎드려 운다. 눈물을 닦고 나서도 또 눈물을 흘린다. 이원수 선생님이 선생님의 문학적 스승이라면 권정생 선생님은 선생님이 발견한 후배이자 믿을 만한 동지이다. 권정생 선생님 생각은 아주 근본적이고 실천적이어서 선생님에게도 깊은 자극이 되었다. 이를테면 권정생 선생님은 교회 같은 것은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다. 그럼 교회 없애고 기도실이나 기도원 같은 것 만들어 놓고 하루 한 시간 정도라도 명상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니, 그런 명상이니 기도니 하는 것 다 소용 없고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살아가면서 서로 정을 나누고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권정생 선생님은 연탄 한 장으로 세 끼 밥도 짓고 반찬 끓이고 다 한다. 개도 두 마리 먹이고 있다(359쪽, 1986년 2월 3일). 이러한 권정생 선생님의 가난한 삶을 보며 당신은 하루에 연탄 두 장을 때고 있으니 권정생 선생님에 비하면 사치하고 사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활동이 활발할수록 교육 당국의 탄압은 노골화되어간다. 1986년에는 텔레비전에서 대학 교수가 나와 『개구리 울던 마을』을 가지고 그 속에 나오는 어느 작품까지 예를 들어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문학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것이 연합통신으로 나가 신문에 기사화되기에 이른다. 문공부에서 만들어 낸 것이고 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 이름을 빌려 준 사건이다. 교육 당국이 조직적으로 선생님을 탄압한 것이다. 끝내 1986년 2월 28일, 선생님은 42년 동안 몸담았던 학교를 떠난다. 애초 학교를 떠나려고 마음먹었으나 막상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떠나려고 하니 선생님은 잠들지 못한다. 그래도 “마구 짓밟히고 쥐어뜯기고 뿌리 뽑히는 풀 같은 어린 생명들 / 그들을 살리는 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다짐한다.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쓴 일기 중에 1983년 것은 없다.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1983년은 선생님이 만든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시작한 해라서 내심 그때의 상황을 알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선생님 기록으로는 볼 수 없게 되어 무척 아쉽다. 일기의 첫 번째 권에서는 미처 보이지 않던 편집의 잘못도 눈에 띈다. 일기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한다(86쪽), 부적당합이다(194쪽), 오늘을(196쪽), 조제도(348쪽) 같은 오자가 눈에 거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