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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보다는 오히려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뱀파이어 공동체가 보통 인간보다 더 긴 수명과 미모를 이용해 인간 사회내부에서 일정한 폐쇄 커뮤니티를 만들어 떠받들어지고 부와 권력을 누리는 묘사가 많았던 것 같은데 쇼리에서는 자연 속의 은둔 컬트 공동체처럼 보이는 면도 있었다. 역사가 아주 짧거나 규모가 작아서 현대사회만큼 복잡하고 익명화된 문화가 생겨나지 않은 이종족 같은 느낌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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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었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번 기회에 옥타비아 버틀러 시리즈를 깨보기로 했다. 국내에 어떤 책들이 출간되었나 보았더니 깨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겨우 네 권이었다. 그 중 한 권을 읽었으니 세 권이 남은 셈이다. <블러드 차일드>는 단편 모음집인 것 같고, <와일드 시드>는 중장편이고 그나마 <쇼리>가 장편이자 드라큘라와 관련된 소설이라는 말에 잽싸게 구입했다. 이번에는 어떤 SF세계를 보여줄지 기대되었다. 주인공은 겉으로는 소녀처럼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53세이다. 극심한 고통에서 눈을 떠보니 자신이 있어야 할 침대가 아닌 외딴 숲에 나체로 누워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허기를 느끼며 사냥을 하는 주인공은 언뜻 짐승과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빛이 보이자 화상을 입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을 보면 이미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뱀파이어가 된 듯 하다. 지난 번에도 느꼈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은 초반부터 전혀 지루함이 없이 흥미진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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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소녀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깨어난다. 소녀는 앞을 보지 못한 채로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을 잡아 먹고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동굴을 벗어나 숲을 지나 청년 라이트를 만나고 그를 물고 그의 피를 마신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단어나 사물과 접촉하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떠올릴 수 있다. 소녀는 라이트를 장악하고 라이트는 능동적으로 장악당한다. 『“이건 종교적인 상징이야, 르네···. 중요한 상징이지. 이건 뱀파이어를 다치게 하려고 쓰는 거야. 뱀파이어는 악하다고 여기니까. 이제껏 내가 본 모든 뱀파이어 영화들에 따르면 너는 십자가를 무서워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게 닿으면 피부가 타들어가야 해.” “안 뜨거운데.” “알아, 알아. 걱정하지 마. 영화에서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이니까.”』 (p.91) 뱀파이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소녀는 라이트에 의해 르네, 라는 이름을 얻지만 곧 원래 자신의 이름이었던 쇼리, 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소설에서 뱀파이어는 이나, 라는 명칭으로 불리운다. 이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와는 다르다. 이나는 공생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들을 찾아 영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한 번 물고 물리는 관계를 맺게 되면 공생인은 그 이나에게 소속된다. “제시카 마거릿 그랜트. 나는 눈을 감고 기억 속에서 그 여자에 대해 뭐라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뭐라도.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인생은 전부 지워졌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친숙하고 따뜻한 줄 알고 들어간 곳에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p.202) 하지만 쇼리를 다른 이나와는 조금 다르다. 이나에게는 인간 유전자가 들어 있다. 다른 이나들은 낮에는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감각 기관이 무뎌진 채로 잠을 자야 하지만 이나는 깨어 있을 수 있다.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만 아니라면, 후드티 등으로 잔뜩 무장한다면 빛이 있는 시간에도 움직일 수 있다. 쇼리를 흑인 소녀이고 실제로는 50살이 넘었지만 10살 정도의 나이로 보인다. “... 대니얼에 따르면 전 세계의 이나 가족들은 내 가족이 유전공학 실험에 성공한 것을 두고 기뻐했다. 모두가 똑같은 방법을 이용해 자신들의 미래 세대가 낮에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인간의 인종차별은 이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종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디서든 마음이 통하는 공생인을 찾았다. 오직 개인적 취향만 따질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p.227) 쇼리의 독특한 내력은 결국 쇼리와 관계가 있는 이나 집단 그리고 그 이나들에 딸린 공생인들의 절멸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쇼리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그 결과물이다. 쇼리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버지의 공생인과 함께 다른 이나 집단에 찾아가고, 그곳에서 또 한 번의 공격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 공격에서 살아남은 쇼리는 범인 색출을 위한 위원회의 구성과 삼일에 걸친 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 대부분의 인간에게 너희를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희들이 우리를 물면 그걸로 끝이야. 난 전혀 이해를 못했지.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헤이든이 매복해 있다가 나를 습격했어. 그가 나를 물었고 그 뒤엔 별 다른 수가 없었지. 내가 어떤 곳에 발을 들이는 건지 짐작도 못했어.” (p.303) 소설은 쇼리를 공격한 이나 집단이 가진 편견, 그러니까 뱀파이어 집단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편견에 대한 우화이고, 그러한 편견을 자신의 태생과 함께 깨고 있는 쇼리의 성장담이다. 소설을 읽으면 곧바로 영화 <렛미인>과 <트와일라잇>이 떠오른다. 이나와 공생인이라는 관계는 <렛미인>의 이엘리와 호칸(그리고 오스칼)을 연상시키고, <트와일라잇>의 벨라는 쇼리의 인간 엄마를 그리고 쇼리를 르네즈미로 연결된다. 소설 <쇼리>가 2005년 출간되었는데 두 영화는 2008년에 개봉되었고, <렛미인>의 원작 소설은 2004년, <트와일라잇>의 원작 소설은 2005년에 출간되었다. 어지간히 뱀파이어로 융숭한 시대였다. 옥타비아 버틀러 Octavia E. Butler / 박설영 역 / 쇼리 (Fledgling) / 프시케의숲 / 455쪽 / 2020 (2005) |